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4일 수요일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2부 중

자연을 거울삼아 - 한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할 때,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꽤 정확한 묘사가 아닐까? 즉, 그가 높게 자란 황금빛 보리밭을 거닐기를 좋아한다는 것,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 저녁의 숲과 꽃의 빛깔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연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크고 윤기 있는 잎을 달고 있는 호두나무 아래에 있으면, 마치 가족 곁에 있는 듯한 느긋함을 느낀다는 것,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산 속에서 몇 개의 작은 외딴 호수를 발견하는 일인데 그것은 그에게 그 곳에서 고독 자체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라는 것, 또한 그는 가을이나 초겨울 저녁 창가에 가만히 다가와서 영혼이 없는 모든 소리를 벨벳 커튼처럼 삼켜버리는 저 안개 낀 여명의 잿빛 적막을 사랑한다라는 것, 아직 침식되지 않은 바위를 지금까지 남아 태고의 일을 이야기하려는 말 없는 증인처럼 느끼고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 왔다는 것, 끝으로 꿈틀거리는 뱀 껍질과 '맹수의 아름다움'을 지닌 바다와는 친숙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라는 식의 묘사다.

비평가들을 동정해서 - 곤충들이 찌르고 쏘는 것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다. 비평가들의 경우도 그와 똑같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피일 뿐, 우리의 고통은 아니다.

내 머리는 나 자신의 목 위에 제대로 얹혀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면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이 가련한 녀석만이 나 자신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은가를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가' 잘못된 머리가 얹혀진 원주 입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아름다워지려는 의지 속의 체념 - (중략)... 언젠가 위대한 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영혼의 문이 넓은 사람의 매혹을 거뒤들이기 위하여.

의도를 잊는다 -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대개 여행 목표가 잊혀진다. 거의 모든 직업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선택되고 시작되지만,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되고 만다. 의도를 잊는다는 것은 행해지고 있는 어리석은 행위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능. 집이 불탈 때 사람들은 먹는 일조차 잊어버린다. - 그러나 불이 꺼진 후에는 잿더미 위에 앉아 다시 먹는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가 오래도록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그대를 들여다볼지니.

긍지 있게 그리고 침착성을 가지고 살라. 언제나 초연하라. - (중략)... 용기, 통찰, 공감, 고독, 언제나 이 네가지 덕의 소유자가 되라.

자기의 나쁜 사정을 다른 사람 탓으로 하든, 자신의 탓으로 하든 - 전자는 사회주의자가 하는 짓이며, 후자는 그리스도교가 하는 짓이다. - 아무런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상승하는 최고의 삶은 누리기 위해, 퇴락하여 가는 삶의 가장 가차 없는 압박과 제거를 요구하는 모든 경우를 위해, 예를 들면 생식의 권리를 위해, 태어나는 권리를 위해, 사는 권리를 위해 의사에게 새로운 책임을 지우는 것,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을 때 자랑스럽게 죽는 것,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밝고 즐겁게 자식들과 다른 이들 속에서 이루어진 적당한 시기의 죽음, 그리하여 죽어가는 사람이 아직 현실적으로 생존하여 진정한 이별을 고하는 것, 그와 똑같이 자신이 달성하고 의욕을 가진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 인생의 총계가 가능한 죽음.

그러나 과연 내가 오늘날 읽히는 것만이라도 바라고 있는지 결국 누가 알겠는가? 시간의 이빨에 견뎌내는 사물을 창조한는 것, 형식에서 보더라도, 실질에서 보더라도 조그마한 불멸성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 나는 이 이하의 것을 내 자신에게 요구할 만큼 겸손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 니체의 글 속에 나는 그의 인간 안에 있는 '초인'에 대한 희망을 본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누구보다 숭고한 인생을 고귀하게 살았던 그, 그의 고독이 절정에 이르러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지경이 이르렀다해도, 그 순간에도 자신을 다지고 펜을 잡았을 것이다.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깊은 공감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다시 본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1부 중

