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9일 일요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1" 중

지금 가스등을 끈 것이다. 마지막 하인은 가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약없이 밤새도록 괴로워해야 한다.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의 새벽녁, 평소에 잠자는 자세와 다른 자세를 취하고 독서하다가 잠들었을 때, 단지 팔의 위치가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 태양의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뒷걸음질치게 할 수 있으므로, 눈 뜬 순간에는, 이미 일어날 시간인 줄 모르고서 지금 막 잠든 줄로 여길 때도 있을 것이다.

제가 신문을 비난하는 건 날마다 하찮은 것에 우리의 주의력을 돌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본질적인 것이 씌어 있는 서적을 한평생 서너 번밖에 읽지 않습니다. (스완의 말 중)

회상에 있어서 콩브레는 마치 얇은 한 개의 계단으로 이어진 2층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콩브레에는 마치 저녁 일곱시 시각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묻는 이가 있다면, 콩브레는 다른 것도 다른 시간도 있었다고 나는 대답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것은 단지 의지에 의한 기억, 의지의 기억에 의해서 회상되는 것이며, 그 기억이 주는 과거에 대한 정보는 참된 과거를 무엇 하나 간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의지해 콩브레의 그 밖의 것을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갖지 않았으리라. 그러한 모든 것은 실제로 죽고 만 것이다. 나로서는. 
영영 죽었는가? 그런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은 모두 우연에 달려 있다. 그리고 두번째의 또 하나의 우연. 곧 우리의 죽음이라는 우연은, 흔히 첫번째의 우연이 가져다 주는 은혜를 오래도록 기다리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의 과거도 그와 마찬가지다. 과거의 환기는 억지로 그것을 구하려고 해도 헛수고요, 지성의 온갖 노력도 소용없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이 물질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우연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나는 자기에게 다시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그 미지의 상태는 무엇이었나, 아무런 논리적인 표시를 가져다 주지 않았지만, 그 명백한 행복감과 실존감으로 다른 온갖 잡념을 소멸시켰던 그 미지의 상태는 무엇이었냐고. 나는 그 상태를 다시 출현시키려고 애쓴다. 사고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차의 첫 숟가락을 마신 순간으로 돌아간다. 돌일한 상태를 발견하나, 새로운 광명은 없다. 나는 정신에게 더한 노력을, 도망쳐 가는 감각을 다시 한 번 붙잡아 데려오기를 요구한다. 정신은 감각을 다시 붙잡으로 애쓴다. 이러한 정신의 비약이 아무것도 안 깨지게, 나는 온갖 장애물, 온갖 잡념을 물리치고, 옆방의 기척에 귀를 막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한다......(중략)......그러자, 나의 몸 안에, 깊은 심연에 빠진 닻처럼 끌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 무엇이 움직이기 시작해, 떠오르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감촉한다. 그것이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올라온다. 나는 그것의 저항을 느끼며, 그것이 지나오는 거리의 소란한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자아의 밑바닥에서 그와 같이 떨고 있는 것, 그것은 그 미각과 결부되어 그 미각의 뒤를 이어 자아의 거죽으로 올라오려는 심상, 시각의 추억임을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멀리, 너무나 어렴풋이 파닥거린다. 뒤숭숭한 색채의 포착할 수 없는 회오리가 빙빙 돌면서 내는 무색의 반영을 나는 그 형태는 식별할 수가 없고, 잔뜩 믿는 유일한 통역자처럼 그 반영에 대하여, 그것과 동시에 태어나고, 그것과 떨어질 수 없는 반려의 표시인 그 미각을 번역해 주기를 청하며, 그것이 어떠한 특수한 상황, 어떤 과거의 시기와 관련이 있는지 가르쳐 주기를 청할 수도 없다.
(중략)
이 추억, 이 옛 순간은 과연 나의 맑은 의식의 표면까지 도달할 것인가? 나는 모른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안 느낀다. 추억이 멈추고 다시 가라앉았나 보다. 그것이 다시 한 번 어둠 속에서 다시 올라오리라는 것을 누가 알랴? 열 번이나 나는 다시 시작해 가라앉은 추억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때마다, 온갖 어려운 소임, 중대한 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나태가 머리를 쳐들고, 그런 따위는 그만두고 단지 수고 없이 되새기는 오늘의 권태나 내일의 욕망을 생각하면서 차라도 마시라고 권유한다.

다시 말해, 그 냄새는 과수원에서 찬장으로 옮겨진 그해의 모든 맛있는 젤리, 잘 익은 맛있는 젤리다. 철따라 변하지만, 세간과 하녀처럼 그 집의 특유한 냄새, 따끈한 빵의 보드라움으로 서시의 짜릿함을 조절하는 냄새, 마을의 큰 시계처럼 한가로우나 시각을 어기지 않는 꼼꼼한 냄새,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질서 있는 냄새, 돈담무심하면서도 선견지명이 있는 냄새, 세탁물의 냄새, 아침 일찍 일어난는 냄새, 신앙심의 냄새, 평안을 즐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불안의 증가밖에 가져다 주지 못하는 평안을 즐기는 냄새, 그리고 거기서 살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는 이의 눈에는 시의 큰 저수지 같아 보이나 실은 산문적인 것밖에 즐기지 못하는 냄새. 


