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환경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좋다는 안이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중략)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이란 없었다. 사소한 불장난, 몇 번의 킬킬대는 웃음, 잠깐의 당혹감, 그리고 나서 처음 짓게 되는 낯설고 침착한 표정. 다시금 찌들린 집안 살림이 시작되고 첫아이가 태어난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한 후 잠깐 사람들 틈에 끼지만 여자들의 말은 처음부터 누구나 건성으로 들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여자들 자신도 점점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게 되고 혼자말이나 중얼거리게 된다. 나중엔 두 다리로 서는 게 불편해지고, 혈관 경련이 오고, 잠자면서 중얼대기 시작하고, 자궁암에 걸리고, 드디어 죽게 되면 예정된 섭리는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을의 여자 아이들이 많이들 하고 노는 말잇기 놀이도 <피곤하고 / 기진하고 / 병들고 / 죽고> 라는 식으로 여자의 삶을 나타냈다.
빨랫줄 위에 매달리는 물방울, 어둠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 앞으로 펄쩍 뛰어드는 두꺼비들, 모기들, 곤충들, 낮에도 날아다니는 나방들, 통나무 헛간의 널빤지들 속에 있는 벌레들과 지네들, 누구나 이런 것들에 길들여져야 했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했다. 그건 그녀가 아이였을 때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건 최초로 가진 소망이었고, 그 소망을 끊임없이 말하다 보니 급기야는 고정 관념이 되어버렸다.
이 시기 동안 나의 어머니는 스스로의 껍질에서 벗어나 제 힘으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범을 보이느라 나름대로 주어진 삶을 살았다. 그들은 보라는 듯이 적게 먹었고, 보라는 듯이 서로의 앞에서 침묵했으며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상기시키기 위해 고해 성사를 하러 갔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지쳐갔다. 자신을 설명하려는 작은 시도도 쓸데없는 말대꾸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될 수도 없었다. 그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어서 그녀에게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름대로 삶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었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은 쉽게 상처를 입었고 그런 마음을 화난 듯 과장된 위엄 뒤에 감추었지만 아주 사소한 일에도 곧 공포에 질린 채 무방비의 얼굴을 내비치곤 했다.
그녀는 존재했고 성장해 갔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집안일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는 생활 형식에서 우정이란 기껏해 봐야 서로 친숙한 것을 의미했을 뿐 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똑같은 걱정거리를 갖고 있다는 게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중략) 결국 개인에게서 인간적인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개성>이란 그저 욕설로나 알려져 있었다.
자유 의지에 따라 사는 것, 가령 평일에 산보를 간다든지, 두번째로 사랑에 빠진다든지, 여자가 혼자 술집에서 과일주를 마신다든지 하는 등의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괴물이나 하는 짓이었다. (중략)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의식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에는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개인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욕구를 조금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질문들은 모두 공허한 말이 되어버렸고 대답 또한 너무 상투적이어서 거기에 인간이 포함될 필요는 없었고 사물로도 족했다. (중략) 이렇게 위안을 주는 물신 앞에서 사람들은 죽어갔다.
오늘이 어제였고, 어제의 모든 것이 예전대로였다.
그녀는 신문을 읽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책을 더 좋아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자신의 삶의 여정과 비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지금까지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문학은 그녀에게 자신을 생각하도록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추위와 배고픔, 주위에서 비난을 받는 것은 모두 그녀의 책임이라고 느꼈다. 경멸했던 남편도 그녀가 느끼는 죄의식 가운데 하나였고 그가 그녀 없이 지내야 했을 때면 그를 진심으로 염려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는 간단히 죽어버렸을 것이다.
<난 집에 있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집 근처 어디론가 달려나가고 만다. (중략) 난 이제 시간이 있어도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쳐도 난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단다.>
사진을 찍을 때면 그녀는 이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마에 주름을 지우고 미소를 지으려고 양 뺨을 부풀렸지만 홍채의 한가운데서부터 풀려버린 동공을 지닌 두 눈은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을 내보였다.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진통제를 몽땅 입안에 털어놓고 거기에다 갖고 있는 신경안정제도 모두 먹어치웠다. 그녀는 생리대까지 끼운 위생 팬티에 팬티 두 개를 더 껴 입고, 머릿수건으로 턱을 단단히 묶고는 전기 담요도 켜지 않은 채 무릎까지 내려오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몸을 쭈욱 뻗고 양손을 가슴 위에 포갰다. 장례식을 어떻게 지내달라는 것만 씌어 있는 편지의 마지막 대목에 가서야 그녀는 <드디어 평화롭게 잠들게 되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썼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죽은 자를 보면서 그들이 점차로 자신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아직도 그 죽은 몸뚱이는 끔찍하게 버림받아서 사랑을 갈망하고 있는 듯 보였다.
-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매우 사실적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작가로서의 시선이 아들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의 어머니의 일생에 대한 날카로운 연민을 가진 성찰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하지 못할 말을 꾹 다물고 참고 있는 여인을 대신해서 누군가 서술해주는 느낌마저 든다.
가난과 사회적 압박 (말하여지지는 않지만 당연시 되어온) 속에서 여자로서의 일생은 무언가를 소망하기도 전에 이미 정하여져 버린 것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그녀는 생각할 줄 알았고, 소망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부딪혀 좌절했다. 그러나, 처음엔 그 좌절로서 죽음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죽음도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전까지는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 죽음이 그녀의 무언가에 대한 갈망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쩔 땐 사방이 막힌 벽에 서 있는 듯 느껴진다. 아무리 무엇을 어떻게 해봐도,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고,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할 듯 느껴질 때,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냥 계속 그대로 묶인 몸을 움찔거리기만 할 것인가?
책을 읽는 동안 가슴에 답답하고, 목까지 무엇인가 울컥 차올라 어쩔 줄 몰랐다. 눈을 돌려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눈 앞에 펼쳐놓은 듯 마음만 아프다. 인간의 삶이, 희생이, 그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 어찌해야 할까? 존재가 그냥 살아감으로 끝날 때. 언제나 말하듯이 그 살아감도 녹록치 않을 때. 존재의 존엄은, 그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답은 모르고, 마음만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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