개인은 자신이 심은 나무에서 손수 과일을 따려 하기 때문에 100년 동안이나 계속 똑같은 손질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다음 세대에게 그늘을 제공할 나무들을 더 이상 심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의 느린 화살 - 가장 고귀한 종류의 미는, 갑자기 매혹시키는 그런 미나, 태풍처럼 취하도록 덮쳐오는 미가 아니라, 인간이 거의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지니고 있는 듯한, 또한 꿈속에서 우연히 만나는 일도 있지만 겸손하게 우리 마음에 걸려 있다가 드디어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고, 우리의 눈을 눈물로, 우리의 마음을 동경으로 채우듯, 천천히 스며드는 듯한 미다. 우리는 미를 보고 무엇을 동경하게 되는가? 아름다움에는 많은 행복이 결부되어 있으리라고 우리는 공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오류다.

손으로 하는 일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 말하지 말라! ...(중략)... 그들은 자신에게 그것을 위한 시간을 부여했다....(중략)... 밤낮으로 이러한 것들의 수집자가 되어라. 이와 같은 다양한 수업으로 이삼십 년을 보내도록 하라. 그 다음 작업실에서 창작되는 것은 거리의 빛 속에 나가도 좋다.

물러선 것이지 뒤돌아간 것은 아니다. - (중략)... 단지 적당한 시기에 그 영역에서 떨어져 나오기만 하면 그는 더욱 급속히 전진할 것이다. 그의 발은 날개를 달고 있다. 그의 가슴은 더 조용히 숨을 길게, 참을성 있게 호흡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는 도약하는 데 충분한 여지를 얻기 위하여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그래서 이 후퇴에는 뭔가 무서운 것, 위협적인 것마저 있을 수 있다.

자유정신의 조심성 - (중략)... 그러나 이따금 그에게는 자유의 일요일이 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삶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까지도 조심스럽고 숨이 짧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식의 목적에 필요한 한에서만 애착과 맹목의 세계에 관계하려 하기 때문이다.

노년이 찾아오면 당신의 자연의 소리에, 세계 전체를 즐거움으로 지배하는 자연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가를 더욱더 깨닫게 된다. 노년에 그 정점을 갖는 이와 같은 인생은 지혜 속에도, 변함없는 정신적 기쁨의 부드러운 햇빛 속에도 정점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즉, 노년과 지혜를 당신은 인생의 한 산등성이에서 만난다. 자연이 그렇게 바랐던 것이다. 그 뒤 죽음의 안개가 다가오는 것은 때가 왔다는 것이며, 화를 낼 아무런 까닭도 없다. 빛을 향하여...... 당신의 마지막 움직임, 인식의 어떤 환호성...... 당신의 마지막 목소리.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직 종교개혁 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다. 어떻게 다를 수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의견이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한 몇 가지 수단을 더 이상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뛰어넘게 하며 우리가 높은 문화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지금도 종교개혁 시대의 방식으로 혐오와 분노의 폭발로 모든 의견을 공격하고 진압하는 사람은, 만약 다른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자기 적을 화형에 처했을 것이며, 만약 종교개혁의 적으로서 살고 있었다면 이단 심문의 모든 수단에 호소하였으리라는 것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이단 심문은 당시로서는 합리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온 영역에 선포되어야 했던 일반적 계엄 상태일 뿐이며, 모든 계엄 상태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방랑자 - 아주 조금이나마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밖에 느낄 수가 없다. 비록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가는' 여행자로서는 아니더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그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잘 관망하고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개개의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자신 속에 변화와 무상함을 기뻐하는, 뭔가 방랑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인간에게는, 피로할 때 휴식을 가져다 줄 도시의 문이 닫혀져 있는 것을 보게 될 심술궂은 밤들이 찾아올 것이다. 아마 거기에는 동방에서처럼 사막이 문까지 이어지고, 맹수가 어떤 때는 멀리, 어떤 때는 가까이서 울부짖고, 강풍이 휘몰아치고, 강도가 그의 수레를 끄는 짐승을 훔쳐 갈지도 모른다. 그때 그에게는 아마 사막위에 있는 또다른 사막과 같은 처참한 그의 마음은 방랑에 지쳐버린다. 그리고 아침 해가 분노의 신처럼 불타며 떠오르고, 거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는 여기에 살고 있는 자의 얼굴에서 아마도 문 밖에서보다 더 많은 사막.더러움.기만.불안정을 본다. 그리고 낮은 밤보다 심할 것이다. 이런 일이 언젠가 방랑자의 신변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보상으로 다른 지방과 다른 날들의 환희에 찬 아침이 온다. 그때 그는 희미한 빛 속에서 이미 뮤즈의 무리가 자기 곁에서 춤추며 사막의 안개 속을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뒤 그가 오전의 영혼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조용히 나무 아래를 거닐때 그 가지와 무성한 잎들 사이로 좋고 밝은 것이 그에게 던져진다. 그것은 산과 숲 그리고 고독 속에 살고 있고 그와 마찬가지로 또는 쾌활한 또는 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방랑자와 철학자인 그 모든 자유정신들의 선물이다. 새벽녘의 비밀에서 태어나 그들은 왜 열 번째와 열두 번째를 치는 종소리 사이의 낮이 이토록 순수하고 환하고 거룩하고 시원스러운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생각에 잠긴다. 그들은 '오전의 철학'을 찾고 있다.

