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카뮈의 '시지프 신화' 중 2

부조리한 인간

그는 또한 위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 풍성해질지 모르되 그들이 사랑의 대상으로 택한 사람들을 필경 가난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머니라든가 정열적인 여인은 필연적으로 메마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세상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감정, 단 하나의 존재, 단 하나의 얼굴뿐, 다른 모든 것은 다 탕진되고 없는 것이다. (중략)
그에게 중요한 것은 똑똑히 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와 맺어주는 힘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그것도 오직 책이나 전설이 만들어낸 어떤 집단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비추어보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중략) 부조리의 인간은 여기서도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화된다. 이리하여 그가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방식은 적어도 그 방식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 못지않게 그를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스스로 덧없는 것인 동시에 둘도 없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랑만이 너그러운 사랑이다.

신에게 찾아가서 무슨 은신처를 구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부조리에 사무쳐 있었던 삶의 논리적 귀결이요, 내일 없는 기쁨을 향해 치닫던 존재의 성난 결말을 구상화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영광이란 모두가 다 덧없는 것이다. 시리우스 별에서 내려다본다면 괴테의 수많은 작품들도 1만 년 후에는 티끌로 변할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잊혀질 것이다. (중략) 이 생각을 천착해 보노라면 우리의 소란스러운 몸부림이 줄어들게 되고, 그리하여 무관심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심오한 고귀함에 이르게 된다. (중략) 모든 영광들 중에서 가장 속임수 없는 것은 몸소 살아가는 영광이다.

햄릿은 말한다. "피와 판단이 너무나도 야릇하게 서로 뒤섞인 나머지, 운명의 손가락이 제멋대로 노래 부르게 하는 피리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복 있을지어다." 라고.

니체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동감이다."라고.

내가 개인을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개인이라 보잘것없고 비천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승리로 끝날 대의들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패배로 끝날 대의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중략)
관조와 행동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늘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찢어짐은 끔찍하다. 그러나 자부심을 가진 마음에게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 신이나 시간이냐, 십자가냐 칼이냐가 있을 뿐이다. (중략) 나는 타협하여 시대 속에 살면서 영원을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단다. 이를 가리켜 동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혐오한다. 나는 전체 아니면 무를 원한다.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이 세계 안에서 인간적인, 오직 인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무엇이든 보다 뜨거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긴장된 얼굴들, 위협받는 동지애, 인간들 상호간의 지극히 강하고 수줍은 우정,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진정한 부(wealth)인 것이다.

만약 슬기롭다는 말이, 갖지도 않은 것에 대한 공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적용될 수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슬기로운 사람들이라 하겠다. 

여하간 부조리의 추론에 보다 뜨거운 체온이 담긴 모습들을 회복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미래도 없고 그렇다고 약해지지도 않는 세계의 척도에 따라 살 줄 아는, 시간에 얽매이고 적지에 발목 잡힌 또 다른 많은 얼굴들을 거기에 추가해볼 수도 있다. 그러면 신 없는 이 부조리의 세계는 분명하게 생각하고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다.


부조리한 창조

중요한 것은 부조리와 더불어 살아 숨쉬는 것이고 그것이 주는 교훈을 알아차리고 그 피와 살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조리한 즐거움의 전형은 다름 아닌 창조이다. "예술, 오로지 예술. 진리로 인하여 죽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들은 예술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중략) 그러나 매순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세계와 맞대면하고 그리하여 질서 있는 광란 속에서 모든 것을 다 맞아들이는 인간은 그의 마음속에서 또 다른 열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체계 '한복판'에 갇혀 있는 철학자와 자신의 작품만 '쳐다보고' 있는 예술가 사이에서 제기되는 모순에 대한 것이다. (중략)
부조리한 창조자는 자신의 작품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작품을 포기할 수도 있다.

진정한 작품은 본질적으로 '더 적게' 말하는 작품이다. (중략) 작품이 경험속에서 도려낸 한 토막, 내면의 광채가 집약되어 있으면서도 제한됨이 없는, 다이아몬드의 한 조각에 불과할 때 이 관계는 좋은 것이다. (중략) 예술가란 무엇보다 먼저 잘 살 줄 아는 사람이다. 물론 여기서 산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느낀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졸렬한 소설이 많다고 해서 가장 훌륭한 소설들의 위대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길에서 쓰러지는 사람은 살아남을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소설가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지어내어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를 창조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철학적 소설가다. 다시 말해서 경향소설가의 반대이다. 발자크, 사드, 멜빌, 스탕달,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말로, 카프카 등은 그런 소설가의 몇 가지 예라고 하겠다.

