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5일 수요일

포그너의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중

듀이 델은 천천히 일어선다. 그러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베개 위에 놓인 얼굴은 빛바랜 청동 주상 같고, 오로지 손만이 생명을 간직한 것 같다. 무기력하나 뭔가 삐뚤어지고 꼬부라진 느낌. 모든 게 소진되었으나 아직도 경계하는 그 무엇 때문에 피로, 기진맥진, 고통이 미처 떠나지 않은 듯하다. 어머니의 손은 마치 죽음 이후 영면의 현실성을 의심이라도 하듯이, 결코 지속되지 않을 정지의 순간, 즉 죽음을 경계하려는 듯하다.

죽은 바람은, 마찬가지로 죽은 듯한 어둠 속에서 죽은 땅을 훑고 지나간다. 눈이 미치는 곳보다 훨씬 멀리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땅은 죽은 채 누워 있다. 온기가 나를 감싸며 내 옷을 뚫고 속살에 닿는다. 내가 말했다. 당신은 걱정이 무엇인지도 몰라. 나도 모른다. 난 내가 걱정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걱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울 줄도 모른다. 내가 울려고 애쓰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뜨거운 흙 속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젖은 씨앗이 된 것 같다.

이 아이는 슬픔과 걱정으로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아요.
난 다시 소름이 끼쳤다. 이따금 누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슬픔과 상흔에 대해서. 마치 번개처럼 언제 어디서나 닥칠 수 있는 것이다.

바더만
엄마는 물고기다.

죽은 후에도 자신의 존엄성을 애써 지키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한다. 아마도. 좋은 일을 했는데 그 대가가 죽은 아내와 함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라니. 정말 기분 나쁜 일이다. (중략) 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자이다. 사랑하는 자를 징벌하시는 하느님이시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벌을 좀 이상하게 내리시는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난 새 틀니를 해넣을 수가 있겠지. 그것이 그래도 위안이 된다. 정말로.

아버지께서 늘 하신던 말씀이 그냥 기억났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그도 단어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 그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랫동안 단어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랑이란 단어 역시 다른 말과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저 빈 곳을 메우기 위한 형태일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존심이나 공포라는 단어만큼이나, 사랑이란 말도 전혀 쓸모없게 될 것을 말이다.

바람도 소리도 없이 피곤하게 반복하는 지친 몸짓으로 되돌아가는 우리들의 삶. 밑도 끝도 없이 끓어오르는 오랜 욕망의 메아리. 해 질 녘 우리는 분노한다. 그러나 그 역시 인형들의 죽은 몸짓일 뿐.

그러나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난 확신할 수 없다.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갖가지 일을 저지른 후, 다시금 똑같은 공포와 놀라움으로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 가난한 집의 부모들은 매우 잔인해 보인다. 그들의 슬픔은 막막하다. 그리고, 그들의 인내. 고통에 대한 인내. 고통스런 삶에 대한 놀라울만한 인내.
죽은 어머니와 이 어머니를 40 마일 떨어진 곳에 묻으러 가는 가족들. 그들과 주변인의 생각의 나열로 이루어진 소설. 이 소설은 매우 서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슬프면서도 아이러니컬한 웃음을 자아낼 때도 있다.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이 사명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다. 인간이하로 보이는 남편조차도 (그는 아내가 죽은 뒤부터 틀니를 해 넣을 생각에 만족해한다.) 닥쳐오는 고난에 그 일을 수행한다.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은 각기 각자의 문제를 안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에 먼 길을 떠나면서도 그들의 머릿속엔 자신만의 문제가 떠나지 않는다. 또한 해결방법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문제, 그들 또한 그들의 어머니와 같이 죽음을 기다리며 살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를 묻고는, 그 부패한 시체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시체의 냄새와 함께 사라지는 것 같다.), 그 필사적으로 지켜온 시신을 묻고는, 이 가족을 매어줄 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남편은 아내를 매장할 삽을 빌리러 간 집의 여자를 새 아내로 맞고, 나머지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것은 슬픈 것인가. 삶이 단지 '살아감'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귀결될 때, 그 '살아감'조차 녹록치 않을 때, 인간의 가치는 어디서 찾아져야 하는가? 등장인물의 몇몇이 믿는 우스꽝스러운 신에 대한 믿음으로써? 아니면 죽은 어머니와 같이 죽음에 대한 기다림으로써?
포크너의 글은 절실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답다.

2012년 4월 20일 금요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 제3부, 제4부 -

제 3 부

우리는 결국 자신만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아끼는 자는 그것 때문에 병들어 버린다. (중략)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 순간을 보라. 이 순간이라는 문에서부터 영원한 하나의 길이 뒤로 뻗어 있다. 우리의 뒤에는 '영원'이 있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고슴도치에게나 알맞은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덕이란 온순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늑대를 개로 길들이고, 인간 자체를인간의 가장 온순한 가축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중간'에 놓았다. 죽어 가는 칼잡이들로부터, 만족하고 있는 돼지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데다 두었다." (중략)
그것이 비록 중용이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실은 '범용'이라는 것이다.

눈발을 머금고 침묵하는 겨울 하늘이여. 내 머리 위의 둥근 눈을 가진 백발의 얼굴이여! 오, 나의 영혼과 분방한 천상의 비유여!
그래서 나는 황금을 집어삼킨 사람처럼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나의 영혼을 찢지 못하도록?

어떤 사람의 고독은 병자로서의 도피지만, 또 어떤 사람의 고독은 병자로부터의 도망이다.

그대는 영혼이 누더기처럼 후줄근하게 널려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그들은 이 누더기로 신문을 만들기까지 한다.
(중략)
그들은 모두 서두르고 있지만, 자신이 어떤 이유로 서두르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서로 흥분시키지만 왜 그러는지조차 모른다.

여기서는 모든 피가 썩어 차디찬 거품을 일으키며 혈관을 돈다. (중략)
억눌려 일그러진 영혼, 여윈 가슴, 퀭한 눈, 끈적거리는 손가락이 널려 있는 이 도시에 침을 뱉어라. (중략)
그러나 나는 그대를 불평만 늘어놓는 나의 돼지라고 부르리라.

