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일찍이 필요에 의해 '자유정신들'을 고안해 냈다. '인간적이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우울하고도 용감한 책을 그 자유 정신들에 바친다.
육체를 지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라리라는 것을 적어도 나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다.
감정이나 공감은 깊이를 더해가고 이슬 섞인 온갖 종류의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자기를 지탱하게 하기 위해서 더 높고, 더 위대한 것, 더 풍부한 것을 남몰래 조금씩 끊임없이 부수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을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대는 '위계'의 문제를, 그리고 어떻게 권력과 권리와 원근법의 넓이가 서로 높아져가는가를 보아야 했다. 그대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젠 그만하자, 자유 정신으로 어떠한 '그대는 해야만 한다'에 자신이 복종해 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이 '가능한지', 비로소 무엇을 '해도 좋은지'를 이제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라 불리는 저 내면 세계의 모험가며 세계 항해자로서, 이와 똑같이 '인간'이라 불리는 모든 '더 고양되려는 자'나, '이미 겹쳐 쌓기를 내포하고 있는 자'의 측량사로서, 곳곳에 돌진하고, 공포심도 없이 아무것도 조소하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맛보고, 모든 것을 우연적인 것에서부터 정화하면서, 말하자면 가려내면서.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가 가장 다양하고 가장 모순된 곤궁과 행복의 여러 상태를 영혼과 육체로 경험해야만 했는가를 비로소 이해한다.
이 책은 무거운 의무의 압박이 없는 사람들에게 알맞다. 또한 이 책은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을 기대하며 과잉을 요구한다. 시간, 하늘이나 마음의 명쾌함, 가장 대담한 의미에서의 '한가함'등의 과잉을.......
우리는 모든 사물을 인간의 두뇌를 통해 관찰하는 것인 만큼, 이 머리를 잘라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머리를 베어 버린다며, 그때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마치 강한 신앙이 그 신앙의 강함을 증명하기는 하지만, 믿게 된 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보다 잘 인식하기 위해서만 계속 살아갈 정도로 삶의 일상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많은 것을, 그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질투나 불만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좀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풍습.법도.사물의 관습적 평가 등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는 이 경지의 즐거움을 전할 것이며, 아마도 그것 이외는 전해야 할 어떤것도 '갖지'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하나의 결여감, 오히려 체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보다 많은 것을 원한다면, 그는 호의적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자신의 형제, 즉, 행동의 자유인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아마 약간의 조소도 띨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사정이 있으므로.
- 니체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대한 정의나 묘사를 읽음으로서 안도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현대에서 인간의 자신이 속한 조직, 자신의 역할, 자신의 직업 등으로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더이상 인간으로서 어떤 성향을 가진, 생각을 가진, 기품을 가진, 덕을 가진 인간으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니체가 일찍이 깨달았듯이 전자의 인간이 후자의 인간으로서의 성향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라는 것, 또한, 후자로서의 인간적 성향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매우 어려우며 어떠한 포기 내지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니체가 마지막 문장에 언급한 듯이, 그 '자유'에 '특별한 사정', 나의 언어로 '전자로서의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맛본 불만족과 좌절, 체념의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동감한다.-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2011년 6월 30일 목요일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중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Epicuros 는 기원전 311년 처음 미틸레네 학화를 세운 다음, 람프사코스에 이어, 307년 이후 아테네에서 학파를 세웠고, 기원전 271년 또는 270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에피쿠로스는 힘든 청년 시절을 보낸 이후에는 아테네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단지 건강이 나빠서 고생했을 따름이다. 그에게는 집 한 채와 분명히 집과 따로 떨어져 있는 정원이 하나 있었고, 그 정원에서 가르쳤다. 처음에 학파의 회원은 에피쿠로스의 형제 세 사람을 비롯한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으나, 아테네에서 철학을 배우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그들의 자식들, 노예들, 헤타이라들이 들어오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커졌다. 에피쿠로스의 적들이 헤타이라의 입회를 빌미로 이따금 추문을 퍼뜨렸는데, 분명히 이는 공평치 않은 처사였다. 에피쿠로스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우정을 맺는 아주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인물로, 공동체에 소속된 회원들의 어린아이들에게도 상냥하고 유쾌한 편지를 쓰곤 했다. 그는 감정을 표현할 때 고대 철학자들이 나타내리라 예상되는 점잔 빼는 행동과 자제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의 편지들은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었다.