-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처음 만났던 것은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집의 책장에 전집 중, 제목이 너무도 멋있어서 두꺼운 책을 꺼내 읽으려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린 나에게는 역부족이었었다. 나는 막연하게 니체의 반기독교적인 문장에 매료되어 그를 동경해왔던 것 같다. 니체의 글은 철학이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의 아포리즘은 반어적이거나 많은 경우 다양한 변장을 하고 나타나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단순한 문장만으로는 그의 철학을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 그의 철학에 나치에 이용되고, 단지 반신론자로서의 철학으로 오인되어 왔던 것 같다. 니체를 읽으려면 그의 저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에 칼날을 세우고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의 철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바이마르의 석양을 바라보는 죽기 전 미친 니체의 모습을 생각하며 울고 말았다. 그가 말한대로,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 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대들은 일체의 것의 회귀를 원한 것이다." 순간으로 영원을 이야기한 치열한 '자유정신'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카뮈의 '전락'중

수상한 존재가 그만 되려거든 그저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지요.

인간들의 상상력이란 왜 그렇게도 빈약하지요? 사람은 꼭 어떤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들 하거든요. 그렇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가질 않는 거예요. 그러니 자진해서 목숨을 끊어 남들이 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달라고 자신을 희생해서 무엇하겠는가 말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저들은 내 죽음에 대해서 어리석거나 천박한 이유를 붙이면서 이용하려고 들 겁니다. 이것 보세요, 선생. 결국 순교자는 잊혀져버리든가 비웃음을 사든가 아니면, 이용당하든가 어느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어요. 남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란다는 건 결단코 안 될 얘깁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던 원의 고리가 깨어져버리면서 저들은 재판소에서 그러듯이 자기들끼리 한 줄로 자리를 잡는 것이었어요. 무언가 심판받아야 할 것이 내게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나는, 요컨대 저들에게는 남을 심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소명의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성공한 낯짝은 남의 눈에 잘못 띄게 되면 미련한 당나귀라도 분통이 커지게 만들 지경이지요.

나는 능력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시민 정신이 투철한, 분개한, 너그러운, 협동적인, 모범적인 사람 등의 역을 연출했어요. 그만 해두죠. 이미 선생께서도 이해하셨겠지만, 요컨대 나는 저기 있으면서도 딴 데 가고 없는 저 네덜란드인들과 같았던 겁니다. 즉 내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나는 사실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지내면서도 그들과 이해관계를 함께하지 않는 터인지라 나는 내가 개입하여 하고 있는 일을 진지하게 믿고 있질 않았어요. 남들이 내 직업, 가족, 혹은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있어서 내게 기대하는 바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정중하고 또 동시에 무사태평했지만, 그떄마다 어쩐지 마음은 딴 데 있는 것만 같은 심정이서서 결국은 그 때문에 만사가 시들해져버리는 것이었어요.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어떤 이중심리 상태 속에서 산 셈이어서 내가 한 가장 심각한 행동은 흔히 내가 책임감을 가장 안 느끼면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 진실이란 건 말이죠 견딜 수 없을 만틈 지겨운 것이랍니다.