더이상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지나쳐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보와 대도시를 지나쳤다.

아, 오랫동안 용기와 오만을 지니고 있는 자는 언제나 아주 적다. (중략)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범속한 사람들이다. 진부하고 하찮은 존재들인 그들의 수는 너무나 많다. 이들은 모두 겁쟁이다. (중략)
이런 봄과 화려한 들판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정이 달랐다면 또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들이 모든 것을 더럽힌다.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졌다고 탄식할 필요가 있겠는가?

기도한다는 것은 치욕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대와 나에게만은 치욕이다.

혼자 버려지는 것과 고독은 아주 다른 것이다. (중략) 그리고 또 군중 속에서 그대는 항상 낯선 타향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그대를 사랑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대는 낯선 타향 사람이다.

나의 가장 큰 위험은 항상 친절하다는 것과 동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항상 위로받고 동정받기를 바란다. 
진실을 말하기를 억제하고, 낙서를 갈겨 쓰는 바보의 손과 마음을 가지고, 동정으로 인한 작은 거짓말을 하면서 나는 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왔다.
나는 변장을 한 채 그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동정심은 모든 자유로운 영혼들이 견디기 힘들 만큼 숨막히는 공기를 만든다. (중략)
내가 자신과 나의 재산을 감춰야 한다는 것, 나는 그것을 저 아래에서 배웠다. 그곳의 사람들은 정신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나도 기다리는 것을 배웠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배웠다. 내가 배운 것은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서는 것, 걷는 것, 뛰는 것, 기어오르는 것, 그리고 춤추는 것이었다.
(중략)
인식의 높은 돛대 위에 올라앉는 것은 적지 않은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그리고 남에게 길을 물었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길을 묻는 것은 내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는 길에게 묻고, 또 길 자체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선한 사람들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처럼 선량하다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중략)
무모한 모험, 끊임없는 회의, 가혹한 부정, 혐오, 살아 있는 것들을 잘라버리는 용기들을 모으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진리는 그런 씨앗에서 싹트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인식은 죄의식과 함께 자라났다. 때려 부숴라. 그대, 인식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낡은 목록을 부숴 버려라!

과거는 할아버지로 끝나게 된다.

모든 천한 자들과 폭군에 대항하여 새 목록에 '고귀'라는 말을 새롭게 기록할 귀족이 필요하다.

사자의 의지를 가진 자에게 있어 인식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중략)
의지는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의지를 갖는다는 것을 곧 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위에 동그라미를 그려서 신성한 경계선을 만든다. 내가 점점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감에 따라 나와 같이 가는 사람의 수는 점점 적어진다.
(중략)
그리고 이 구더기는 올라가고 있는 영혼의 어디가 지쳐 있는지를 아주 잘 간파해 내는 특이한 재주를 지녔다. 그들은 그대들의 상심과 불만, 예민한 수치심 속에 구역질나는 그들의 집을 짓는다.
(중략)
자기 자신의 가장 넓은 영역 속에서 가장 먼 거리를 달리고 방황할 수 있는 영혼, 가장 필연적인 영혼이면서도 즐겁게 우연 속으로 뛰어드는 영혼, 현존하는 영혼이면서도 생성의 흐름 속으로 뛰어드는 영혼, 소유하는 영혼이면서도 의욕과 욕구속으로 뛰어드는 영혼.

오,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나는 잔인한가? 그러나 나는 말한다. 쓰러지는 자는 오히려 걷어차 버려야 한다고.

그들은 자신이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을 괴롭힌다.


제 4 부

차라투스트라는 그 노인을 부축해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이 불행한 사람은 자기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몸부림을 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었을 때, 그는 훨씬 더 큰 다른 욕망을 느꼈다. 즉, 이 완벽한 대낮에 그 나무 그들에 누워서 잠자고 싶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했다. 그는 여러 가지 풀의 정적과 친밀함 속에 눕자마자 갈증도 잊어버린 채 잠들어 버렸다. 그것은 차라투스트라가 흔히 하는 말대로 이 하나의 일이 다른 일보다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략)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충분하다!' (중략)
정말 가장 작은 것, 가장 희미한 것, 가장 가벼운 것, 쪼르르 달리느 한마리의 작은 고슴도치, 하나의 숨결, 하나의 잘못, 한 순간 등, 이런 사소한 것들이 최고의 행복을 만든다. 조용히 하라!

극복하라, 보다 높은 사람이여! 왜소한 덕을, 왜소한 지혜를, 모래알 같은 추측을, 개미 같은 초조함을, 비참한 안일을, 최대 다수의 행복을!
복종하기보다는 절망하라! 그리고 진실로 높은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오늘날 어떻게 사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대들을 사랑한다. 그대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삶을 산다.

용감한 자란 공포를 알면서도 그 공포를 정복하는 자다. 심연을 보고도 뒷걸음치지 않는 자다.
독수리의 눈으로 심연을 바라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심연을 움켜쥐는 자야말로 정말 용기 있는 자다.

"인간은 보다 착해져야 하며 또한 보다 악해져야 한다."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초인의 최선을 위해서는 최대의 악이 필요하다.
(중략)
당나귀 귀를 가진 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기 위해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말이 누구의 입에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미묘하고 심원한 것이다. 양의 발톱으로는 그것을 움켜쥘 수 없다.

나는 그대들의 행로가 더욱더 험악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어야만,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은 번갯불이 그들을 후려치고 그들을 때려부술 정도로 높은 곳까지 자라날 수 있다! 나의 마음과 동경은 예사롭지 않은 것, 오래된 것, 먼 것에 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발로 올라가라! 남의 힘으로 올라가서도 안 되고, 남의 등에 타지도 말고 남의 머리에도 올라타지 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은 그대들의 항아리 속에서 서로 부딪히며 거품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중략)
그대들 주위에 작지만 훌륭하고 완전한 것들을 아주 많이 놓아 두도록 하라!

