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0일 금요일

밀란 쿤데라의 '농담' 중

여러 해 동안 나를 내 고향으로 이끌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 도시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벌써 15년 전부터 다른 곳에 살고 있었고, 이곳에는 이제 아는 사람도 친구도 몇 없었던 것이다(남아 있는 친구도 피하고 싶다). 어머니도 내가 돌보지 않는 낯선 무덤 속에 묻혀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왜 그토록 자유가 필요한 거죠?" 나는 물었다. - "그러면 당신은요?" 그가 말했다.

그와 논쟁을 하면, 나는 정말 누구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진리를 내게 납득시키려고 애쓸 수 있는 오랜 친구가 옆에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특별히 구체적인 것은 없고, 다만 "너는 그렇게 행동하니까"라는 것이었다 -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데?" - "언제나 묘하게 웃쟎아" - "그래서? 난 즐거움을 표현한는 거야!" - "아니야, 너는 혼자서만 마음에 담아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웃어"

나는 다른 사람이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고 혁명 자체가, 시대 정신이 틀릴 수도 있으며, 나 하나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미소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곧 내 안에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하고 싶다.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 그때의 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신도들에게 근원적이고도 영원한 죄인임을 상기시키는 기독교의 저 막강한 힘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나는(우리 모두가 그랬다) 혁명과 당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래서 장난으로 썼다 해서 내 엽서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길들여지게 되었으며, 머릿속에서 자아 비판의 검토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인격 박탈은 처음 얼마간은 마치 안개 속에서처럼 분간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중략) 시간이 가면서 안개는 천천히 걷혀갔고, 그와 함께 그런 비인격화의 어스름 속에서도 사람들의 인간적인 요소가 조금씩 눈에 띄게 되었다.

그 어떤 병사도 이 정치적인 행동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저 지배자 앞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무의미한 몸짓으로만 여겼다.
나는 그렇게 해서 결국은 나의 저항이 헛된 것이며, 내가 다르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므로 이제 오로지 나에게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삶의 길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었다.

그랬다. 모든 끈이 끊어져 있었다.
모두 끝났다. (중략) 내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 그것을 나는 이전의 그 어는 때보다 더 내밀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았던 시간, 일로 사랑으로 온갖 노력들로 탈바꿈된 그런 시간, 내가 하는 일들 뒤에 살그머니 숨은 채 얌전히 있어서 그저 무심코 받아들였던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옷을 다 벗고, 그 자체로, 자신 본래의 진짜 모습으로 나에게 오고 있었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어(이제 나는 순수한 시간, 순수하게 텅 빈 시간을 살고 있었으므로), 내가 단 한순간도 그것을 망각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무게를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로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날 저녁부터 내 안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내 안에 다시 누군가가 살게 된 것이었다. 나의 내면은 마치 방처럼 휘 청소가 되고 어떤 사람이 거기에 살게 되었다.

그녀의 삶 속에서는 세계동포주의와 국제주의, 철저한 경계와 계급 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정의에 대한 논쟁들, 전략과 전술이 동반된 정치,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일들(너무도 전적으로 시대의 것이어서 곧 그 용어조차도 뜻모를 소리가 되어버릴 일들)을 하다가 나는 파멸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바로 그 일들에 계속 집착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해 있었다. (중략)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시베리아에서 여섯 달이 지난 후)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리워져 있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잊혀져 있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서 자꾸만 그 강당, 백 명이 손을 들어 내 삶의 파탄을 결정했던 그 강당이 떠오르곤 했던 것이다. 그 백 명의 사람들은 언젠가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을 나를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중략) 추방이 아니라 교수형이 제안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랬다고 해도 모두 손을 들었으리라는 결론이 나올 뿐 다른 결론에 이르러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중략) 그러니 인정하시라. 당신을 유배보내거나 사형시킬 태세가 되어 있는 이들과 같이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그들과 친해지기가, 그들을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나는 혼란스러워하면 이 역할 저 역할 왔다갔다하던 끝에, 결국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어쩔 줄 모르다가 붙잡힌 것이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중략)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그리고 길을 따라 보이는 풀들은 너무도 푸르러서 손으로 쓰다듬어보지 않을 수 없다.

폭신한 풀로 덮인 땅이 등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등으로 땅을 더듬어본다. 등올 땅을 꽉 받치고, 나는 땅에게 너무 무거울까봐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내 위에 온 무게를 다 싣고 기대라고 말한다.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이 떠나버린 그 처녀성의 화관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우리 삶이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데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지금 내가 기독교인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믿지 않는 이들과 똑같이 살고 있는 가짜 기독교인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인이란 말은 다르게 산다는 것을 뜻하는데 말이다.

그녀는 아들 녀석과 가족의 미래를 생각했다. (중략) 그 끊임없는 걱정, 내일을 위한 그리고 다음해를 위한 걱정, 하루하루 그리고 앞으로 올 세월들에 대한 걱정을 보면선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동으로 앞으로 움직여가는 보도(시간)와 그 위에서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나)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런데 그 보도는 나보다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내가 달려가는 방향과 반대편에 있는 목적지로 서서히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중략)
과거에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중략)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그렇다,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넥이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 이 책은 몇 사람의 입장, 주인공 루드빅과 주변 인물들 (헬레나, 야로슬라브, 코스트카)의 목소리로 이야기 되고 있다. 무심함의 매력과 조소어린 농담을 즐겨하던 루드빅은 별 것 아니 한 사건(농담처럼 보낸 엽서)으로 급우들에 의해 트로츠카주의자로 몰려 정치범으로 복역하게 된다. 5년간의 탄광 및 감옥 생활 후, 루드빅은 다시 재기에 성공하나 그는 그 과거의 시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의 매력과  농담은 외적으로 여전히 보여지나 그의 내면은 매우 불안정하며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루드빅의 복수는 제마넥의 부인인 헬레나와 간통을 통해 제마넥에게 충격을 주려하나 (제마넥은 자신의 파멸을 주도했던 인물), 제마넥과 헬레나는 이미 헤어진 것과 진배없었고, 세월이 흘러 제마넥은 과거의 생각을 가진 제마넥이 아님을 발견하고 루드빅은 충격과 패배감에 휩싸인다. 결국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루드빅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농담'처럼 변해버린 상황. 그러나, 자신의 신조대로 열심히 살았던 친구 야로슬라브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던 헬레나의 인생들 역시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농담'처럼 되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쿤데라는 매우 중요한 시선을 이 책에 담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나 시대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역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맹목으로 따르는 행위, 특히 정신적으로 아직
 성숙되지 않은 젊은이들의 역사적 행위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또한, 역사 속의 개인,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농담처럼 되어버린 주인공과 주번인물들의 인생속에서 역사에 대한 어떠한 태도나 자세도 시대에 따라서는 비극적 웃음거리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존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 그 답은 없다. 그러나, 의문을 던져볼 필요는 있다는 것. 우리가 생각없이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관, 삶의 방식들을 시간의 자를 놓고 바라볼 필요는 절대적으로 있다는 것!

