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4일 수요일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2부 중

자연을 거울삼아 - 한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할 때,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꽤 정확한 묘사가 아닐까? 즉, 그가 높게 자란 황금빛 보리밭을 거닐기를 좋아한다는 것,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 저녁의 숲과 꽃의 빛깔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연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크고 윤기 있는 잎을 달고 있는 호두나무 아래에 있으면, 마치 가족 곁에 있는 듯한 느긋함을 느낀다는 것,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산 속에서 몇 개의 작은 외딴 호수를 발견하는 일인데 그것은 그에게 그 곳에서 고독 자체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라는 것, 또한 그는 가을이나 초겨울 저녁 창가에 가만히 다가와서 영혼이 없는 모든 소리를 벨벳 커튼처럼 삼켜버리는 저 안개 낀 여명의 잿빛 적막을 사랑한다라는 것, 아직 침식되지 않은 바위를 지금까지 남아 태고의 일을 이야기하려는 말 없는 증인처럼 느끼고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 왔다는 것, 끝으로 꿈틀거리는 뱀 껍질과 '맹수의 아름다움'을 지닌 바다와는 친숙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라는 식의 묘사다.

비평가들을 동정해서 - 곤충들이 찌르고 쏘는 것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다. 비평가들의 경우도 그와 똑같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피일 뿐, 우리의 고통은 아니다.

내 머리는 나 자신의 목 위에 제대로 얹혀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면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이 가련한 녀석만이 나 자신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은가를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가' 잘못된 머리가 얹혀진 원주 입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아름다워지려는 의지 속의 체념 - (중략)... 언젠가 위대한 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영혼의 문이 넓은 사람의 매혹을 거뒤들이기 위하여.

의도를 잊는다 -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대개 여행 목표가 잊혀진다. 거의 모든 직업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선택되고 시작되지만,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되고 만다. 의도를 잊는다는 것은 행해지고 있는 어리석은 행위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능. 집이 불탈 때 사람들은 먹는 일조차 잊어버린다. - 그러나 불이 꺼진 후에는 잿더미 위에 앉아 다시 먹는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가 오래도록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그대를 들여다볼지니.

긍지 있게 그리고 침착성을 가지고 살라. 언제나 초연하라. - (중략)... 용기, 통찰, 공감, 고독, 언제나 이 네가지 덕의 소유자가 되라.

자기의 나쁜 사정을 다른 사람 탓으로 하든, 자신의 탓으로 하든 - 전자는 사회주의자가 하는 짓이며, 후자는 그리스도교가 하는 짓이다. - 아무런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상승하는 최고의 삶은 누리기 위해, 퇴락하여 가는 삶의 가장 가차 없는 압박과 제거를 요구하는 모든 경우를 위해, 예를 들면 생식의 권리를 위해, 태어나는 권리를 위해, 사는 권리를 위해 의사에게 새로운 책임을 지우는 것,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을 때 자랑스럽게 죽는 것,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밝고 즐겁게 자식들과 다른 이들 속에서 이루어진 적당한 시기의 죽음, 그리하여 죽어가는 사람이 아직 현실적으로 생존하여 진정한 이별을 고하는 것, 그와 똑같이 자신이 달성하고 의욕을 가진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 인생의 총계가 가능한 죽음.

그러나 과연 내가 오늘날 읽히는 것만이라도 바라고 있는지 결국 누가 알겠는가? 시간의 이빨에 견뎌내는 사물을 창조한는 것, 형식에서 보더라도, 실질에서 보더라도 조그마한 불멸성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 나는 이 이하의 것을 내 자신에게 요구할 만큼 겸손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 니체의 글 속에 나는 그의 인간 안에 있는 '초인'에 대한 희망을 본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누구보다 숭고한 인생을 고귀하게 살았던 그, 그의 고독이 절정에 이르러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지경이 이르렀다해도, 그 순간에도 자신을 다지고 펜을 잡았을 것이다.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깊은 공감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다시 본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1부 중

개인은 자신이 심은 나무에서 손수 과일을 따려 하기 때문에 100년 동안이나 계속 똑같은 손질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다음 세대에게 그늘을 제공할 나무들을 더 이상 심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의 느린 화살 - 가장 고귀한 종류의 미는, 갑자기 매혹시키는 그런 미나, 태풍처럼 취하도록 덮쳐오는 미가 아니라, 인간이 거의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지니고 있는 듯한, 또한 꿈속에서 우연히 만나는 일도 있지만 겸손하게 우리 마음에 걸려 있다가 드디어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고, 우리의 눈을 눈물로, 우리의 마음을 동경으로 채우듯, 천천히 스며드는 듯한 미다. 우리는 미를 보고 무엇을 동경하게 되는가? 아름다움에는 많은 행복이 결부되어 있으리라고 우리는 공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오류다.

손으로 하는 일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 말하지 말라! ...(중략)... 그들은 자신에게 그것을 위한 시간을 부여했다....(중략)... 밤낮으로 이러한 것들의 수집자가 되어라. 이와 같은 다양한 수업으로 이삼십 년을 보내도록 하라. 그 다음 작업실에서 창작되는 것은 거리의 빛 속에 나가도 좋다.