그처럼 지나친 사랑을 요구하는 자들을 피하라! 그들은 가난하고 병든 천한 자의 자식이다. 그들은 이 지상의 삶을 잘못된 관점에서, 이 대지를 사악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처럼 지나친 요구를 하는 자들을 피하라! 그들은 무거운 다리와 숨막히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동상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또 기등처럼 단단하게, 돌처럼 둥글게 서 있지는 않다. 나는 질주를 즐긴다.

나의 고통과 타인들의 고뇌에 대한 나의 동정,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나는 나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내가 열망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다.


- 이 책이 좀 더 길기를 바랬다. 끝남이 너무 아쉬웠다. 나머지는 스스로에게 맡겨져 있는 것. 그가 말한대로 '내가 열망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한 인간이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끊임없는 사회의 잣대를 갖다대고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여러가지 방법으로 종용한다. 거기에는 도덕과 가족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도 끊임없이.
그의 글은 나에게 힘을 준다. 기존의 내가 카뮈의 이방인처럼 느껴졌다면, (다른 생각을 가져서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면), 이제의 나는 스스로 이방인이기를 자처한 것으로 느껴진다 (다른 생각을 가져서 사회로부터 걸어나온). 깊은 산중에 외따로 떨어져 산다고 한들 내 삶은 충만할 듯하다. 이제 나는 무시하고 비웃는 나에 대해서 더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애초에 그랬어야 한 것이다. 너무 많은 세월을 가면을 쓰고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왔다. 온전히 한 인간으로, 삶을 누리는 것. 생각하고, 인식하고, 느끼고, 즐기는 것.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인식의 주체, 스스로에게도 멋진 것.



2012년 4월 18일 수요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 제2부 -

그는 씨를 뿌린 사람처럼 기다렸다.

나는 나의 말을 골짜기 아래로 떨어뜨리고 싶다.
내 사랑의 물줄기가 길이 없는 곳으로 떨어진다 해도 개의치 않으리라.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어갈 길을 찾지 못할 리는 없을 테니까.

인간이 존재한 뒤로 지금까지 인간에게는 즐거움이 너무 적었다. 형제들이여, 그것만이 우리의 원죄이다.

그러나 거지들을 가까이하지 말라. 우리는 그들에게 주어도 화가 나며 주지 않아도 화가 난다.
또 죄인과 옳지 못한 양심을 지닌 사람들도 가까이하지 말라. 내 말을 믿어라. 벗들이여, 양심의 가책이란 것에 계속 물어뜯기는 자는 언젠가 다른 사람을 물어뜯게 된다.

우리가 가장 부당하게 대하는 것은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일 괴로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대는 그를 위해 안식처가 되도록 하라. 딱딱한 침대, 간이 침대가 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걸어온 길에 피로 표적을 새겼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피가 진리를 증명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피는 진리의 최악의 증인일 뿐이다.

삶은 등진 자들은 대부분은 사실 천한 자들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그들은 샘과 불길과 과일을 천한 자와 함께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중 사이에서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자로서 귀를 막고 살았다. (중략)
나는 코를 틀어막은 채 어제와 오늘의 사건 속을 불쾌한 기분으로 걸어 나왔다. (중략)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권력을 추구하는 천한 자들, 문필을 추구하는 천한 자들, 쾌락을 추구하는 천한 자들과 섞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나의 정신은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갔다.

정신이란 스스로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장님의 맹목적 탐색은 역시 그가 본 태양의 힘에 의해서 증명해야 한다. (중략)
또 그대들은 아직 한 번도 눈구덩이 속에 던진 적이 없다. 그럴 정도로 불타오르지 않은 것이다.

진정되지 않은, 진정할 수 없는 것이 내 안에 있다. 그것이 외치려 한다.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 어디로? 어디서? 어째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아, 벗들이여, 내 안에서 이렇게 묻는 것은 황혼이다.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황혼이 되었다. 황혼이 된 것을 용서하라.


그렇다. 내게는 상처입힐 수 없는 것, 영원히 묻어 둘 수 없는 것, 바위까지도 부숴 버릴 수 있는 것이 있다 . 바로 '나의 의지'다. 그것은 묵묵히 굴복하지 않고 오랜 세월 속을 걸어간다.


침묵은 더 나쁘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은 채 감추고 있는 진리는 더 해롭다.

그렇다. 숭고한 자여, 그대도 언젠가 아름다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거울에 비쳐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 그대의 영혼은 성스러운 욕망으로 전율하리라. 그리고 그대의 자만심 속에도 존경이 가득 차리라!

그대들이 벌거벗었건, 온갖 색깔의 옷을 걸쳤건 나는 그대들을 견딜 수 없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나의 슬픔이다.

진실로 나는 태양처럼 삶과 깊은 바다를 사랑한다.

나는 학자들의 집에서 뒷발로 문을 세차게 닫고 뛰쳐 나왔다. (바젤대학 교수직 사임을 의미)
나의 영혼은 오랫동안 그들의 식탁에 같이 앉아 있었지만 배고픔에 시달렸다. 나는 그들처럼 호두 깨는 일을 목적으로 인식의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나는 자유를 사랑한다. 나는 생기 있는 대지를 감싸고 있는 공기를 사랑한다. 학자들의 지위와 위엄 위에서 자는니 차라리 황소 가죽으로 된 자리 위에서 잠들고 싶다.
나는 내 사상으로 인해 불타오르고 있다. 그 때문에 때로는 호흡이 곤란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먼지투성이 방을 떠나 대기 속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차가운 그림자 속에 냉정하게 앉아 있다. 그들은 무슨 일에든 방관자로 남고 싶어한다. 그리고 태양빛이 타는 듯이 내리쬐는 계단에 내려서지 않으려 한다. 거리에 서서 입을 벌린 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은 꼼짝 않고 앉아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중략)
그들은 노련하다. 그들은 예리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다양성에 비해 나의 단순성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손가락은 실을 다루는 법, 맺는 법, 짜는 법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리서 그들은 정신의 양말(무가치한 학문적 세공품)을 짜낸다.
(중략)
그들은 서로 감시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잔 꾀를 잘 부리는 절름발이 지식의 소유자를 잡으려고 기다린다. 마치 거미들처럼.
나는 그들이 언제나 신중한 태도로 독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들은 투명한 유리장갑을 끼고 있었다.
(중략)
그들에게 나는 이방인이다. (중략)
그래서 나와 그들이 함께 살고 있을 때는 내가 그들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증오한다.