2012년 3월 29일 목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3부 대타존재, 제2장/제3장 -

제2장 몸

나의 몸을 '살아간다.'

하나의 몸을 가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의 근거로 있는 것이고, 자기 존재의 근거로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나의 몸'인 것은' 내가 존재하는 한에서이다. 내가 나의 몸으로 '있지 않는 것은' 내가 나의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는 한에서이다. 내가 나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의 무화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의 몸을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벗어나는 것은, 끊임없이 내가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이며,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자기를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어 하고 있는 이 병든 몸마저도,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에 의해, 나는 그것을 몸에 떠맡은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시도를 향해 병든 몸을 뛰어넘는다. 나는 병든 몸을 나의 존재에서의 필연적인 장애가 되게 한다. 내가 병든 나를 선택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내가 어떤 방법으로 나의 병든 몸을 구성할지 ('견딜 수 없는 것'으로서, '굴욕적인 것'으로서, '숨겨야 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으로서, '자존심의 대상'으로서, '내 실패의 핑계' 등으로서 구성할지) 선택하지 않는 한, 나는 병든 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파악한 몸은, 바로 '하나의 선택이 그곳에 존재한다'고 하는 필연성, 다시 말해 '나는 "단번에 모든 선택"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필연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유한성의 내 자유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선택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세계에 대한 순수의식으로서의 의식을 조건짓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몸은 의식을 바로 그 자유 자체 속에서도 가능하게 한다.

오히려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타동사로 사용하여, '의식은 그 몸을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몸에 대한 의식은 측면적이고 회고적이다.

만일 내가 아무리 독서에 열중해 있더라도, 나는 세계를 존재에 이르게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독서는 자신의 본성 자체 속에 하나의 필연적인 배경으로서 세계의 존재를 내포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내가 세계에 대한 의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내가 세계를 '배경으로서'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색깔과 운동을 놓치지 않는다. 온갖 소리가 끊임없이 나에게 들려온다. 다만, 그런 것들은 나의 독서 배경을 이루고 있는 무차별적인 전체 속에 사라지고 있다.

내가 아무리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떨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맛, '나의' 그 무미건조한 맛을 나의 대자에 의해 끊임없이 파악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른 곳에서 <구토>라는 이름 아래 써던 바로 그것이다.



제3장 타자와의 구체적인 관계

타자는 나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다.' 그런 자로서 타자는 내 존재의 비밀을 쥐고 있다. 타자는 내가 '무엇인지'[내가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 존재의 깊은 의미는 나의 밖에 있고, 하나의 부재 속에 갇혀 있다. 타자는 나에 대해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1) 그래서 '내가 그것으로 있으면서 그것에 근거를 부여할 수 없는 즉자'로부터 내가 도피하는 한에서, 밖으로부터 나에게 부여된느 이 존재를 부정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번에는 내 쪽에서 타자에게 대상 존재를 부여하기 위해 타자 쪽으로 다시 돌아설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자의 대상 존재는 타자에게 있어서 나의 대상성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런 반면, 자유로서의 타자가 나의 즉자 존재의 근거인 한에서, 나는 타자에게서 자유라고 하는 그 성격을 없애지 않은 채, 그 자유를 회복하고, 그 자유를 빼앗으려고 시도할 수 있다. 사실, 만일 내가 나의 즉자존재의 근거인 자유를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나 자신의 근거가 될 것이다. 한쪽은, 타자의 초월을 초월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반대로 타자로부터 초월이라고 하는 그 성격을 없애지 않고 그 초월을 내 안에 삼켜버리는 것이다. (중략) 나는 내 존재의 근원 자체에 있어서 타자를 대상화하려고 하는 기투, 또는 타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기투이다.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런 두 가지 시도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 한쪽은 다른 쪽의 죽음이다.  (중략) 우리는 우선 대자가 타자의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할 때의 태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1. 타자에 대한 첫번째 태도 - 사랑.언어.마조히즘

의식이라고 하는 자격에 있어서, 타자는 나에 대해, 나에게서 나의 존재를 훔친 자인 동시에,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거기에 존재하게' 하는 자이다. (중략) 즉 나는 내 대타-존재의 책임자이기는 하지만 내 대타-존재의 근거는 아니다.

분명히 사랑은 '의식'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이는 '소유'라는 이 관념은, (중략) 그러나 거기에는 바로 어떤 종류의 아유화(appropriation)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경우 우리는 자유로서의 한에서의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타인 속에서 쉰다. (중략) 나는 욕망되기를 원한다. (중략) 자신이 이미 하나의 '대상' 이외에, 즉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즉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를 시도한다. 


사랑받고 싶다는 나의 요구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사실적 한계인 이 사실성, 결국 마지막에는 '그 자신의' 사실성이 될 이 사실성은 '나의' 사실성이다. (중략) 그러므로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은 타인을 그 사실성에 감염시키는 일이며, 복종하고 자기를 구속하는 하나의 자유[타자의 자유]의 조건으로서 끊임없이 우리를 재창조하도록 타인을 강제하려고 하는 일이다. 그것은 자유가 사실에 근거를 부여하고자 하는 동시에, 사실이 자유에 대해 우위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많일 이 결과가 이룩될 수 있다면, 그 결과로서 가장 먼저 나는 '타인'의 의식 속에서 '안전하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상대는 '시선'이다.

유혹한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 밑에 나를 두는 일이며, 타자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일이다. 유혹한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 '보이게 되는' 위험을 범하는 일이고, 나의 대상존재에 의해, 또 나의 대상존재 안에서,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는 나의 '존재'를 잃고, 나는 나 자신의 책임에, 나 자신의 존재 가능에 맡겨진다.

타인의 타성을 그에게 보존하게 한 채로 이 타인을 흡수하려는 대신, 나는, 나를 타자가 흡수하도록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주관성에서 탈출하고자 타인의 주관성 속에 자기를 잃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 시도는 구체적인 면에서는 '마조히스트'적인 태도로 나타날 것이다.

2. 타자에 대한 두 번째 태도 - 무관심.욕망.증오.사디즘

타인의 절대적인 주관성을 함께 무시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안심한다. 나는 '뻔뻔스러워'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타인의 시선이 나의 가능성들이나 나의 몸을 응고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중략)
세상에는 '타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이 - 순간적인 무서운 번뜩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 죽어가는 인간이 있다. 그러나 완전히 그런 상태에 빠져 있을 때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불충분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이 없으면, (중략) 나는 '태어났는데'도 나를 존재시키는 배려를 나 혼자에게밖에 맡겨둘 수 없다고 하는 이 사실을, 완전히 알몸 그대로 파악하게 된다.