설명을 하고 싶은 유혹이 가장 강한 세계가 창조인데 거기서 과연 우리는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현실 세계의 의식이 가장 강한 곳이 이 허구의 세계인데 과연 나는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욕망에 굴하지 않은 채 끝까지 부조리에 충실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숙고해보아야 할 문제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중략)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습관에 젖어든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데 인생의 모든 노력과 최상의 몫이 이 돈벌이에만 집중되어버린다. 행복은 잊혀지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한다. (중략) 인간의 마음속에서 집요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희망이다. 가장 헐벗은 인간들도 이따금 환상에 동의하고 만다. (중략) 이리하여 빛의 제신과 진흙의 우상이 생긴다. 그러나 진정으로 찾아내어야 할 것은 인간의 얼굴들로 인도하는 중간의 길이다.

따라서 키릴로프는 자신을 희생시킨다. 그러나 비록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다 해도 속아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죽음 다음에 미래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복음적 슬픔에 사무친 채 신-인간으로 머무른다.

그는 공허를 자신의 색채로 물들여야 한다.

의지가 곧 기적을 이룬다.

즉, 인간 조건에 대한 집요한 반항, 불모의 것인 줄 잘 알고 있으면서 노력을 계속하는 불굴의 인내가 그것이다. 창조는 나날의 노력, 자기 억제, 진리의 한계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절도와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고행이다. 그런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것을 위해서' 이고 끝없이 되풀이하고 제자리걸음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위대한 작품은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시련과, 또한 인간이 그의 망령들을 이겨내고 자신의 적나라한 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리라. 

이는 그들 삶의 부조리를 깨달음으로써 지나칠 만큼 열광하며 삶 속에 뛰어들게 되는 것과 같다. 남은 것은 운명이다. 오직 운명의 결말만이 숙명적이다.


시지프 신화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었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에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한다. 그 운명도 시지프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중략)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저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걸음, 잠시 동안의 휴식 때문에 특히 시지프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시지프의 말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중략)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중략)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중략)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고자 원하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 산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 산다는 것은, 어찌보면 잔인한 일이다.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형수와도 같은 입장이다. 설령 감옥 밖에 다른 세상이 있다 하더라도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는 사형수에게는 그 밖의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현재와 자신, 그 뿐이다. 카뮈가 말하는 '몸소 살아가는 영광'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 외에는 중요치 않다.
  카뮈가 비유한 시지프,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시지프들, 그들은 매일 자신의 돌을 굴려올리고 있다. 모든 형벌을 받은 자들이 시지프는 아닐 것이다. 어떤 이들은 비탄에 잠겨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도 있고, 원망과 애원을 할 수도 있으며, 사죄의 눈물로 사면을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의 대변자, 시지프는 묵묵히 돌을 굴려 올린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성실히 자신의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운명의 의미는 그의 발걸음, 그의 고통, 그의 생각, 그의 한숨, 그의 상상, 그의 추억 속에 모두 녹아있는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떠한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든 인간은 그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절대적 가치는 오늘의 삶이, 깨어있음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창조에 대한 카뮈의 견해는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 너무도 일치한다. 그러나, 혼자만 스스로의 생각을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던 나에게 든든한 지원군이다. 동의하지 않고, 희망하지 않고, 명료한 의식으로 써내려가야 할 성실한 사명, 부조리 속에서도 맺히는 열매! 비록 썩어 사라질지라도 현재의 삶을 살아나가는 인간의 위대한 의지가 바위를 굴려 올린다. 굴러떨어질지라도 정상을 향해 굴려지는 바위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지더라도 인간들이 흘린 땀과 피의 냄새가 언제나 천지에 진동할 것이다. 그 냄새에 신들이 기절초풍하더라도!


카뮈의 '시지프 신화' 중 1

부조리의 추론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멜로드라마에서처럼 하나의 고백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이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을 용의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한한다.

비극적인 일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결국 그 사람됨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지는 애착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비참보다도 더 강한 그 무엇이 있다.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않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육체는 소멸의 위협과 마주치면 뒤로 물러선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워서 익힌다.

이 시론의 제3의 치명적인 회피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 내세의 삶(우리가 그 삶을 얻을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에 대한 희망, 혹은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며 삶을 배반하게 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 말이다.

