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6일 토요일

카뮈의 '페스트' 중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곳에서 병을 앓는 사람은 아주 외롭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시간에 전화를 붙잡고서, 혹은 카페에 앉아서 어음이니 선하증권이니 할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데, 더위로 불꽃이 튀기는 듯한 수많은 벽들 뒤에서 덫에 걸린 채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상상해 볼가. 비록 현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메마른 고장에 죽음이 그처럼 들이닥칠 때 불편함이 어떠할 것일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나흘째 되는 날부터 쥐들은 떼를 지어서 거리로 나와 죽었다.

마치 그 광경은 우리의 집들이 자리 잡고 서 있는 땅 자체가 그 속에 있던 응어리와 악혈을 표면으로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건강한 사람의 짙은 피가 돌연 역류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들어오시오, 나는 목매달았소.'

공포가, 공포와 함께 반성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망자의 증가도 충분하지는 못했는지 시민들은 그 불안의 한복판에서도, 그것은 필시 가슴 아픈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결국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버리지 못했다.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겁은 났지만 절망은 하지 않았으며, 페스트가 그들의 생활 형태처럼 보이기까지 하고 또 그때까지 영위할 수 있었던 생활 방식 자체를 잊어버리기까지 하는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일을 두고 시달리다 보니 사람마다 심장이 무뎌져 버렸는지, 마치 신음 소리가 인간의 타고난 언어라는 듯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거나 그 곁에서 살고 있었다.

질병이 확대되면 도덕도 역시 헐렁해질 것이다. 우리는 무덤 근처에서 벌어지던 그 밀라노의 사투르누스 축제를 여기서도 다시 보게 될 판이다.

그때 나는 절대로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이와 같이 매주일 계속해서 그 페스트의 포로들은 저마다 재주껏 발버둥을 쳤다. (중략)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아! 정말이지 인간은 다른 인간들 없이 지낼 수는 없고, 정말이지 그도 이제는 저 불행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속수무책의 신세이고, 정말이지 그들 곁을 떠나고 나면 그 역시 가슴 속에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 동정심의 전율과 똑같은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그런 인간이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라도 전진을 계속해야만 하고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죄 없는 사람이 눈알을 잃었을 때,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앙을 잃거나 눈알이 빠지거나 해야 마땅하죠. 파늘루는 신앙을 잃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는 갈 데까지 갈 거예요.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겁니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인간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필연적으로 그러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행위나 원칙들을 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그러한 죽음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속을 썩이는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자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목구멍이 착 달라붙는 것같이 괴로웠어요. 나는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외로웠어요. 내가 나의 께름칙한 마음을 표시할라치면, 그들은 나에게 지금 때가 어떤 때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흔히 감동적인 이유들을 내세워 아무리 해도 소화되지 않는 것을 내게 삼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일단 한번 양보하면 끝도 없이 양보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략)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을 약간 일으키면서 타루에게,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기링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본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건 공감이죠."

사람은 신없이 성인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늙은 서기의 얼굴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눈물을 라유의 마음을 흔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눈물의 원인을 알고 있었고, 자기도 역시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 슬픔은 리유 자신의 슬픔이었고, 그때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같이 나누고 있는 고통 앞에서 문득 치솟는 견딜 수 없는 분노였다.

끝으로, 낮과 밤의 어떤 시간이 되면 인간이 비겁해지곤 하는데,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시각이라고 그는 대답 대신 적어 놓았다. 타루의 수첩은 여기서 끝나 있었다.

그에게 그렇게도 친근했던 그 인간의 모습이, 지금은 창끝으로 찔리고 초인간적인 악으로 불태워지고 하늘의 증오에 찬 온갖 바람에 주리 틀리면서 바로 그의 눈앞에서 페스트의 검은 물결 속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그로서는 이 난파를 막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빈손과 뒤틀리는 마음뿐, 무기도 처방도 없이 기슭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자신들의 우정을 정말 우정답게 체험할 시간도 미처 갖지 못한 채 그날 저녁에 타루는 죽어 갔던 것이다. 타루는 자기 말마따나 내기에 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 리유가 이긴 것은 무엇이었던가? 단지 페스트를 겪었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우정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애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그가 얻은 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타루도 아마 그런 것을 내기에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단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추억에 남는 것만을 지니고 살아갈 뿐, 희망하는 것은 다 잃어야 되니,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이랴.