타인의 '대아-대상성'을 통해 '타인'의 자유로운 주관성을 빼앗으려 하는 하나의 근원적인 시도는 '성적 욕망'이다.

나는 하나의 인간존재를 원하는 것이지, 한 마리의 곤충이나 연체동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내가 인간존재를 원하는 것은, 그 인간존재가, 그리고 내가, 세계 속에, 상황 속에 존재하는 한에서이며, 그 인간존재가 나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타인'이고, 또 내가 그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타인'인 한에서이다.

사디스트가 두 손으로 반죽하고, 자신의 주먹 아래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이다.

3. '함께 있는 존재'(공동존재)와 '우리'

'우리'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때 군중들 속에서 사랑의 근원적인 기도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 이 사람이 제삼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삼자가 집단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희생함으로써 집단 전체를 그 대상존재 자체 속에서 구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적인 '우리'는 - '대상-우리'로서의 한에서 - 이를 수 없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각각의 개별적인 의식에 제시된다. 그런데도 각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원둘레를 계속 확대해 감으로써 인류적인 '우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류적인 '우리'는 하나의 공허한 개념에 머물며, 우리라고 하는 말의 통상적인 사용을 가능한 한 확장한 것에 대한 하나의 단순한 지시이다.

이 가능성들의 이런 기투는 세계의 형상을 정적으로 규정한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도는 순간마다 세계를 변화시킨다.

- 샤르트르의 '몸'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유용하다. 그는 '의식이 몸을 살아간다'라는 것으로 존재를 정의함으로써, 의식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대부분 사람들은 몸에 의해 많은 생각들이 지배받는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우리가 의식으로서 인정하기 전까지 이 몸에 의해 발생되는 많은 것들은 대자에게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게 몸에 대한 주도권을 넘기고, 많은 부분에서의 몸에 대한 진정한 통제가 가능해진다.
또한,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의 샤르트르의 고찰은 어느정도 시니컬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을 많은 부분 반영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포장지 아래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을 서로 쟁취하려는 혹은 자유로운 의식을 타인에게 홀라당 주어버리는 (타인의 의식에 자리를 얻기 위해) 행위는 말하여지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존재는 홀로 존재의 증명일 수 없으므로 타인의 의식에 자리를 차지하여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암암리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쟁탈/헌납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더 커 갈 것이다. (특히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근거가 전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는 나에 대한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나에 대한 타인의 판단의 내 존재의 의미가 되므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존재근거를 집단적 목표에서 찾으려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 소위 이념적 집단 행동들이 많은 경우 이러한 존재의 약점에 근거하고 있다. 개인에게 존재를 던질 정도로 중요했던 이념적 집단 행동이 세월이 지나면, 아무 의미도 없이 퇴색되어 버리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스스로 존재를 세우고, 타인의 자유로운 의식에서 진정으로 인정받을 때, 진정한 존재의 근거를 찾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


2012년 3월 28일 수요일

'마지막 사진 한 장' 중, 베아테 라코타 글, 발터 셀스 사진

우리는 몇 주 동안 그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카메라와 녹음기에 담으며 죽음을 체험하고 싶었다. 예전엔 누구나 어릴 때부터 죽은 식구들의 얼굴을 보며 자랐다. 죽음이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엔 고통과 죽음을 쉽게 외면할 수 있다. 죽음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죽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희미해져 버렸다. 그래서 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략)
호스피스 병원은 이런 감정을 추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죽음을 볼 수는 있다. 양로원, 중환자실, 사고 현장...... 하지만 그런 곳에서의 죽음은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거의 일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호스피스 병원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현대 의학의 덕분이긴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최대한 고통없이, 가능한 한 맑은 의식 속에서 지낼 수 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작별을 고해야 하며, 삶을 정리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이 이제 곧 끝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혹은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무엇도 위안이 되지 않는 사람들, 죽음과 무에 대한 두려움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우리는 인간이 참으로 모순된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살날이 얼마 남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실제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 본 순간에 솟구쳐 오른 감정의 힘은 예상치 못한 변화나 결심을 불러왔다. 한 노숙자는 호스피스 병원에 와서 술과 담배를 끊었다. 매일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고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한 후에야 그는 죽을 수 있었다.

매일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살인이나 전쟁, 자연재해에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너무도 자세하게 기록한 기사를 읽는다. 하지만 일상적인, 자연적인 죽음의 기사나 사진은 보기가 아주 힘들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종말을 너무 일찍 떠올리게 될까 봐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에서 눈길을 돌리는 것보다는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오히려 죽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행동이 아닐까?


하인츠 뮐러 (71세)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이 아닌 것처럼. 개와 작별을 고하는 것이 그에겐 너무 힘겹다.


에델가르트 클라바이 (67세)
죽음은 아주 힘들 일이지. 빈말이 아니야. 죽음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냥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지. 정한 대로 되는 거야. 생명을 받았고, 그 생명을 살아야 했고, 이제 다시 반납하는 거지. 태어나 강보에 싸였다가 또 다른 덮개에 싸여 돌아가는 거야.

그래, 살아보지 못한 삶. 나 역시 그런 게 있어.

내가 죽은 후에도 누군가 내 눈동자에 담긴 그리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죽음은 졸업시험이야. 누구나 혼자서 치러야 해. 내 인생이 그러했듯 아주 조용히, 검소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인간은 죽은 순간까지 인간을 그리워하지. 사람의 체온이 필요해. 그렇지 않아?

이상하게 겁이 나. 너무 너무 무서워. 이렇게 신앙심이 깊은데도 말이야. 예전부터 나는 겁이 많았지. 통증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결국 내 꼴이 이렇잖아. 그게 너무 슬퍼.


클라라 베렌스 (83세)
식욕이 떨어지면 끝난 거야.

죽음은 두렵지 않아. 어떤 상상을 하느냐고? 그냥 사라지는 거야.

그래, 다시 태어난다면 다른 인생을 살 거야.
하지만 또 한 번의 삶이 있을까? 난 없다고 생각해.


미하엘 라우어만 (56세)
그는 정말 멋지게 살았다.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그러느라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일도 두렵지 않다.


로스비타 파홀레크 (47세)
내세울 만한 게 없는 인생이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살고 싶지 않았고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미치도록 살고 싶어졌다.

"다들 영원히 살 것처럼 바쁘게 오가네요."


게르다 슈트레히 (68세)
딸은 어머니의 손을 쓰다듬으며 울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딸을 외면한다.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미하엘 푀게 (50세)
건강할 때 그는 한 번도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종양이 그의 언어능력을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코르티손이 도움이 된다면 의사의 판단이 옳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에 가까이 다가가는 조용한 의학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그런 의료진이 필요하다.