논리적이 되기는 언제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궁극에까지 논리적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중략) 과연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논리란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리는 일 없이, 자명함이라는 단 하나의 빛 속에서, 내가 여기 그 기원을 지적하고 있는 추론을 진행시킴으로써만 그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천에 옮긴 것은 가장 순순한 반항의 형태인 사유의 자살이었다. 참다운 노력이란 포기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그곳에 살아 남아 버티면서 멀고 구석진 고장에 서식하는 괴이한 식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일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건대, 단순한 '관심'이 모든 것의 기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중략)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한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그보다 한 단계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낯설음이다. 즉, 세계가 '두껍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의 돌이 얼마나 낯선 것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완강하게 닫혀 있는 것인가를, 그리고 자연이, 하나의 풍경이 우리를 어느 만큼 고집스럽게 부정할 수 있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중략) 한동안 우리는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 세게 동안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세계에 미리부터 부여해놓은 모습과 윤관만을 이해해왔기 때문이며, 이제부터는 그러한 인위적인 수단을 행사할 힘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중략)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갑자기 우리를 그토록 고독하게 만드는 것을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단 하나의 사실만 말해두자. 즉 세계의 낯설음과 두꺼움,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마치 죽음 같은 것을 '전연 몰랐다'는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정녕 놀라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 대해서, 무엇에 대해서 '그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 속의 이 마음, 나는 이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이 세계, 나는 이 세계를 만져볼 수 있으며 이것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나의 모든 지식은 여기서 멈춘다. 그밖의 것으 조작이다. 왜냐하면, 가령 나 잔시도 확신하고 있는 터인 자아를 막상 포착해보거나 정의하고 요약해보려고 들면, 이 자아는 그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에 불과한 것이 되니 말이다. (중략) 내 것인 이 마음 자체조차 나에게 영원히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머물 것이다.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하여 갖는 확신과 내가 그 확신에 부여하려는 내용 사이에 가로놓인 단층은 결코 메워질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나 자신에 게 이방인일 것이다. 심리학에 있어서든 논리학에 있어서든, 여러 가지 진리들은 있으나 유일한 진리는 없다.

또 다른 예로, 여기 나무들이 있다. 나는 그 꺼칠꺼칠한 촉감이나 물기를 알고 있으며 그 맛을 느낀다. 여기 이 풀잎과 별들의 냄새, 밤, 마음이 느긋해지는 저녁나절들, 내가 이토록 저력과 힘을 실감하는 터인 이 세계의 존재를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상의 모든 지식은, 이 세계가 나의 것이라고 확신시켜줄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제동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렇듯 나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줄 것 같던 과학은 가설로 끝나고, 저 명증성은 비유속으로 가라앉고 저 불확실성은 예술작품으로 낙착되어버린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 많은 노력을 했던가? 차라리 저 산들의 부드러운 곡선과 어수선한 가슴 위에 얹혀 놓이는 저녁의 손길이 세계에 대하여 내게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중략) 만일 내가 과학을 통하여 제반 현상들을 파악하고 열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세계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이 세계의 들어가고 나온 기복을 손가락으로 남김없이 다 더듬어본 후라 할지라도 역시 내가 더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중략) 바란다는 것, 그것은 곧 온갖 역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태평함, 마음의 졸음 또는 치명적인 체념이 주는 이 중독된 평화가 생겨날 수 밖에 없도록 모든 것이 다 골고루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조건을 냉철하게 고찰한 다음, 실존은 굴욕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중략) 그 역시, 잠들어서는 안 되며 마지막 다할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이 부조리한 세계 안에서 버티면서, 소멸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세계의 성격을 밝혀낸다. 그는 폐허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얻어내거나 아니면 무, 둘 중의 하나를 원한다. (중략) 그러나 열망뿐인 사람들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고 모두가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스스로의 명증성과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공언한다.
(중략)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숨막히는 하늘 아래서 살게 되면 거기서 빠져나오든가 아니면 그곳에 버티고 있든가 양자택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전자의 경우, 어떻게 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를, 그리고 후자의 경우, 무엇 때문에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기독교란 스캔들이다. 키에르 케고르가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요구했던 제3의 희생, 신이 가장 기뻐하시는 '이지의 희생'이다.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세우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오로지 그것만 가지고도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중략) 다만 나는 지성이 명석함을 잃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중간적인 길을 고수하고자 할 따름이다. 바로 이 점이 오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포기해야만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문제는 부조리의 상태, 그 안에서 사는 일이다. (중략)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도대체 삶이란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의 장미꽃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면, 부조리의 정신을 단념하고 허위에 몸을 내맡기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움 없이 '절망'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이 대답을 선택할 것이다.

사실상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의지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의 추론은 추론을 유발시킨 자명함 자체에 충실하고자 원한다. 그 자명함이란 곧 부조리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주는 세계 사이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중략)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더불어 살고 생각하는 것이며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자명한 것을 은폐한다거나 방정식의 한쪽 항을 부인함으로써 부조리 자체를 제거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논리는 부조리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다고 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관심있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 아니라 그냥 자살 그 자체다. (중략) 후설은 '익히 잘 알고 있고 편안한 생존 조건 속에서 살고 생각하는 고질적인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 순응하라고 말한다. (중략) 오히려 진정한 위험은 비약하기 바로 전의 미묘한 순간 속에 있다. 현기증나는 순간의 모서리 위에서 몸을 지탱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성실성이다.

나는 이 세계가 그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지금 나로서는 그것을 인식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조건을 벗어나는 의미가 존재한 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오직 인간적인 언어로 된 것만을 이해할 따름이다.