내 말을 믿으라. 나의 벗, 지옥의 소란이여. 가장 중대한 사건이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란스러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조용한 시간이다.
새로운 소란을 발견한 자들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자들을 중심으로 세계는 돈다. 소리없이 돌고 있다.

- 니체의 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진솔함에 고뇌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황혼이 되었다. 황혼이 된 것을 용서하라' 라는 구절에 묻어있는 것처럼,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목적을 묻고, 의심하고, 불안하고, 외로워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나가는 것. (아무나 자신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심하고 실행하는 자만이 가지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보석처럼 빛난다. 그는 비판적 시각으로 인간사를 꿰뚫어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경계할 것을 가르치면서도 두 팔을 벌리고 껴안고 있다. 모순이라고 말하지 말자. 모순된 가치도 품을 수 있기에 인간이 아닌가? 두려움에도 앞으로 나갈 수 있기에 인간이 아닌가? 그래서 위대한 것이 인간이 아닌가? 니체는 고귀한 정신이 세상의 가치에, 세상의 윤리에, 세상의 풍습에 감춰져버리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는 진흙 속의 진주를 건져 씻어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거울에 비추어 자신이 진주임을 알 수 있도록 진흙탕을 경계하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이루어진 사회속에서의 인간은 매우 다른 모습을 띤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가진 개인도 사회라는 틀안에서, 다양한 역할과 도구로서 종용받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이 사회속의 타인들은 자신과 다른, 혹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개인을 참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기억되는 사람들은 이 다른 사람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 길이 힘들고, 고단하고, 고독하더라도. 그러기에 인간은 그 모든 파렴치하고 비겁한 행위들에도 불구하고 멋진 것일 것이다.

2012년 4월 16일 월요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 머리말, 1부 -

머리말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그들에게 주어 보라. 그들이 그것을 받는지 시험해 보라. 인간들은 은둔자에 대해 의심을 품지. 우리가 선물을 하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네."

나는 그대들이 대지에 충실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대들은 하늘나라의 희망에 대해 설교하는 자들을 믿어서는 안된다. (중략)
그런 자들이야말로 생명을 경멸하는 자요 죽어 가는 자며 스스로 독을 받고 있는 자다. (중략)
예전에는 신에 대한 모독이 최대의 죄악이었다. 그러나 이제 신은 죽었다.

인간이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줄이다. 심연 위에 쳐진 줄이다. 그 줄을 타고 가는 것도 위험하고, 가운데에 멈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두려워서 엉거주춤한 채 머물러 있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중략)
저쪽 기슭을 동경하는 화살이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사랑한다. 인식하려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 언젠가는 초인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인식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중략)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영혼을 아낌없이 내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을. (중략)
나는 사랑한다. 행위에 엎서 황금 같은 말을 던지고, 언제나 자기가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이 행하는 사람을. (중략)
나는 사랑한다. 미래에 올 사람들의 의의를 인정하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사람들을 구하는 사람을. 그런 사람은 현존하는 사람을 상대로 몰락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사랑한다. 상처 입었을 때도 계속 영혼의 깊이를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그리고 아주 작은 체험으로도 몰락한 수 있는 사람을. 그런 사람은 이렇게 하여 기꺼이 저 다리를 건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한다. 왜냐하면 일하는 것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위로가 몸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온갖 신앙을 가진 자를 보라!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의 가치관을 깨뜨리는 자는 파괴자이며 범죄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다.
창조하는 자가 바라는 것은 길동무이다. 시체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자들도 아니다. 창조자가 구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목록에 기록할 동반자다.


제 1 부

그러나 이 세계 저편에 대한 망상으로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괴로움과 무능이야말로 내세를 창조한 것들이다.

나는 신성하다는 자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신임받기를 바라고,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 죄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형제들이여, 차라리 건강한 육체의 소리에 귀기울여라! 그것이먀말로 성실하고 순결한 소리다. 건강한 육체, 완전하고 튼튼한 육체는 보다 성실하고 보다 순결하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덕이다.

과거에는 의심이 악이었고, 본래 자아의 의지가 악이었다. 그 시대에 병든자는 이단자가 되거나 마녀가 되었다.

모든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 사랑한다. 피로 써라!

인생은 무겁다. 그러나 그렇게 연약한 꼴을 보이지는 마라.
우리는 그 짐을 질 정도로 힘이 센 한 쌍의 당나귀다.

내가 악마를 보았을 때 (중략) 그것은 무거운 영혼이었다. 모든 사물은 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것을 물리치는 것은 노여움이 아니라 웃음이다. 자, 무거운 영혼을 물리치자.

높은 데 올라가 보면 언제나 나는 혼자고, 아무도 나와 이야기하지 않아요. 고독이라는 매서운 추위가 나를 무서워 떨게 하지요. 도대체 나는 높은데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그러나 고귀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착하다는 사람에게조차 고귀한 자는 방해물이지. 그리고 그들은 이 고귀한 자를 착하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네.
고귀한 자는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고 하지.
착하다는 사람은 오래된 것을 사랑하고, 오래된 것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네.

대지는 쓸모없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중략) 그들은 그 '영원한 삶'이란 것을 좇아 삶에서 사라지는 편이 낫다.