삶의 체온과 죽음의 이미지, 그것이 바로 인식이었던 것이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 카뮈가 이야기한 세가지 긍정의 작품 중의 하나인 '페스트'.
죽음과 고립, 저항할 수 없이 밀어닥친 이 재앙에 있어 사람들이 어떠한 행동으로 내몰리는지 카뮈의 문장은 날카롭다. 그러나, 의사인 리유, 타루, 랑베르 등의 인물을 통해, 인간으로서 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최선을 가지고 맞선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 우정, 공감들... 잿빛 하늘 아래에서도 분명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포에 휘말려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일삼게 되더라도, 또다른 리유와 타루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타루의 말대로 '한번 양보하면 끝도 없는 양보를 하게 될까봐'... 그러나, 지금에 와서 비극적인 사건에 침묵하는 나는, 대중은, '양심을 한 보 양보하고, 정의를 한 보 양보하고' 결국 끝도 없이 뒤로 밀리게 될까봐 두렵다.
페스트를 겪은 리유는 그 전의 리유와는 다른 리유이다. 그는 많은 고통과 슬픔을 보았지만, 그에 맞선 용기와 양심도 보았다. 그 추억들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간이 생에 있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전부라고 한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님을 굳게 믿는다. 카뮈의 인간에 대한 긍정을 믿는다.

2012년 6월 15일 금요일

블라드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중

나의 이 글이 머리글이 된 그 기묘한 원고의 저자인 험버트 험버트는 1952년 11월 수감된 상태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었다. 그가 재판을 받기 며칠 전 일이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괴물이었지나 너만은 사랑했다. 나는 비열하고, 잔인하고, 야비한 그 모든 것이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 너를 사랑하였다! 네 기분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때도 더러 있었으나 그것을 안다는 것은 곧 지옥이었다.

<롤리타> 나의 책에 대하여
1949년 무렵, 뉴욕 주 중부 이타카에 살고 있을 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 고동 소리가 또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음의 다짐이 새로운 열의를 가지고 영감에 합류했고, 이 주제를 다시 다루어 이번엔 영어로 써볼 생각이었다.
(중략)
진지한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이 발표한 작품이 끊임없이 위로를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표시등은 지하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켜져 있어서, 감추어 둔 자동온도조절 장치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이내 따뜻한 온기를 내뿜는다. (중략) 1955년 봄에 교정을 본 이후 나는 <롤리타>를 다시 읽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기쁨으로 가득 찬 존재이고, 안개 저편에서 틀림없이 밝게 빛날, 여름날의 태양과 같다.
(중략)
하지만 여기서 나는 내 목소리가 꽤 귀에 거슬린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미국인 벗들 중 아무도 내가 러시아어로 쓴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로 쓴 소설을 기준으로 한 평가라는 것은 초점에 벗어날 수밖에 없다.

