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사에서의 결혼> 중
본다는 것, 이 땅 위에서 본다는 것,
......
오직 바라보는 것이면 그만이었다.
사는 시간이 따로 있고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도 따로 있다. 그건 좀 덜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
태양과 바다로부터 태어나서 그의 단순성 속에서 위대함을 찾아낼 줄 아는 저 활력에 차고 멋을 아는 한 종족, 바닷가에 우뚝 서서 그네들 하늘의 눈부신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져 보내고 있는 그 종족 전체와 사랑을 나누려는 의식과 그것을 사랑으로 삼는 자부심이 내게 있으므로.
<제밀라의 바람> 중
세상에는 정신 그 자체를 부정하는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정신이 사멸하는 곳이 있다. 내가 제밀라에 갔을 때 그곳에는 바람과 태양이 있었다...... 그곳에는 무겁고 틈새 하나 없는 거대한 침묵이 - 어떤 저울의 균형과도 같은 그 무엇이 지배하고 있더라는 사실이다. 새들의 비명, 구멍이 세 개 뚫린 피리의 고즈넉한 소리, 염소들이 바스락거리며 발을 옮겨놓는 소리, 하늘에서 울려오는 어럼풋한 소음, 그 하나하나가 다 그 장소의 침묵과 황폐함을 만들어내는 소리들이었다. 이따금씩 무언가 메마르게 탁 부딪는 소리,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는데 그것은 바로 돌들 사에에 가만히 엎드려 있던 어떤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기척이었다.
제밀라의 언덕에는 바람이 분다. 바람과 태양이 분간할 수 없도록 하나로 뒤엉키고 그로 인하여 폐허와 빛이 한데 뒤섞이는 그 엄청난 혼잡 속에서 무엇인가가 다듬어져가지고는 인간에게 사멸한 도시의 고독과 침묵과 더불어 인간의 정체를 측정할 수 있는 절도를 부여한다.
제밀라에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곳은 그저 지나가다가 발길을 멈추거나 거쳐가는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다른 어느 곳으로도 인도해주지 아니하며 어느 고장을 향하여 트여 있지도 않다. 그곳은 갔다가 되돌아오게 마련인 곳이다.
포기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을 별로 없다. 여기서 미래라든가 더 잘 되고 싶다는가 출세라든가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마음의 진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다음에는 또 다른 삶이 온다고 믿는 것이 내게는 즐겁지 않다. 내게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제밀라는...... 그리하여 그때 나는 문명의 참다운 단 하나의 진보, 한 인간이 이따금씩 마음을 두게 되는 그 진보는 바로 스스로 뚜럿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하는 것임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무대장치에도 불구하고, 죽는다. 남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 병이 다 낫거든......." 그런데 죽는다. 나는 그런 것을 원치 않는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참말을 하는 날도 있다. 오늘 저녁 제밀라는 참말을 한다. 얼마나 대단한 슬픔과 집요한 아름다움으로 참말을 하는가! 이 세계를 앞에 둔 채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으며 남이 거짓말을 해주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내 명징한 의식을 극한에까지 말고 나가서 나의 모든 아낌없는 질투와 공포와 더불어 나의 종말을 응시하고 싶다. 내가 세계에서 멀어져감에 따라, 그리고 영원히 지속하는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에 집착을 가짐에 따라, 나는 죽음을 더욱 무서워하게 된다. 또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곧 나와 세계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며 영원히 잃어버린 한 세계의 열광적인 이미지들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기쁨도 없이 완성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알제의 여름> 중
우리가 어떤 도시와 주고받는 사랑은 흔히 은밀한 사랑이다. 파리, 프라하, 심지어 피렌체 같은 도시들은 웅크리고 돌아앉아 있어서 그것 특유의 세계에 테를 두르듯 한계를 짓는다. 그러나, 알제는,...... 입처럼 혹은 상처처럼 하늘로 열려 있다. 우리가 알제에서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나 다 향유할 수 있는 것, 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바다, 어떤 햇빛의 무게, 인종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파리에서는 넓은 공간과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소리가 그리워진다. 여기서는 적어도 인간이 흡족함을 맛볼 수 있고 자기의 욕망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풍요함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이곳이 요구하는 것은, 혜안을 지닌 영혼, 즉 위안받으려 하지 않는 영혼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과 하늘은 남는다.
