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인간
그는 또한 위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 풍성해질지 모르되 그들이 사랑의 대상으로 택한 사람들을 필경 가난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머니라든가 정열적인 여인은 필연적으로 메마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세상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감정, 단 하나의 존재, 단 하나의 얼굴뿐, 다른 모든 것은 다 탕진되고 없는 것이다. (중략)
그에게 중요한 것은 똑똑히 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와 맺어주는 힘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그것도 오직 책이나 전설이 만들어낸 어떤 집단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비추어보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중략) 부조리의 인간은 여기서도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화된다. 이리하여 그가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방식은 적어도 그 방식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 못지않게 그를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스스로 덧없는 것인 동시에 둘도 없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랑만이 너그러운 사랑이다.
신에게 찾아가서 무슨 은신처를 구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부조리에 사무쳐 있었던 삶의 논리적 귀결이요, 내일 없는 기쁨을 향해 치닫던 존재의 성난 결말을 구상화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영광이란 모두가 다 덧없는 것이다. 시리우스 별에서 내려다본다면 괴테의 수많은 작품들도 1만 년 후에는 티끌로 변할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잊혀질 것이다. (중략) 이 생각을 천착해 보노라면 우리의 소란스러운 몸부림이 줄어들게 되고, 그리하여 무관심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심오한 고귀함에 이르게 된다. (중략) 모든 영광들 중에서 가장 속임수 없는 것은 몸소 살아가는 영광이다.
햄릿은 말한다. "피와 판단이 너무나도 야릇하게 서로 뒤섞인 나머지, 운명의 손가락이 제멋대로 노래 부르게 하는 피리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복 있을지어다." 라고.
니체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동감이다."라고.
내가 개인을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개인이라 보잘것없고 비천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승리로 끝날 대의들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패배로 끝날 대의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중략)
관조와 행동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늘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찢어짐은 끔찍하다. 그러나 자부심을 가진 마음에게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 신이나 시간이냐, 십자가냐 칼이냐가 있을 뿐이다. (중략) 나는 타협하여 시대 속에 살면서 영원을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단다. 이를 가리켜 동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혐오한다. 나는 전체 아니면 무를 원한다.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이 세계 안에서 인간적인, 오직 인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무엇이든 보다 뜨거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긴장된 얼굴들, 위협받는 동지애, 인간들 상호간의 지극히 강하고 수줍은 우정,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진정한 부(wealth)인 것이다.
만약 슬기롭다는 말이, 갖지도 않은 것에 대한 공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적용될 수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슬기로운 사람들이라 하겠다.
여하간 부조리의 추론에 보다 뜨거운 체온이 담긴 모습들을 회복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미래도 없고 그렇다고 약해지지도 않는 세계의 척도에 따라 살 줄 아는, 시간에 얽매이고 적지에 발목 잡힌 또 다른 많은 얼굴들을 거기에 추가해볼 수도 있다. 그러면 신 없는 이 부조리의 세계는 분명하게 생각하고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다.
부조리한 창조
중요한 것은 부조리와 더불어 살아 숨쉬는 것이고 그것이 주는 교훈을 알아차리고 그 피와 살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조리한 즐거움의 전형은 다름 아닌 창조이다. "예술, 오로지 예술. 진리로 인하여 죽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들은 예술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중략) 그러나 매순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세계와 맞대면하고 그리하여 질서 있는 광란 속에서 모든 것을 다 맞아들이는 인간은 그의 마음속에서 또 다른 열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체계 '한복판'에 갇혀 있는 철학자와 자신의 작품만 '쳐다보고' 있는 예술가 사이에서 제기되는 모순에 대한 것이다. (중략)
부조리한 창조자는 자신의 작품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작품을 포기할 수도 있다.