-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한 번은 영문으로 한 번은 한글번역으로 읽었다. 롤리타는 나보코프의 최초의 영문 소설이다. 내게 옮겨 적을 구절이 거의 없는 까닭은 이 소설은 전체를 읽지 않고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한 두 구절이 마음에 와 닿기 보다는 범죄스러운 이상한 애절함에 사로잡히게 하는 소설 전체를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 더 많이 알려진 롤리타는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라는 중년의 사내가 롤리타라고 명칭되어지는 의붓딸을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성도착자의 어린이에 대한 에로티시즘과 집착을 포함한다면 말이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우리의 주인공 험버트가 무지몽매한 사람도 아니고, 미치광이 범죄자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고, 고상한 취미를 가진 수려한 외모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특히 미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더욱 용서받지 못할) 일을 장기간에 걸쳐 저지르며 그것에 대한 어떤 도덕적 판단을 배제한다는 것은 소설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지기 쉬운 내용은 아니다. 어머니가 죽은 (험버트가 딸을 탐해 결혼했으나 험버트의 진면목을 알고나서 우연한 사고로 죽게 된, 그러나 죽음의 많은 책임에 험버트에게 있는) 12살의 딸을 데리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자신의 성적욕구를 만족시키며 그녀에게 집착하는 험버트. 그녀를 그로부터 도망시킨 사람을 찾아내 살해하는 험버트. 그의 온갖 도덕적 부정함과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매력적인 인물인 험버트.
나보코프의 이 소설은 줄거리만큼이나 그 출판도 드라마틱하다. 코넬 교수였던 나보코프가 출판되었을 때의 파장을 예상하였을 거라 생각된다. (처음에는 익명의 출판을 고려했을 만큼.)  그러나, 미국의 모든 출판사는 출판을 거부하고, 결국 파리의 포르노 소설을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출판된다. 그러나, 미국의 어떤 비평가에 의해 명성을 얻게 되고, 미국에 출판되어 나보코프는 교수를 그만두어도 될 정도의 부를 얻는다. 이 소설이 없었다면 나보코프의 훌륭한 러시아어로 쓰여진 소설도 빛을 보지 못했으리라.
작가 역시 그의 후기에서 영어로 쓰는 일이 러시아어로 쓰는 것만큼의 표현의 유려함과 자유를 주지 못했음을 토로하고 있다. 나 역시 그가 '절망'에서 썼던 현란한 언어의 기교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을 외면하고 자신에게 갇혀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같은 모습이 공통되게 보여지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죄스러운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본인의 이유로는 자신에게 가장 정당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나보코프의 소설에서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개인의 반항 혹은 개인의 관점의 흔치않은 그릇됨이 극한으로 표현되었지만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부분인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2012년 6월 1일 금요일

카뮈의 '작가수첩 1' 중 (1935 ~1942)

내가 말할 것은 한 가지뿐이니 똑똑히 보겠다는 것이다.

8월의 소나기 머금은 하늘. 뜨거운 바람결. 시커먼 구름. 그러나 동쪽에는 섬세하고 투명한 띠. (중략)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다라 끝없이 늘이고만 싶은 한 순간의 영원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뭇잎들과 햇빛의 유희 속으로 빠져드는 것밖에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중략) 잠시 후면 또다른 사물들, 또다른 사람들이 나를 휘어잡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책갈피에 꽃잎을 끼워두듯이 나로 하여금 시간의 천에서 이 순간을 오려낼 수 있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던 어느 날의 산책길을 그 꽃잎 속에 간직해둔다. 그리하여 나 또한 산책을 한다. (중략) 진종일 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나더러 매우 활동적이란다. 오늘은 잠시 발길을 멈춘 정지다. 그리하여 내 가슴은 저 자신을 만나러 간다.
아직도 어떤 불안이 나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잡을 길 없는 무형의 순간이 수은 방울들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하는 이들을 가만 놓아두라. 나는 나 자신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있기에 이젠 더 이상 불평이 없다. 나는 이 세계 속에서 행복하다. 나의 왕국은 이 세계의 것이기 떄문이다. 지나가는 구름, 사라져가는 순간. 나 자신으로부터의 나의 죽음. 책을 펼치면 좋아하는 한 페이지가 나타난다.

철학자가 되려거든 소설을 쓰라.

나는 수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왜냐 하면 내 몸이 그걸 요구하니까.

죽음과 태양의 맛. 삶에 대한 사랑.

나는 사람들이 내게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속으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모두들 겉모습을 향해 미소를 짓고 거기에 고분고분 따르는 척한다.

자기 스스로를 죽이지 않는 한 삶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내가 물 밖으로 조금씩 조금씩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그처럼 분주하고 절망적인 생활의 오랜 기간을 보냈으니 이젠 다시 건설적이 되어야 한다. 마친내 햇빛, 그리고 내 헐떡거리는 몸뚱이. 침묵할 것 - 믿을 것.

자신의 삶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확장할 것.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허송하지 말 것. 고독 속에서 극단적인 경험을 구할 것. 자기 극복으로 유희를 정화할 것 - 자기 극복이 부조리한 것임을 알면서.

