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일찍이 필요에 의해 '자유정신들'을 고안해 냈다. '인간적이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우울하고도 용감한 책을 그 자유 정신들에 바친다.
육체를 지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라리라는 것을 적어도 나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다.
감정이나 공감은 깊이를 더해가고 이슬 섞인 온갖 종류의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자기를 지탱하게 하기 위해서 더 높고, 더 위대한 것, 더 풍부한 것을 남몰래 조금씩 끊임없이 부수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을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대는 '위계'의 문제를, 그리고 어떻게 권력과 권리와 원근법의 넓이가 서로 높아져가는가를 보아야 했다. 그대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젠 그만하자, 자유 정신으로 어떠한 '그대는 해야만 한다'에 자신이 복종해 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이 '가능한지', 비로소 무엇을 '해도 좋은지'를 이제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라 불리는 저 내면 세계의 모험가며 세계 항해자로서, 이와 똑같이 '인간'이라 불리는 모든 '더 고양되려는 자'나, '이미 겹쳐 쌓기를 내포하고 있는 자'의 측량사로서, 곳곳에 돌진하고, 공포심도 없이 아무것도 조소하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맛보고, 모든 것을 우연적인 것에서부터 정화하면서, 말하자면 가려내면서.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가 가장 다양하고 가장 모순된 곤궁과 행복의 여러 상태를 영혼과 육체로 경험해야만 했는가를 비로소 이해한다.
이 책은 무거운 의무의 압박이 없는 사람들에게 알맞다. 또한 이 책은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을 기대하며 과잉을 요구한다. 시간, 하늘이나 마음의 명쾌함, 가장 대담한 의미에서의 '한가함'등의 과잉을.......
우리는 모든 사물을 인간의 두뇌를 통해 관찰하는 것인 만큼, 이 머리를 잘라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머리를 베어 버린다며, 그때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마치 강한 신앙이 그 신앙의 강함을 증명하기는 하지만, 믿게 된 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보다 잘 인식하기 위해서만 계속 살아갈 정도로 삶의 일상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많은 것을, 그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질투나 불만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좀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풍습.법도.사물의 관습적 평가 등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는 이 경지의 즐거움을 전할 것이며, 아마도 그것 이외는 전해야 할 어떤것도 '갖지'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하나의 결여감, 오히려 체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보다 많은 것을 원한다면, 그는 호의적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자신의 형제, 즉, 행동의 자유인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아마 약간의 조소도 띨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사정이 있으므로.
- 니체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대한 정의나 묘사를 읽음으로서 안도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현대에서 인간의 자신이 속한 조직, 자신의 역할, 자신의 직업 등으로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더이상 인간으로서 어떤 성향을 가진, 생각을 가진, 기품을 가진, 덕을 가진 인간으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니체가 일찍이 깨달았듯이 전자의 인간이 후자의 인간으로서의 성향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라는 것, 또한, 후자로서의 인간적 성향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매우 어려우며 어떠한 포기 내지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니체가 마지막 문장에 언급한 듯이, 그 '자유'에 '특별한 사정', 나의 언어로 '전자로서의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맛본 불만족과 좌절, 체념의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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