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카뮈의 '전락'중

수상한 존재가 그만 되려거든 그저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지요.

인간들의 상상력이란 왜 그렇게도 빈약하지요? 사람은 꼭 어떤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들 하거든요. 그렇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가질 않는 거예요. 그러니 자진해서 목숨을 끊어 남들이 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달라고 자신을 희생해서 무엇하겠는가 말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저들은 내 죽음에 대해서 어리석거나 천박한 이유를 붙이면서 이용하려고 들 겁니다. 이것 보세요, 선생. 결국 순교자는 잊혀져버리든가 비웃음을 사든가 아니면, 이용당하든가 어느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어요. 남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란다는 건 결단코 안 될 얘깁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던 원의 고리가 깨어져버리면서 저들은 재판소에서 그러듯이 자기들끼리 한 줄로 자리를 잡는 것이었어요. 무언가 심판받아야 할 것이 내게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나는, 요컨대 저들에게는 남을 심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소명의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성공한 낯짝은 남의 눈에 잘못 띄게 되면 미련한 당나귀라도 분통이 커지게 만들 지경이지요.

나는 능력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시민 정신이 투철한, 분개한, 너그러운, 협동적인, 모범적인 사람 등의 역을 연출했어요. 그만 해두죠. 이미 선생께서도 이해하셨겠지만, 요컨대 나는 저기 있으면서도 딴 데 가고 없는 저 네덜란드인들과 같았던 겁니다. 즉 내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나는 사실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지내면서도 그들과 이해관계를 함께하지 않는 터인지라 나는 내가 개입하여 하고 있는 일을 진지하게 믿고 있질 않았어요. 남들이 내 직업, 가족, 혹은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있어서 내게 기대하는 바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정중하고 또 동시에 무사태평했지만, 그떄마다 어쩐지 마음은 딴 데 있는 것만 같은 심정이서서 결국은 그 때문에 만사가 시들해져버리는 것이었어요.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어떤 이중심리 상태 속에서 산 셈이어서 내가 한 가장 심각한 행동은 흔히 내가 책임감을 가장 안 느끼면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 진실이란 건 말이죠 견딜 수 없을 만틈 지겨운 것이랍니다.

대답을 미리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똑같은 의문들과 대면한 채 끊임없이 그 누구에겐가, 아니 그 누구에게라 것도 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 전직 변호사 클라망스가 누군게에가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형식의 소설 '전락'에서 카뮈가 꼬집어 내는 인간의 작은 부분들, 수치스러운 부분이지만 인간이기에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그러한 부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그러나 용서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부분들을 읽어내려갔다. 그러기에 주인공 역시 그 자신을 '재판관 겸 참회자'라고 부르며, 신의 존재를 무시한다하더라도, 인간 자체로 충분히 죄인이 될 수 있는, 또한, 그 부도덕함을 인지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할만한 존재 자체를 보여준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