병의 재발과 허약함에 대항하여: 노력 - 주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한 권의 책을 언젠가는 쓸 것이다.

단순하고 진실해야 한다. 말로 때워서는 안 된다 - 받아들이고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중략)
고통받는다고 해서 무슨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싶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것은 똑같은 태양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똑같은 태양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철학은 철학자의 됨됨이에 달렸다. 인간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철학은 더욱 진실한 법이다.

불멸성이라는 문제의 부질없음. 우리의 관심사가 우리의 운명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뒤'의 운명이 아니라 '앞'의 운명이다.

멀리 물러나 있을 것. 내 가슴에 가득히 차오르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것도 빨리.

자기 앞으로의 도망.

광란하는 듯한 노력 속에 모든 것을 해방하기 전에 크게 숨을 내쉬는 시간.

사물들과 존재들이 나를 기다린다. 아마도 나 또한 내 모든 힘과 내 모든 슬픔을 다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욕망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여기서 너무나 많은 침묵과 비밀로써 삶을 획득한다.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기적.

나는 체념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무용함으로 인해서 도대체 내 반항의 그 무엇이 의미 없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삶이 무용하기 때문에 반항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략)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 보면 나는 결국 행복하게 죽게 될 것 같다. 내가 내 희망을 남김없이 다 먹고 난 뒤의 일일 터이다.

나는 다만 내 삶을 내 두 손 안에 거머쥐고 싶을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 자신의 현존, 내 노력은 그것을 궁극에까지 밀고 나가고 그것을 삶의 모든 모습들 앞에서 지탱하는 것이다 - 견디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아는 터인 고독을 그 대가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무릎 꿇어버리지 말 것 - 문제는 여기 있다. 동의하지 말 것, 배반하지 말 것. (중략)
사람이(내가) 자신의 허영에 양보할 때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생각하고 살게 될 때마다, 그것은 배반이 된다. 그때마다 남의 눈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며, 그로 인하여 나의 존재는 진실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자신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중략) 한 인간에게는 훨씬 더 큰 힘이 내재해 있다. (중략) 궁극에까지 간다는 것은 자신의 비밀을 간직할 줄 안다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지금 나는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홀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 나의 심오한 기쁨!

산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붉은 꽃들을 바라보며 사는 바로 그 사람들은 그들의 손바닥만한 방안에서 명상을 도와주는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손바닥만한 방안에서 명상을 도와주는 죽은 사람의 해골을 앞에 놓아두고 지낸다. 창 밖으로는 피렌체 시가가 내려다보이고 탁자 위에는 죽음이 놓여 있는 것이다.

눈물과 태양의 얼굴을 가진 삶, 소금과 뜨거운 돌 속에서의 삶, 내가 사랑하고 내가 뜻하는 그대로의 삶, 그 삶을 애무하다 보면 나의 모든 절망과 사랑의 힘들이 서로 접합하는 것 같다. (중략) 그것은 긍정이고 부정이다. 눈물과 태양이 아닌 모든 것 앞에서의 부정이요 반항. 처음으로 그 장래의 약속을 느낄 수 있는 내 삶 앞에서의 긍정. (중략) 미래의 불확실함, 그러나 내 과거와 나 자신에 대한 절대적 자유.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행동을 해야 해요.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사람이 살자면 뭔가 하면서 지내야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가난하면 자기 밥벌이를 해야 하고, 일거리를 얻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믿으며 지내왔다. (중략)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에 비긴다면 어쩌면 생활의 안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져서 나는 그걸 거부하고 말았다. 그런 생활의 따분하고 무기력한 면이 생각되어 뒤로 물러선 것이다. 처음 며칠만 잘 견뎠다면 나는 분명 그 직작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중략) 그런 생활을 물리치고, 남들이 '미래'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여전히 불확실과 가난 속에 남아 있는다는 것이 과연 용기였는지 아니면 비겁함이었는지 지금도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만약에 마음속에 갈등이 있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인가를 위한 것임을 나는 안다.

