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식은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이 자체 속에 즉자를 향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기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상도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은 세계 속의 인간이다.
우리는 존재의 탐구를 목표로 출발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일련의 질문에 의해 존재의 핵심으로 인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막 목표에 손을 대려고 한 순간, 질문 자체 위에 던진 일별에 의해 뜻밖에도 우리는 무로 에워싸여 있음이 드러났다.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조건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밖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는 비존재의 끊임없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대답을 에워싸려 하고 있는 것 또한 존재이다. 존재가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탕으로 부각된다. 이 대답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존재는 '그것(cela)'이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rien)."
모든 것은 나의 주의가 향하는 방향에 달려있다.
내가 피에르를 찾으로 이 카페에 들어설 때, 이 카페의 모든 대상물은 종합적으로 배경으로서 구성되며, 그 배경 위에 피에르가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카페가 이렇게 배경으로 구성되는 것이 최초의 무화이다.
부정은 연속성의 갑작스러운 중단이다. (중략) 부정은 하나의 근원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다.
부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비존재가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 밖에서의 끊임없는 현전이라는 것이다. 즉 그 조건은, 무가 존재에 '항상 붙어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중략) 무에 대한 인간존재의 최초의 관계최초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또한 최초의 무화적 행위는 어떤 것일까?
존재와 비존재를 마치 그림자와 빛의 방식으로, 현실의 두 가지 상호 보충적 요소들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중략)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비존재는 두 개의 추상이며, 구체적 실재의 바탕에 있는 것은 양자의 결합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존재가 자기를 넘어서 '다른 것으로' 나가는 한, 존재는 오성의 모든 규정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존재가 자기를 뛰어넘는 한, 다시 말해 존재가 자기의 가장 심오한 갈피 속에서 자기 자신의 뛰어넘음의 근원인 한, 존재는 반대로 그것이 '있는' 그대로 오성에 나타날 것이고, 오성은 자기 자신의 모든 규정 속에 존재를 응고시킬 것이다. 존재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임을 긍정하는 것은, 적어도 존재가 그 자신의 뛰어넘음'인 한', 존재를 그대로 손도 대지 않고 내버려 두게 될 것이다.
비존재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존재의 심장부에서 하는 일이다. 헤겔은 "(존재와 무)는 모두 공허한 추상이며, 양쪽 다 똑같이 공허하다."고 말했는데, 이 경우 그는 공허가 '무언가의' 공허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는 그 자체와의 동일성보다 그밖의 다른 모든 규정의 공허이지만, 비존재는 존재의 공허이다. 다시 말해, 헤겔에 비해 여기서 상기해야 하는 것은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어떤 차이적 성질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무는 논리적으로 존재보다 뒤에 오는 것이다. 그 말은 무는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며, (중략) 우리가 무를, 거기서 존재가 생겨나는 하나의 근원적인 심연으로 내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존재는 무에 선행하는 것이며, 무에 근거를 부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존재가 무에 대해 논리적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가 구체적으로 그 효력을 이끌어 내는 것은 존재로부터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우리는 '무는 존재에 붙어다닌다'라고 표현한다. 요컨대 존재는 생각되기 위해서 전혀 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에 무의 흔적을 털끝만큼도 찾는 일 없이 존재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고찰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무는 빌려온 존재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무가 그 존재를 받아오는 것은 존재로부터이다. 무가 가지고 있는 존재적인 무는 존재의 한계 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 존재가 모두 사라졌다고 해서 비존재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렇게 되면 무도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비존재는 오직 존재의 표면에만 존재한다."
존재에는 하나의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해명해야 한다. (중략) '현존재(Dasein)'에 있어서도 무에 '직면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현상적으로 무를 발견하는 끊임없는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불안이다.
(중략)
인간은 이 복합체에서 출발하여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존재'는 그가 존재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는 한에서 나타난다는 것, 인간존재는 존재 속에서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다른 현편으로는 인간존재를 둘러싸는 이 존재가 세계의 형태를 가지고 인간존재 둘렝 배치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인간존재가 하는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존재가 존재를, 세계라는 형태로 구성된 전체로서 나타나게 하는 것은 오직 그가 존재를 넘어섬으로써만 가능하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모든 규정은 넘어섬이다. (중략) 인간으 세계의 저편에서 자기자신에게 자기를 알려 주고 지평선에서 출발하여 자기 자신을 향해 자기를 내면화시키기 위해 돌아온다. 인간은 '자기에 앞서 있는 존재이다'.
인간존재가 괴로움을 받고 투쟁하고 두려워하는 현실, 그 내부 구조 속에, 마치 존재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부정을 품고 있는 현실이 수없이 많다. (중략) 무는 오직 존재의 기반 위에서만 자기를 무화할 수 있다. 만일 무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 이전도 이후도 아니며, 일반적인 방식으로 존재 밖에서도 아니다. 무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존재의 핵심에서이며, 한 마리의 벌레로서이다.
