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러가 '원한적인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뜻과 기능, 그것이 '부'이다. (중략) 즉,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존재에 있어서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중략) 차라리 인간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태도이기도 하고, 동시에 의식이 그 부정을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일정한 태도를, 선택하여 검토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 태도가 아마도 '자기기만'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허위가 하이데거의 이른바 '공존재(Mit-sein)의 정신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허위는 나의 존재, '타인'의 존재, 타인을 '위한' 나의 존재, 나를 '위한' 타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중략) 자기기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허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전적으로 다른 점은 자기기만에서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진실을 가리는 것이다. (중략) 그렇다 해도 자기기만은 인간존재의 그 밖의 모든 현상과 달리 '공존재'에 의해 조건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존재'는 하나의 '상황'으로 나타남으로써 자기기만을 부채질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기만은 언제라도 이런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다. 요컨대 자기기만은 밖에서 인간존재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중략) 어떤 최초의 의도, 하나의 자기기만적인 기도가 필요하다.
자기기만의 이런 온갖 양상 속에는 어떤 통일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모순되는 개념을 형성하는 일종의 기술, 즉 어떤 관념과 그 관념의 부정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을 형성하는 기술이다. 그렇게 하여 발생된 개본 개념을 하나의 '사실성'인 동시에 하나의 초월'이라고 하는 인간존재의 이중의 성질을 이용한다.
(중략) 우리를 먼저 초월의 한복판에 던져 넣은 다음, 갑자기 우리를 우리의 사실적인 본질의 좁은 한계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런 구조는 저 유명한 문구 '그는 그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 되었다',
나의 행위 가운데 어떤 하나에 나의 시선과 타자의 시선, 이 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나에게는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쪽의 시선에 비치는 행위와 다른 쪽의 시선에 비치는 행위는 결코 똑같은 구조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훨씬 뒤에 가서 우리가 보여주게 되겠지만, 또 누구나 그렇게 느끼겠지만, 나의 존재의 이 두 가지 모습 사이에는, 마치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나 자신의 진실이지만, 타자는 나에 대해 왜곡된 영상밖에 가지지 않는 것과 같은 식으로 외관과 존재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타자에게 있어서의 나의 존재와 나 자신에게 있어서의 나의 존재가 동등한 존재 자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분열하는 하나의 종합이 생기는 것이며, 대자가 대타에서, 대타가 대자에서 끊임없이 달아나는 숨바꼭질이 일어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오로지 그가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오로지 그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이것이 그 이상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즉자의 정의 - 또는 이른바 동일률이 아닐까? 사물의 존재를 이상으로 세우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이런 존재는 인간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동일률의 원칙은 보편적으로 보편적인 공리는커녕, 단순히 영역적으로 보편성을 가진 종합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 아닐까? (중략) 인간존재가 필연적으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 있을 수 있어야만 한다.
카페의 종업원은 자신의 신분을 가지고 놀며 자신의 신분을 '실현한다.' (중략) 그들의 신분은 모두 의식으로 되어 있다.
공중은 그들이 그 신분을 하나의 의식으로서 실현하기를 요구한다. 식료품 가게 주인, 양복점 주인, 경매인 등에게는 각자의 춤이 있다. 이 춤으로서 그들은 자기의 손님에게 자신이 식료품가게 주인, 양복점 주인, 경매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 (중략) 마치 우리는, 그가 그곳에서 도망치지나 않을까, 그가 갑자기 그의 신분에서 빠져 나와 그의 신분을 떠나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다.
나의 의식은 그것이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대상 또는 상태가 어떤 것이든, 적어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그러나 후설이 정확하게 본 것처럼 나의 의식은 근원적으로 타자에게는 하나의 부재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나의 의식은 나의 모든 태도와 나의 모든 행위의 의미로서는 항상 현존하는 대상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항상 부재하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의 직관에는 하나의 끊임없는 질문으로서, 더 정확하게 말해 하나의 끊임없는 자유로서 자기를 내주기 때문이다. (중략) 그의 자유로운 판단은 늘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중략)
상대편의 판단은 항상 나의 모든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저 너머에 있어서 이 판단을 환기시키려고 해도 되지 않는 일이다. 상대편의 판단은 그것이 그 자체로서 나의 노력에 힘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면 결코 나의 노력을 통해 환기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자기를 밖으로부터 환기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미래는 처녀이고, 모든 일은 나에게 허용되어 있다.