이토록 보잘 것 없는 이성, 바로 이것이 나를 모든 창조물에 대립시켜놓는 것이다. 나는 그 이성을 펜으로 확 지워버리듯이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마땅히 견지해야 한다. (중략) 현재라는 이름의 지옥, 이것은 마침내 그의 왕국일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들은 또다시 서슬이 푸른 날을 세운다. (중략) 아무것도 해결되 것은 없다. 그러나 모든 모습이 달라졌다. 이제 죽을 것인가, 비약을 통해서 문제를 모면할 것인가, 아니면 제 분수에 맞는 관념과 형상들의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부조리의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해 나갈 것인가?

이리하여 그가 스스로에 요구하는 바는 '오로지'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살고, 실재하는 것으로써 자족하고, 확실치 않은 것이라면 아무것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즉 그는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 죽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중략)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중략)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중략)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기증나는 추락의 막바른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 되는 저 한 가닥의 구두끈이다. 자살자의 반대, 이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이다.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편협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과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인간적 오만이 펼쳐 보이는 그 광경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평가절하하려고 제아무리 애써보아야 헛수고가 될 것이다. 정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이 규율, 불 속에서 통째로 단련해낸 이 의지, 그리고 정면대결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 (중략) 그런 이론들은 나 자신의 삶에서 짐을 덜어내준다. 그러나 이 짐은 나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회의적 형이상학이 포기의 모럴과 손잡는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반대이다. 인간 가슴속에 깃들인, 환원될 수 없고 정열에 찬 모든 것이 다 함께 그의 삶에 맞서서 거부를 고무한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카뮈의 철학적 서술인 '시지프 신화'를 읽는 순간 그동안 머릿속을 맴돌며 말하지 못했던 질문과 생각, 그에 대한 완벽한 대답들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언제나 의문했던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 어렴풋이나마 줄기차게 믿어왔던 인간의 의지의 위대함 등이 같은 생각들로 그의 글 전반에 녹아있다.
  카뮈의 인간에 대한 긍정은 그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의 인간에 대한 긍정을 넘어선다. 그는 인간의 삶 자체에 절대적인 의미를, 특히 눈을 부릅뜨고 의식의 명료함을 잃지 않은 채 부조리에 대항하여 씩씩한 걸음을 옮기는 인간의 삶에 강력한 지지를 부여한다. 그 어떠한 삶도 (거짓 '희망'에 팔아버리거나 '의식'을 체념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위대한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의 삶 자체로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다.
  한 인간의 소멸은 세계의 소멸인 것이다.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 세계는 존재를 잃는다. 반항, 자유, 열정을 간직하고 명료한 의식으로 살아갈 의미를 카뮈는 우리에게 안겨준다. 너무도 반갑고 안도한다.



2012년 7월 16일 월요일

카뮈의 '여행일기' 중

미국  1946년 3월~5월

인생은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것이 다 동원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학생들은 무언가 결핍을 느끼고 있다. 그들의 커다란 노력은 비장하다. 그러나 비극성이란 일단 바라본 후에 떨쳐버려야 할 것이지 보기도 전에 버려서는 안 된다.

저녁에 서커스. 네 곳에 마련된 곡예 공간들. 모두가 동시에 묘기를 보인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투치의 말 : 이곳에서 인간 관계가 아주 쉬운 것은 인간 관계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겉껍질만 남습니다. 예의상, 그리고 게을러서.

옳은 자는 결코 아무도 죽인 적이 없는 자다. 그러니 그것은 신일 리 없다.

어떤 한 사내가 사업상의 여행 중에 별다른 생각 없이 어떤 자연 그대로인 고장의 외따로 떨어진 여인숙에 든다. 그런데 거기서 그 자연의 침묵, 아무 치장 없는 소박한 방,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 등이 그로 하여금 영원히 이곳에 머물며 과거의 자기 삶이었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그리하여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별하지 말고 지내기로 결심하게 한다.

이 대륙에 온 이후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진정한 위대함의 실감 나는 인상을 받다. 퀘벡에 대해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어떤 힘에 떠밀려 이 고독 속으로 찾아와서 투쟁했던 인간들의 그 과거에 대해서 나는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중략) 내가 말하고 싶은 단 한 가지를 나는 지금까지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아마도 영원히 그것을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뉴욕의 비. 끊임없이 내리며 모든 것을 씻어낸다. 회색의 안개속에서 마천루들은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의 거대한 관들처럼 희끄무레하게 서 있다. 빗속에서 이 관들의 밑받침이 흔들거리는 것이 보인다.
버림받았다는 끔찍한 느낌.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 품에 꽉 껴안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방어되지 못할 것만 같다. 