"나는 빵과 물로 살 때 몸이 쾌락으로 충만하며, 내가 사치스러운 쾌락에 침을 뱉는 까닭은 사치스러운 쾌락 자체가 나쁜 탓이 아니라 그것에 뛰따르는 불편한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한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시달렸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법을 터득했다. 인간이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스토아 학파가 아니라 바로 에피쿠로스였다.
부와 명예 같은 욕망이 무익하고 헛된 까닭은 만족할 수 있는 때에도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어 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최고선은 사려이며, 사려는 심지어 철학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어떤 형태의 문화이든 다 피하라"
에피쿠로스의 의견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쾌락 가운데 제일 안전한 것은 우정이다.
신들이 우리 인간 세상의 정세를 걱정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자유의지가 있으며, 우리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운명의 주인이 된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면 죽음도 나쁜 것은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운문으로 쓴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다. (이하)
인간 생명이 땅에 엎드려
종교의 잔혹성 아래
무참히 짓밟혀 처참하게 부서지고,
잠시 종교가 저 위 하늘나라에서 얼굴을 내밀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 인간을 짓누를 때,
처음으로 한 그리스인이 용감히
종교에 맞서 도덕의 눈을 치켜떴네.
분연히 일어나 종교에 도전한 최초의 인간이었네.
신들에 대한 숱한 이야기에도, 번갯불에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네.
오, 모든 것이 그의 영혼 속 대담한 용기를 더욱 북돋아
자연의 굳게 잠기 문을 헤치고 들어간
최초의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네.
그리하여 정신의 강렬한 기운이 널리 퍼져,
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세계는 불타는 성벽을 넘어
저 멀리 여행을 떠나
정신과 영혼이 아득히 멀리 넓고도 넓게
측량할 길 없는 우주 구석구석까지 미쳤네.
그때 이래 우리에게 정복자로 개선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지식을
둘 다 가져와서,
어떤 원리에 근거해 살물이 제각각 제한된 힘을 갖고
깊숙한 곳에 숨은 경계석을 갖게 되는지 가르쳤네.
그리하여 이제 종교는 인간의 발 아래 내던져져 짓밟히게 되었다.
그 사람의 승리가 우리를 하늘 높이 드높이네.
에피쿠로스 복음은 에피쿠로스 사후 6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상의 삶이 주는 비참한 고통 때문에 더욱 압박을 받게 될수록, 철학과 종교에서 더욱 강력한 처방을 계속 요구했다.
- 내가 대학때 배운 철학강의에서 '에피쿠로스 = 쾌락주의, 현실의 쾌락을 중요시한다.'라고만 배우고는 끝이었다. 이 책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기전까지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어감으로 인해 마치 에피쿠로스 학파가 신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학파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에피쿠로스는 현실의 절제와 만족에 촛점을 두고 있다. 전체의 철학사에 걸쳐 종교에 혹은 신, 사후, 윤회 등에 의존하지 않고, 현세에 중심을 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쾌락주의라는 그릇된 어감의 단어보다는 현실주의나 인본주의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기원전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기원전 이후 이러한 철학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신이나 절대자'보다는 '인간'을, '내세'보다는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며 절제하는 삶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설파한 에피쿠로스의 용기와 지혜가 존경스럽다.
"나는 빵과 물로 살 때 몸이 쾌락으로 충만하며, 내가 사치스러운 쾌락에 침을 뱉는 까닭은 사치스러운 쾌락 자체가 나쁜 탓이 아니라 그것에 뛰따르는 불편한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한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시달렸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법을 터득했다. 인간이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스토아 학파가 아니라 바로 에피쿠로스였다.
부와 명예 같은 욕망이 무익하고 헛된 까닭은 만족할 수 있는 때에도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어 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최고선은 사려이며, 사려는 심지어 철학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어떤 형태의 문화이든 다 피하라"
에피쿠로스의 의견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쾌락 가운데 제일 안전한 것은 우정이다.