대답을 미리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똑같은 의문들과 대면한 채 끊임없이 그 누구에겐가, 아니 그 누구에게라 것도 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 전직 변호사 클라망스가 누군게에가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형식의 소설 '전락'에서 카뮈가 꼬집어 내는 인간의 작은 부분들, 수치스러운 부분이지만 인간이기에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그러한 부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그러나 용서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부분들을 읽어내려갔다. 그러기에 주인공 역시 그 자신을 '재판관 겸 참회자'라고 부르며, 신의 존재를 무시한다하더라도, 인간 자체로 충분히 죄인이 될 수 있는, 또한, 그 부도덕함을 인지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할만한 존재 자체를 보여준 듯하다. -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서문 중 - 자유의지에 대하여

그래서 나는 일찍이 필요에 의해 '자유정신들'을 고안해 냈다. '인간적이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우울하고도 용감한 책을 그 자유 정신들에 바친다.

육체를 지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라리라는 것을 적어도 나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다.

감정이나 공감은 깊이를 더해가고 이슬 섞인 온갖 종류의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자기를 지탱하게 하기 위해서 더 높고, 더 위대한 것, 더 풍부한 것을 남몰래 조금씩 끊임없이 부수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을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대는 '위계'의 문제를, 그리고 어떻게 권력과 권리와 원근법의 넓이가 서로 높아져가는가를 보아야 했다. 그대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젠 그만하자, 자유 정신으로 어떠한 '그대는 해야만 한다'에 자신이 복종해 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이 '가능한지', 비로소 무엇을 '해도 좋은지'를 이제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라 불리는 저 내면 세계의 모험가며 세계 항해자로서, 이와 똑같이 '인간'이라 불리는 모든 '더 고양되려는 자'나, '이미 겹쳐 쌓기를 내포하고 있는 자'의 측량사로서, 곳곳에 돌진하고, 공포심도 없이 아무것도 조소하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맛보고, 모든 것을 우연적인 것에서부터 정화하면서, 말하자면 가려내면서.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가 가장 다양하고 가장 모순된 곤궁과 행복의 여러 상태를 영혼과 육체로 경험해야만 했는가를 비로소 이해한다.

이 책은 무거운 의무의 압박이 없는 사람들에게 알맞다. 또한 이 책은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을 기대하며 과잉을 요구한다. 시간, 하늘이나 마음의 명쾌함, 가장 대담한 의미에서의 '한가함'등의 과잉을.......


우리는 모든 사물을 인간의 두뇌를 통해 관찰하는 것인 만큼, 이 머리를 잘라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머리를 베어 버린다며, 그때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마치 강한 신앙이 그 신앙의 강함을 증명하기는 하지만, 믿게 된 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보다 잘 인식하기 위해서만 계속 살아갈 정도로 삶의 일상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많은 것을, 그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질투나 불만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좀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풍습.법도.사물의 관습적 평가 등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는 이 경지의 즐거움을 전할 것이며, 아마도 그것 이외는 전해야 할 어떤것도 '갖지'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하나의 결여감, 오히려 체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보다 많은 것을 원한다면, 그는 호의적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자신의 형제, 즉, 행동의 자유인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아마 약간의 조소도 띨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사정이 있으므로.