국가는 그대들에게 음험한 거짓말로 속삭인다. 국가는 스스로를 낭비하고 몸을 내맡기려는 자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

착한 자들이나 나쁜 자를 불문하고 모든 자가 독을 마시는 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자나 나쁜 자, 모든 자들이 자아를 잊어버리는 곳, 모든 사람들이 서서히 자살하면서 '삶'이라고 불리는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이 쓰레기 같은 자들을 보라! 그들을 언제나 병들어 있다. 그들은 담즙을 토해 내 그것을 신문이라 부른다. 그들은 서로를 게걸스럽게 먹지만 소화시키지 못한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그 악취 속에서 질식하고 싶은가? 아니, 창문을 부수고 자유 속으로 뛰어나가라!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피하라.

그들을 향해 손을 들지 말라. 그들은 너무 많아 한이 없다. 파리채가 되는 것이 그대의 운명은 아니다.

그들은 그대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기 위해 자신들의 좁은 소견으로 이것 저것 추측해 본다. 그들에게 있어 그대는 의심스러운 존재이다.

그대의 고요한 자존심은 언제나 그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그대가 일부러라도 겸손해지면 그들을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한다.

그들은 그대를 대할 때 자신을 소인배로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열등감은 그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복수심으로 불타오른다.

벗에게 있어 그대는 초인을 목표로 날아가는 하나의 화살, 동경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 나의 친구여, 인간이란 극복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대가 멍에를 벗어날 만한 자격이 있는 자란 말인가? 세상에는 타인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집어던지자마자 자신이 가진 마지막 가치까지 내버린 자가 적지 않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내가 그대 눈빛을 통해 분명히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독이 그대를 피로에 지치게 할 것이다.

고독한 인간을 죽이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여러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그대를 죽이는 데 실패한다면 그 감정이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대는 과연 그 감정들을 없앨 수 있겠는가?

고독한 이들은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너무 급하게 손을 내민다.
그대가 손을 내밀면 안 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는 앞발을 내밀어라.

그대는 자신의 불길로 자신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재가 되지 않은 채 어떻게 거듭나기를 바라겠는가?

그대는 사랑과 창조의 힘을 지닌 채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형제여, 이윽고 시간이 흐르면 정의는 다리를 절면서 그대를 따라가리라.
형제여, 나의 눈물을 지닌 채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자신을 극복하여 창조하기를 원한고, 그래서 멸망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계속 제자로 머물러 있는 것은 스승에게 보답하는 길은 아니다.

- 정말로 읽고 싶었던 책,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였다. 한국에서 날아온 소포를 열면서 가슴이 벌써 뛰었다. 그의 아름다운 문구들과 강인한 철학이 새로운 샘물을 나에게 부어주는 것만 같다. 그가 허무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는 지나치게 '실존적'이다. 그는 인간을 너무도 중요시한 나머지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가 할퀴는 말들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가 얼마나 인간이라는 존재를 믿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실망하였는지, 그럼에도 얼마나 믿고 싶어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상적인 인간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한다. (그것은 평등의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르게 태어난다. 그것은 우열의 개념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애써 이 부분을 외면하려 하지말자.) 그가 제시하는 초인은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이르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정은 제쳐 놓자. 그런 세상은 있지도 않을 것이므로.)
나에게 화살처럼 와서 박히는 2개의 말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라는 것과 '고독'이다. 사람을 옭아매는 많은 물질적, 정신적 밧줄에서 풀려나 맨 몸이 되었을 때, 그것은 불안한 자유이다. 그 '불안'을 지니고 '고독'에 몸을 맡긴 채 걸어가야 하는 길은 분명 인간으로서 어려운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위한'이라는 전제가 걸려있는 한, 그 길은 분명 그 가치를 지닐 것이다.

2012년 4월 3일 화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결론 -

존재는 이유 없이, 원인 없이 또 필연성 없이 존재한다. 존재의 정의 자체가 우리에게 존재의 근원적인 우연성을 털어놓는다.

나는 존재를 파악한다. 나는 존재의 파악이다. 나는 존재의 파악'일 뿐이다.'

우리로 하여금 '고지식한 정신'을 단념하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한다. 사실 '고지식한 정신'이 지닌 이중적인 특징은, 가치를 인간적인 주관성에서 독립한 초월적인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 그리고 '바람직하다'는 성격을 사물의 존재론적 구조에서 사물의 단순한 물질적 구성으로 옮기는 것이다. (중략) 이 도덕은 자기를 불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자기의 모든 목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인간을 손을 더듬거리며 존재를 탐구하고 있고, 이 탐구가 자유로운 기도라는 것을 자기에게 숨기고 있다. 인간은 자기를, 마치 길 위에 놓여 있는 온갖 임무에 의해 자신이 '기다림을 요구받고' 있는 것처럼 만들고 있다. 온갖 대상은 무언의 요구이고, 인간은 그 자신에 있어서는 이런 요구에 대한 수동적인 복종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가치를 현실에 존재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때야말로 그의 자유는 그 자신을 의식하고,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불안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며 또한 '세계'를 현실에 존재하게 하는 무를 발견할 것이다. 존재의 탐구, 즉자의 아유화가 그의 자유에 대해 '그 가능성'으로서 발견되자마자, 그의 자유는 불안에 의해 또 불안 속에서, 그런 가능이 가능으로 있는 것은 다른 가능의 가능성을 배경으로 할 때뿐이라는 것을 파악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설령 가능이 '마음대로' 선택되거나 취소될 수 있다 하더라고, 가능에 대한 모든 선택의 통일을 ㅇ루는 주제는 가치이고 '자기원인적인 존재자'의 이상적인 현전이었다. (중략) 자기를 자유로서 원하는 자유란, 요컨대 '그것이-있는 것으로-있지 않고' '그것이-있지 않은-것으로-있는' 하나의 존재이고, 이런 존재는 존재 이상으로서, '그것이-있지 않은-것으로-있고', '그것이-있는-것으로-있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일이다.