즉 나의 일상적인 존재에 있어서도, 나는 사실은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를테면 '슬프게 있다'의 있다 -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은 존재방식에 있어서, 내가 그것으로 있는 것 - 와, 내가 나에게 감추고자 하는 '용감하게 있지 않다'의 '있지 않다' (비존재) 사이에는, '아니-있음'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것, 이것이 존재론적 앎이다. (중략) 자기기만이 가능한 조건은, 인간존재가 그 가장 직접적인 존재에 있어서, 즉 반성 이전의 코기토의 내부구조에 있어서, 그것이 있지 않은 그대로의 것으로 있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참된 문제는 분명하게 자기기만이 신앙이라는 점에 있다. 자기기만은 냉소적인 허위일 수도 없고, 대상의 작관적인 소유라는 뜻에서의 명증일 수도 없다. 그러나 대상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또는 대상이 불명확하게 주어졌을 때, 그 대상과 존재의 밀착을 신념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때의 자기기만은 신념이며, 자기기만의 본질적 문제는 신념의 문제이다.
자기를 설득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 낸 그런 개념을 우리가 자기기만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략) 자기기만은 너무 지나치게 요구하지 말자고 하는 결심, 납득이 가지 않을 때도 그대로 만족하자는 결심, 확실하지 않은 진리에 대한 자기 동의를 결의를 통해 강행하려는 결심 속에 전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기기만의 이 최초의 계획은 신앙의 본성에 대한 하나의 자기기만적인 결의이다.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믿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자기가 믿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이 자괴는 모든 신앙의 바탕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나를 용감하다고 '믿으려' 하는 순간, 나는 내가 비겁하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중략) 이런 신념들은 신념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자체를 드러내 보인다.
- 이 '자기기만'에 대한 서술은 논리적인 서술이기로 느껴지기보다는, 내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는 '타자의 의식'이다. '타자'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은 전적으로 나의 외부에 있다. 따라서, 타자의 의식에 대한 나의 의식은 철저한 부재로 남는다. 그러나, 타인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우리는 타자에 대한 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의식적인 노력이 때로는 성실하게, 혹은 불성실하게 수행될 수 있으나, 큰 차이는 없다고 샤르트르는 말한다. 이 역할이나 신분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존재에 있어 '즉자'나 '대자'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신념이나 신앙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믿는다'라는 것 자체가 '믿지 않는다'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믿는 것'이라는 행위에는 그 저변에 '불확실성'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결심'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는 '타자의 의식'이다. '타자'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은 전적으로 나의 외부에 있다. 따라서, 타자의 의식에 대한 나의 의식은 철저한 부재로 남는다. 그러나, 타인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우리는 타자에 대한 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의식적인 노력이 때로는 성실하게, 혹은 불성실하게 수행될 수 있으나, 큰 차이는 없다고 샤르트르는 말한다. 이 역할이나 신분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존재에 있어 '즉자'나 '대자'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신념이나 신앙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믿는다'라는 것 자체가 '믿지 않는다'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믿는 것'이라는 행위에는 그 저변에 '불확실성'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결심'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역할을 성실하게 하기 위해 불확실한 신념에 몸을 던지는 행위 (자기기만적 행위)를 배제한 존재가 어떠한 존재로 남을 수 있을지 알고 싶다. 마치 투명인간이 옷을 벗었을 때 남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싶은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투명인간이 옷을 벗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그는 분명 존재한다'. 존재와 무가 하나라는 샤르트르의 논점을 서서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지금 그대로 있지 않은 나'를 위해 움직이는 '대자'로서 살아나감을 넓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존재의 의미는 '나를 던지는' 행위에 의해 그 의미를 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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