- 니체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대한 정의나 묘사를 읽음으로서 안도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현대에서 인간의 자신이 속한 조직, 자신의 역할, 자신의 직업 등으로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더이상 인간으로서 어떤 성향을 가진, 생각을 가진, 기품을 가진, 덕을 가진 인간으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니체가 일찍이 깨달았듯이 전자의 인간이 후자의 인간으로서의 성향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라는 것, 또한, 후자로서의 인간적 성향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매우 어려우며 어떠한 포기 내지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니체가 마지막 문장에 언급한 듯이, 그 '자유'에 '특별한 사정', 나의 언어로 '전자로서의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맛본 불만족과 좌절, 체념의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동감한다.-

2011년 6월 30일 목요일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중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Epicuros 는 기원전 311년 처음 미틸레네 학화를 세운 다음, 람프사코스에 이어, 307년 이후 아테네에서 학파를 세웠고, 기원전 271년 또는 270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에피쿠로스는 힘든 청년 시절을 보낸 이후에는 아테네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단지 건강이 나빠서 고생했을 따름이다. 그에게는 집 한 채와 분명히 집과 따로 떨어져 있는 정원이 하나 있었고, 그 정원에서 가르쳤다. 처음에 학파의 회원은 에피쿠로스의 형제 세 사람을 비롯한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으나, 아테네에서 철학을 배우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그들의 자식들, 노예들, 헤타이라들이 들어오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커졌다. 에피쿠로스의 적들이 헤타이라의 입회를 빌미로 이따금 추문을 퍼뜨렸는데, 분명히 이는 공평치 않은 처사였다. 에피쿠로스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우정을 맺는 아주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인물로, 공동체에 소속된 회원들의 어린아이들에게도 상냥하고 유쾌한 편지를 쓰곤 했다. 그는 감정을 표현할 때 고대 철학자들이 나타내리라 예상되는 점잔 빼는 행동과 자제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의 편지들은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었다.

"나는 빵과 물로 살 때 몸이 쾌락으로 충만하며, 내가 사치스러운 쾌락에 침을 뱉는 까닭은 사치스러운 쾌락 자체가 나쁜 탓이 아니라 그것에 뛰따르는 불편한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한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시달렸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법을 터득했다. 인간이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스토아 학파가 아니라 바로 에피쿠로스였다. 

부와 명예 같은 욕망이 무익하고 헛된 까닭은 만족할 수 있는 때에도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어 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최고선은 사려이며, 사려는 심지어 철학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어떤 형태의 문화이든 다 피하라"

에피쿠로스의 의견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쾌락 가운데 제일 안전한 것은 우정이다.

신들이 우리 인간 세상의 정세를 걱정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자유의지가 있으며, 우리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운명의 주인이 된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면 죽음도 나쁜 것은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운문으로 쓴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다. (이하)

인간 생명이 땅에 엎드려
종교의 잔혹성 아래
무참히 짓밟혀 처참하게 부서지고,
잠시 종교가 저 위 하늘나라에서 얼굴을 내밀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 인간을 짓누를 때,
처음으로 한 그리스인이 용감히
종교에 맞서 도덕의 눈을 치켜떴네.
분연히 일어나 종교에 도전한 최초의 인간이었네.
신들에 대한 숱한 이야기에도, 번갯불에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네.
오, 모든 것이 그의 영혼 속 대담한 용기를 더욱 북돋아
자연의 굳게 잠기 문을 헤치고 들어간
최초의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네.
그리하여 정신의 강렬한 기운이 널리 퍼져,
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세계는 불타는 성벽을 넘어
저 멀리 여행을 떠나
정신과 영혼이 아득히 멀리 넓고도 넓게
측량할 길 없는 우주 구석구석까지 미쳤네.
그때 이래 우리에게 정복자로 개선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지식을
둘 다 가져와서,
어떤 원리에 근거해 살물이 제각각 제한된 힘을 갖고
깊숙한 곳에 숨은 경계석을 갖게 되는지 가르쳤네.
그리하여 이제 종교는 인간의 발 아래 내던져져 짓밟히게 되었다.
그 사람의 승리가 우리를 하늘 높이 드높이네.

에피쿠로스 복음은 에피쿠로스 사후 6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상의 삶이 주는 비참한 고통 때문에 더욱 압박을 받게 될수록, 철학과 종교에서 더욱 강력한 처방을 계속 요구했다.