바르바라 그뢰네 (51세)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어요. 그게 너무 슬퍼요. 늘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쓰러질 때까지 죽어라 일만 했어요. 1년에 일주일 이상 쉬어본 적이 없었어요. 치료 센터가 웬만큼 자리를 잡아서 이제 좀 여유를 갖고 여행을 다니려던 참이었죠. 가르다 호수로, 추크슈피체 산으로. 하지만 그것마저 내 차지가 아니었네요.


볼프강 코트찬 (57세)
늘 삶만 생각했지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죽음을 기다려요.
하지만 남은 하루하루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답니다. 한 번도 구름을 쳐다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젠 모든 게 달라 보여요. 구름도, 꽃병의 꽃도...... 갑자기 모든 게 소중해요.

그날은 밤새도록 함박눈이 내렸다. 뇔커는 병원 문 앞에서 솜처럼 하얀 눈을 뭉쳐 큰 눈덩이를 만든 다음 허겁지겁 뛰어서 코트찬의 병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이 서서히 녹아 물이 되는 걸 지켜보며 물이 다시 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사라지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었을 거예요.


베아테 타우베 (44세)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이겨야 해.
사방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애들에게 네가 필요해.
당시 막내 예시카는 세 살, 이자벨이 다섯 살, 멜라니가 열 살, 첫째 티에모가 열한 살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문했다.
진정으로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자기가 어머니를 위로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자신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늘 무언의 비난이 공중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의술이 발달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요즘엔 죽음을 집중의학 및 하이테크 의학을 무기로 삼아 싸워야 하는 적군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그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오래 산다. 그 대가는 통증과 구토, 쇠약,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동반한 채 몇 년씩 질질 끄는 중병이다.

지금도 여전히 고통의 기간이 불필요하게 연장되고 있다. 자비로운 죽음은 소생술로 저지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배를 뚫어 인공영양을 공급한다.
환자가 임박한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사들이 환자와 함께 기분 전환에 불과한 의학적 모헙에 뛰어든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을 거두는 그곳, 병원보다 더 죽음을 배척하려는 노력이 강하게 각인된 곳은 없어 보인다. 이곳의 의사들은 치유를 원한다. 따라서 죽어가는 환자는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니 치유의 장소에선 죽어가는 사람도 배척을 당하는 것이다.

- 이 책은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온 사람들의 생전과 사후의 모습의 사진들과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공장소에서 읽다가 울까봐 몇 번을 덮었다 다시 폈다. 그들이 내 친구이자 가족인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사실처럼 변함없는 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외면받는 진리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우리도 죽는 다는 사실에 등을 돌리고 산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진짜 이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산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며, 옷장을 가득 채우고, 집을 꾸민다. 알 수 없는 미래에 투자하고, 현재를 잊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뒤통수를 친다. 아무리 죽음을 가깝게 보고 산다 할지라도 자신의 죽음은 예기치 못할 사건이며,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에 우리가 가장 잘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지 않을까.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다를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회한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죽음을 전제한 우리의 삶을, 그때가 왔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 가야 하는 것 같다.
더불어, 현대 의학 및 사회 풍조가 불러온 죽음에 대한 외면, 도피, 거부 등에 대한 각성이 (이 책에 언급된 대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병원에 들어선 순간, 인간은 존엄성을 잃은 하나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마지막 시간들을 한 존재로서 충실하게 보낼 수 있도록 사회적인/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듯 하다.
지금은 너무도 쉽지만,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고, 말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3부 대타존재, 제1장 타자의 존재 -

생각건대 부끄러움은 본디 '자인'이다. 나는 타자가 나를 보는 그대로 내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한다.

사실, 실재적인 것 가운데 타자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있을까? 그것은 나와 똑같은 본질을 가진 하나의 사고하는 실체이다.

타자의 존재에 대한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전제, 즉 '타자는 사실 "타인"이다. 다시 말하면 나"로 있지 않은" 나이다'라는 전제가 도사리고 있다.

내가 타인에게 나타나는 대로, 나는 존재한다. 또, 타인은 그가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고, 나의 존재는 타인에게 의존하므로 내가 나에게 나타나는 방식 - 다시 말해 나의 자기의식이 발전하는 계기 - 은 타인이 나에게 나타나는 방식에 의존한다. 타인에 의한 나의 승인의 가치는 나에 의한 타인의 승인의 가치에 의존한다. 그런 뜻에서 타인이 나를 하나의 몸에 묶여 있는 자, '생명'에 급급한 자로서 파악하는 한에서, 나는 내 스스로 '한 사람의 타인'일 뿐이다. 타인에게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의 생명을 걸고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사실 자기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은, 자신이 대상적인 형태 또는 어떤 한정된 존재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명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타인에게 보여 주는 일이다. (중략) 그것은 내가 나의 생명을 거록 나서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나의 감각적 존재를 '위험에 노출함으로써' 이것을 무시한 것인데, 타인은 반대로 생명과 자유에 집착함으로써, 그가 대상적인 형태에 묶여 있지 않은 자로서 처신할 수 없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외적인 사물 전반에 묶여 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비본질적'인 것으로 나에게 나타난다. 그는 '노예'이고 나는 '주인'이다.  그에게 있어 본질로 있는 자는 나이다.

개별자가 요구하는 것은 개별자로서의 자기완성이다. 개별자는 자기의 구체적인 존재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지, 보편적인 구조의 객관적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자기의식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문제인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순수한 내면성이다. 의식은 끊임없이 자신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자기'에 대한 지향이다. (중략) 나는 나한테서 달아날 수가 없다. 나는 나를 뒤에서 다시 붙잡는다. 그리고 설사 내가 나를 대상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해도, 이미 나는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대상의 핵심에 있어서 나로 있을 것이며, 또 이대상의 바로 중심부에서 나는 그것을 쳐다보는 주관으로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실재론.관념론. 후설. 헤겔의 경우에는, 의식개체 서로 간의 관계의 형식은 '......에 대하여 있음'이었다. 바뀌 말하면, 타자는 그가 나에 '대해' 존재하거나 내가 그에 '대해' 존재하는 한에서 나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나를 구성하기까지 했다. (중략) 그런데 '......와 함께 있음'은 매우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중략) '~와 함께'는 차라리 이 세계의 경영을 위한 일종의 존재론적 연대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중략)
타인은 '대상'이 아니다. 타인은 나와의 연관에 있어서 여전히 인간존재이다. 타인이 나를, 나의 존재에 있어서 한정하는 경우에 의지처로 삼는 존재는 '세계-속-존재'로서 파악된 순수한 그 자신의 존재이다. (중략) 우리의 관계는 '정면으로부터'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측면으로부터'의 상호의존이다. (중략)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고, '자기를 존재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존재시킬' 때의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바로 그러므로, 내가 자유롭게 내 존재를 본래성 또는 비본래성에 있어서 이루는 한에서, 나는 타자에 대해 나의 존재에 대한 책임자이다.