-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많은 물음으로 그 글을 마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존재의 모습, 즉, 미래를 향해 기투하는 존재로서의 존재,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향한 존재, 불안과 책임을 떠맡고 자유라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존재는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힘을 인간 자신에게 돌려놓는다. 그는 '무'라는 개념을 도입시켜 허무적인 존재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적극적인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부조리한 우연적 탄생으로 정의해버리고, 대신 인간존재의 자유에 무한한 권한을 이끌어냄으로써 존재의 불안으로부터 신이나 제도로 도피해버리고자 하는 인간을 잡아끌어내 우리의 존재 자체를 똑바로 보도록 '직시하도록' 들이밀고 있다.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은 이제 이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그 근원적 물음에서 그 실존적 물음으로 변화했다. 존재의 실현을 '생각'에서 '함'으로, '가치적 소유'가 아닌 '실존적 소유'로, 나의 즉자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2012년 4월 2일 월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4부, 제2장 함과 가짐 -

우리가 사랑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칭찬할 수도 있는 '플로베르'라고 하는 인간, 우리에게 있어서 '타인'인 그 인간, 그가 존재했었다는 단지 그 사실만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직접 덮치는 그 인간은, 본디 이런 욕망의 무한정한 하나의 기체, 즉 그런 욕망을 수도적으로 받아들일 불확정적인 일종의 점토와 같은 것일까 - 아니면 플로베르라고 하는 인간은 그런 환원될 수 없는 경향들의 단순한 묶음으로 환원되는 것일까? 어느 경우를 선택하더라도 그 인간은 사라져 없어진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가 가루처럼 부서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존재속에서 하나의 중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이 성향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사람들은 콩트가 이름 지은 의미에서의 '유물론'의 길, 즉 상위의 것을 하위의 것으로 설명하려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전체이지 집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가장 피상적인 행위 속에도 있는 그대로 자기를 나타낸다. 달리 말하면, 아무것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 하나의 취향, 하나의 버릇, 하나의 인간적 행위란 없는 것이다.

프로이트 학파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헤아릴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거기에, 빛에 비쳐지며 존재한다.

인간에 대한 인식은 전체적이어야 한다.

정신은 끊임없이 작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은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며, 정신의 이 산출에 대해서 말하자면 무관심하다.

고지식한 사상은 모두 세계에 의해 농도가 짙어져 있다. 그것은 응고시킨다. 고지식한 사상은 세계를 위해 인간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고지식한 인간은 '세계에 속해' 있으며, 더 이상 자기 안에 어떤 의지처도 지니지 않는다.

이를테면, 눈 덮인 고원, 알프스 고원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본다는 것은 벌써 그것을 갖는 것이다. 이 설원은 그 자체에 있어서 이미, 보는 것에 의해 존재의 상징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모든 소유물이 인간적인 질서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의 책임자이다.

자전거를 나에게 소속시키기 위해서는 한 장의 지폐를 건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그 소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의 전 생애가 필요해질 것이다.

파괴는 - 아마 창작보다 더 훌륭하게 - 아유화를 실제로 이룬다. 왜냐하면 파괴된 대상은 더 이상 자기를 스며들 수 없는 것으로 보여 주기 위해 거기에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하나의 파괴적이고 아유화적인 반응이다. (중략) 내가 피우는 다재를 통해, 불타서 연기가 되는 것, 기체가 되어 내 안에 흡수되는 것은 세계였던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미래를 향해, 어떤 자기 기투를 향해 돌진하려 하지만, 자신이 그곳에 이르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하게 자신의 과거의 빨아들임에 의해 붙잡혀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신을 탄생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한에서는 자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관념은 모순되어 있다. 우리는 헛되이 자기를 잃어버린다. 인간은 하나의 이로울 것이 없는 수난이다.

-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은 '소유'에 관한 것이었다. 소유란 단지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일이 아니라, 그 물건을 '함'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다. 위의 자전거의 비유에 보듯이, 우리는 진정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욕심내고 창고 가득히 쌓아두고 있다. 진실로 우리의 생을 바쳐 소유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삶을 구성해나간다면,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즉자화하기 전에.)
또한, 보는 것 그 자체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감상/감탄하는 것' 혹은 '봄으로 인해 마음의 움직임이 생기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본다. 매일. 현대와 같은 문명에서는 더 많은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보는 것은 얼마나 될까? 쓸데없는 것을 보느라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닐까? 지금 하늘을 소유할 기회, 이 푸르른 봄날에 피어난 새싹들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데도 말이다. 카뮈가 썼던대로, '본다는 것, 이 땅 위에서 본다는 것, ...... 오직 바라보는 것이면 그만이었다.' 에 공감한다.

2012년 4월 1일 일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4부, 제1장 '있음'과 '함' -

인간존재는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존재하게 해야 한다는, 지탱할 것이 없는 필연성에 어떤 종류의 도움도 없이 전적으로 맡겨져 있다. 그러므로 자유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재이다. 다시말해 자유는 인간의 '존재의 무'이다.

특히 '자기포기'라고 불리는 수많은 행위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그것이다. 피로.열.굶주림. 목마름 등에 몸을 맡기는 것, 쾌락에 빠져 의자나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것, 누워서 아무렇게나 뒹구는 것, 자기 자신의 몸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 (중략) 그 경우, 자기를 '몸으로 만들려는' 기도는, 그때뿐인 셀 수 없이 많은 사소한 향략에, 셀 수 없이 많은 사소한 욕구에, 셀 수 없이 많은 약점에, 기꺼이 자기를 내던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은 불안.고독.책임은 그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의식이 그저 단순한 자유인 한에서 우리 의식의 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시작인 동시에 끝이 아닌 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은 체념에서 하는 수도 있고, 마지못해 하는 수도 있다. 선택은 하나의 도피일 수도 있다. 선택은 자기기만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도피하는 자, 종잡을 수 없는 자, 주저하는 자 등으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 다양한 경우에, 목적은 하나의 사실적 상황의 저편에 세워진다. 게다가 그런 목적의 책임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의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선택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한 자'로 선택할 것인지, '고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또는 '비열한 자', '비굴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이 허망한 노력이고, 그것이 허망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것을 선택한 것은 집단 속에서 사라지는 것보다는 '끝'에라도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 또는 '존재'에 이르는 최상의 수단으로서 내가 낙담과 부끄러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다. (중략) 열등한 예술가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려는 '의지'를 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존재에게 있어서, '있음'은 '함'에 귀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략)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존재에 있어서는, 존재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자유는 자기 존재의 '선택'이지 자기 존재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뜻대로 바꾸기는커녕, 스스로 자신을 바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내 계급의 운명, 내 민족의 운명, 내 가족의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나의 권력과 나의 재산을 쌓아올리는 것에 대해서도, 나의 매우 사소한 욕망이나 나의 습관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유롭지' 않다.