- 내가 대학때 배운 철학강의에서 '에피쿠로스 = 쾌락주의, 현실의 쾌락을 중요시한다.'라고만 배우고는 끝이었다. 이 책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기전까지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어감으로 인해 마치 에피쿠로스 학파가 신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학파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에피쿠로스는 현실의 절제와 만족에 촛점을 두고 있다. 전체의 철학사에 걸쳐 종교에 혹은 신, 사후, 윤회 등에 의존하지 않고, 현세에 중심을 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쾌락주의라는 그릇된 어감의 단어보다는 현실주의나 인본주의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기원전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기원전 이후 이러한 철학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신이나 절대자'보다는 '인간'을, '내세'보다는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며 절제하는 삶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설파한 에피쿠로스의 용기와 지혜가 존경스럽다.

2011년 5월 30일 월요일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중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또 만약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이끌어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생생한 희망과 두려움 속에서 불확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는 누구나 고통을 느끼지만, 만약 마음이 편해지도록 위로나 주는 동화에 의지해 살고 싶지 않다면 그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을 망각해서도 안 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답변을 찾았다고 자신을 설득해도 안 된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 연구자를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 처음 이 두꺼운 책을 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읽을수록 빠져들게 되는 책. 이제 겨우 고대에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을 지났다. 수 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놀라우리만큼 많다는 점이 행복하다. 인간은 시대를 초월해서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 대한 안도. 과학과 철학과 신학의 출발점이 거의 같다는 점에 대한 기분좋은 느낌. (현대에 있어 지나치게 전공을 가르고, 마치 과학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같은 분야에서도 서로의 분야를 자로 긋듯이 가르는 것이 팽배한 지금, 그것이 못마땅한 나에게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준 듯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고, 시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생각들을 읽어나가는 재미.-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주제 사라미구의 "돌뗏목"중

옳은 것이 틀린 것을 만들어 내고, 틀린 것이 옳은 것을 낳지. 괴로운 사람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로군. 이봐, 슬퍼하는 친구, 위로라는 건 없어, 인간은 위로할 수 없는 존재거든.
어쩌면 주제 아나이수의 이런 의견이 옳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위로받지도 않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동, 어는 모로 보나 무의미하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행동을 보면, 인간이 언젠가는 인간의 어깨에 기대 울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이미 너무 늦었을 때일 수도 있고, 이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일 수도 있지만.

(중략)

삶을 바꾸는 데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이 생각하고, 이것저것 재보고 망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곤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우리는 원형의 운동을 하며 시간의 행로를 따라 움직인다. 더 이상 어쩔 힘이 없는 먼지 구름처럼, 낙엽처럼, 파편처럼. 차라리 허리케인이 부는 땅에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을. 그러나 어느 때는 딱 한마디면 된다. 가서 바위가 지나가는 것을 봅시다.

(중략)

하느님과 저 아들의 개가 원한다면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날 것이니.

(중략)

그렇게까지 해서 잠깐 더 사는니 죽는 게 낫다.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기다리면서. 멀리 고요한 산, 장밋빛 아침, 뜨거운 오후의 짙푸른색, 별이 뜬 하늘을 응시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 때가 찾아와도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겠어.

- 사라미구의 환상적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느날 이유없이 땅이 갈라져 이베리아 반도가 바다를 표류하게 되었을 때, 과학도 종교도 아무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을 때,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욕구중에 하나인 확실성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라미구는 특유의 해학적 필치로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을 날카롭게 비꼰다. 이 극한적 상황,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상황 (실제로 물리적 피해가 아무런 것도 없는 상황에 확실성만 결핍된 상황)에 4명의 이상한 우연의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삶에 비할 바 없는 놀라운 여행을 한다. 그들의 여행은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조용하고 여유롭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멈춘 이 돌뗏목에서 이 4명만이 진정한 삶을 살았다. 결국 나머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 생도 이 끝없는 외부의 불확실성 속에 그냥 우왕좌왕하는 것만이 아닐까? 사라미구가 말한대로 "주기의 순환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은 사람뿐이다. 사람에게는 한번뿐 그 이상은 없다." 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