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그들에게 주어 보라. 그들이 그것을 받는지 시험해 보라. 인간들은 은둔자에 대해 의심을 품지. 우리가 선물을 하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네."
나는 그대들이 대지에 충실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대들은 하늘나라의 희망에 대해 설교하는 자들을 믿어서는 안된다. (중략)
그런 자들이야말로 생명을 경멸하는 자요 죽어 가는 자며 스스로 독을 받고 있는 자다. (중략)
예전에는 신에 대한 모독이 최대의 죄악이었다. 그러나 이제 신은 죽었다.
인간이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줄이다. 심연 위에 쳐진 줄이다. 그 줄을 타고 가는 것도 위험하고, 가운데에 멈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두려워서 엉거주춤한 채 머물러 있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중략)
저쪽 기슭을 동경하는 화살이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사랑한다. 인식하려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 언젠가는 초인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인식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중략)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영혼을 아낌없이 내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을. (중략)
나는 사랑한다. 행위에 엎서 황금 같은 말을 던지고, 언제나 자기가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이 행하는 사람을. (중략)
나는 사랑한다. 미래에 올 사람들의 의의를 인정하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사람들을 구하는 사람을. 그런 사람은 현존하는 사람을 상대로 몰락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사랑한다. 상처 입었을 때도 계속 영혼의 깊이를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그리고 아주 작은 체험으로도 몰락한 수 있는 사람을. 그런 사람은 이렇게 하여 기꺼이 저 다리를 건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한다. 왜냐하면 일하는 것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위로가 몸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온갖 신앙을 가진 자를 보라!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의 가치관을 깨뜨리는 자는 파괴자이며 범죄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다.
창조하는 자가 바라는 것은 길동무이다. 시체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자들도 아니다. 창조자가 구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목록에 기록할 동반자다.
제 1 부
그러나 이 세계 저편에 대한 망상으로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괴로움과 무능이야말로 내세를 창조한 것들이다.
나는 신성하다는 자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신임받기를 바라고,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 죄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형제들이여, 차라리 건강한 육체의 소리에 귀기울여라! 그것이먀말로 성실하고 순결한 소리다. 건강한 육체, 완전하고 튼튼한 육체는 보다 성실하고 보다 순결하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덕이다.
과거에는 의심이 악이었고, 본래 자아의 의지가 악이었다. 그 시대에 병든자는 이단자가 되거나 마녀가 되었다.
모든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 사랑한다. 피로 써라!
인생은 무겁다. 그러나 그렇게 연약한 꼴을 보이지는 마라.
우리는 그 짐을 질 정도로 힘이 센 한 쌍의 당나귀다.
내가 악마를 보았을 때 (중략) 그것은 무거운 영혼이었다. 모든 사물은 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것을 물리치는 것은 노여움이 아니라 웃음이다. 자, 무거운 영혼을 물리치자.
높은 데 올라가 보면 언제나 나는 혼자고, 아무도 나와 이야기하지 않아요. 고독이라는 매서운 추위가 나를 무서워 떨게 하지요. 도대체 나는 높은데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그러나 고귀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착하다는 사람에게조차 고귀한 자는 방해물이지. 그리고 그들은 이 고귀한 자를 착하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네.
고귀한 자는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고 하지.
착하다는 사람은 오래된 것을 사랑하고, 오래된 것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네.
대지는 쓸모없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중략) 그들은 그 '영원한 삶'이란 것을 좇아 삶에서 사라지는 편이 낫다.
국가는 그대들에게 음험한 거짓말로 속삭인다. 국가는 스스로를 낭비하고 몸을 내맡기려는 자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
착한 자들이나 나쁜 자를 불문하고 모든 자가 독을 마시는 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자나 나쁜 자, 모든 자들이 자아를 잊어버리는 곳, 모든 사람들이 서서히 자살하면서 '삶'이라고 불리는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이 쓰레기 같은 자들을 보라! 그들을 언제나 병들어 있다. 그들은 담즙을 토해 내 그것을 신문이라 부른다. 그들은 서로를 게걸스럽게 먹지만 소화시키지 못한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그 악취 속에서 질식하고 싶은가? 아니, 창문을 부수고 자유 속으로 뛰어나가라!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피하라.
그들을 향해 손을 들지 말라. 그들은 너무 많아 한이 없다. 파리채가 되는 것이 그대의 운명은 아니다.
그들은 그대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기 위해 자신들의 좁은 소견으로 이것 저것 추측해 본다. 그들에게 있어 그대는 의심스러운 존재이다.
그대의 고요한 자존심은 언제나 그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그대가 일부러라도 겸손해지면 그들을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한다.
그들은 그대를 대할 때 자신을 소인배로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열등감은 그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복수심으로 불타오른다.
벗에게 있어 그대는 초인을 목표로 날아가는 하나의 화살, 동경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 나의 친구여, 인간이란 극복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대가 멍에를 벗어날 만한 자격이 있는 자란 말인가? 세상에는 타인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집어던지자마자 자신이 가진 마지막 가치까지 내버린 자가 적지 않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내가 그대 눈빛을 통해 분명히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독이 그대를 피로에 지치게 할 것이다.
고독한 인간을 죽이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여러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그대를 죽이는 데 실패한다면 그 감정이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대는 과연 그 감정들을 없앨 수 있겠는가?
고독한 이들은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너무 급하게 손을 내민다.
그대가 손을 내밀면 안 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는 앞발을 내밀어라.
그대는 자신의 불길로 자신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재가 되지 않은 채 어떻게 거듭나기를 바라겠는가?
그대는 사랑과 창조의 힘을 지닌 채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형제여, 이윽고 시간이 흐르면 정의는 다리를 절면서 그대를 따라가리라.
형제여, 나의 눈물을 지닌 채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자신을 극복하여 창조하기를 원한고, 그래서 멸망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계속 제자로 머물러 있는 것은 스승에게 보답하는 길은 아니다.
- 정말로 읽고 싶었던 책,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였다. 한국에서 날아온 소포를 열면서 가슴이 벌써 뛰었다. 그의 아름다운 문구들과 강인한 철학이 새로운 샘물을 나에게 부어주는 것만 같다. 그가 허무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는 지나치게 '실존적'이다. 그는 인간을 너무도 중요시한 나머지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가 할퀴는 말들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가 얼마나 인간이라는 존재를 믿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실망하였는지, 그럼에도 얼마나 믿고 싶어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상적인 인간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한다. (그것은 평등의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르게 태어난다. 그것은 우열의 개념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애써 이 부분을 외면하려 하지말자.) 그가 제시하는 초인은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이르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정은 제쳐 놓자. 그런 세상은 있지도 않을 것이므로.)
나에게 화살처럼 와서 박히는 2개의 말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라는 것과 '고독'이다. 사람을 옭아매는 많은 물질적, 정신적 밧줄에서 풀려나 맨 몸이 되었을 때, 그것은 불안한 자유이다. 그 '불안'을 지니고 '고독'에 몸을 맡긴 채 걸어가야 하는 길은 분명 인간으로서 어려운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위한'이라는 전제가 걸려있는 한, 그 길은 분명 그 가치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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