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7일 목요일

단테의 신곡중에서

지옥의 제구 영역으로 들어가네
신대의 거인의 손을 빌려
내려가네
지옥의 밑바닥

고요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소리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짙은 어둠 속으로 바늘 같은 한 줄기 바람이 불어갔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중략-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떨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대기조차 바르르 떨리고 있었따. 팽팽하게 긴장된 시간 속을 무거운 발자국 소리만이 뚜벅 뚜벅 길을 가고 있었다.

- 단테의 신곡 중 문학적인 표현이 내게 가장 와 닿은 부분이다. 가장 무섭도록 살벌한 지옥의 밑바닥이 마치 우리가 사는 현실에 어떤 순간을 묘사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 마음의 지옥이, 우리가 사는 지옥이, 현실의 지옥이 시간을 따라 흘러갈 때.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그 곳에, 당신은...





나그네여,
그대의죄를 씻어라.
죄가 무거울수록,
정화의 고행도 힘드나니
나그네여,
그대의 죄를 씻어라.

"이런 높고 험한 곳에 서려면 날개가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힘든 일이야. 날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날개가 없어.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 역시 뛰어 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을 가지고 발 아래를 잘 살피는 것 뿐이지 않을까. 그리고, 시간을 지워버릴 것....... 조금 전까지 밑바닥에 있던 우리가 이렇게 높은 곳에 올랐다는 것은, 우리가 날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 단테가 묘사한 지옥같은 현실을 겪고 있다고 느껴질 때, 앞으로 한발짝도 내딛기 힘들게 느껴질 때,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고 한발씩 내디디다 보면, 어느순간 그 절망이, 어둠이, 헤어날 수 없음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진짜 우리가, 내가 날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 지옥같은 순간에서 벗어난 것은?

2011년 1월 21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행락지 중에서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절보다 현재에 와서 이것은 더 심하게 변했다. 사람들은 TV, 핸드폰, 인터넷 등에 시간을 보내느라 정작 생각할 시간을 잊어버린 듯 하다.
동물과 차별화된 특징인 "사고하는 능력"이라는 것이 시험볼 때만 필요한 인간의 슬픈 현대 문명이란.......

2011년 1월 1일 토요일

샤르트르의 '구토'중

내 생각이 옳다면, 또 축척되어가는 모든 징조가 내 삶의 새로운 파괴의 전조라면, 나는 정말 두렵다. 나의 생활이 풍부하다든지, 충족되어 있다든지, 귀중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생겨나려고 하는 것, 나를 사로잡으려는 것...... 이 두렵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가? 연구와 저술, 그 모든 것을 계획 속에 남겨두고 또다시 가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수개월 또는 수년이 지났을 때, 지쳐빠져서 실망한 모습으로 새로운 폐허의 한복판에서 깨어나게 될 것인가? 너무 늦기 전에 나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을 똑똑히 알고 싶다.

- 같은 두려움...... 같은 공포. 두려움을 외면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아는 두려움. 내가 정말 그 두려움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 두려운. 시작도 못한 채 생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달려갔는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정말 나의 두려움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출발점에 선 나-

샤르트르의 '구토'중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두렵다-나는 그것에 뒷덜미를 잡혀서, 높은 파도처럼 들어올려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 한 존재에게 절실함이 이 세상에서 여분의 존재일수도, 인간존재는 그토록 부조리하면서도 슬픈 운명을 타고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