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6일 토요일

보부아르의 "편안한 죽음"중에서

'그 사람도 죽을 나이가 됐지' 하는 말. 노인들의 슬픔, 노인들이 쫓겨가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도 어머니에 대해서마저 그런 상투적인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일흔이 넘은 자기 부모나 조부모가 숨을 거둔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쉰 살이나 된 여자가 자기 어머니가 죽었다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나는 그 여자가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차피 죽을 운명일 테니까. 여든 살이면 그야말로 죽어도 좋을만큼 많으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는다.
어머니도 연세가 연세인지라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어도 그 때문에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대한 끔찍한 경악스러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암, 혈전증, 패충혈 따위의 병은 저 넓은 하늘에서 비행기의 엔진이 갑자기 멈추는 것만큼이나 예상할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일이다.
어머니가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다 죽어 가는 상태에서 한 순간 한 순간 속에 깃들인 무한한 가치를 확인하던 때 어머니는 희망을 갖고 기운을 냈다. 하지만 어머니의 헛된 집념은 마음을 달래주는 일상이라고 하는 막을 찢어 버렸다.
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는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비록 그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가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솔직하면서도, 때론 객관적인 시선으로 쓴 글이다. 우린 때론 남의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곤 한다. 죽을 때가 됐지, 죽는 게 났지.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면 우리는 끝없는 당혹감에 왜 나라는 질문을 알 수 없는 절대자에게 쉼없이 던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