신들이 우리 인간 세상의 정세를 걱정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자유의지가 있으며, 우리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운명의 주인이 된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면 죽음도 나쁜 것은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운문으로 쓴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다. (이하)
인간 생명이 땅에 엎드려
종교의 잔혹성 아래
무참히 짓밟혀 처참하게 부서지고,
잠시 종교가 저 위 하늘나라에서 얼굴을 내밀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 인간을 짓누를 때,
처음으로 한 그리스인이 용감히
종교에 맞서 도덕의 눈을 치켜떴네.
분연히 일어나 종교에 도전한 최초의 인간이었네.
신들에 대한 숱한 이야기에도, 번갯불에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네.
오, 모든 것이 그의 영혼 속 대담한 용기를 더욱 북돋아
자연의 굳게 잠기 문을 헤치고 들어간
최초의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네.
그리하여 정신의 강렬한 기운이 널리 퍼져,
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세계는 불타는 성벽을 넘어
저 멀리 여행을 떠나
정신과 영혼이 아득히 멀리 넓고도 넓게
측량할 길 없는 우주 구석구석까지 미쳤네.
그때 이래 우리에게 정복자로 개선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지식을
둘 다 가져와서,
어떤 원리에 근거해 살물이 제각각 제한된 힘을 갖고
깊숙한 곳에 숨은 경계석을 갖게 되는지 가르쳤네.
그리하여 이제 종교는 인간의 발 아래 내던져져 짓밟히게 되었다.
그 사람의 승리가 우리를 하늘 높이 드높이네.
에피쿠로스 복음은 에피쿠로스 사후 6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상의 삶이 주는 비참한 고통 때문에 더욱 압박을 받게 될수록, 철학과 종교에서 더욱 강력한 처방을 계속 요구했다.
- 내가 대학때 배운 철학강의에서 '에피쿠로스 = 쾌락주의, 현실의 쾌락을 중요시한다.'라고만 배우고는 끝이었다. 이 책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기전까지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어감으로 인해 마치 에피쿠로스 학파가 신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학파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에피쿠로스는 현실의 절제와 만족에 촛점을 두고 있다. 전체의 철학사에 걸쳐 종교에 혹은 신, 사후, 윤회 등에 의존하지 않고, 현세에 중심을 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쾌락주의라는 그릇된 어감의 단어보다는 현실주의나 인본주의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기원전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기원전 이후 이러한 철학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신이나 절대자'보다는 '인간'을, '내세'보다는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며 절제하는 삶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설파한 에피쿠로스의 용기와 지혜가 존경스럽다.
2011년 5월 30일 월요일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중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또 만약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이끌어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생생한 희망과 두려움 속에서 불확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는 누구나 고통을 느끼지만, 만약 마음이 편해지도록 위로나 주는 동화에 의지해 살고 싶지 않다면 그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을 망각해서도 안 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답변을 찾았다고 자신을 설득해도 안 된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 연구자를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 처음 이 두꺼운 책을 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읽을수록 빠져들게 되는 책. 이제 겨우 고대에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을 지났다. 수 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놀라우리만큼 많다는 점이 행복하다. 인간은 시대를 초월해서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 대한 안도. 과학과 철학과 신학의 출발점이 거의 같다는 점에 대한 기분좋은 느낌. (현대에 있어 지나치게 전공을 가르고, 마치 과학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같은 분야에서도 서로의 분야를 자로 긋듯이 가르는 것이 팽배한 지금, 그것이 못마땅한 나에게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준 듯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고, 시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생각들을 읽어나가는 재미.-
- 처음 이 두꺼운 책을 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읽을수록 빠져들게 되는 책. 이제 겨우 고대에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을 지났다. 수 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놀라우리만큼 많다는 점이 행복하다. 인간은 시대를 초월해서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 대한 안도. 과학과 철학과 신학의 출발점이 거의 같다는 점에 대한 기분좋은 느낌. (현대에 있어 지나치게 전공을 가르고, 마치 과학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같은 분야에서도 서로의 분야를 자로 긋듯이 가르는 것이 팽배한 지금, 그것이 못마땅한 나에게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준 듯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고, 시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생각들을 읽어나가는 재미.-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주제 사라미구의 "돌뗏목"중
옳은 것이 틀린 것을 만들어 내고, 틀린 것이 옳은 것을 낳지. 괴로운 사람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로군. 이봐, 슬퍼하는 친구, 위로라는 건 없어, 인간은 위로할 수 없는 존재거든.