'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는 '존재되는' 것이다. '무'는 자기를 무화하는 것이 아니다. '무'는 '무화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무를 세상에 도래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곧 또 하나의 문제를 유발한다. 즉 인간에 의해 무가 존재에 도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그 존재에 있어서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물음은 회의와 같이 하나의 행위이므로 현재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의 시간적인 작용이다. 이런 시간적인 작용은, '인간존재는 먼저 존재의 품안에서 쉬고 있으며, 이어서 하나의 무화적 후퇴에 의해 자기를 존재에서 분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를 의식하는 것은 불안에 있어서이다. 또 말하자면, 불안은 존재의식으로서의 자유의 존재방식이다. 불안 속에서야말로 자유는 그 존재 속에 그 자신을 위한 문제가 된다.
(중략)
먼저 키에르케고르가 정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불안은 이 점에서 두려움과 구별된다. 두려움은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 앞에서의 불안이다. 현기증이 불안인 것은,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은 그것이 밖에서 나의 생명과 나의 존재를 변경할 우려가 있는 한,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내가 이 상황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한, 이 상황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만일 나의 생명을 구하도록 나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내가 심연에 몸을 던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정적인 행위는 내가 아직 그것이 아닌 하나의 '나'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내가 아닌 내가, 내가 현재 그것인 나에게 의존하지 않는 한, 내가 현재 그것인 나는 그 자체로는 내가 아직도 그것이 아닌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현기증은 이런 의존의 파악으로서 나타난다.
나는 낭떠러지에 다가간다. 나의 눈길이 심연 바닥에서 찾고 있는 것은 '나'이다. 이 순간부터 시작해서 나는 나의 모든 가능과 희롱한다. 나의 눈은 심연을 위에서 아래로 계속 내려다보면서 있을 수 있는 나의 추락을 모방하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실감한다. 동시에 자살행위는 그것이 있을 수 있는 '나의 가능'이 된다는 사실에서 이번에는 이 자살행위가 이 행위를 채택하는 가능한 동기들을 나타나게 한다 (자살은 불안을 끝낼 것이다).
그것은 과거 앞에서의 불안이다.
본질은 '있었던 것'이다. 본질은 인간존재에 대해서 '그것은......이다'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불안의 경우에, 자유는 그것이 결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재촉받거나 방해받지도 않는 한, 자기 자신 앞에 불안해지는 것이다.
(중략) 사실 불안이란 하나의 가능성을 '나의' 가능성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중략) 이를테면 내가 쓰는 문장은 내가 쓰느 글자의 뜻이지만, 내가 써내려는 작품 전체는 또한 문장의 뜻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하나의 가능성이며 이 가능성에 대해 나는 불안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참된 '나의' 가능이며, 나는 내가 내일도 이 일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내일은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자유가 그 무화하는 힘을 행사할 수도 있다. 다만 이 불안은 이런 작품을 '나의' 가능성으로 인식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본질에서 나의 자유를 떼어 놓는 무 (나는 '이 책을 쓰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그 무엇도', 심지어 내가 원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도 나에게 그것을 쓰도록 강요할 수 없다)를 발견해야 한다.
(중략) 나는 나의 자유가 현재에 있어서든 미래에 있어서든, 내가 현재 있는 그대로의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자유인 한, 나의 가능으로서의 이 책의 저술 자체 속에서 이 자유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그러므로 일어나는 행위 자체는 사람을 안심시킨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행위는 '일은 나의 가능성인가?' 하는 물음을 면제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어나는 행위는 정적주의나 일의 거부, 종국에는 세계의 거부나 죽음 따위의 가능성을 인식할 여유를 나에게 주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해 자명종 소리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그 부름에 응하여 벌써 일어나 있는 한, 이 파악은 자명종시계의 소리에 그 요구를 부여하는 것은 나이고, 게다가 나뿐이라는 불안한 직관으로부터 나를 지켜 준다. 같은 방식으로 일상생활의 도덕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윤리적 불안을 배제한다. 내가 모든 가치에 대한 나의 근원적인 관계에서 나를 응시할 때, 그것에는 윤리적 불안이 있다. 사실, 가치는 하나의 근거를 구하는 요구이다. 그러나 이 근거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존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상적인 본성의 근거를 그 존재에 두는 가치는 모두, 바로 그 사실때문에 가치인 것을 그만두고, 나의 의지의 타율을 실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그 존재를 그 요구에서 끌어내는 것이지, 그 요구를 그 존재에서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 결과로서 나의 자유는 모든 가치의 유일한 근거이다.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내가 이러이러한 가치, 이러이러한 가치의 기준을 채택할 때, 그 정당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모든 가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나의 존재인 한, 나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는 내가 모든 가치의 근거 없는 근거인 것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중략) 모든 가치 앞에서의 이 불안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이상성의 승인이다.
