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일 목요일

야스퍼스 (Karl Theodor Jaspers)의 '철학입문' 중

철학적 사유에는 과학과는 달리, 진보의 과정이라는 성격이 없다. 우리는 분명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보다 훨씬 많은 '의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우리가 플라톤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중략)
철학적 확신이란 그것이 성취될 때 인간의 본질 전체가 동시에 표현되는 확신이다. 과학적 인식은 각각의 대상에 관련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반면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그 자체에 관련된 존재 전체의 문제이며, 그것이 환히 밝혀질 때에는 그 어떤 과학적 인식보다도 더 우리를 감동시킬 진리의 문제이다. 

그리스어로 철학자(필로소포스) 라는 말은 지자(知者)라는 단어와 대립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 단어는 지식을 소유하고 스스로 지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식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중략)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진리의 탐구에 바로 철학적 본질이 있다. (중략) 철학이란 도상(道上)에 있는 것이다. 철학의 질문은 그에 대한 해답보다 중요하며, 철학에서는 온갖 해답이 새로운 질문으로 변한다. 

무엇이 철학인가 하는 정의는 사람들 각자가 시도해야 할 일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이에서 출발하여 존재의 본질을 추구했다.
데카르트는 제한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함을 추구했다.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실생활의 고뇌 속에서 영혼의 안정을 추구했다.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산만한 생활 속에서 무너져서는 안 되므로, 어떠한 질서 속에서 영위되어야 한다.
(중략)
하지만 자기를 망가가하고 싶어하는 경향은 이미 인간 자신 속에 내재해 있다. 세상일이나 인습, 무분별하게 파헤쳐진 일, 고정된 궤도에 몰두하여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것에서 탈출해야 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근원을 깨닫고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가 내적 행위로써 있는 힘껏 우리 자신을 구하려는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물론 현살생활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실제 직무인 매일의 요청에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단순하게 노동을 하고 여러 가지 목적에 몰두하는 것이 이미 자기망각에 이르는 길이고 따라서 태만이고 죄책임을 깨닫는 것, 바로 여기에 철학적 생활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나아가 행복과 고민, 성취와 단념, 암흑과 혼란이라는 인간에 관현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것들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런 것들에게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그것을 극복하며, 결말이 난 것으로 치부해버리지 않고 끝까지 밝히는 것, 이런 삶의 방식이 철학적 생활이다.
철학적 생활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고독한 길, 모든 종류의 반성을 통해 명상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 함께 행동하고, 말하고, 침묵하면서 모든 종류의 상호이해를 통해 교제해 나가는 길이다.
(중략)
이런 명상 속에서 나 혼자서 얻는 것은 -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 얻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략) 진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끊임없이 교제를 철저하게 추진하기를, 항상 다른 옷을 걸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는 우리의 오만한 자기주장을 포기하기를, 또 이 자기 포기를 바탕으로 내가 나에게 셀 수 없을 만큼 되풀이하여 증여될 것이라고 희망하며 살기를 요청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안심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조명하고 진실이라고 평가하는, 내 안의 억측 위에 움직이지 않는 지점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 그런 자기 확신은 성실함이 결여된 자기주장의 유혹으로 가득찬 모습이다.
(중략) 단호하게 인생에 밀고들어가는 것, 최악의 사태에서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호도하지 않는 것, 무엇을 보거나 묻거나 대답할 때는 제한 없이 성실함을 지배하는 것, 이런 태도가 중요하다. (중략)
철학하는 것이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면 이 경우, 죽을 수 있는 능력은 바르게 살기 위한 조건임이 틀림없다. 사는 것을 배우는 것과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명상은 사고의 힘을 가르친다.
사유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증거이다.
(중략)
우리의 여러 가지 상태는 자신의 실존이 끊임없이 노력하거나 힘을 잃는 것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본질은 과정에 있다는 말이다.
(중략)
철학적 생활의 이러한 비상은 각각 이 인간의 비상이다. 이러한 비상은 타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교제 속에서 개인의 비상으로서 성취되어야 한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그 대지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두둥실 날아다니는 우리의 움직임은 매우 불안정하고, 고정된 대지에 안전하게 자리잡아 만족하고 있는 사람의 입작에서는 아주 가소롭게 보일 것이다. 그것으 불안에 사로잡혀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은 항상 새롭게 획득되어야 하며, 자기 자신의 근원에서 철학을 깨닫는 사람만이 철학을 붙잡을 수 있다. 아직 어슴푸레하기는 해도 철학을 깨닫는 최초의 시선이 있다면 개인의 마음에 철학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


- 왜 철학이 필요한가? 아마도 이 시대만큼 철학이 무시되고 장막에 가리워져 있는 시대도 드문 듯 하다. 중세에는 철학이 종교의 베일을 쓰고 있었다면 현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고시대의 학문처럼 멀고도 어려운 것으로 인지되는 것 같다. 그러나 철학은 야스퍼스에 의해서 다시 강조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위한, 그것도 한 인간을 위한 문제이다. 그 한 인간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며, 그 인간들이 모여있는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가치의 부재에 대해서 사유의 부재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으로서 철학적 사유로부터 인간이 얼마나 자신에 대한 정신의 힘을 끄집어 낼 수 있는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자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지 인생의 가치를 찾아내어 가꾸어 나갈 수 있는지 알려주고 싶다. 그러한 의미에서 야스퍼스가 역설하고 있는 '철학적 태도'는 인간의 삶을 허무와 좌절에서부터 건져내어 삶의 길 위에 선 인간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것의 의미는 이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고 비상하는 과정에서의 인간은 죽음을 앞에 놓고도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는 정말로 잘 살아온 인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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