돌아오는 여행길은 길기만 하다. 내 마음의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들은 바다 위에 내리는 저녁들과, 황혼에서 달이 뜰 때로 옮겨 가는 시간이다.

이곳 계층의 끔찍스러운 범속함.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에워쌀 수 있는 범속함 때문에 괴로워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바다를 지켜보리라.

내가 아직도 이토록 상처 받기 쉽다는 것을 느끼는 슬픔. 25년 후면 나는 57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작품을 쓰고, 내가 찾는 것을 발견해야 할 25년. 그런 다음에는 노년과 죽음. 나는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작은 유혹들에 넘어가고 헛된 수다와 무익한 방황에 시간을 허비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 속의 두세 가지를 극복했다. 그러나 내게 그렇게도 필요한 저 우월감을 가지기에는 아직 멀었다.

나는 늘, 인간들에 대한 강한 관심과 부산하게 움직이고 싶은 허영, 그리고 이 망각의 바다에도 손색이 없고 죽음의 환희와도 같은 이 무한한 침묵에도 손색이 없는 나 자신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찢어져 있었다.


남아메리카  1949년 6월~8월

이 무한한 고독이 지금은 내 마음을 느긋하게 해준다. 비록 이 바다가 오늘은 이 세상의 모든 눈물을 다 출렁이게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지만. 나는 내 선실로 되돌아와서 지금 이 글을 쓴다 - 저녁마다 그렇게 하고 싶다. (중략) 내가 버려둔 채 하지 못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지만 그래도 나는 잠이 들고 싶다.

바다는 표면만 빛을 받고 있지만 바다의 깊은 어둠이 느껴진다. 바다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 삶의 부름인 동시에 죽음에의 초대.

그리고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이 좁고 단정한 선실, 이 딱딱한 침대, 그리고 이 헐벗음이 좋다. 아니면 이 군더더기 없는 고독 혹은 사랑의 폭풍. 그 밖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내 관심을 끌지 못한다. 뭐 잊어버린 건 없는가? 없는 것 같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앞에 두고 하루를 마감한다. (중략) 하늘과 물은 끝이 없다. 여기서는 슬픔도 얼마나 멋진 동반자를 가지는가!

아침 바다: 생성들의 거대한 양어장 - 무겁고 펄쩍펄쩍 뛰는 - 또한 지글지글 끓는 - 비늘이 돋은 - 끈적끈적한 - 신선한 거품에 뒤덮인.

바다는 분해되어가는 것들의 금속성 광채와 함께 거대하게 부어오른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바람 쐬는 갑판을 네 바퀴나 뒤따라 돌면서 그 사람을 관찰해보니 그는 단 한 번도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혼자이며 길을 잃었다는 것을 느끼다가 마침내 황홀해지는가 하면 얼굴을 알 수 없는 이 미래와 내가 사랑하는 이 위대함 앞에서 내 힘이 점점 다시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바다는 거칠다. 하늘은 꽉 막혀 있다.

약간 일했고, 많이 어슬렁거렸다.

지금 이 순간의 내 관심이 실제로 인간들을 향해 있지 않고 바다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내게 습관 되지 않은 내 속의 이 깊은 슬픔은 거기서 오는 것.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배 전체가 침묵을 지키고 서쪽 뱃전의 갑판 위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선객들마저 일상의 비참과 존재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 듯 침묵으로 돌아갈 맘큼.

바다를 앞에 두고 오래 머문다. 아무리 노력하고 이리저리 다져보아도 이 슬픔을, 더 이상 이해할 수조차 없는 이 슬픔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저녁은 서늘하고 감미롭다. 이제 이틀 후면 도착하게 된다. (중략) 또다시 살고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는 것. 사람들, 얼굴들, 내가 해야 할 역할, 아마 내가 지금 그것들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오후에 수백 미터 아래의 바닷물 속에서 시커먼 거대한 동물 한 마리가 물 표면까지 솟아 올라와서는 파도를 몇 번 타너니 먼지같은 물방울들을 두 줄기 내뿜는다. 내 곁의 바의 보이가 고래라고 알려준다. 그 몸집의 크기, 헤엄쳐나가는 무서운 힘, 고독함 짐승의 모습......등을 보면 그런 것 같지만 여전히 잘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교통질서의 혼란과 무질서는 단 하나의 법칙, 즉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일 먼저 도착한다는 법칙으로만 보상이 된다.

나는 인간의 신들보다 밤과 하늘이 훨씬 더 좋다.

나는 몇몇의 진실한 눈들을 보았다.

이런 날씨에는 두 번 젖는다. 우선 비에, 그 다음에는 자기가 흘린 땀에.

그러나 광대한 공간들 특유의 슬픔을 가진 이 감당할 수 없이 넓은 땅 위에서 삶은 바로 그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삶으로 파고들자면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잊혀진 이 구석에서 나를 보게 된 것에 놀라워들 했다.