그러나 보통, 나는 모든 가치를 매우 안심하는 태도로 대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상 내가 모든 가치의 세계 속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나의 자유에 의해 존재 속에 지탱되고 있다는 불안한 자각은 뒤에 오는 간접적인 현상이다. 직접적인 것은 긴박하게 닥쳐오는 이 세계이다. 내가 스스로 구속되어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나의 행위는 모든 가치를 자고새처럼 날아가게 한다. '비열'이라는 반가치가 내 안에 생기는 것은 나의 분개 때문이며, '위대성'이라는 가치가 나에게서 생겨나는 것은 나의 찬미 속에서다. 특히 내가 많은 금기에 실제로 복종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 금기를, 사실상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 나에게 나타낸다. 스스로 '성실한 신사'로 자처하는 시민이 성실한 것은, 도덕적 가치를 고려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세계 속에 나타나자마자 성실이라는 뜻을 가진 하나의 태도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실함은 하나의 존재를 획득한다. 그것은 새삼스럽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가치는 잔디밭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팻말과도 같은 수많은 작은 현실적 요구들로 나의 앞길에 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자명종시계와 팻말, 납세통지서.경찰관이 모두 다 불안에 대한 울타리가 되어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나에게서 멀어지자마자, 나는 미래에 기대를 걸야 하므로, 내가 나 자신을 향하게 되자마자 나는 곧 자명종시계에 그 뜻을 부여하는 자로서, 팻말에 따라 꽃밭이나 잔디밭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금하는 자로서, 상사의 명령이 긴급한 것임을 알고 있는 자로서, 자신이 쓰고 있는 책의 흥미를 좌우하는 자로서, 요컨대 자기 행동을 모든 가치의 요구에 따라 결정하기 위해 모든 가치들이 존재하게 하는 자로서, 나 자신을 발결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근원적이고 유일한 계획에 직면하여, 오직 홀로 불안 속에 떠오른다. 모든 방벽, 모든 울타리는 나의 자유의 의식에 의해 무화되어 무너진다. 가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사실을 거스르면, 나는 어떤 가치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것도 나 자신을 거슬러서 나를 안전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무로 말미암아 나는 세계에서도 나의 본질에서도 분리되어 있으므로, 나는 세계의 뜻과 나의 본질의 뜻을 스스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오로지 혼자서, 핑계도 대지 못하고 변명할 여지도 없이 그 뜻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불안이란 자유 자체에 의한 자유의 반성적인 파악이다. 이런 뜻에서 불안은 매개이다. 왜냐하면 불안은 그 자체의 직접적인 의식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요청의 부정에서 생겨나기 때문이고, 내가 스스로 구속하고 있던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할 때, 그리고 나 자신을 의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의 존재로 이전의 양해와 그 모든 가능의 판단 이전의 뜻을 가지는 의식으로서 파악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자유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든지, 우리가 어떤 변명의 필요를 느낄 때는 언제든지 결정론을 믿는 것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인'으로서, 또는 사물로서 '밖으로부터' 파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불안을 피한다. (중략) 그것은 이미 건설된 하나의 과정이며 명백하게 우리에게서 불안을, 즉 우리의 자유의 참된 '직접소여'를 은페하기 위한 과정이다.
(중략) 즉 나는 내가 피하고 싶어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계속 나와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대상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불안과 불안의 지향적 목표, 그리고 불안 속에 위안이 되어 주는 신화로의 도피는 모두 똑같은 의식의 통일 속에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요컨대 나는 알지 않기 위해서 피하는 것이지만, 나는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을 수 없고, 또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는 불안을 의식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불안은, 사실은 가릴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의식 속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 즉 '그것으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인간이 질문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가 그 자신의 무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인간이 근원적으로 존재에 있어서의 비존재에 속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그 자신에 의해서, 무에 전율하는 경우뿐이다. 그리하여 인간존재라는 이 시간적 존재 속에서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초월이 비로소 나타난다.
-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 '자유'를 가진 인간의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를 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인간, '무'라는 주제를 꺼내어 보이며 '언젠가 무로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 '무가 존재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의 논리.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도입부에는 이미 인간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을 바닥에 깔고 있다. 그는 세상의 주체로서의 인간, 모든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인간, 자유라는 위대하고도 무거운 짐을 지고 불안에 떠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눈 앞에 꺼내든다. 이 인간의 무한한 권위에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고, 존재라는 그 엄청난 사실을 외부로 던져버리지 않고, 받아들 용기. 그것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존재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그 존재의 위대성을 책임질 열쇠는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