나의 '죽음에의 존재'의 돌연한 드러내 보임이 홀연히 나를 하나의 절대적인 '공통의 고독'속에 떠오르게 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독까지 올려놓는 것은, 그런 공동존재의 공통의 지반 위에서이다.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원하고 있던 것, 즉 '자신의 존재 속에 타자의 존재를 품고 있는 하나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사실 내가 '그 사람과 함께' 존재하는 이 인간존재는, 그 자신이 '세계 속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의 세계의 자유로운 근거이며, 그 자신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이 인간존재는 '그 자신에게 있어서' 존재한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세계를 '치명적'인 세계로서 구성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인간존재를 그 자신의 온갖 가능성인 구체적인 존재로 구성할 수는 없다.

타자의 자유는, 내가 그에게 있어서 그것으로 있는 이 존재의 불안한 불확정을 통해 나에게 드러내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 존재는 나의 가능이 아니다. 이 존재는 항상 내 자유 속에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존재는 반대로 내 자유의 한계이며, '카드의 이면'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내 자유의 '이면'이다.
(중략) 여기서 문제는 타자의 자유 속에, 그리고 타자의 자유에 의해 묘사되는 나의 존재이다.

타인의 이 가능성은 거기에 존재한다. 나는 이 가능성을, 이른바 부재하는 가능성으로서, '타인의' 가능서응로서, 나의 불안에 의해, '그다지 안전하지 않은' 이 은신처를 포기하는 나의 결심에 의해, 파악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가능성은 타인이 '나를 엿보고 있는 ' 한에서 나의 비반성적 의식에 대해 현전하고 있다.

그에 비해, 타인의 나타남은 상황 속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하나의 국면이 나타나게 한다. 나는 그 국면의 주인이 아니며, 이 국면은 원리적으로 나에게 탈출한다. 왜냐하면 그 양상은 '타인에게 있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드가 절묘하게도 '악마의 몫'이라고 부른 그것이다.
이것은 예견할 수 없는, 게다가 실재하는 '이면'이다. 이를테면 카프카의 <심판>과 <성> 속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런 예견 불가능성이다.

나는 타자의 평가에 몸을 내맡긴다. 또한 그것을 나는 단순한 '코기토'의 행사에 의해서도 파악한다. '시선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인식할 수 없는 평가의, 특히 가치평가의, 인식되지 않는 대상으로서 나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부끄러움 또는 자부심에 의해, 나는 그런 평가들에 정당성이 있음을 인정한는 동시에, 또한 이 평가들을 단순한 평가에 불과한 것으로서, 즉 주어진 것에서 모든 가능성을 향한 하나의 자유로운 초월로서 받아들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중략) 그러므로 '보이고 있다'는 것은 나의 자유가 아닌 하나의 자유에 대한 하나의 무방비한 존재로서 나를 구성한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는, 나는 세계 한복판에 응고된 것으로서, 위험에 처한 것으로서, 치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나를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세계 속에서의 나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며', 내가 있는 이 세계가 어떤 면을 타자를 향해 돌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타자의 '시선' 이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겨졌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샤르트르가 타자에 대한 논의에 있어, '타자의 나에 대한 시선 및 평가에 대한 나의 자유의 부재'에 대해 지적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가 느꼈던 것은 무엇일까? 타자의 시선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박탈감이었을까? 타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조정하려고 했던 무력감이었을까? 나 역시 타인의 시선에 따라 나의 생을 살아왔다. 나의 생각위에 타자의 시선을 놓고, (특히 나에게 가까웠던 사람들의 시선들) 그 감탄적 시선에 최대치가 되려고, 혹은 비판적 시선의 최소치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깨달은 것은 중요한 것은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에 대한 타자의 평가가 나의 손에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내 생의 의미가 기쁨이 타자의 눈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았지만, 나는 깨달았다.)
다른 깨달음은,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도 타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샤르트르가 지적한 대로 "~와 함께"있는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속에 타자의 존재를 품고 있는 하나의 존재'이기에, 나도 '타자'로서의 역할을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수행한다. 나는 타자로서 기억하려고 애쓴다. 타자의 생이 내가 존재하는 한, 기억 속에 존재할 수 있도록 기억하려 애쓴다. 그것이 내가 나의 삶을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나의 태도이며,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성에 대한 나의 작은 '반항'이다.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2부 대자존재, 제3장 초월 -

그래서 결굴 인식과 인식하는 것 자체는,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주어지며', 존재가 없는 것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떠올라 온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식은 다만 존재가 '거기 있게' 할 따름이다.

'인식하다'와 '존재하다'의 내적인 관계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말은 우리가 방금 존재론적 의미와 인식론적 의미를 이중으로 부여하여 사용한 '이루다(realize, 실감하다)'라는 말이다.

내가 항상,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 저편에서, 나 자신에게 장차 와야 할 것으로 있는 한에서, 내가 현전하고 있는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향해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것으로서 나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갖가지 도구의 무한지향은, 결코 내가 있는 그대로의 대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면 갖가지 도구의 전체는 나의 모든 가능의 엄밀한 상관자이다. 게다가 나는 나의 모든 가능성으로 '있으므로' 세계 속에서의 갖가지 도구의 질서는 나의 모든 가능성이, 즉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 즉자 속에 투영된 영상이다. (중략) 그것은 오히려 '세계-속-존재'는 인간존재에 있어서, 세계를 그곳에 있게 하는 드러내 보임 그 자체에 의해, 근본적으로 세계 속에 자기를 상실하는 일이다. '세계-속-존재'라는 것은 느슨해지는 일 없이, '무언가 도움이 될' 가능성조차 없이, 도구에서 도구로 지향되며, 반성적인 순환 이외에 아무런 의지처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에 '"목적이 되는 무엇인가"의 연쇄는 "목적이 되는 누군가"에 이르러 정지된다'는 말로, 우리에게 이론을 제기해 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중략)
'목적이 되는 누군가'는, 도구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즉자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략) 이것은 우리가 항상 타인을 하나의 특수한 형식의 도구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다만 우리가 세계에서 출발하여 타인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도구 복합의 무한지향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대자가 자기를 향한 그 비약과 상관적으로, 거부로서 자기 자신의 결여로 있는 한에서, 존재는 세계라는 배경 위에 대자에 대해 '사물-도구'로서 드러내 보여지며, 세계는 도구성이라는 지시적 복합의 무차별적인 배경으로서 나타난다. (중략)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살고 있다. '생활 - 노동'이라는 이 전체의 '의미'에 대한 문제, 즉 '살고 있는 내가 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이 일하기 위한 일이라면, 어째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대자 자신에 의한 대자의 발견을 품고 있기 때문에 반성적 차원에서밖에 제기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부정은 '반사-반사하는 것'의 존재방식에서는,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것'에 '대한' 부정으로서, 현실 존재에 대해 나타나며, 또 이 부정은 자신이 존재 속에서 장래를 향해 과거에 도전함으로써, '이것'에서 자기를 해방하기 '위해' 과거에서 탈출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에 대한 대자의 관점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는 세계로부터의 이중의 도피이다. 대자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현전으로서, 세계 한복판에서의 자신의 존재에서 탈출하는 동시에, 자신이 현전하고 있는 그 세계에서 도피하낟. 가능은 이런 도피의 자유로운 종착점이다. (중략) 오히려 대자는, 다만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하나의 초월적인 것을 향해 도피할 수 있을 뿐이다. (중략) 진부한 비유이나마, 내 생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의 비유를 쓰는 것이 허락된다면, 끌채의 멍에목에 매달려 있는 당근을 쫓아 가느라고, 뒤에 있는 수레를 끌고 가는 당나귀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기 바란다. 당근을 덥석 물려는 당나귀의 모든 노력은 결과적으로 수레 전체를 전진하게 만들지만, 당근 자체는 언제까지나 당나귀로부터 같은 거리에 머물러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의 가능을 쫓아서 달리지만, 이 가능은, 우리의 질주 자체가 나타나게 하는 가능이며, 우리의 질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가능은 우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달리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달리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종착점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그쪽을 향해 달리는 정도에 따라 고안되고 투영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는 질주가 내던져 버리는 이 의의를 질주에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가능은 대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피의 의미는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