보통의 사물이 한계로서 자기를 드러내게 되는 것은, 그런 테두리와 기술, 목적의 관계에 의해서이다.

'자유롭다'는 말은 '자기가 원하던 것을 획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원하는 것(넓은 의미에서 선택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바꿔 말하면, 성공은 자유에 있어서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략) 단순히 '선택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즉, 선택은 '함'과 똑같기 때문에, 꿈이나 바람과 구별되기 위해 이룸이라는 단서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동시에, 나의 상황에 대해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또한 나는 결코 '상황 속에서밖에' 자유롭지 않다.

그 밖에도 만일 내가 그 조직에 따른다면, 나는 그 조직에 의존하게 된다. (중략) 내가 복종하는 한에서, 내가 순서 속에 나를 끼워넣는 한에서, 나는 '누구든 상관없는 누군가'의 인간존재의 목표에 따르며, '누구든 상관없는 누군가'의 기술에 의해 그 목표들을 이룬다.

그렇다 해도 '타인'의 존재는 나의 자유에 대해 사실상의 하나의 한계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있어서 즉자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타유화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중략) 왜냐하면 타인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거기에 존재하며, 다정하게 자기를 내밀고 있다. 그러나 이 나는, 하니의 부재에 불과하다. (중략) 자기를 심판하는 것, 즉 자기에 대해 타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삼는 불성실한 양심의 불안이 싹트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게 있어서 '존재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그것을 '선택'해야지만 존재할 수 있다.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나의 자유 법칙은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 나는 타인에게 있어서 '내가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내가 타인에 대해 나타나는 그대로 나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말해 하나의 선택적인 떠맡음에 의해서만, 나에게 있어서 '내가 타인에 대해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존재하도록 시도할 수 있다.

인간은 이미 인간적인 것밖에 만날 수가 없다. 더 이상 인생의 '저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하나의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인생의 최종 현상이기는 하지만 또한 인생이다. 이런 것으로서 죽음은 거꾸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생은 인생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다. (중략) 죽음은 '나의 것'이 된다. 내면화됨으로써 죽음은 개별화된다. 그것은 이미 인간적인 것에 한계를 지니도록 하는, 위대한 불가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현상이며, 이 현상이 이 인생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뿐인 인생, 즉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인생, 결코 다시 새로 수정할 수 없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가 된다. (중략) 죽음의 절망적인 의미를 깨닫게 하고, 그 결과 그들이 갑자기 '인생은 유일하다'는 그 절망적이고 도취되는 듯한 진리에 눈뜨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사실, 만일 '현존재'가 정말로 기도이고 앞지르기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당하지 않는다면',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의 앞섯서 존재함을 더 이상 실현하지 않는 가능성으로서의, 그 자신의 죽음의 앞지르기이다 기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하여 죽음은 현존재의 본래의 가능성이 되었다. 인간존재는 '죽음에 대한 존재'로서 정의된다. 현존재가 죽음을 향한 자기의 기도를 결정하는 한에서 현존재는 '죽는 것-에 대한 자유'를 실현하고 또 유한성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스스로 자기를 전체로서 구성한다.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은, 많은 사형수들  사이에 있는 한 사람의 사형수의 상황과 같다. 그 사형수는 자기의 사형 집행일을 모르고 있지만 매일같이 자기의 감방 친구가 처형되는 것을 본다."

죽음에 대비를 권장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지혜가 이해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음을 '기대된 죽음'으로 바꿈으로써 죽음을 되찾으려고 한다. 만일 우리 인생의 의미가 죽음의 기대가 된다면, 사실 죽음은 엉겹결에 닥쳐옴으로써 인생 위에 죽음 도장을 찍는 일밖에는 못할 것이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개별화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죽음은 한 사람의 '인격의' 죽음, 한 사람의 개인의 죽음이고,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해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임을 우리에게 지시한다.

죽음이 기대되는 한은 결코 없을 것이다. (중략) 죽음를 '각오하는' 것은 죽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가능성으로 보면,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기 전에 죽거나 또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아남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인간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존재는 자신이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에 의해, 자신이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알려 준다. 또는, 말하자면 인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장래적 (와야-하는)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즉 그가 다른 작품을 쓸 수 있는 '소질이 있는지 어떤지' 알고자, 불안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시련을 거는 바로 그때, 그가 자기를 기대하고 있는 바로 그때, 갑자기 죽음이 그 작가를 덮친다. 모든 것을 미결정 상태 속에 밀어넣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죽음은 나의 모든 가능성 중에 하나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어버린 지금, 그의 인생이 현재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그 즉자적인 충실을 향해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의 기억'밖에 없다. (중략)
'망각의 심연에 가라앉은 인생' (중략)
잊혀진다는 것은 타인의 어떤 태도의 대상이 되는 것, 타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의 분명한 결정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선택한다. (중략) 그러나 이런 무관심 - 죽은 자들을 '다시 죽게' 하는 데 존재하는 이 무관심 - 은 죽은 자들에 대한 다른 태도들 가운데서 하나이다.

