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의식의 핵심에서 나타나는 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되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대자는 그 자신의 무로 있어야만 한다. 의식인 한에 있어서의 의식의 존재는 자기에의 현전으로서 '자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것이며, 또 이런 존재가 그 존재 속에 지니고 있는 이 아무것도 아닌 거리, 그것이 '무'이다.
(중략) 무는 항상 하나의 '딴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딴 것'이라는 형태로서만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존재의 불안정을 자기에게 배당하는 하나의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 이것이 대자의 책무이다. (중략)
무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무화이다. (중략) 무는 존재의 무이므로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만 존재에 올 수 있다. 물론 무는 인간존재라는 특이한 존재로 말미암아 존재에 온다. 그러나 이 특이한 존재는 그것이 그 자신의 무의 근원적 기도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한, 자기를 인간존재로 구성한다. 인간존재는 그 존재 안에서,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 존재의 핵심 속에서 무의 유일한 근거라는 한에서만 존재이다.
세계 속에 던져져 있고, 하나의 상황 속에 버려져 있는 한에 있어서 대자는 존재한다.
(중략) 사실상 데카르트는 자기의 발견을 이용하고자 할 때, 그는 스스로 불완전한 한 존재로서 자기를 파악한다. '왜냐하면 그는 의심하기 때문이다.'
대자는 의식으로 자기를 근거 세우기 위해서 즉자로서의 자기를 상실하는 즉자이다. (중략) 만일 즉자존재가 그 자신의 근거로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존재의 근거도 될 수 없다면, 근거는 일반적으로 대자와 함께 세계에 온다. 대자는 무화된 즉자로서 스스로 자기의 근거를 세우는데, 뿐만 아니라 대자와 한께 비로소 근거가 나타난다.
(중략) 의식은 그 자신의 근거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단순한 즉자가 무한으로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발적이다. 절대적 사건, 다시 말해 대자라는 사건은 그 존재 자체에 있어서 우발적이다.
초승달에 그 초승달로서의 존재를 부여하는 것은 보름달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규정하는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자기 밖에서 자기가 있지 않은 존재에까지, 즉 자기의 '의미'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인간적 초월과 상관관계에 있는 현실존재자의 존재 속에서 하는 일이다.
(중략) 욕망은 '......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결여'가 아니면 안 된다. 욕망은 존재의 결여이다. 욕망에는 그 가장 내면적인 존재 속에서 자기가 욕망하고 있는 존재가 따라다니고 있다.
(중략) 결함을 가지 현실존재가가 그것을 향해 자기를 뛰어넘거나 뛰어넘어지고, 그로 인해 결함을 가지 자로서 자기를 구성할 때의 '부재'이다. 인간존재의'......을 위하여'는 어떤 것일까?
(중략) 인간존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이다.
인간존재는 그 존재에 도래하는 데 있어서 자기를 불완전한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존재는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이 독특한 전체의 현전으로, 자기를 '있지 않은 한에 있어서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중략) 그러나 인간존재가 그것을 향해 자기를 뛰어넘는 존재는 하나의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이 존재는 인간존재의 핵심에 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인간존재 자체일 뿐이다. (중략)
신이란 그것이 완전히 긍정성이고, 세계의 근거인 한에 있어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존재인 동시에 의식이고, 자기 자신의 필연적 근거인 한에 있엉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는 존재이며, 또 그것이 있지 않는 것으로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인간존재는 자기의 존재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존재이다. (중략)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본디 불행한 의식이며, 이 불행한 상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를 가지고 있는 고뇌이다. 이 고뇌는 치밀하고도 객관적인 전체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중략) 이런 고뇌는 이 나무나 이 돌과 마찬가지로 침투할 수 없는 것, 농밀한 것으로 세계의 한복판에 존재한다. 이런 고뇌는 지속된다. 요컨대 이런 고뇌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중략) 그것은 내가 고뇌를 만들고, 그 고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고뇌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나는 나의 고뇌가 나를 붙잡아 폭풍처럼 나한테서 넘쳐 흐르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나는 나의 자유로운 자발성 속에서 고뇌를 존재에까지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고뇌로 있고 싶고 동시에 고뇌를 당하고 싶지만, 나를 나의 밖으로 데리고 나갈 이 거대하고 불투명한 고뇌는, 끊임없이 그 날개로 나를 가볍게 스치기만 할 뿐 나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나는 탄식하고 있는 이 나밖에, 신음하고 있는 이 나밖에,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고뇌를 이루기 위해 고뇌하는 희극을 쉴새없이 연기해야 하는 나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중략) 나의 고뇌는 그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 있는 것에 대해 고뇌하고, 그것이 있는 것으로 있지 않은 것에 대해 고뇌한다. (중략)
나의 고뇌는 그것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으므로 쓸데없이 많은 말을 늘어놓지만, 그것의 이상은 오히려 침묵이다. 조각상의 침묵,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을 가리고 침울한 상태에 잠겨 있는 인간의 침묵이다. 그러나 이 침묵의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이다. 그 사람 자신으로서는 끝없이 얘기를 계속하고 있다. (중략) 그 자신으로서는 그가 스스로 원하지 않음으로써 원하고, 스스로 원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이 괴로움, 끊임없이 하나의 부재가 따라다니는 이 괴로움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여기서 부재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무언의 고뇌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고뇌하는 대자의 이를 수 없는 구체적인 '전체 고뇌하는 '인간존재'의 '목표(le pour)'가 부재하는 것이다.
