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풍이야".
정풍이 뭔진 몰라도 녀석이 좋아하는 바람인 건 분명했다. 축축하고 더러운 녀석의 운동화가 경쾌하게 빗속을 날았다. 푸른 셔츠도, 작업반 바지도, 양말도 날아갔다...... (중략)
승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늘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마주 선 우리 사이의 1미터는 단순한 물리적거리가 아니었다. 건너갈 길 없는 차원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같은 세계에 함께 존재한 적이 있다는 증거는 만식 씨의 헬멧 뿐이었다.......(중략)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는 누구일까. 나, 나는.......(중략)
승민은 손을 내밀었다. 머뭇 머뭇 맞잡았다. 손을 떼자 손바닥에 승민의 시계가 놓여 있었다. "이제 빼았기지 마." 승민의 눈이 고글 속에서 웃고 있었다. "네 시간은 네 거야."
시계를 쥐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걸었다.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절벽 끝까지 단숨에 뛰었다. 숨을 턱 끝으로 몰아내며 조명탄 마개로 힘껏 쳤다. '훅'소리와 함께 불꽃이 올라왔다. 나머지 하나에도 불을 붙인 뒤 양손에 나눠 쥐고 승민을 향해 돌아섰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뿌연 연기가 하늘 로 치솟았다. 오렌지 빛 섬광이 나를 가뒀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주변이 환해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승민이 오고 있었다. 헬멧의 전등을 끄고 먹빛 땅거미를 통과해 오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질주해오고 있었다. 노란 캐노피가 승민의 머리 위에 벽을 세우고 따라왔다. 5미터, 4미터......
승민의 발이 지상에서 떨어졌다. 허공을 디디며 가볍게 떠올랐다. 수리호가 뿜어내는 상승기류를 타고 거침없이 하늘로 비상했다. 비상의 한 지점에서 글라이더가 반 바퀴를 돌았다. 일순, 글라이더 주변이 환해졌다. 승민이 헬멧의 전등을 켠 것이었다. 불빛은 아주 잠깐 거기 머물렀다. (중략)
몸이 떨려왔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떨림이었다. 목과 가슴사이에선 불처럼 뜨거운 것이 오르내렸다. 그 뜨거운 한기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날아간 자에 대한 '경외', 갈 곳이 없는 자의 '절망'.
절벽 끝에 누웠다. 하늘이 까맸다. 별들은 내게 너무도 멀었다.
- 중략 -
석양의 잔광이 하늘을 태우고 있었다. 저 불길이 가시고 나면 저녁 별이 뜰 테지.
하모니카 소리가 가슴을 두들겼다. 심장 안에서 피가 요동쳤다. 몸의 움직임도 피의 요동만큼 격렬해졌다.
넌 누구냐?
승민이 물었다.
알아맟혀 봐.
내가 대답했다.
새야?
아니.
비행기?
아니.
그럼 누구?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 웃음과 눈물과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던 소설,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청년의 극단적인 다른 성향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에의 동경, 삶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 등이 고스란히 전해졌던. 승민의 무모하면서 끊임없는 자유로의 도전을 지켜보면서 삶에서 회피했던 수명이 자신의 삶에 대해 새로운 발걸음을 디디게 되는, 또 인간이기에 독자로서 같은 감정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멋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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