어쩌면 주제 아나이수의 이런 의견이 옳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위로받지도 않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동, 어는 모로 보나 무의미하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행동을 보면, 인간이 언젠가는 인간의 어깨에 기대 울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이미 너무 늦었을 때일 수도 있고, 이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일 수도 있지만.
(중략)
삶을 바꾸는 데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이 생각하고, 이것저것 재보고 망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곤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우리는 원형의 운동을 하며 시간의 행로를 따라 움직인다. 더 이상 어쩔 힘이 없는 먼지 구름처럼, 낙엽처럼, 파편처럼. 차라리 허리케인이 부는 땅에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을. 그러나 어느 때는 딱 한마디면 된다. 가서 바위가 지나가는 것을 봅시다.
(중략)
하느님과 저 아들의 개가 원한다면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날 것이니.
(중략)
그렇게까지 해서 잠깐 더 사는니 죽는 게 낫다.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기다리면서. 멀리 고요한 산, 장밋빛 아침, 뜨거운 오후의 짙푸른색, 별이 뜬 하늘을 응시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 때가 찾아와도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겠어.
- 사라미구의 환상적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느날 이유없이 땅이 갈라져 이베리아 반도가 바다를 표류하게 되었을 때, 과학도 종교도 아무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을 때,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욕구중에 하나인 확실성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라미구는 특유의 해학적 필치로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을 날카롭게 비꼰다. 이 극한적 상황,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상황 (실제로 물리적 피해가 아무런 것도 없는 상황에 확실성만 결핍된 상황)에 4명의 이상한 우연의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삶에 비할 바 없는 놀라운 여행을 한다. 그들의 여행은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조용하고 여유롭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멈춘 이 돌뗏목에서 이 4명만이 진정한 삶을 살았다. 결국 나머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 생도 이 끝없는 외부의 불확실성 속에 그냥 우왕좌왕하는 것만이 아닐까? 사라미구가 말한대로 "주기의 순환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은 사람뿐이다. 사람에게는 한번뿐 그 이상은 없다." 고 말이다.
어쩌면 주제 아나이수의 이런 의견이 옳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위로받지도 않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동, 어는 모로 보나 무의미하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행동을 보면, 인간이 언젠가는 인간의 어깨에 기대 울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이미 너무 늦었을 때일 수도 있고, 이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일 수도 있지만.
(중략)
삶을 바꾸는 데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이 생각하고, 이것저것 재보고 망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곤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우리는 원형의 운동을 하며 시간의 행로를 따라 움직인다. 더 이상 어쩔 힘이 없는 먼지 구름처럼, 낙엽처럼, 파편처럼. 차라리 허리케인이 부는 땅에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을. 그러나 어느 때는 딱 한마디면 된다. 가서 바위가 지나가는 것을 봅시다.
(중략)
하느님과 저 아들의 개가 원한다면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날 것이니.
(중략)
그렇게까지 해서 잠깐 더 사는니 죽는 게 낫다.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기다리면서. 멀리 고요한 산, 장밋빛 아침, 뜨거운 오후의 짙푸른색, 별이 뜬 하늘을 응시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 때가 찾아와도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겠어.