진정한 작품은 본질적으로 '더 적게' 말하는 작품이다. (중략) 작품이 경험속에서 도려낸 한 토막, 내면의 광채가 집약되어 있으면서도 제한됨이 없는, 다이아몬드의 한 조각에 불과할 때 이 관계는 좋은 것이다. (중략) 예술가란 무엇보다 먼저 잘 살 줄 아는 사람이다. 물론 여기서 산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느낀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졸렬한 소설이 많다고 해서 가장 훌륭한 소설들의 위대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길에서 쓰러지는 사람은 살아남을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소설가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지어내어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를 창조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철학적 소설가다. 다시 말해서 경향소설가의 반대이다. 발자크, 사드, 멜빌, 스탕달,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말로, 카프카 등은 그런 소설가의 몇 가지 예라고 하겠다.
설명을 하고 싶은 유혹이 가장 강한 세계가 창조인데 거기서 과연 우리는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현실 세계의 의식이 가장 강한 곳이 이 허구의 세계인데 과연 나는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욕망에 굴하지 않은 채 끝까지 부조리에 충실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숙고해보아야 할 문제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중략)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습관에 젖어든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데 인생의 모든 노력과 최상의 몫이 이 돈벌이에만 집중되어버린다. 행복은 잊혀지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한다. (중략) 인간의 마음속에서 집요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희망이다. 가장 헐벗은 인간들도 이따금 환상에 동의하고 만다. (중략) 이리하여 빛의 제신과 진흙의 우상이 생긴다. 그러나 진정으로 찾아내어야 할 것은 인간의 얼굴들로 인도하는 중간의 길이다.
따라서 키릴로프는 자신을 희생시킨다. 그러나 비록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다 해도 속아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죽음 다음에 미래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복음적 슬픔에 사무친 채 신-인간으로 머무른다.
그는 공허를 자신의 색채로 물들여야 한다.
의지가 곧 기적을 이룬다.
즉, 인간 조건에 대한 집요한 반항, 불모의 것인 줄 잘 알고 있으면서 노력을 계속하는 불굴의 인내가 그것이다. 창조는 나날의 노력, 자기 억제, 진리의 한계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절도와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고행이다. 그런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것을 위해서' 이고 끝없이 되풀이하고 제자리걸음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위대한 작품은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시련과, 또한 인간이 그의 망령들을 이겨내고 자신의 적나라한 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리라.
이는 그들 삶의 부조리를 깨달음으로써 지나칠 만큼 열광하며 삶 속에 뛰어들게 되는 것과 같다. 남은 것은 운명이다. 오직 운명의 결말만이 숙명적이다.
시지프 신화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었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에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한다. 그 운명도 시지프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중략)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저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걸음, 잠시 동안의 휴식 때문에 특히 시지프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시지프의 말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중략)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중략)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중략)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고자 원하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 산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 산다는 것은, 어찌보면 잔인한 일이다.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형수와도 같은 입장이다. 설령 감옥 밖에 다른 세상이 있다 하더라도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는 사형수에게는 그 밖의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현재와 자신, 그 뿐이다. 카뮈가 말하는 '몸소 살아가는 영광'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 외에는 중요치 않다.
카뮈가 비유한 시지프,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시지프들, 그들은 매일 자신의 돌을 굴려올리고 있다. 모든 형벌을 받은 자들이 시지프는 아닐 것이다. 어떤 이들은 비탄에 잠겨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도 있고, 원망과 애원을 할 수도 있으며, 사죄의 눈물로 사면을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의 대변자, 시지프는 묵묵히 돌을 굴려 올린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성실히 자신의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운명의 의미는 그의 발걸음, 그의 고통, 그의 생각, 그의 한숨, 그의 상상, 그의 추억 속에 모두 녹아있는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떠한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든 인간은 그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절대적 가치는 오늘의 삶이, 깨어있음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창조에 대한 카뮈의 견해는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 너무도 일치한다. 그러나, 혼자만 스스로의 생각을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던 나에게 든든한 지원군이다. 동의하지 않고, 희망하지 않고, 명료한 의식으로 써내려가야 할 성실한 사명, 부조리 속에서도 맺히는 열매! 비록 썩어 사라질지라도 현재의 삶을 살아나가는 인간의 위대한 의지가 바위를 굴려 올린다. 굴러떨어질지라도 정상을 향해 굴려지는 바위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지더라도 인간들이 흘린 땀과 피의 냄새가 언제나 천지에 진동할 것이다. 그 냄새에 신들이 기절초풍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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