- 세계에서 인지되고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도구성'은 슬프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부분은 내가 너무도 혐오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려 했던 사실이다. 나는 '조직 속의 인간', '인간의 도구화'가 무엇보다 싫었다. 존재의 가치가 그 존재가 가진 도구적인 부분에 의해 판단되는 것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러한 도구적인 인간은 본질적 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도구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화된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전적으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이 수행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은 쉽게 다른 인간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간의 본질적 요소에 기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도구적 요소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직속에서 떠났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나를 도구로 보고 있다. 아직은 유용한 도구. 세계가 요구하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나 스스로 그 도구적 유용성을 사용하기 거부하는 도구.
그러나, 그 세계에서 존재의 현전에 대한 초월적 도피가 (당근을 쫓아가는 당나귀에 질주에 비유되어 조소를 자아내더라도), 그 도피, 그 '질주'가 분명 용기있고, 의미있는 일임을, 인간존재로서 세계에 대항해 내던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존엄성'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2부 대자존재, 제2장 시간성 -

존재하는 존재는 전적으로 다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략) 존재는 자기의 과거를 '잊어버린' 것도 아니다. 잊어버린다는 것도 또 하나의 연결방식이 될 것이다. 과거는 말하자면 꿈처럼 존재로부터 빠져나간 것이다.

이미 죽은 피에르에 대해 (중략) 따라서 그것은 '나의' 현실성의 과거이다. 사실 피에르는 나에게 있어서 존재한 것이고, 나는 피에르에게 있어서 존재한 것이다. 곧 분명하게 알 수 있겠지만, 피에르의 존재는 나의 뼛속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피에르의 존재는 '세계-속에서의, 나에게 있어서의, 또 타자에게 있어서의' 하나의 현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고, 이런 현재는 피에르가 생존해 있었을 때의 '나의' 현재였다. (중략) '죽음 속에 있는 무서운 사실은 죽음이 삶을 '운명'으로 바꾼다는 것'이라고 말로는 그렇게 표현했다. (중략) 죽은 피에르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늘에 와서는 오직 나만이 나의 자유에 있어서 그 책임자이다. 그리고 어떤 생존자의 구체적인 과거의 영역으로 옮겨지지 않고, 그 영역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 죽은 자들은 '과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그들의 과거도, 모두 소멸되어 버렸다.
따라서 각각의 과거를 '가진' 각각의 존재가 있다.

극한까지 가서 나와 나의 죽음 사이가 무한소가 된 순간에는, 나는 이미 나의 과거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과거만이 나를 한정할 것이다.

더 이상 남아 있는 패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놀라움과 함께 깨달을 때, 그를 때려눕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영원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바꾼 것과 같이 죽음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합체시킨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의 판단 앞에 방어할 수단도 없이 존재한다. (중략)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죽음은 이 도약을 다른 것들과 함꼐 응고시킨다. (중략)
죽음에 의해 대자가 통째로 과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한에 있어서, 대자는 영원히 즉자로 변한다.

그러나 과거로서의 한애서 과거의 내용에 대해서,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없앨 수 없고, 그것에 아무것도 더할 수도 없다. 바꿔 말하면, 내가 그것으로 있었던 과거는 그것이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즉자이다. 나는 과거와의 존재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런 과거와의 존재관계는 즉자형의 관계이다.

과거라고 하는 이 사실적 존재 때문에, 나는 어떤 순간에도 외교관으로도 선원으로도 있지 않고 교수로 있는 것이다. 하기야 이 경우에도 나는 이런 교수의 존재를 연기할 뿐이지, 결코 완전하게 이 교수라는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는 먼저 즉자적이다.

즉자인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대자이다. (중략) "한편으로는 우리는 기꺼이 현재를 '존재'에 의해 정의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와 앞서 존재한 과거에 비해, 존재하는 것이 현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재를 그것으로 있지 않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직접적인 과거와 미래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엄밀한 분석은, 사실 이미 무한소의 한 순간밖에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후설이 그 '내적인 시간의식에 대한 강의'에 가리킨 것처럼, 무한하게 진행된 분할의 이상적인 종국이자, 하나의 무이다."

'대자'가 현전하는 것은 모든 즉자존재에 대해서이다. (중략) 그러나 대자는 현재를 세계 속에 들어오게 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현재가 무언가에 대해 현전적으로 있을 때의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순간의 형태로 '현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중략) 현재는 공통현전적인 존재 밖으로의 도망이며, 자신이 그것으로 있었던 존재로부터 자신이 그것으로 있을 존재를 향한 도망이다. 현재로서의 한에서는, 현재는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것(과거)으로 있지 않고, 자신이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미래)로 있다.