자기란 가치이다. (중략) 가치의 존재는 가치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로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로서 있는 한에서의 가치의 존재, 그것은 존재를 갖지 않은 것의 존재이다. 따라서 가치는 파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가치는 그 행위들의 저편에 있는 하나의 사물로서, 이를테면 숭고한 행위들의 무한한 향상의 극한으로서 주어진다. 가치는 존재의 저편에 있다. (중략) 인간존재는 가치를 세계에 도래하게 하는 것임을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그 가치는 하나의 존재가 그곳을 향해서 자기의 존재를 뛰어넘는 것을 존재의 의미로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가치를 부여받은 존재는 모두, '......을 향한' 자기의 존재로부터의 이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는 이 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존재가 자기에게 근거를 부여하는 한에 있어서 이 존재를 따라다닌다. 요컨대 가치는 '자유'를 따라다닌다. (중략) 오히려 이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이런 가치의 존재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자신을 있기 하기 때문이다.
인간존재는 넓은 의미에서 대자와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는 다만 존재의식으로서 자기를 존재시키는 대자의 비조정적 반투명성과 함께 주어진다. 가치는 도처에 존재하면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반사 - 반사하는 것'의 무화적인 관계의 핵심에, 현전하면서도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으며, 다만 나의 존재를 현전하게 하는 이 결여의 구체적인 의미로서만 체험된다. 가치가 명제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치가 따라다니는 대자가 반성의 시선 앞에 나서야 한다. 사실, 반성적 의식은 반성되는 '체험'을 그 결여적인 본성 속에서 정립하고, 동시에 가치를 '결여를 입는 것'의 손이 닿지 않는 의미로서 꺼내온다.
'가능은 인간존재에 의해 세계에 찾아온다'고 하는 최초의 과학적 발걸음은 옳은 것이다.
'세계는 그것이 인식되는 한 나의 세계로서 인식된다'는 표현은 부조리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세계의 이런 아성은 달아나면서도 항상 현재적인 하나의 구조이며, 이 구조를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에 대한) 가능적인 모든 의식은 모든 가능에 대한 의식인데, 그런 모든 가능이 세계를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에 세계는 나의 세계('인") 것이다.
- 존재의 가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 언제나 존재의 이편에서 저편을 바라보는 한 사람으로서 느끼던 대중과의 괴리를 나에게서 덜어내어 준다. 존재란 우연한 절대적인 사전으로 규정지어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지워버림으로 하나의 짐을 덜어내고, 존재에 대한 고찰을 좀 더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듯하다. '고뇌'를 존재에게 따르는 필연으로 인정하고, '가치'를 향해 현존재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존재를, 세상속에 던져졌으나, 세상에 가능성을 부여하는 존재를, 그럼으로써 인간존재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샤르트르의 철학에 많은 위안을 얻는다. 언제나 현재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못하고, 그 있지 못함에 괴로워했던 내가 단순한 현실 부적응자가 아니라, 가치를 향해 고뇌를 안고 몸을 던지는 존재중 하나라는 사실에 기쁘다. 침묵 속에 가려진 말들. 꺼내진 심정. 존재로서의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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