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길을 반밖에 안내려갔는데도, 이 집이 안 보였어요. 집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게 됐죠. 동네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몇 피트 앞밖에 안 보였어요. 사람도 하나 안 보였고요. 모든 게 초현실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실제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했던 거죠. 다른 세계, 사실이 사실이 아니고 삶이 스스로에게서 숨을 쉴 수 있는 곳, 그런 세계에 혼자 있는 것, 저기 항구 너머, 해안 따라 길이 뻗어 있는 곳에선 땅 위에 서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인지 바다 밑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물속에 오래전 빠져버린 것 같은. 전 안개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 같았어요. 그렇게 유령 속에 유령이 돼 있으니까, 죽여주게 편안하던데요.
(중략)
아님, 잊기 위해 취하든가요. (보들레르의 산문시 <취하라>를 냉소적인 열정을 담아 비통하고 멋지게 읊는다.)
언제나 취해 있으라. 다른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것뿐. 시간의 무게가 어깨를 아프게 짓눌러 땅바닥에 짓뭉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무엇에 취하냐고? 포도주에, 시에, 미덕에,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저 취해 있으라.
그리고 이따금, 궁전의 계단이나 도랑가 풀밭 위에서, 그대 방안의 쓸쓸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가 반쯤 혹은 전부 가시면, 바람에게 파도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무엇이든 날아다니거나 한숨짓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들에게 물어보라, 지금이 무얼 할 시간인지. 그려면 바람에 파도, 별, 새, 시계 그대에게 답하리니.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고통받는 시간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취해 있으라! 술에, 시에, 미덕에, 그대 원하는 대로.'
(중략)
사실 전 언제나 어색한 이방인, 누군가를 원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대상도 못 되는 이방인, 어디에 속하지도 못해서 언제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처럼 살 거예요!
- 살아생전 출판을 원치 않았던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불편한 마음으로, 그 씁쓸한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불안하게 책장을 넘겼다. 시대가 권하는 상식, 그러니까 누군가 그렇게 느끼고 행동해야 마땅하다는 그 일반적인 생각,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가족에 대한 상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은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고 최고의 편안함과 안락의 원천이라는 이 쓸데없는 강요된 생각에 오히려 깊이 상처입고, 두려움에 떨고, 죄책감에 찌들고, 자신의 내면으로만 깊이 기어들어가게 되는. 누구하나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상처 하나 있지 않을까? 다만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회가 사람을 더욱 병들게 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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