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9일 월요일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의 'Self-Reliance' 중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별이다.
-보몬트.플레처 'Honest Man's Fortune' 중-

"당신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곧,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이 된다. 이것이 재능이다."

마음속에 숨겨진 확신을 드러내서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라. 그러면 내 안에서만 머물던 그 확신은 머지않은 날에 세상의 보편적인 견해가 될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참된 지침을 따르기 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반대편에서 어떤 시끄러운 외침이 들리더라도 따사롭고도 과감하게 자신의 자발적인 신념과 직관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어떤 낯선 이가 다가와 따져 물을 것이다. 그대는 항상 무엇을 생각해 왔고, 무엇을 느껴 왔는가?"

'질투는 어리석음이고 모방은 멸망'
(중략)
그리고 드넓은 우주는 좋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자기 몫으로 주어진 땅에서
직접 밭을 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옥수수 낱알 하나도 절대 얻을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를 때가 바로 그때이다.

그러나 신은 겁쟁이를 통해서는 결코 그 어떤 일도 시도하지 않는다.

자신을 믿어라, 우리의 마음은 강철과 같은 진리에 진동한다. (중략) 당신에게 마련해 준 자리를, 당신과 그 시대 사회를, 모든 일의 연결 고리를 받아들여라.

모든 약속에서 자유롭고, 감정의 치우침 없이 공평하며, 매수되지 않고, 두려움 없는 순수함으로 관찰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관찰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을 스치는 모든 일에 대해 사사롭지 않은 필요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언제나 강하다.

사회는 구성원 하나하나의 인간성에 어긋나는 음모의 굴레이다. 사회는 하나의 주식회사와 같다. 그 안에서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몫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자유와 문화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 여기에서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순응이며, 독립은 반목일 뿐이다. 사회는 현실과 창조자들을 싫어하지 않으며, 이름과 관습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이고자 한다면, 순응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불멸의 야자 열매 (승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선의 이름 앞에 흔들려서는 안 되며, 우선 그것이 참된 선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나에게 어떤 아이디어가 번득일 때, 섬광과 같은 영감이 떠오를 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형제도 멀리할 것이다. 나는 문설주에 '생각 중'이라고 써 붙여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섬광 같은 영감이 일시적인 생각으로 끝나지 않도록, 좀 더 나은 무엇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일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행동들을 하든 안 하든 나에게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나의 능력이 비록 작고 평범할지라도, 그에 대한 나 자신의 보증이나 제삼자의 증언이 필요하지는 않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의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또한 홀로 존재한다면 자신의 의견을 따라 사는 것도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완벽한 따사로움을 유지하며 고독하게 홀로 서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당신 자신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다.

'바보 같은 칭찬의 얼굴'이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별로 관심 없는 대화에 대꾸를 하려니 불편해서 짓게 되는 억지 미소 같은 것이다.

세상을 안다고 자부하는 당당한 사람들의 나약한 분노에 군중이 일으키는 분노가 더해지면, 어리석은 자와 가난한 자들이 들고일어난다면, 사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비이성적이고 잔인한  힘이 으르렁거리며 들썩이기 시작한다면, 이를 마치 아무 일도 아닌 듯 당당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진실과 믿음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은 일관성, 다시 말해서 평소에 자신이 한결같이 굳게 믿고 있는 '자기만의 논리'를 버리고 달아나라.

위대한 것은 오해받게 되어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다.

훌륭한 배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뱃길을 바꾸며 나아간다. 그러나 충분히 거리를 두고 보면, 그 중간으로 뱃길이 일직선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당신의 진실한 행동은 그 자체로 설명될 것이며, 다른 진실한 행동들까지 더불어 설명해 줄 것이다. 반대로 당신의 순응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오늘 내가 남들의 눈길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나를 지키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옳은 일들을 많이 행한 덕분이다.

우리의 마음은 현재에 살고, 과거와 미래도 현재의 시간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인간은 무언가를 미루거나 기억한다. 그런 인간은 현재에 살지 않으며, 회상에 젖은 눈길로 과거를 떠올리며 애석해 한다. 또는 그를 둘러싼 풍요로움에는 무심한 채 발끝을 세워 미래를 내다보려 한다. 장미처럼 시간을 초월해 지금 이 순간 자연과 더불어 살지 않는 한 그는 행복하거나 강해질 수 없다.