어떤 땅과 맺고 있는 관계, 몇몇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을 느낀다는 것, 가슴이 제게 맞는 조화를 찾을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있음을 안다는 것, 한 사람의 얼마 안 되는 일생에 있어서 이만한 것이면 벌써 많은 확신이라 할 수 있다. 아마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모든 것이 이 영혼의 고향을 동경한다...... 나는 세상에 초인적인 행복이란 없다는 것을, 하루 해의 곡선을 초월한 저 너머의 영원이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이 덧없으나 근본적인 부를, 이 상대적인 진실들만이 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그밖의 것들, '이상적인 것들'을 이해할 만큼 충분한 영혼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나는 천사들의 행복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저 하늘이 나 자신보다 더 오래 계속하여 존재하리라는 사실뿐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 바로 영원이 아니라면 무엇을 영원이라 부를 것인가?.......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순수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순수하다는 것은 피의 고동치는 소리가 오후 두 시의 태양의 폭력적인 맥박과 하나가 되는 곳, 세계와의 혈연관계가 실감되는 저 영혼의 고향을 다시 찾는 것이다.
<사막> 중
우리는 이제 우리 동시대 사람들을 잘 바라보지도 않게 되었다. 오로지 그들에게서 우리의 처신에 필요한 방향과 규칙만을 찾는 데 급급한 탓이다.
사람이 가슴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늘이 피렌체 들판의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들을 엄청나고 말없는 슬픔으로 뒤덮어가기 시작하는 어떤 저녁, 나는 이 진실이 자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고장의 슬픔은 아름다움에 대한 한갓 주석만은 결코 아니다. 저녁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 속에서 무엇인가의 응어리가 풀려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오늘 내가 어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지성이 아름다움 속에 몸을 던지면 허무로 식사를 하게 된다. 위대함이 목을 죄는 듯한 이 경치들 앞에서는 인간의 사념들 하나하나는 인간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이토록 당혹스러운 확신들로 곧 거부되고 깔리고 짓깔리고 연멸된 나머지 이 세계 앞에는 그저 진실이라고는 수동적인 진실밖에 알지 못하는 저 무형의 반점, 혹은 그 빛깔, 혹은 그 태양밖에 남은 것이 없게 된다.
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미 수없이 많은 눈들이 이 풍경을 응시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 내게는 그 풍경이 마치 하늘의 첫번째 미소와도 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나를 나의 밖으로 끄집어내놓는 것이었다. 나의 사랑과 이 돌의 아름아운 절규가 없다면 모든 것이 다 무용하다는 것을 그 풍경은 내게 확신시켜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 풍경이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위대한 진실은 바로 정신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마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햇살에 따뜻해진 돌, 혹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흠씬 키가 크듯 위로 솟구치듯 시프레나무, 바로 그것이 '이치에 맞는다'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를 금그어주는 경계선이라는 사실이다. 유일한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이 없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한다. 그것은 나를 저 극한에까지 떠밀어간다. 세계는 분노하지 않은 채 나를 부정한다. 피렌체의 들판 위에 내리는 저녁빛속에서 나는 어떤 예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내 두 눈에 눈물이 괴지 않았더라면, 내 속을 가득 채우는 시의 소리 높은 흐느낌이 세계의 진실을 잊어버리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이미 다 정복당해버린 것과 같은 그 예지의 나라를 향하여.
- 카뮈의 이른 저작인 산문집, "결혼"을 여러번 되풀이 해서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 하나 하나를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당시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가 의미한 바의 모두를 이해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알제' 혹은 '티파샤'와 같은 장소가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장소에,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경외로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리라. 때론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느라, 혹은 뛰어가기 바빠 앞만 보느라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무언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니. 내가 카뮈를 어떤 작가보다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문장은 대담하고, 아름다우면서, 솔직하다는 것이다. 카뮈에게서 문장을 위한 문장은 없다. 그는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인간을 생각하고, 인간의 운명을, 죽음을, 삶을 그의 생각에 담았다. 자연에 압도되지도 않고, 영원에 기가 죽지도 않으면서, 순간을 대표하는 인간과 영원을 대표하는 자연의 대립적이면서 아름다운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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