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건대 부끄러움은 본디 '자인'이다. 나는 타자가 나를 보는 그대로 내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한다.
사실, 실재적인 것 가운데 타자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있을까? 그것은 나와 똑같은 본질을 가진 하나의 사고하는 실체이다.
타자의 존재에 대한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전제, 즉 '타자는 사실 "타인"이다. 다시 말하면 나"로 있지 않은" 나이다'라는 전제가 도사리고 있다.
내가 타인에게 나타나는 대로, 나는 존재한다. 또, 타인은 그가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고, 나의 존재는 타인에게 의존하므로 내가 나에게 나타나는 방식 - 다시 말해 나의 자기의식이 발전하는 계기 - 은 타인이 나에게 나타나는 방식에 의존한다. 타인에 의한 나의 승인의 가치는 나에 의한 타인의 승인의 가치에 의존한다. 그런 뜻에서 타인이 나를 하나의 몸에 묶여 있는 자, '생명'에 급급한 자로서 파악하는 한에서, 나는 내 스스로 '한 사람의 타인'일 뿐이다. 타인에게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의 생명을 걸고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사실 자기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은, 자신이 대상적인 형태 또는 어떤 한정된 존재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명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타인에게 보여 주는 일이다. (중략) 그것은 내가 나의 생명을 거록 나서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나의 감각적 존재를 '위험에 노출함으로써' 이것을 무시한 것인데, 타인은 반대로 생명과 자유에 집착함으로써, 그가 대상적인 형태에 묶여 있지 않은 자로서 처신할 수 없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외적인 사물 전반에 묶여 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비본질적'인 것으로 나에게 나타난다. 그는 '노예'이고 나는 '주인'이다. 그에게 있어 본질로 있는 자는 나이다.
개별자가 요구하는 것은 개별자로서의 자기완성이다. 개별자는 자기의 구체적인 존재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지, 보편적인 구조의 객관적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자기의식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문제인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순수한 내면성이다. 의식은 끊임없이 자신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자기'에 대한 지향이다. (중략) 나는 나한테서 달아날 수가 없다. 나는 나를 뒤에서 다시 붙잡는다. 그리고 설사 내가 나를 대상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해도, 이미 나는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대상의 핵심에 있어서 나로 있을 것이며, 또 이대상의 바로 중심부에서 나는 그것을 쳐다보는 주관으로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실재론.관념론. 후설. 헤겔의 경우에는, 의식개체 서로 간의 관계의 형식은 '......에 대하여 있음'이었다. 바뀌 말하면, 타자는 그가 나에 '대해' 존재하거나 내가 그에 '대해' 존재하는 한에서 나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나를 구성하기까지 했다. (중략) 그런데 '......와 함께 있음'은 매우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중략) '~와 함께'는 차라리 이 세계의 경영을 위한 일종의 존재론적 연대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중략)
타인은 '대상'이 아니다. 타인은 나와의 연관에 있어서 여전히 인간존재이다. 타인이 나를, 나의 존재에 있어서 한정하는 경우에 의지처로 삼는 존재는 '세계-속-존재'로서 파악된 순수한 그 자신의 존재이다. (중략) 우리의 관계는 '정면으로부터'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측면으로부터'의 상호의존이다. (중략)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고, '자기를 존재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존재시킬' 때의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바로 그러므로, 내가 자유롭게 내 존재를 본래성 또는 비본래성에 있어서 이루는 한에서, 나는 타자에 대해 나의 존재에 대한 책임자이다.
나의 '죽음에의 존재'의 돌연한 드러내 보임이 홀연히 나를 하나의 절대적인 '공통의 고독'속에 떠오르게 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독까지 올려놓는 것은, 그런 공동존재의 공통의 지반 위에서이다.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원하고 있던 것, 즉 '자신의 존재 속에 타자의 존재를 품고 있는 하나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사실 내가 '그 사람과 함께' 존재하는 이 인간존재는, 그 자신이 '세계 속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의 세계의 자유로운 근거이며, 그 자신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이 인간존재는 '그 자신에게 있어서' 존재한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세계를 '치명적'인 세계로서 구성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인간존재를 그 자신의 온갖 가능성인 구체적인 존재로 구성할 수는 없다.