나는 여러 시간 동안 다시 한번 이 단조로운 자연과 이 광막한 공간을 바라본다.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보는 이의 정신에 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경치다. 이 고장에서는 계절들이 서로서로 뒤섞여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뒤엉킨 식물들은 형체를 규정할 수 없게 되고 피들이 어찌나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지 영혼이 그 한계를 잃게 된다.

내 관심은 떠나는 것, 그리고 다 끝내는 것, 마침내 모든 것을 다 끝내버리는 것이다.

지독한 서글픔과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


- 작가의 여행, 작가의 눈으로 본 여행. 물론 작가의 느낌이 그대로 표현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공감.
아마도 이 두 여행을 신문기사로 보았다면, 유명작가가 되어 강연을 두 대륙으로 순차적으로 떠나는 카뮈의 여행이 성공의 한 단편 쯤으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손으로 기록된 여행일기는 오히려, 카뮈의 고독과 갈등, 작가로서의 시선, 사람과 함께이면서도 완전히 혼자일 수 있는 공간, 장거리의 선상 여행에서의 바다에 대한 애정과 묘사 등으로 그저 일반인이 혼자 떠나는 여행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마치 내가 다시 같은 여정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의 손에 의해 기록된 그 묘사와 나의 느낌이 다르지 않게 느껴질 듯.
원하는 것을 써내고 싶은 작가의 갈망이 광대한 자연과 낯설은 도시의 풍경에 녹아들어가 열망과 고독을 가슴에 불러일으키는 글.

말로의 '인간의 조건' 중

모든 인간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세계, 영원의 세계, 낮은 또다시 이들, 썩어빠진 기와지붕 위로 돌아올 것인가?

보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가슴속에 있는 것을 말로 형언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검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물결은 침묵 속에서 흔들렸다. 사람 음성에 잉어가 잠을 깬 모양이었다.

"부상자의 반은 죽었겠지. 고통이란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런데 대개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거든."