두려움과 희망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서로 닮아 있다. 심지어 희망에도 어떤 저열함이 숨어 있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어리석은 군중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을 경외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본성이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충고하지 않으며, 자신 안의 별은 바다와 소통하라고 타이르지도 않는 대신 다른 사람의 물병에 든 물 한 컵을 구걸하기 위해 바다를 건넌다.

왜 우리는 친구, 아내, 아버지, 또는 아이의 잘못을 떠맡아야 하는가? 그들이 우리의 난롯가에 같이 둘러앉는 사이라서? 또는 흔히 말하듯이 같은 피를 나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나와 피를 나눴으며, 나 역시 그들과 피를 나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불쾌하고 어리석은 행위까지 떠맡아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마음은 고귀해야 하고, 의지는 충실해야 하며, 시야는 밝아야 한다.

우리는 마치 근육과 마음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버린 듯, 겁 많고 소심한 투정쟁이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진실과 행운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서로를 두려워한다. 우리 시대에는 위대하거나 완벽한 인간이 나올 것 같지 않다.

특별한 편의를, 즉 어떤 것이든지 전체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간원하는 기도는 사악하다.

여행은 어리석은 사람의 낙원이다. (중략) 내가 어디로 가거나 나를 동반한다.

자기 자신을 고집하라. 결코 모방치 말라. (중략) 그것이 무엇인가는 그 본인이 그것을 발휘할 때까지에는 아는 이도 없고 알 길도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어디 있는가. (중략) 모든 위인은 독특한 개인이다.

사회는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중략) 훌륭한 제네바제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태양으로 시간을 알아보는 재간은 없는 것이다.

힘이란 내부에서 생기는 것, 자기가 약한 것은 자기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도움을 구하기 때문임을 아는 사람, 이것을 깨닫고는 주저없이 자기의 생각에 투신몰두하여, 즉시 몸을 바르게 하고 곧은 위치에 서서, 당당히 수족을 움직이는 사람이야말로 기적을 성취한다. 그것은 마치 제 발을 디디고 서는 사람이 머리를 따에 대고 서는 사람보다 힘센 이치와 같다.

당신 자신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 Ralph Waldo Emerson, 성직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를 졸업하고 목사의 길을 가던 중 신앙과 직업에 대해 회의에 빠져 사상가이자 시인, 수필가로 살았던 사람. 에머슨의 삶을 보면 자기자신에게 누구보다도 솔직한 사람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명예와 안정된 삶을 버리고 진실을 이야기한 사람. 그는 본인의 글과 삶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다른 글보다 'Self-Reliance'라는 글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은, 모든 그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가라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떠한 섬광을 발견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그것을 키워나가라는 메세지이다. 그는 힘의 근원을 인간에게 돌려놓고, 그것도 한 개개인에게 돌려놓고, 그 힘을 역설한다. 관습과 제도에 얽매인 인간을 직시하고 본질적인 인간의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독려하는 그는 다른 실존주의 철학자와도 매우 닮아 있다. 그는 보다 쉽고 설득력 있는 언어로 실의와 좌절에 빠진 개인에게 '현재'와 '자기자신'이라는 힘의 원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에머슨 자신의 사상이 동시대에 비판/냉대를 받았으나 시간을 거쳐 결국 그 생명을 회복한 것이 그가 역설한 '개인의 올바른 생각의 힘'의 승리가 아닌가 한다.


2014년 5월 1일 목요일

야스퍼스 (Karl Theodor Jaspers)의 '철학입문' 중

철학적 사유에는 과학과는 달리, 진보의 과정이라는 성격이 없다. 우리는 분명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보다 훨씬 많은 '의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우리가 플라톤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중략)
철학적 확신이란 그것이 성취될 때 인간의 본질 전체가 동시에 표현되는 확신이다. 과학적 인식은 각각의 대상에 관련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반면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그 자체에 관련된 존재 전체의 문제이며, 그것이 환히 밝혀질 때에는 그 어떤 과학적 인식보다도 더 우리를 감동시킬 진리의 문제이다. 

그리스어로 철학자(필로소포스) 라는 말은 지자(知者)라는 단어와 대립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 단어는 지식을 소유하고 스스로 지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식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중략)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진리의 탐구에 바로 철학적 본질이 있다. (중략) 철학이란 도상(道上)에 있는 것이다. 철학의 질문은 그에 대한 해답보다 중요하며, 철학에서는 온갖 해답이 새로운 질문으로 변한다. 

