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남은 본질을 감추고 있지 않다. 나타남은 본질을 드러내 보인다. 나타남이 '본질인 것이다'.
'유한한 것 속의 무한한 것'
프루스트의 천재는 생산된 여러 가지 작품들로 환원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관점들의 무한성, 다시 말하면 우리가 프루스트 작품의 '무궁무진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관점의 무한성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나타남은 그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존재를 '현재(presence)'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왜냐하면 '부재(absence)' 또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상적 조건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신을 개시하는 정도에 따라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어떤 인식하는 의식이 자기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기 위해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이 의식이 이 인식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 '이전'에 '의식의 무'가 존재할 수는 없다. (중략) 의식의 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에는 존재했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의식 및 최초의 의식의 무를 재인저 종합으로서 내세우는 하나의 증인적 의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의식은 무에 선행하는 것으로, 존재로부터 '자기를 끌어낸다.'
존재의 절대자이지 인식의 절대자가 아니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인식된 절대자는 이미 절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지는 인식과 상대적이기 때문이다'락 하는 그 유명한 반박을 면하는 것이다. (중략) 의식은 실체적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의식이 나타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는 뜻에서 하나의 순수한 '나타남'이다. 그러나 의식이 절대자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순수한 나타남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하나의 전적인 공허 (왜냐하면 세계 전체는 의식 밖에 있는 것이므로) 이기 때문이며, 나타남과 존재가 의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물이 지각되는 한에서, 지각되는 사물의 한 존재가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런데 '지각되는 것'의 양상은 수동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현상의 존재가 그의 '지각되는'것 속에 깃든다면, 이 존재는 수동성이다. (중략) 그리하여 나의 존재는 내가 그 원천이 아닌 그런 존재 방식을 참고 견디어 내고 있다. 다만,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또한 나는 존재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이 사실에서 나의 존재는 항상 수동성의 저쪽에 자리잡는다. 예를 들면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은 '단호하게 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녀 나가는 하나의 태도이고,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만일 내가 언제까지나 '모욕 받은 자'로 있어야 한다면, 나는 나의 존재를 참과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상대성'과 '수동성'이라는 이 두 가지 규정은, 존재 방식에 관련된 것일 수는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존재 자체에는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존재현상의 뚜렷한 관찰은 흔히, 우리가 창조설이라고 부르는 매우 일반적인 편견에 빛을 잃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이 세계에 존재를 주었다고 상정한 경우에는, 존재는 항상 어떤 종류의 수동성에 더럽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에서의' 창조는 존재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다. (중략) 존재는 그 창조자에게 뚜렷이 반역하지 않고는 존재로 긍정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는 창조자 속에 녹아들어가 버린다.
(중략)
존재는 '자체(soi)'이다. 이것은 존재가 수동성도 능동성도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개념은 모두 인간적이며, 인간적 행위 또는 인간적 행위의 도구를 뜻한다. (중략) 존재의 즉자상태는 능동과 수동의 저편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부정과 긍정의 저편에 있다.
사실, 존재가 그 자체에 대해 불투명한 것은, 바로 그것이 자체에 의해 충만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는 그것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는 있다. 존재는 그 자체로[즉자로] 있다. 존재는 그것이 있는 것이다.
- 샤르트르를 읽어가는 첫 인상은 '니체'와 '카뮈'에게는 '경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직시'가 있다는 것이었다. 딱딱한 문체속에서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철학적 지성의 노력이 (비록 읽는 이에게 주는 감동은 덜하지만) 보다 이성적인 눈으로 접근하도록 유도한다.
인류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 것도 수천수만년, 개인이 같은 물음을 던진 것도 태어나 자신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한 이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얻을 수 없는 답에 샤르트르는 마침표를 찍듯이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자체이다'. 그렇다. 존재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 그 순간 존재 자체인 것이다.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던지기도 전에, 의식하지 못하는 식물인간이라도, 존재는 그 자체인 것이다. 자체로서 절대인 존재에 대한 샤르트르의 성찰이 시작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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