- 사라미구의 환상적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느날 이유없이 땅이 갈라져 이베리아 반도가 바다를 표류하게 되었을 때, 과학도 종교도 아무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을 때,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욕구중에 하나인 확실성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라미구는 특유의 해학적 필치로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을 날카롭게 비꼰다. 이 극한적 상황,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상황 (실제로 물리적 피해가 아무런 것도 없는 상황에 확실성만 결핍된 상황)에 4명의 이상한 우연의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삶에 비할 바 없는 놀라운 여행을 한다. 그들의 여행은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조용하고 여유롭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멈춘 이 돌뗏목에서 이 4명만이 진정한 삶을 살았다. 결국 나머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 생도 이 끝없는 외부의 불확실성 속에 그냥 우왕좌왕하는 것만이 아닐까? 사라미구가 말한대로 "주기의 순환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은 사람뿐이다. 사람에게는 한번뿐 그 이상은 없다." 고 말이다.
2011년 5월 3일 화요일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중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길을 반밖에 안내려갔는데도, 이 집이 안 보였어요. 집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게 됐죠. 동네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몇 피트 앞밖에 안 보였어요. 사람도 하나 안 보였고요. 모든 게 초현실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실제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했던 거죠. 다른 세계, 사실이 사실이 아니고 삶이 스스로에게서 숨을 쉴 수 있는 곳, 그런 세계에 혼자 있는 것, 저기 항구 너머, 해안 따라 길이 뻗어 있는 곳에선 땅 위에 서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인지 바다 밑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물속에 오래전 빠져버린 것 같은. 전 안개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 같았어요. 그렇게 유령 속에 유령이 돼 있으니까, 죽여주게 편안하던데요.
(중략)
아님, 잊기 위해 취하든가요. (보들레르의 산문시 <취하라>를 냉소적인 열정을 담아 비통하고 멋지게 읊는다.)
언제나 취해 있으라. 다른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것뿐. 시간의 무게가 어깨를 아프게 짓눌러 땅바닥에 짓뭉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무엇에 취하냐고? 포도주에, 시에, 미덕에,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저 취해 있으라.
그리고 이따금, 궁전의 계단이나 도랑가 풀밭 위에서, 그대 방안의 쓸쓸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가 반쯤 혹은 전부 가시면, 바람에게 파도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무엇이든 날아다니거나 한숨짓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들에게 물어보라, 지금이 무얼 할 시간인지. 그려면 바람에 파도, 별, 새, 시계 그대에게 답하리니.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고통받는 시간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취해 있으라! 술에, 시에, 미덕에, 그대 원하는 대로.'
(중략)
사실 전 언제나 어색한 이방인, 누군가를 원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대상도 못 되는 이방인, 어디에 속하지도 못해서 언제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처럼 살 거예요!
- 살아생전 출판을 원치 않았던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불편한 마음으로, 그 씁쓸한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불안하게 책장을 넘겼다. 시대가 권하는 상식, 그러니까 누군가 그렇게 느끼고 행동해야 마땅하다는 그 일반적인 생각,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가족에 대한 상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은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고 최고의 편안함과 안락의 원천이라는 이 쓸데없는 강요된 생각에 오히려 깊이 상처입고, 두려움에 떨고, 죄책감에 찌들고, 자신의 내면으로만 깊이 기어들어가게 되는. 누구하나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상처 하나 있지 않을까? 다만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회가 사람을 더욱 병들게 하는 듯 하다.-
(중략)
아님, 잊기 위해 취하든가요. (보들레르의 산문시 <취하라>를 냉소적인 열정을 담아 비통하고 멋지게 읊는다.)
언제나 취해 있으라. 다른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것뿐. 시간의 무게가 어깨를 아프게 짓눌러 땅바닥에 짓뭉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무엇에 취하냐고? 포도주에, 시에, 미덕에,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저 취해 있으라.
그리고 이따금, 궁전의 계단이나 도랑가 풀밭 위에서, 그대 방안의 쓸쓸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가 반쯤 혹은 전부 가시면, 바람에게 파도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무엇이든 날아다니거나 한숨짓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들에게 물어보라, 지금이 무얼 할 시간인지. 그려면 바람에 파도, 별, 새, 시계 그대에게 답하리니.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고통받는 시간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취해 있으라! 술에, 시에, 미덕에, 그대 원하는 대로.'
(중략)
사실 전 언제나 어색한 이방인, 누군가를 원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대상도 못 되는 이방인, 어디에 속하지도 못해서 언제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처럼 살 거예요!
