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9일 토요일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 중

삶의 의미가 없어져도 여전히 삶은 남는다.


이리하여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더 이상 우리의 존재를 보증해주지 못한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스스로 행동하기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니체는 담벼락에 달려들어 부딪치지만 스티르너는 궁지에 몰려서도 웃는다.


역사적 기독교는 자연을 송두리째 죄의 원천으로 만들어버리게 된다......(중략)......그러나 기독교는 삶에 있지도 않은 가공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허무주의적인데도 말이다.
(중략)
신과 도덕적 우상을 제거하고 난 이세계에서 인간은 이제 주인 없는 고독한 존재다. 누구보다도 니체는 이러한 자유가 손쉬운 것일 수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바로 이 점으로 해서 니체는 낭만주의자들과 구별된다. 이러한 사나운 해방으로 인하여 니체는, 새로운 비탄과 새로운 행복을 고통스럽게 맛보게 되리라고 그가 말했던 그 사람들의 대열에 서게 된다......(중략)......더 이상 신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 고통으로부터 태어나 삶의 고통에 내던져진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법과 질서를 찾아내는 일은 인간의 몫, 오직 인간만의 몫이다. 그리하여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시대가, 사력을 다한 정당화의 탐구가, 대상없는 향수가,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가슴을 찢는 물음, 즉 내 집처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학 자문하는 절실한 물음"이 시작된다.
니체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기에 정신의 자유가 안락함이 아니라 인간이 갈구하는 위대함, 힘든 투쟁을 통해서 점차 획득하게 되는 위대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략)
그는 지성과 결합된 용기를 믿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이름으로, 용기를 지성에 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켜 놓았다......(중략)......어떤 한 예외적인 영혼의 고결함과 고뇌에 의해 조명받은 한 사상이 전세계의 눈앞에서 거짓들의 퍼레이드와 수용소에 산적된 끔찍한 시체들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예는 아직 없었다.


신은 죽은 게 아니라 굴러 떨어진 것이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반은 인간에게 가해진 불의를 보면서 신에게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의에 대하여 보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되씹어보고 가슴속에서 보다 비통한 불꽃을 태운 끝에 그는 '설령 당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를 '당신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변화시켜버렸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군인이라면 명령이 살인을 요구할 때 살인하지 않는 것은 범죄가 된다.
불행하게도 명령은 선을 행하기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다. 교조적인 순수 역동성은 선이 아니라 오로지 효율성만을 향해 나아가게 마련이다.


노동이 본래의 고귀함을 잃고 비천한 것으로 전락해버릴 때, 비록 그 노동이 삶 전체의 시간을 다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우리는 그에게서 배웠다. 이 생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절망 -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절망이 그 어떤 희망보다 낫다-을 이루는 것이다. 이 사회가 내세우는 구실이야 가지가지이지만 이 사회가 누리는 비천한 쾌락이 실은 수백만의 죽은 영혼들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과연 그 누가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죽이고 죽는 대신에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됨됨이를 창조하기 위해 스스로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는 것을.


빈곤은 때때로 행복한 이미지들을 보면 고통스러워 고개를 돌려버리는 법이다.

모순은 이런 것이다. 즉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면서도 그 세계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들은 세계에 집착하며, 거의 대부분 세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세계를 아주 망각하기를 바라기는커녕 그들을 오히려 세계를 충분히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괴로워한다.

이 예술은 죽음과 망각의 힘에 대항하여 이 세계와 존재들의 아름다움과 동맹하고 있다.

반항하는 인간의 논리는 인간 조건의 불의에 또 다른 불의를 보태지 않도록 정의에 봉사하고, 세상에 가득한 거짓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명료한 언어를 쓰고, 인간의 고통에 맞서서 행복을 위하여 투쟁하는데 있다.
(중략)
그의 유일한 미덕은 암흑 속에 빠져 있어도 암흑의 어지러운 현기증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데 있고 악의 사슬에 묶여 있어도 집요하게 선을 향하여 힘겹게 나아가는 데 있다.

만일 반항하는 인간이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는 침묵과 타인의 예속을 선택하는 셈이다.


그러나 참된 삶이란 이 가슴 찢는 고통 한가운데에 있다. 참된 삶은 이 가슴 찢는 고통 그 자체이며, 빛의 화산 위를 비행하는 정신이며 형평에의 열광이며 절도를 지향하는 불굴의 집념이다..... 지성과 용기의 언어이다.
(중략)
인간은 통제되어야 할 모든 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통제할 수 있다. 인간은 수정되어야 할 모든 것을 창조 속에서 수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어린애들이, 완전한 사회에서조차, 여전히 부당하게 죽어갈 것이다. 인간은 최대한으로 노력함으로써 다만 세계의 고통을 산술적으로 감소시키기를 꾀할 수 있을 따름이다. 불의와 고통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을 것이고 아무리 한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추문임에 변함이 없을 것이다.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왜?"라는 의문의 절규가 계속하여 울려 퍼질 것이다. 예술과 반항은 오직 최후의 한 사람이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중략)
그들은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잊고, 연기처럼 허망한 권력을 위하여 인간의 실감 나는 무게를 잊고, 찬란한 도시를 위하여 변두리의 비참을 잊고, 헛된 약속의 땅을 위하여 일상의 정의를 잊는다. 그들은 개인들의 자유에 절망하고 인류의 기이한 자유를 꿈꾼다. 그들은 고독한 죽음을 거부하고 엄청난 집단적 임종의 고통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세계를, 살아 있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중략)......사는 법과 죽는 법을 배울 것, 그리고 인간이 되기 위하여 신이 되기를 거부할 것.
사상의 정오에서, 반항하는 인간은 이처럼 인간 공동의 투쟁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신성을 거부한다. 우리는 일편단심의 땅 아티카를, 대담하고 소박한 사상, 명철한 행동, 그리고 지자(지식있는 자)의 너그러움을 택할 것이다.
(중략)
우리 각자가 다시금 스스로의 진가를 발휘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에 반하여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 즉 자신의 밭에서 얻는 보잘것없는 수확과 저 대지에 대한 짦은 사랑을 획득하기 위하여 팽팽하게 활을 당겨야 하는 이 시간, 마침내 한 인간이 탄생하는 이 시간, 시대와 시대의 풋풋한 열광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활이 휘고 활등이 운다. 최고조의 긴장의 절정에 이르러 곧은 화살은 더없이 단단하고 더없이 자유롭게 퉁겨져 날아갈 것이다.

- 카뮈의 소설과 사뭇 같고도 다른 느낌,  여러 다른 방대한 관점을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루고 있는 이 "시론"은 무척 생소하면서도 신선한 것이었다. 시니컬하면서도 무심하게 인간존재의 본질이나 사회의 모순을 꼬집어 내는 그의 소설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이고 웅변적인 그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부조리한 운명을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자연을 긍정하고, 지성과 용기를 통하여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2차대전 시기였으며,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이념과 구호가 휘날리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서의 정의와 존엄을 높이 세우고, 신을 제외한다하더라도, 인간만으로 당당하게 현재를 살아갈 것을 역설하는 그의 신념이 멋지고, 부럽다.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뿐더러, 과학과 물질문명에 묻혀버린 현대에 와서는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의 주체인 인간으로서 그가 말한대로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겨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고, 고통스럽더라도 당당하게 살도록. 다른 인간이 존엄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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