인간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육체는 눈에 익은 것이 갑자기 변모하였을 때의, 그 비통한 신비감 - 벙어리나 장님, 미치광이들이 갖고 있는 그 신비감 - 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생명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는 고독이 있다. 고독은 무수한 인간들의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마치 희망과 증오로 충만한 황량한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 깊은 밤의 배후에 커다란 원시의 밤이 존재하듯이.
'그런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 자신에 대해서, 목구멍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긍정이다. 미치광이의 긍정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나라는 존재는 결국 내가 한 일만이 전부인 것이다.' (중략) 포옹은 사랑에 의해서 남녀를 결속시켜 고독을 잊게 해주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결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이 완전한 고독, 그가 기요에게 품고 있는 그 애정조차도 그를 여기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인간 속에서 피난처를 발견할 수는 없다 해도 자기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편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곳에서는 관대한 무관심이 모든 것을 녹이고 있었다.
(중략) 두 눈을 감고, 흔들리지 않는 커다란 날개에 실려가고 있는 노인 지조르는 자기의 고독을 조용히 관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성한 것을 추구해가는 쓸쓸한 마음이었다. 동시에 죽음의 심연을 부드럽게 덮고 있는 저 조용한 물결은 무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들은 모두 죽음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개죽음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마치 밤이 그들을 그곳에 가둔 것처럼 적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이 새벽이, 이번에는 그들을 거기서 놓아주는 것같이 여겨졌다. 지붕 위의 새벽빛이 반사되어 파르스름한 잿빛으로 변했다. 전투가 그친 시간 위에서 빛이 밤의 커다란 덩어리를 흡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만, 인간 앞에 검고 네모지 그림자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그림자도 차차 짧아져갔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앞으로 여기서 죽어갈 사람들오 잊어버릴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다. 그림자는 오늘도 영원한 움직임을 계속하면서 줄어들어갔다. 그것이 오늘은 일종의 처참할 정도로 장엄함을 띠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두 번 다시 그것을 볼 수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오고 있는 저 사나이는 돈 때문에 저 위층에서 아직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러 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상, 어떤 신념 때문일 것이다. 지금 철조망 앞에 서 있는 저 그림자, 에멜리크는 그 그림자의 사상에까지 증오를 느꼈다. 이 행운의 종족은 그들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기네들이 정당하다고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배하고 있는 인간 앞에서 누구나가 느끼는 그 굴욕감을 욕지기가 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채찍을 쥔 저 더러운 그림자에 대해서는 무력했다.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마치 권력을 쥐기만 하면 거의 모든 인간을 개짐승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어릴 때 꿈에 본 갑각류나 거대한 곤충처럼 왠지 마음을 못 놓게 하는 존재들, 창살 저편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저 희미한 존재들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한 고독과 굴욕이었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 벗어나 남의 눈에 지금까지와 다른 인생을 사는 인간처럼 비치기 위해서는 한 벌의 옷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이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통과 부조리 속에서, 혹은 굴욕의 한가운데서 일하는 인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사람들은 이곳에 있는 이와 같은 수형자들을 생각할 것이다. 마치 신자들이 기도를 드리듯이. 그리고 벌써 거리에서는 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이미 죽어버린 것처럼 여기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중략) 죽음을 각오할 수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혼자만이 죽는 것이 아닐 때, 사람은 쉽게 죽을 수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이 동지의 떨리는 말소리로 가득 찬 죽음,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순교자로 발견하게 될 패배자의 집합, 황금전설을 만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설! 이미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 생명을 바치 인간의 중얼거림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중얼거림은 죽어가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씩씩한 마음이야말로 영혼의 세계 몿지않은 은신처라고 부르짖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자존심이 강해 순응주의자도 위선자도 되지 못했다. 위대한 개인주의란 위선의 비료를 받지 않으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의 정신은 인간을 영원의 세계에 놓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에 대한 의식은 고뇌일 수밖에 없다.
(중략)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다.' 하고 그는 여전히 명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 광증과 세계를 결부시키기 위한 인생의 노력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면, 인간의 운명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늘 높이 뜬 가벼운 구름이 어두운 소나무 위로 흘러가다가 차츰 하늘에 녹아들었다. 그는 거기에 흐르고 있는 구름 한 조각이 - 바로 그것이 - 그가 일찍이 알던 혹은 사랑한, 그리고 지금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은 살과 피와 고뇌로 두껍고 무겁다. 무릇 죽는 것이 다 그러하듯 인간은 영원히 자기 자신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피조차도, 살조차도, 고뇌조차도, 그리고 죽음까지도 저 높은 광명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 중국 공산주의의 저항이 시작되었을 때 장제스의 탄압에 대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인간 개인의 생각과 의식을 날카롭게 짚어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사상보다는 사상속에서 행동하는 인간에 대해 촛점을 맞추고 있다. 공산주의 세력인 첸, 기요, 카토프, 에멜리크 등은 사상에 얽매여 있기 보다는 동지애, 인간애 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투쟁한다. 각각의 개인적 생각과 삶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선택을 하는 그들의 참담한 패배. 그것은 과연 패배인가? 죽음으로 끝나는, 혹은 죽음으로 끝날 것이 당연히 예견되어져 있는, 그들의 삶은 어리석음인지 위대함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들은 인간의 고귀한 본질, 의리, 우정, 용기, 자존심 등, 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엇을 가슴 속에 남기고 있다.
  역사를 통해 많은 사상과 신념에 의해 인간들이 잔혹하게 희생되어 온 것을 본다. 그 사상과 신념의 중심에서 생기는 권력에 의해 반대편의 인간들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는 인간이하의 존재로 변하는 것도 본다. 그러나, 시간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사상과 신념의 무용함과 무상함 또한 보아왔다. 그럼에도 같은 잔악함과 그 잔악함에 대한 대항이 계속 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인가? 위대함인가?
  말로는 여러 극중 인물을 통해, 투쟁하는 인간, 회색지대에 머무는 인간, 회피하는 인간을 모두  보여준다. 어떠한 것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귀한 인간적 본질들(우정, 용기, 의리, 자존심)은 모두 세상적 의미에서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고통과 죽음, 부조리 앞에서, 인간의 조건(최소한 인간의 존엄)을 사수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진실로 안타깝고도 위대하다. 이를 극히 명확하고도 아름다운 서술로 이끌어 낸 말로의 시각. 주인공들이 한동안 가슴에 남아있다...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중

죽은 자들의 몸속으로 가스가 가득히 차오르면 낯선 별빛 아래서 마치 유령처럼 시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 희망도 없이, 모두들 제각각 혼자서, 말없이 다시 한 번 전투에 참가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것들은 다시 쭈그러들기 시작하여 그대로 땅에 착 달라붙을 것 같았다. 너무도 지쳐 땅속으로 기어들려는 것 같았다.

시체들은 햇빛 아래 놓이면 우선 눈 부위부터 녹아내렸다. 눈은 광채를 상실했고, 동공은 아교질처럼 번들번들했다. 눈 속의 얼음이 녹아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마치 울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정말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모든 것을 의심했고, 구역질나는 것도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은 아닐까?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 지난 몇 년 동안 갖가지 견해들이 난무하지 않았던가? 온갖 신념들 말이야. 말이라는 건 의미도 없을뿐더러 위험하기도 하지. 소리도 없이 천천히 다가오는 낯선 것이야말로 훨씬 더 거대하고 막연하고 불길하지. 사람들은 근무와 먹을 거와 추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을 했지. 하지만 낯선 것 그리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어.

