'그 사람도 죽을 나이가 됐지' 하는 말. 노인들의 슬픔, 노인들이 쫓겨가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도 어머니에 대해서마저 그런 상투적인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일흔이 넘은 자기 부모나 조부모가 숨을 거둔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쉰 살이나 된 여자가 자기 어머니가 죽었다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나는 그 여자가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차피 죽을 운명일 테니까. 여든 살이면 그야말로 죽어도 좋을만큼 많으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는다.
어머니도 연세가 연세인지라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어도 그 때문에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대한 끔찍한 경악스러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암, 혈전증, 패충혈 따위의 병은 저 넓은 하늘에서 비행기의 엔진이 갑자기 멈추는 것만큼이나 예상할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일이다.
어머니가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다 죽어 가는 상태에서 한 순간 한 순간 속에 깃들인 무한한 가치를 확인하던 때 어머니는 희망을 갖고 기운을 냈다. 하지만 어머니의 헛된 집념은 마음을 달래주는 일상이라고 하는 막을 찢어 버렸다.
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는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비록 그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가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솔직하면서도, 때론 객관적인 시선으로 쓴 글이다. 우린 때론 남의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곤 한다. 죽을 때가 됐지, 죽는 게 났지.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면 우리는 끝없는 당혹감에 왜 나라는 질문을 알 수 없는 절대자에게 쉼없이 던지게 될 것이다.
2011년 3월 26일 토요일
2011년 1월 27일 목요일
단테의 신곡중에서
지옥의 제구 영역으로 들어가네
신대의 거인의 손을 빌려
내려가네
지옥의 밑바닥
고요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소리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짙은 어둠 속으로 바늘 같은 한 줄기 바람이 불어갔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중략-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떨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대기조차 바르르 떨리고 있었따. 팽팽하게 긴장된 시간 속을 무거운 발자국 소리만이 뚜벅 뚜벅 길을 가고 있었다.
- 단테의 신곡 중 문학적인 표현이 내게 가장 와 닿은 부분이다. 가장 무섭도록 살벌한 지옥의 밑바닥이 마치 우리가 사는 현실에 어떤 순간을 묘사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 마음의 지옥이, 우리가 사는 지옥이, 현실의 지옥이 시간을 따라 흘러갈 때.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그 곳에, 당신은...
나그네여,
그대의죄를 씻어라.
죄가 무거울수록,
정화의 고행도 힘드나니
나그네여,
그대의 죄를 씻어라.
"이런 높고 험한 곳에 서려면 날개가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힘든 일이야. 날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날개가 없어.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 역시 뛰어 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을 가지고 발 아래를 잘 살피는 것 뿐이지 않을까. 그리고, 시간을 지워버릴 것....... 조금 전까지 밑바닥에 있던 우리가 이렇게 높은 곳에 올랐다는 것은, 우리가 날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 단테가 묘사한 지옥같은 현실을 겪고 있다고 느껴질 때, 앞으로 한발짝도 내딛기 힘들게 느껴질 때,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고 한발씩 내디디다 보면, 어느순간 그 절망이, 어둠이, 헤어날 수 없음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진짜 우리가, 내가 날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 지옥같은 순간에서 벗어난 것은?
신대의 거인의 손을 빌려
내려가네
지옥의 밑바닥
고요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소리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짙은 어둠 속으로 바늘 같은 한 줄기 바람이 불어갔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중략-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떨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대기조차 바르르 떨리고 있었따. 팽팽하게 긴장된 시간 속을 무거운 발자국 소리만이 뚜벅 뚜벅 길을 가고 있었다.
- 단테의 신곡 중 문학적인 표현이 내게 가장 와 닿은 부분이다. 가장 무섭도록 살벌한 지옥의 밑바닥이 마치 우리가 사는 현실에 어떤 순간을 묘사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 마음의 지옥이, 우리가 사는 지옥이, 현실의 지옥이 시간을 따라 흘러갈 때.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그 곳에, 당신은...
나그네여,
그대의죄를 씻어라.
죄가 무거울수록,
정화의 고행도 힘드나니
나그네여,
그대의 죄를 씻어라.
"이런 높고 험한 곳에 서려면 날개가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힘든 일이야. 날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날개가 없어.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 역시 뛰어 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을 가지고 발 아래를 잘 살피는 것 뿐이지 않을까. 그리고, 시간을 지워버릴 것....... 조금 전까지 밑바닥에 있던 우리가 이렇게 높은 곳에 올랐다는 것은, 우리가 날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 단테가 묘사한 지옥같은 현실을 겪고 있다고 느껴질 때, 앞으로 한발짝도 내딛기 힘들게 느껴질 때,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고 한발씩 내디디다 보면, 어느순간 그 절망이, 어둠이, 헤어날 수 없음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진짜 우리가, 내가 날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 지옥같은 순간에서 벗어난 것은?
2011년 1월 21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행락지 중에서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절보다 현재에 와서 이것은 더 심하게 변했다. 사람들은 TV, 핸드폰, 인터넷 등에 시간을 보내느라 정작 생각할 시간을 잊어버린 듯 하다.
동물과 차별화된 특징인 "사고하는 능력"이라는 것이 시험볼 때만 필요한 인간의 슬픈 현대 문명이란.......
-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절보다 현재에 와서 이것은 더 심하게 변했다. 사람들은 TV, 핸드폰, 인터넷 등에 시간을 보내느라 정작 생각할 시간을 잊어버린 듯 하다.
동물과 차별화된 특징인 "사고하는 능력"이라는 것이 시험볼 때만 필요한 인간의 슬픈 현대 문명이란.......
2011년 1월 1일 토요일
샤르트르의 '구토'중
내 생각이 옳다면, 또 축척되어가는 모든 징조가 내 삶의 새로운 파괴의 전조라면, 나는 정말 두렵다. 나의 생활이 풍부하다든지, 충족되어 있다든지, 귀중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생겨나려고 하는 것, 나를 사로잡으려는 것...... 이 두렵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가? 연구와 저술, 그 모든 것을 계획 속에 남겨두고 또다시 가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수개월 또는 수년이 지났을 때, 지쳐빠져서 실망한 모습으로 새로운 폐허의 한복판에서 깨어나게 될 것인가? 너무 늦기 전에 나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을 똑똑히 알고 싶다.
- 같은 두려움...... 같은 공포. 두려움을 외면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아는 두려움. 내가 정말 그 두려움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 두려운. 시작도 못한 채 생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달려갔는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정말 나의 두려움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출발점에 선 나-
- 같은 두려움...... 같은 공포. 두려움을 외면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아는 두려움. 내가 정말 그 두려움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 두려운. 시작도 못한 채 생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달려갔는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정말 나의 두려움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출발점에 선 나-
샤르트르의 '구토'중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두렵다-나는 그것에 뒷덜미를 잡혀서, 높은 파도처럼 들어올려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 한 존재에게 절실함이 이 세상에서 여분의 존재일수도, 인간존재는 그토록 부조리하면서도 슬픈 운명을 타고난걸까?-
- 한 존재에게 절실함이 이 세상에서 여분의 존재일수도, 인간존재는 그토록 부조리하면서도 슬픈 운명을 타고난걸까?-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