타자의 자유는, 내가 그에게 있어서 그것으로 있는 이 존재의 불안한 불확정을 통해 나에게 드러내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 존재는 나의 가능이 아니다. 이 존재는 항상 내 자유 속에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존재는 반대로 내 자유의 한계이며, '카드의 이면'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내 자유의 '이면'이다.
(중략) 여기서 문제는 타자의 자유 속에, 그리고 타자의 자유에 의해 묘사되는 나의 존재이다.
타인의 이 가능성은 거기에 존재한다. 나는 이 가능성을, 이른바 부재하는 가능성으로서, '타인의' 가능서응로서, 나의 불안에 의해, '그다지 안전하지 않은' 이 은신처를 포기하는 나의 결심에 의해, 파악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가능성은 타인이 '나를 엿보고 있는 ' 한에서 나의 비반성적 의식에 대해 현전하고 있다.
그에 비해, 타인의 나타남은 상황 속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하나의 국면이 나타나게 한다. 나는 그 국면의 주인이 아니며, 이 국면은 원리적으로 나에게 탈출한다. 왜냐하면 그 양상은 '타인에게 있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드가 절묘하게도 '악마의 몫'이라고 부른 그것이다.
이것은 예견할 수 없는, 게다가 실재하는 '이면'이다. 이를테면 카프카의 <심판>과 <성> 속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런 예견 불가능성이다.
나는 타자의 평가에 몸을 내맡긴다. 또한 그것을 나는 단순한 '코기토'의 행사에 의해서도 파악한다. '시선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인식할 수 없는 평가의, 특히 가치평가의, 인식되지 않는 대상으로서 나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부끄러움 또는 자부심에 의해, 나는 그런 평가들에 정당성이 있음을 인정한는 동시에, 또한 이 평가들을 단순한 평가에 불과한 것으로서, 즉 주어진 것에서 모든 가능성을 향한 하나의 자유로운 초월로서 받아들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중략) 그러므로 '보이고 있다'는 것은 나의 자유가 아닌 하나의 자유에 대한 하나의 무방비한 존재로서 나를 구성한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는, 나는 세계 한복판에 응고된 것으로서, 위험에 처한 것으로서, 치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나를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세계 속에서의 나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며', 내가 있는 이 세계가 어떤 면을 타자를 향해 돌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타자의 '시선' 이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겨졌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샤르트르가 타자에 대한 논의에 있어, '타자의 나에 대한 시선 및 평가에 대한 나의 자유의 부재'에 대해 지적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가 느꼈던 것은 무엇일까? 타자의 시선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박탈감이었을까? 타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조정하려고 했던 무력감이었을까? 나 역시 타인의 시선에 따라 나의 생을 살아왔다. 나의 생각위에 타자의 시선을 놓고, (특히 나에게 가까웠던 사람들의 시선들) 그 감탄적 시선에 최대치가 되려고, 혹은 비판적 시선의 최소치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깨달은 것은 중요한 것은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에 대한 타자의 평가가 나의 손에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내 생의 의미가 기쁨이 타자의 눈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았지만, 나는 깨달았다.)
다른 깨달음은,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도 타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샤르트르가 지적한 대로 "~와 함께"있는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속에 타자의 존재를 품고 있는 하나의 존재'이기에, 나도 '타자'로서의 역할을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수행한다. 나는 타자로서 기억하려고 애쓴다. 타자의 생이 내가 존재하는 한, 기억 속에 존재할 수 있도록 기억하려 애쓴다. 그것이 내가 나의 삶을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나의 태도이며,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성에 대한 나의 작은 '반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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