시체들은 창백하고 적대적이고 낯설었으며 아직도 생을 체념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 제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머리도 위장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는 층계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야곱의 사다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저건 무엇이었을까?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었을까? 천사들이 그 위로 날아다니지는 않았을까? 천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비행기로 변했을까. 모든 것은 어디에 있는가? 지구는 어디에 있는가? 지구는 오로지 무덤을 위해서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인가? 나는 무덤을 팠어, 많은 무덤을,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나는 폐허들을  수없이 보아 왔어. 하지만 진짜 폐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오늘에서야 진짜 본 거야. 바로 이 폐허를. 이것은 다른 폐허들과는 달라. 왜 나는 저 아래에 누워 있지 않은 걸까? 나는 저 아래 누워 있어야 마땅해.

그것은 그가 전선에서 자주 느꼈던 암흑과도 같은 것이었다. 감히 단 한 번도 대답할 수 없었던 의문이었으며, 낭떠러지 앞에 선 심정이긴 해도 계속해서 회피해왔던 절망이었다. 그것이 마침내 그를 궁지로 내물았고, 그도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더 이상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깊이 숨을 쉬었고, 정의도 불의도 상관없이 세속을 초월하여 위안을 주는 온기를 느꼈다.

"나무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 오늘 오후에는 보리수나무에게서 배웠는데, 지금은 이 나무에게 배우는군. 나무는 자라서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지. 비록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일부는, 땅 속에 조금이나마 뿌리를 뻗고 있는 일부는 계속해서 잎과 꽃을 피우는 거야. 나무는 끊임없이 가르침을 주면서도 결코 비통해하거나 자신을 동정하는 법이 없어."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 그는 경악하며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 것인가? 몇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희미해져 가는 기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략) 그리고 그것조차도 얼마나 오래 남을 것인가? 그는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미 종이 한 장처럼 얇아지고 그림자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훅 불기라도 하면 날려가 버리고, 펌프에 의해 빨아들여진 텅 빈 껍질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 어디에 정주할 수 있을 것인가, 어디에 닻을 던질 것인가,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완전히 내쫓기지 않도록 그를 지탱해 줄 무엇을 어디에다 남겨야 한단 말인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을 때는 판단을 내리고 용감해지는 것이 쉽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세상은 달라 보인다. 더 쉬워질 수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별안간에 이 모든 것을 빚어낸 인간들에 대해 발작과도 같은 증오심이 일었다. 조국의 경계썬에 머무는 그런 증오심이 아니었으며, 신중함이라든지 정의와는 아무 상관없는 증오심이었다.

나는 나를 지탱해 줄 무언가를 가지려 했어. 하지만 그것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나를 두 곱이나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은 몰랐던 거야.

"집단 수용소 대장들 중에 유머를 갖춘 사람도 있고, 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동지애를 갖춘 친위대원도 있어. 그리고 애써 세상의 선한 면만을 보면서 끔찍한 일에는 눈을 감아 버리거나 그것을 일시적이거나 엄혹한 필연으로 여겨 버리는 동시대인도 얼마든지 있어. 그들은 말하자면 탄력적인 양심을 가지 사람들이지."

모든 것은 죽음과 죽음 사이에 있는 거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독일군 병사인 주인공의 고통과 좌절, 양심의 갈등, 사랑과 죽음등이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인간들이 이유도 없이 죽이고 죽어갈 때, 침묵하는 양심은 옳은 것인가?
그래버는 독일군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원인에 대한 반항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소설 초반에 이는 구체화되지 못하고 점차 그래버가 꿈꾸었던 휴가에서의 부모와의 상봉이 물거품되고 생사조차 모르게 될 때, 전방이나 후방 모두에서 모든 사람들이 참혹하게 생활하거나 죽어갈 때, 양심의 유보에 대한 그의 혼돈은 점차 진전된다. 엘리자베스와의 사랑은 전쟁 중에서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던 만큼 그에게 절대적이었으나, 사랑한 사람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를 잃게 됨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다운 삶을 조금이라도 찾는 그 순간이 그에게 영원하다. 결국 그래버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민간인처럼 보이는 러시아인들을 풀어주기 위해 살인광인 동료 독일군을 살해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래버는 자신이 첫 양심에 따라 움직인 그 행동에 의해 죽게 된다. (그 풀려난 러시아인이 도망치면서 두려움에 그를 쏘게 된다.)
  절망과 희망, 삶과 죽음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극한 상황에 도달했을 때 인간의 존엄성은 얼마나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인가? 레마르크는 이 소설에 가치/사상/종교의 무용, 인간의 잔인성과 무모함, 혹은 인간의 양심과 사랑, 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 등을 한꺼번에 담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잔인한 상황과 생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뿌리로 싹을 돋아내는 나무처럼, 순간을 살아내고 사랑하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행동하는 양심의 위대함을 그는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