무엇이 철학인가 하는 정의는 사람들 각자가 시도해야 할 일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이에서 출발하여 존재의 본질을 추구했다.
데카르트는 제한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함을 추구했다.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실생활의 고뇌 속에서 영혼의 안정을 추구했다.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산만한 생활 속에서 무너져서는 안 되므로, 어떠한 질서 속에서 영위되어야 한다.
(중략)
하지만 자기를 망가가하고 싶어하는 경향은 이미 인간 자신 속에 내재해 있다. 세상일이나 인습, 무분별하게 파헤쳐진 일, 고정된 궤도에 몰두하여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것에서 탈출해야 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근원을 깨닫고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가 내적 행위로써 있는 힘껏 우리 자신을 구하려는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물론 현살생활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실제 직무인 매일의 요청에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단순하게 노동을 하고 여러 가지 목적에 몰두하는 것이 이미 자기망각에 이르는 길이고 따라서 태만이고 죄책임을 깨닫는 것, 바로 여기에 철학적 생활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나아가 행복과 고민, 성취와 단념, 암흑과 혼란이라는 인간에 관현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것들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런 것들에게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그것을 극복하며, 결말이 난 것으로 치부해버리지 않고 끝까지 밝히는 것, 이런 삶의 방식이 철학적 생활이다.
철학적 생활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고독한 길, 모든 종류의 반성을 통해 명상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 함께 행동하고, 말하고, 침묵하면서 모든 종류의 상호이해를 통해 교제해 나가는 길이다.
(중략)
이런 명상 속에서 나 혼자서 얻는 것은 -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 얻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략) 진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끊임없이 교제를 철저하게 추진하기를, 항상 다른 옷을 걸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는 우리의 오만한 자기주장을 포기하기를, 또 이 자기 포기를 바탕으로 내가 나에게 셀 수 없을 만큼 되풀이하여 증여될 것이라고 희망하며 살기를 요청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안심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조명하고 진실이라고 평가하는, 내 안의 억측 위에 움직이지 않는 지점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 그런 자기 확신은 성실함이 결여된 자기주장의 유혹으로 가득찬 모습이다.
(중략) 단호하게 인생에 밀고들어가는 것, 최악의 사태에서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호도하지 않는 것, 무엇을 보거나 묻거나 대답할 때는 제한 없이 성실함을 지배하는 것, 이런 태도가 중요하다. (중략)
철학하는 것이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면 이 경우, 죽을 수 있는 능력은 바르게 살기 위한 조건임이 틀림없다. 사는 것을 배우는 것과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명상은 사고의 힘을 가르친다.
사유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증거이다.
(중략)
우리의 여러 가지 상태는 자신의 실존이 끊임없이 노력하거나 힘을 잃는 것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본질은 과정에 있다는 말이다.
(중략)
철학적 생활의 이러한 비상은 각각 이 인간의 비상이다. 이러한 비상은 타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교제 속에서 개인의 비상으로서 성취되어야 한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그 대지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두둥실 날아다니는 우리의 움직임은 매우 불안정하고, 고정된 대지에 안전하게 자리잡아 만족하고 있는 사람의 입작에서는 아주 가소롭게 보일 것이다. 그것으 불안에 사로잡혀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은 항상 새롭게 획득되어야 하며, 자기 자신의 근원에서 철학을 깨닫는 사람만이 철학을 붙잡을 수 있다. 아직 어슴푸레하기는 해도 철학을 깨닫는 최초의 시선이 있다면 개인의 마음에 철학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


- 왜 철학이 필요한가? 아마도 이 시대만큼 철학이 무시되고 장막에 가리워져 있는 시대도 드문 듯 하다. 중세에는 철학이 종교의 베일을 쓰고 있었다면 현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고시대의 학문처럼 멀고도 어려운 것으로 인지되는 것 같다. 그러나 철학은 야스퍼스에 의해서 다시 강조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위한, 그것도 한 인간을 위한 문제이다. 그 한 인간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며, 그 인간들이 모여있는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가치의 부재에 대해서 사유의 부재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으로서 철학적 사유로부터 인간이 얼마나 자신에 대한 정신의 힘을 끄집어 낼 수 있는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자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지 인생의 가치를 찾아내어 가꾸어 나갈 수 있는지 알려주고 싶다. 그러한 의미에서 야스퍼스가 역설하고 있는 '철학적 태도'는 인간의 삶을 허무와 좌절에서부터 건져내어 삶의 길 위에 선 인간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것의 의미는 이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고 비상하는 과정에서의 인간은 죽음을 앞에 놓고도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는 정말로 잘 살아온 인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