즉자는 미래로 있을 수도 없고 미래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저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을 때, 보름달은 인간존재에 대해 드러내 보이는 '세계 속에서'만 미래적이다. '미래'가 세계 속에 도래하는 것은 인간존재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미래'는 오로지 존재의 저편에 위치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대자의 현전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내가 그것으로 있는 '대자'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은 바로 나 자신이다. (중략) 그러므로 '미래'는 내가 존재의 저편에 있는 하나의 존재에 대한 현전으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에서 나이다. 나는 '미래'를 향해 나를 기투함으로써 내가 결여하고 있는 것과, 즉 그것이 나의 '현재'에 종합적으로 부가되면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게 되는 것과, 미래애서 융합하려고 한다. 따라서 대자가 존재의 저편에 있어서의 존재에 대한 현전으로서 있어야 하는 것은, 대자 그 자신의 가능성이다. '미래'는 이상적인 지점으로, 거기서는 사실성(과거)과 대자(현재)와 그 가능(장래)의 갑작스럽고 무한한 압축이 마침내 자기를 대자의 그 자신에 있어서의 존재로서 나타낼 것이다. 대자가 그것으로 '있는' 미래를 향한, '대자'의 기도는 '즉자'를 향한 하나의 기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자'는 자신의 미래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자는 자기 앞에, 그리고 존재의 저편에서만, 자신이 있는 것의 근거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란 내가 자유롭지 않다면 내가 그것으로 있었을 것이고, 내가 자유로워야만 내가 그것으로 '있어야 하는 것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거기서 우리가 앞에서 기술한 그 불안이 생겨난다. 불안은 내가, 내가 있어야 하는 이 미래로 있는 데 충분하지 않은 데서 온다. (중략) 자신의 '가능'에 매달리려 해도 헛일이다. (중략)
한 마디로 대자는 자유롭다. 그리고 대자의 자유는 이 자유 자체에 대해 이 자유 자체의 한계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것이다.

즉 '모든 "지금"은 곧 "지난 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갉아먹고 구멍을 뚫는다. 시간은 분리한다. 시간은 달아난다.
(중략) 시간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있었던 것으로부터, 내가 있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사물들로부터, 타자로부터 나를 분리시킨다. 거리의 실제적 척도로서 선택된 것은 시간이다. (중략) 세계와 인간의 시간적 모습은 '앞'과 '뒤'의 산산이 부서진 상태로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분쇄의 단위, 즉 시간적 원자는 '순간'일 것이다. 이 순간으 어느 일정한 순간의 '앞에', 그리고 다른 순간의 '뒤에' 자기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자신의 형태의 내부에는 앞도 뒤도 포함하지 않는다.
순간은 불가분적이고 무시간적이다.

또 시간성은 존재도 아니고, 오히려 존재 자신의 무화라는, 존재의 내부구조이며, 대자존재에 고유한 '존재방식'이다. '대자'는 '시간성'이라는 디아스포라(Diaspora, 분산-점착)적인 형태로 자신의 존재로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현재'는 마치 금방 메워지고는 끊임없이 재생하는 끊임없는 '존재의 구멍'이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경과한다. 또 현재는 마치 '즉자'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도피이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경과한다. 이 즉자의 덫은 이미 어떤 대자의 '과거'도 아닌 하나의 '과거' 속에 현재를 끌어넣는 즉자의 마지막 승리에 이를 때까지 현재를 위협한다. 이런 즉자의 마지막 승리는 바로 죽음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체계 전체의 과거화에 의한 '시간성'의 근본적 정지이고, 또는 이른바 '즉자'에 의한 인간적 '전체'의 탈환이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 살아남아 있는 추억은 하나의 과거적인 '지금'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일꺠워지기를 기다리는 한에서 하나의 미래적인 '지금'이다.

- 시간에 관한 샤르트르의 고찰. '과거'를 하나의 '즉자'로 보는 것은 내게 하나의 유용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과거'를 즉자의 하나의 예인 '의자'에 비유해 보자. '의자'는 앉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의자를 나의 의식 속에서 자꾸만 나에게 앉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앉는 행위가 가장 쉬운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앉는 대신 이 의자를 무시하거나 안 보이는 곳에 가져다 놓거나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심적으로우리가 과거를 통제하는 데 용이하게 쓸 수 있다. '우울증'이라는 과거병력을 가진 사람에게 '우울'이라는 과거적 생각이 떠오를 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데로 우울한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 의자에 앉는 것처럼 가장 쉬운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의자'로 환원해 창고에 넣고 닫아버리거나(무시하거나), 위에 화분을 올려놓는 받침대로 사용하거나(다른 용도로 변화시키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즉자이므로, 현재의 우리가 변화시킬 수는 없으나 그에 대한 태도는 우리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
또한, 현재가 존재하지 않음. 과거와 미래의 전제만이 현재를 정의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현재는 미래로의 기투를 하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인 것이다. 따라서, 미래는 존재에게 있어 완전한 주체적인 자유를 부여한다. 이 불안과 함께 오는 자유로운 존재는 미래에 도래할 세계의 가능성이다.  죽음이 존재를 즉자로 굳혀버리기 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있고자 하지만 있지 않는 그 모습으로 최대한 몸을 던져 가까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마술같은 매력!
또한, 죽음이 존재를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기억이 현재 존재할 수 있다는 그의 논의가 나의 그동안의 관점과도 일치하는 점에 너무도 반갑다. 마치 샤르트르의 생각이 현대까지 살아 숨쉬고, 논의되고, 반박되고, 공감될 수 있는 것처럼. 시간성에 묻히지 않을 수 있는 영원한 즉자적 존재의 창조가 현재 기투하는 지금 있지 않는 그러나 있어야 할 나의 미래의  존재이다.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2부 대자존재, 제1장 대자의 직접적 구조 -

'그것이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으로 있고,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다'는 이 필연성이 의식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해 보자.

그러나 의식의 핵심에서 나타나는 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되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대자는 그 자신의 무로 있어야만 한다. 의식인 한에 있어서의 의식의 존재는 자기에의 현전으로서 '자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것이며, 또 이런 존재가 그 존재 속에 지니고 있는 이 아무것도 아닌 거리, 그것이 '무'이다.
(중략) 무는 항상 하나의 '딴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딴 것'이라는 형태로서만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존재의 불안정을 자기에게 배당하는 하나의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 이것이 대자의 책무이다. (중략)
무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무화이다. (중략) 무는 존재의 무이므로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만 존재에 올 수 있다. 물론 무는 인간존재라는 특이한 존재로 말미암아 존재에 온다. 그러나 이 특이한 존재는 그것이 그 자신의 무의 근원적 기도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한, 자기를 인간존재로 구성한다. 인간존재는 그 존재 안에서,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 존재의 핵심 속에서 무의 유일한 근거라는 한에서만 존재이다.

세계 속에 던져져 있고, 하나의 상황 속에 버려져 있는 한에 있어서 대자는 존재한다.
(중략) 사실상 데카르트는 자기의 발견을 이용하고자 할 때, 그는 스스로 불완전한 한 존재로서 자기를 파악한다. '왜냐하면 그는 의심하기 때문이다.' 

대자는 의식으로 자기를 근거 세우기 위해서 즉자로서의 자기를 상실하는 즉자이다. (중략) 만일 즉자존재가 그 자신의 근거로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존재의 근거도 될 수 없다면, 근거는 일반적으로 대자와 함께 세계에 온다. 대자는 무화된 즉자로서 스스로 자기의 근거를 세우는데, 뿐만 아니라 대자와 한께 비로소 근거가 나타난다.
(중략) 의식은 그 자신의 근거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단순한 즉자가 무한으로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발적이다. 절대적 사건, 다시 말해 대자라는 사건은 그 존재 자체에 있어서 우발적이다.