삶은 자기 자신의 의미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삶은 항상 유예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자기비판의 능력, 자기 변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 능력에 의해 삶은 자기를 하나의 '아직-없음'으로 정한다. 또는, 말하자면 삶은 자신을 그것으로 있는 것의 변화로서 존재한다. 죽은 인생은 그것만으로 변화하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지만, 이 인생은 '이루어져 버렸다.' 다시 말하면, 죽은 인생에 있어서는 도박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죽은 인생에 있어서는 단지 임의의 결정적인 하나의 전체화만이 문제가 아니라, 나아가서 철저한 하나의 변모가 문제이다. 내부로부터 죽은 인생에 '닥쳐올' 수 있는 것은 이미 아무것도 없다. 죽은 인생은 완전히 닫혀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거기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은 인생의 의미는 외부로부터 변경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죽음'의 존재 자체는 우리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타자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송두리째 타자의 것이 되게 한다. 죽은 자로 있는 것은, 산 자의 희생물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결코 나의 존재론적 구조가 아니다. 적어도 나의 존재가 '대자'인 한에서 그러하다. 자기 존재에 있어서 죽음이 가능한 것은 '타인'이다. 대자존재 안에는 죽음에 있어서 어떤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자존재는 죽음을 기대할 수 도 없고, 죽음을 실감할 수도 없으며, 죽음을 향해 자기를 기투할 수도 없다. 죽음은 결코 대자의 유한성의 근거가 아니다. (중략)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성의 어떤 면, 그리도 대타존재의 어떤 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탄생한다는 것은 부조리이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도 부조리이다. 또 한편으로 이 부조리는 이미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타인의 가능성인, 나의 '가능성 - 존재'의 끊임없는 타유화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주체성의 외적인 하나의 한계, 사실상의 하나의 한계이다.

죽음은 내 선택의, 선택된 이면, 도피하는 이면으로서, '한계 - 상황'이다.

죽음은 '나'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향한 자유'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하나의 자유로운, 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상황은 이 먼지 자욱한 이 언덕길이고, 내가 느끼는 이 타는 듯한 갈증이며, 내가 돈이 없는 까닭에 또는 내가 같은 나라, 같은 인종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을 때의 이 거부이다. 상황은 아마도 내가 예정한 목표에 이르는 것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을 만큼 지친 몸을 이끌고, 적의를 품고 있는 그런 주민들 한복판에 내버려져 있을 때의 나의 고독이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문을 자기가 만든다'

이 자유의 사실이 인간적인 운명에 있어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이로운 일일 것이다. (중략) 인간은 자유라는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므로, 전세계의 무게를 자기의 두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존재의 방식에 관한 한, 그 책임자이다. (중략) 대자의 책임은 압도적이다. 왜냐하면, 대자는 그것에 의해 하나의 세계가 '거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자는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이든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자는 이 상황을 그 역행률이 아무리 견디기 힘든 것이라 해도 그것까지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떠맡아야만 한다. (중략) 나의 신상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최악의 재앙, 최악의 위협도, 나의 기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중략) 내가 비인간적인 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은, 단지 공포에 의해서, 도피에 의해서, 마술적인 행위에 의지함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결정은 인간적이고, 나느 그 결정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상황이 '내 것'인 것은, 상황이 나 자신을 선택하는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상이기 때문이고, 상황이 나에게 제시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나를 표현하고 나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존재의 특징은 '인간존재는 변명 없이 존재한다'고 하는 그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이 전쟁 속에서 나는 날마다 나를 선택한다. 나는 나를 만듦으로써 이 전쟁을 내 것으로 한다. 만일 이 전쟁이 공백의 4년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요컨대 우리아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각각의 인간은 인식과 기술의 세계에서 출발한 하나의 절대적인 자기 선택이며, 이 선택이 세계를 떠맡는 동시에 세계를 비춰 준다. 각각의 인간으 하나의 절대적인 날짜를 누리는 하나의 절대자이고, 다른 날짜에 있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자문하느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잰에 이르게 된 이 시기의 가능한 의미들의 하나로서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기 자체와 나를 구분할 수가 없다. 내가 다른 시기로 옮겨지는 것은 모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가 변명 없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한과 후회도 없이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에 존재에 대해 내가 출현한 순간부터 나는 오직 나 혼자서 세계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으며, 그 어떤 것도 또 그누구도 그 무게를 덜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사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자이다. 그러나 나는 내 책임 자체에 대한 책임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존재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세계 속에 '버려져' 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물결 사이로 떠다니는 널빤지처럼, 적의를 품은 하나의 우주 속에 버려진 채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 오직 혼자서, 도움도 없이 구속되어 있는 나 자신을 갑자기 발견한는 것이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이 책임에서 한순간도 나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나의 욕구 자체에 대해서도 나는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나를 세계 속에 수동적으로 있게 하는 것, 사물과 타인에 대해 작용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도 또한 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또 자살은 '세계-속-존재'의 여러가지 존재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진정 대자는 불안 속에서 자기를 파악한다. 다시 말하면 대자는 자기의 존재의 근거도 아니고 타인의 존재의 근거도 아니며, 세계를 형성하는 즉자의 존재의 근거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속 또는 자기 밖에서, 곳곳에서 존재의 의미를 결정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로서 자기를 파악한다. 자기의 버려짐까지 되돌아볼 정도의 책임 속에 내던져 '있다'고 하는 자기의 존건을, 불안 속에서 실현하는 자는 이미 회한도 후회도 변명도 갖지 않는다. 그는 이미 완전히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자유, 그 존재가 드러내 보임 자체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자유이다.


-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사상이 가장 집약되어 있는 부분이며, 내가 가장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던 부분이다. 인간존재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상황도 죽음도 그 회피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모든 개인의 생은 그러므로 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인간의 위대한 자유와 책임을 자기기만에 빠짐으로써 던져버리거나 외면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같은 자유와 책임을 가진 타인에 대한 존중을 져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잊고 사는 것, 죽음을 잊고 사는 것, 타인의 생을 잊고 사는 것.
우리에게 지워진 존재의 무게가 무겁고, 불안의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록 크다 하더라도 인간존재가 한계 속에서도 가진 위대한 능력, 자유와 책임을 바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자 또한 다른 대자의 타자로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존경과 배려, 또한, 타자가 죽음으로 그 존재를 잃었을 때 타자의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기억해 주는 일. 그것이 존재가 가장 인간적인 의미를 찾는 일이 아닌가 한다. 하늘은 푸르고, 자연은 아름답다. 그러나, 자연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그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의미를 찾아 줄 수 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나의 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