- 살아생전 출판을 원치 않았던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불편한 마음으로, 그 씁쓸한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불안하게 책장을 넘겼다. 시대가 권하는 상식, 그러니까 누군가 그렇게 느끼고 행동해야 마땅하다는 그 일반적인 생각,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가족에 대한 상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은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고 최고의 편안함과 안락의 원천이라는 이 쓸데없는 강요된 생각에 오히려 깊이 상처입고, 두려움에 떨고, 죄책감에 찌들고, 자신의 내면으로만 깊이 기어들어가게 되는. 누구하나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상처 하나 있지 않을까? 다만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회가 사람을 더욱 병들게 하는 듯 하다.-
2011년 4월 25일 월요일
주제 사라미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중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황소들이 이미 경험한 것보다 더 큰 지옥은 있기 힘들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양쪽에서 황소들의 몸에 매여 있는, 여러 종류의 불꽃놀이 폭죽에 불이 붙여지고, 상당한 시간 동안 폭죽이 폭발하여 투우장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동안, 황소들은 산 채로 구워지고 있었다. 주앙 5세와 그의 신하들이 그 비참한 죽음에 갈채를 보내는 동안, 광분한 그 저주받은 짐승들은 비명을 지르며 투우장 안을 이리저리 내달렸다. 황소들은 살육당하면서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다른 누군가를 죽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광장에서는 불에 탄 살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 냄새는 종교 재판의 성대한 비비큐에 코가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역거움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게다가 황소들은 결국에는 누군가의 식탁에 오르는 것으로 끝장이 나서, 좋은 용도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반면 말뚝에 묶인 채로 불에 탄 유대인의 유해는 그가 남길 수 있는 자산의 전부였다.
- 사라미구의 독특한 해학적인 문장으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어 내는 그의 천재성은 언제나 나의 경탄을 불러 일으킨다. 믿음이 아무런 믿음이 없는 것보다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명분을 주는 듯 하다.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 역사에 저지른 죄악의 양을 보면 말이다. 때론 무언인가에 대한 "믿음"이 혹은 그 "믿음을 지키려는 욕망"을 가진 자가 같은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잔혹함이 이성과 상식의 선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보면 몸서리가 처진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믿음을 가진 자"가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러도 그 "믿음"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이 정당화되리라는 그 엄청난 착각에 대한 무모한 "믿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 사라미구의 독특한 해학적인 문장으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어 내는 그의 천재성은 언제나 나의 경탄을 불러 일으킨다. 믿음이 아무런 믿음이 없는 것보다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명분을 주는 듯 하다.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 역사에 저지른 죄악의 양을 보면 말이다. 때론 무언인가에 대한 "믿음"이 혹은 그 "믿음을 지키려는 욕망"을 가진 자가 같은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잔혹함이 이성과 상식의 선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보면 몸서리가 처진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믿음을 가진 자"가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러도 그 "믿음"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이 정당화되리라는 그 엄청난 착각에 대한 무모한 "믿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중에서
천성적으로 소심한 소냐는 예전에도 자기가 누구보다도 더 쉽게 파멸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든 대가를 치르는 일 없이 그녀를 쉽게 모욕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든 고분고분하게 대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느낀 절망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모든 일을, 심지어 이런 일마저 아무 불평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순간은 너무나도 힘겨운 것이었다.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어 누명을 벗었는데도, 처음 느꼈던 경악과 충격이 사라지고 이제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깨닫게 되자, 의지할 데 없이 나약한 자신의 처지와 모욕감이 그녀의 심작을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견디다 못해 방을 뛰쳐나가 자기 집으로 뛰어갔다.
- 등장인물 중 한 명도 진심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죄와 벌" 중, 동의가 가는 한 부분.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대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님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로 타인하게 잔인하고 몰인정하게 대하는 것을, 누구도 그럴 권리를 그들에게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등장인물 중 한 명도 진심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죄와 벌" 중, 동의가 가는 한 부분.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대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님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로 타인하게 잔인하고 몰인정하게 대하는 것을, 누구도 그럴 권리를 그들에게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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