나의 사사로운 생활의 보잘것없는 사건을 나의 손으로 조심스럽게 파내, 그것들을 살아 있는 물이 흐르는 어떤 고장 안의 이상한 모험과 동정으로 가득한 삶으로 내가 바꾼 일요일의 화창한 오후여, 내가 그대를 생각할 때, 아직도 그대는 그 아름다운 삶을 나의 머리에 떠오르게 하며, 그대의 조영한, 잘 울리는, 향기로운, 맑은 시간의 ,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너머로 천천히 변해 가는 잇따른 결정 속에 - 나는 독서에 골몰하고 낮 더위가 쏟아지는 동안 - 그대는 그 아름다운 삶을 조금씩 형성하다가 마침내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그대는 아직도 실상 그 아름다운 삶을 그대 속에 품고 있구나.

레오니 고모를 위하여, 삶은 이처럼, 항상 한결같이 그녀가 짐짓 꾸며 보이는 경멸과 깊은 애정과 더불어 '작은 타성'이라고 일컫는 안온한 천편일률 가운데 지나갔다. 고모에게 보다 유효한 섭생을 권해 본댔자 소용없음을 알고서, 차차 이 타성에 경의를 표하게 된 집안뿐 아니라, 집에서 세 거리가 떨어진 동네에서 짐 꾸리는 인부가 궤짝에 못질하기 전에, 고모가 '쉬고 계시지나 않은지' 프랑수아즈에게 물으러 사람을 보내는 촌락에 있어서마저, 모든 사람에 의해 보호되었던 이 타성.

고모에게 시작되고 있던 것은 - 이는 평소보다 약간 일찍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 죽음의 채비를 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도기적인 상태인 번데기 속에 들어가 버리는 노년의 크나큰 체념인데, 이 체념은 서로 가장 깊이 사랑하던 옛 애인들 사이에서도, 보다 정신적인 유대로 맺어진 벗들 사이에서도 - 어느 해를 최후로 삼아, 서로 만나기 위해 필요한 여행이나 외출을 중지하고, 서로 편지 보내기를 그만두고, 이승에서 이제는 못 할 줄 알게된, 그런 정신적인 유대로 맺어진 벗들 사이에서조차도 - 오래 끌어온 삶의 마지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자 나에게는, 이 자기라는 것이, 다른 인간들과 같은 식으로 살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죽으리라, 나는 그들 속에서 쓰는 소질을 전혀 타고나지 않은 수효 안에 들어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되었다........나의 사상은 허무하다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절박한 감정은 나에게 마구 주는 어떠한 아첨말보다 더 값어치가 있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선행을 칭찬받는 악인이 갖는 양심의 가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런 문학적인 전념에서 아주 떠나, 더구나 그것과는 아무 관계 없이, 느닷없이 한 지붕이, 돌 위에 보이는 태양의 반사가, 길의 냄새가 나에게 어떤 특별한 기쁨을 주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또 내가 걸음을 멈춘 것은, 나보고 붙잡으로 오라고 초청하고 있는데도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발견 못 하는 그 무엇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의 건너편에 숨겨 두고 있는 성싶어서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 숨겨진 것이 눈길이 미치는 것 중에 있다고 느껴, 거기에 그대로 서서 꼼짝하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몰아쉬고, 눈에 비치는 것의 형상 또는 냄새의 건너편으로 나의 사념과 함께 가려고 애썼다.......(중략).....나는 지붕의 선, 돌의 색조를 정확히 회상하려고 전념하였다. 그러자 그 까닭을 이해함없이, 나에게는 그것들이 충만해지고 스스로 막 열리고, 그 덮어 숨기고 있는 것을 나에게 내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중략).......그러나 적어도 그 인상들은 나에게 까닭 모를 기쁨을, 일종의 풍요한 환상을 주어, 그럼으로써 한 거대한 문학 작품을 위한 철학적인 주제를 탐구할 때마다 반드시 내가 경험한 권태와 무력감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형태와 냄새 또는 색채의 인상에 의해 나의 의식에 가해진 의무 - 다시 말해 그 인상들 뒤에 숨은 것을 인식하려고 애쓰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나는 곧 그 노력을 모면해 주는 동시에 그 노고에서 구해 줄 구실을 나 자신에 찾았다.

- 프루스트가 어떠한 생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 후회나 회한의 마음으로 쓴 것으로 생각되지도,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의 글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그가 그의 과거에게 생생한 현실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에게 불가능한 '영원'의 옷을 입힌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언제나 내가 가져왔던 의문, '과연 한 인간의 생이, 한 인간의 기억이 그토록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한 인간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어느정도의 해답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가 묘사한 어린시절의 종탑, 콩브레, 게르망트, 메리글리즈 산책,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스완, 질베르트 등은 아직 그의 묘사의 색채를 더해서 더할 수 없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에게 내가 느끼는 또 하나의 동질감은 그의 묘사적 노력, 어떠한 장면이나 모습에 대한 기쁨(혹은 슬픔, 경이 등)과 그것에의 묘사에의 노력, 이다. 어느 순간 느껴지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과 그 광경의 작은 부분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붙잡고 싶게 느껴지는 그 마음이 혼자만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남은 10권의 책을 (그의 죽을 때까지의 10여년의 저작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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