초승달에 그 초승달로서의 존재를 부여하는 것은 보름달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규정하는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자기 밖에서 자기가 있지 않은 존재에까지, 즉 자기의 '의미'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인간적 초월과 상관관계에 있는 현실존재자의 존재 속에서 하는 일이다. 
(중략) 욕망은 '......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결여'가 아니면 안 된다. 욕망은 존재의 결여이다. 욕망에는 그 가장 내면적인 존재 속에서 자기가 욕망하고 있는 존재가 따라다니고 있다. 
(중략) 결함을 가지 현실존재가가 그것을 향해 자기를 뛰어넘거나 뛰어넘어지고, 그로 인해 결함을 가지 자로서 자기를 구성할 때의 '부재'이다. 인간존재의'......을 위하여'는 어떤 것일까?
(중략) 인간존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이다.

인간존재는 그 존재에 도래하는 데 있어서 자기를 불완전한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존재는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이 독특한 전체의 현전으로, 자기를 '있지 않은 한에 있어서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중략) 그러나 인간존재가 그것을 향해 자기를 뛰어넘는 존재는 하나의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이 존재는 인간존재의 핵심에 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인간존재 자체일 뿐이다. (중략)
신이란 그것이 완전히 긍정성이고, 세계의 근거인 한에 있어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존재인 동시에 의식이고, 자기 자신의 필연적 근거인 한에 있엉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는 존재이며, 또 그것이 있지 않는 것으로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인간존재는 자기의 존재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존재이다. (중략)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본디 불행한 의식이며, 이 불행한 상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를 가지고 있는 고뇌이다. 이 고뇌는 치밀하고도  객관적인 전체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중략) 이런 고뇌는 이 나무나 이 돌과 마찬가지로 침투할 수 없는 것, 농밀한 것으로 세계의 한복판에 존재한다. 이런 고뇌는 지속된다. 요컨대 이런 고뇌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중략) 그것은 내가 고뇌를 만들고, 그 고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고뇌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나는 나의 고뇌가 나를 붙잡아 폭풍처럼 나한테서 넘쳐 흐르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나는 나의 자유로운 자발성 속에서 고뇌를 존재에까지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고뇌로 있고 싶고 동시에 고뇌를 당하고 싶지만, 나를 나의 밖으로 데리고 나갈 이 거대하고 불투명한 고뇌는, 끊임없이 그 날개로 나를 가볍게 스치기만 할 뿐 나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나는 탄식하고 있는 이 나밖에, 신음하고 있는 이 나밖에,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고뇌를 이루기 위해 고뇌하는 희극을 쉴새없이 연기해야 하는 나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중략) 나의 고뇌는 그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 있는 것에 대해 고뇌하고, 그것이 있는 것으로 있지 않은 것에 대해 고뇌한다. (중략)
나의 고뇌는 그것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으므로 쓸데없이 많은 말을 늘어놓지만, 그것의 이상은 오히려 침묵이다. 조각상의 침묵,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을 가리고 침울한 상태에 잠겨 있는 인간의 침묵이다. 그러나 이 침묵의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이다. 그 사람 자신으로서는 끝없이 얘기를 계속하고 있다. (중략) 그 자신으로서는 그가 스스로 원하지 않음으로써 원하고, 스스로 원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이 괴로움, 끊임없이 하나의 부재가 따라다니는 이 괴로움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여기서 부재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무언의 고뇌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고뇌하는 대자의 이를 수 없는 구체적인 '전체 고뇌하는 '인간존재'의 '목표(le pour)'가 부재하는 것이다.

자기란 가치이다. (중략) 가치의 존재는 가치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로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로서 있는 한에서의 가치의 존재, 그것은 존재를 갖지 않은 것의 존재이다. 따라서 가치는 파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가치는 그 행위들의 저편에 있는 하나의 사물로서, 이를테면 숭고한 행위들의 무한한 향상의 극한으로서 주어진다. 가치는 존재의 저편에 있다. (중략) 인간존재는 가치를 세계에 도래하게 하는 것임을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그 가치는 하나의 존재가 그곳을 향해서 자기의 존재를 뛰어넘는 것을 존재의 의미로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가치를 부여받은 존재는 모두, '......을 향한' 자기의 존재로부터의 이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는 이 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존재가 자기에게 근거를 부여하는 한에 있어서 이 존재를 따라다닌다. 요컨대 가치는 '자유'를 따라다닌다. (중략) 오히려 이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이런 가치의 존재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자신을 있기 하기 때문이다. 

인간존재는 넓은 의미에서 대자와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는 다만 존재의식으로서 자기를 존재시키는 대자의 비조정적 반투명성과 함께 주어진다. 가치는 도처에 존재하면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반사 - 반사하는 것'의 무화적인 관계의 핵심에, 현전하면서도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으며, 다만 나의 존재를 현전하게 하는 이 결여의 구체적인 의미로서만 체험된다. 가치가 명제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치가 따라다니는 대자가 반성의 시선 앞에 나서야 한다. 사실, 반성적 의식은 반성되는 '체험'을 그 결여적인 본성 속에서 정립하고, 동시에 가치를 '결여를 입는 것'의 손이 닿지 않는 의미로서 꺼내온다. 

'가능은 인간존재에 의해 세계에 찾아온다'고 하는 최초의 과학적 발걸음은 옳은 것이다.

'세계는 그것이 인식되는 한 나의 세계로서 인식된다'는 표현은 부조리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세계의 이런 아성은 달아나면서도 항상 현재적인 하나의 구조이며, 이 구조를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에 대한) 가능적인 모든 의식은 모든 가능에 대한 의식인데, 그런 모든 가능이 세계를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에 세계는 나의 세계('인") 것이다.

- 존재의 가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 언제나 존재의 이편에서 저편을 바라보는 한 사람으로서 느끼던 대중과의 괴리를 나에게서 덜어내어 준다. 존재란 우연한 절대적인 사전으로 규정지어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지워버림으로 하나의 짐을 덜어내고, 존재에 대한 고찰을 좀 더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듯하다. '고뇌'를 존재에게 따르는 필연으로 인정하고, '가치'를 향해 현존재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존재를, 세상속에 던져졌으나, 세상에 가능성을 부여하는 존재를, 그럼으로써 인간존재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샤르트르의 철학에 많은 위안을 얻는다. 언제나 현재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못하고, 그 있지 못함에 괴로워했던 내가 단순한 현실 부적응자가 아니라, 가치를 향해 고뇌를 안고 몸을 던지는 존재중 하나라는 사실에 기쁘다. 침묵 속에 가려진 말들. 꺼내진 심정. 존재로서의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