물러선 것이지 뒤돌아간 것은 아니다. - (중략)... 단지 적당한 시기에 그 영역에서 떨어져 나오기만 하면 그는 더욱 급속히 전진할 것이다. 그의 발은 날개를 달고 있다. 그의 가슴은 더 조용히 숨을 길게, 참을성 있게 호흡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는 도약하는 데 충분한 여지를 얻기 위하여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그래서 이 후퇴에는 뭔가 무서운 것, 위협적인 것마저 있을 수 있다.

자유정신의 조심성 - (중략)... 그러나 이따금 그에게는 자유의 일요일이 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삶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까지도 조심스럽고 숨이 짧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식의 목적에 필요한 한에서만 애착과 맹목의 세계에 관계하려 하기 때문이다.

노년이 찾아오면 당신의 자연의 소리에, 세계 전체를 즐거움으로 지배하는 자연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가를 더욱더 깨닫게 된다. 노년에 그 정점을 갖는 이와 같은 인생은 지혜 속에도, 변함없는 정신적 기쁨의 부드러운 햇빛 속에도 정점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즉, 노년과 지혜를 당신은 인생의 한 산등성이에서 만난다. 자연이 그렇게 바랐던 것이다. 그 뒤 죽음의 안개가 다가오는 것은 때가 왔다는 것이며, 화를 낼 아무런 까닭도 없다. 빛을 향하여...... 당신의 마지막 움직임, 인식의 어떤 환호성...... 당신의 마지막 목소리.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직 종교개혁 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다. 어떻게 다를 수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의견이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한 몇 가지 수단을 더 이상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뛰어넘게 하며 우리가 높은 문화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지금도 종교개혁 시대의 방식으로 혐오와 분노의 폭발로 모든 의견을 공격하고 진압하는 사람은, 만약 다른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자기 적을 화형에 처했을 것이며, 만약 종교개혁의 적으로서 살고 있었다면 이단 심문의 모든 수단에 호소하였으리라는 것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이단 심문은 당시로서는 합리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온 영역에 선포되어야 했던 일반적 계엄 상태일 뿐이며, 모든 계엄 상태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방랑자 - 아주 조금이나마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밖에 느낄 수가 없다. 비록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가는' 여행자로서는 아니더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그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잘 관망하고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개개의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자신 속에 변화와 무상함을 기뻐하는, 뭔가 방랑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인간에게는, 피로할 때 휴식을 가져다 줄 도시의 문이 닫혀져 있는 것을 보게 될 심술궂은 밤들이 찾아올 것이다. 아마 거기에는 동방에서처럼 사막이 문까지 이어지고, 맹수가 어떤 때는 멀리, 어떤 때는 가까이서 울부짖고, 강풍이 휘몰아치고, 강도가 그의 수레를 끄는 짐승을 훔쳐 갈지도 모른다. 그때 그에게는 아마 사막위에 있는 또다른 사막과 같은 처참한 그의 마음은 방랑에 지쳐버린다. 그리고 아침 해가 분노의 신처럼 불타며 떠오르고, 거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는 여기에 살고 있는 자의 얼굴에서 아마도 문 밖에서보다 더 많은 사막.더러움.기만.불안정을 본다. 그리고 낮은 밤보다 심할 것이다. 이런 일이 언젠가 방랑자의 신변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보상으로 다른 지방과 다른 날들의 환희에 찬 아침이 온다. 그때 그는 희미한 빛 속에서 이미 뮤즈의 무리가 자기 곁에서 춤추며 사막의 안개 속을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뒤 그가 오전의 영혼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조용히 나무 아래를 거닐때 그 가지와 무성한 잎들 사이로 좋고 밝은 것이 그에게 던져진다. 그것은 산과 숲 그리고 고독 속에 살고 있고 그와 마찬가지로 또는 쾌활한 또는 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방랑자와 철학자인 그 모든 자유정신들의 선물이다. 새벽녘의 비밀에서 태어나 그들은 왜 열 번째와 열두 번째를 치는 종소리 사이의 낮이 이토록 순수하고 환하고 거룩하고 시원스러운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생각에 잠긴다. 그들은 '오전의 철학'을 찾고 있다.

-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처음 만났던 것은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집의 책장에 전집 중, 제목이 너무도 멋있어서 두꺼운 책을 꺼내 읽으려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린 나에게는 역부족이었었다. 나는 막연하게 니체의 반기독교적인 문장에 매료되어 그를 동경해왔던 것 같다. 니체의 글은 철학이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의 아포리즘은 반어적이거나 많은 경우 다양한 변장을 하고 나타나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단순한 문장만으로는 그의 철학을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 그의 철학에 나치에 이용되고, 단지 반신론자로서의 철학으로 오인되어 왔던 것 같다. 니체를 읽으려면 그의 저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에 칼날을 세우고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의 철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바이마르의 석양을 바라보는 죽기 전 미친 니체의 모습을 생각하며 울고 말았다. 그가 말한대로,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 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대들은 일체의 것의 회귀를 원한 것이다." 순간으로 영원을 이야기한 치열한 '자유정신'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