포기하지 말 것, 절대로 포기하지 말 것 -  (중략) 남의 눈에 보이는 모습에 연연해하지 말고 존재할 것.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버티는 것,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우선 침묵하는 것 - 관중을 제거해버리는 것, 그리고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주의 깊은 육체적 훈련을 주의 깊은 삶의 의식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 일체의 우쭐해하는 태도를 버리고 돈에 대한, 자신의 허영과 비겁함에 대한 이중의 해방 작업에 노력할 것. 질서 있게 살 것. 한 사람의 일생에서 단 한 가지 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데 2년은 너무 긴 시간이 아니다.

이 공책을 매일매일 기록할 것: 2년 뒤에는 한 편의 작품을 쓸 것.

창조자의 메마른 가슴.

칼리굴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입을 다물어야 해. 내겐 존재들의 침묵이 필요해. 그리하여 가슴속의 이 끔찍한 소용돌이가 잠잠해져야 해."

커다란 하늘 한 조각만 나타나면 지나치게 팽팽했던 가슴속에 금방 고요가 찾아든다.

우리는 완전한 모순 속에 놓여 있다. 시대가 송두리째 해방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채 모순 속에 목까지 푹 빠져 숨막혀 하며 살고 있다.
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제도 없다.

마치 그 검은 심장에서 흘러나온 황금빛 즙이 그 짧은 가지들 끝에까지 끓어 올라와가지고 녹색의 잎새들 위로 긴 자국을 남기면서 줄줄 흘러내리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묘사하는 작품과 설명하는 작품을 서로 조화시킨다. 묘사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묘사는 그 자체만으로는 멋진 것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없다. (중략) 작품은 '울림'을 갖게 된다.

전쟁은 전사와 비전사의 저 끔찍한 고독 속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저 수치스런 절망 속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비쳐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저 점증하는 비열함 속에 있다. 짐승들의 세상이 시작되었다.

밖에 서서 어떤 사태를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도덕하다. 이 부조리한 불행을 멸시할 권리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불행의 한가운데 서 있어야 한다.

받아들일 것. 그리하여 가령 나쁜 것 속에서 좋은 것을 볼 것.

다른 사람들의 피와 자유를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베다경.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된다.

그 심장은 썩어 있다. 감상적인 것, 눈에만 즐거운 것, 자기 만족, 인간에게는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대도시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이 모든 끈적거리는 피난처들.

나를 텅 비워놓는 것을 나는 삶과 사랑이라고 부른다. 출발, 구속, 단절, 나의 내면에 흩어져 있는 빛 없는 이 마음, 눈물과 사랑의 짠맛.

뭐가 뭔지 모르는 혼란에 빠진 채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무엇과도 닮지 않고, 우리를 규정하는 것을 영원히 분쇄해버리고, 고독과 허무를 바치며, 돌연 운명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단을 다시 찾고 싶은 그 현기증. 그 유혹이 끊이지 않는다. 그 유혹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물리칠 것인가? 나른한 생활의 품에 안겨 지내면서도 어떤 작품의 고정관념을 지탱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에 걸맞는 자신의 삶을 살고 그 섬광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인가? 자유와 더불어 나의 최악의 걱정거리는 아름다움이다.

T. E. Lawrence (중략) 그는 국왕이 하사하는 훈장도 거절하고 무공 훈장은 기르는 개한테 준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출판사를 익명으로 보냈다가 거절당한다. 오토바이 사고.
(중략) 초인은, 역사 족에 요지부동으로 갇혀 있으면서도 그가 역사에 대하여 누리는 내적 자유에 의하여 알아볼 수 있다.

여러 가지 감정, 이미지는 철학을 열 배로 확대한다.

- 작가의 수첩을 들여다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그의 메모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힘을 얻고, 노트를 옮겨 적으면서.
카뮈는 내게는 이상적인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적이면서도 독창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의미가 깊다. 한쪽으로 치우친 유미주의자도 아니고, 삶의 비극적인 면만을 고통스럽게 묘사하는 작가도 아니다. 그는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의 모습을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그런 작가다. 그의 글은 완벽하면서도 글을 위한 글이 아닌, 진실이다. 때론 공공연히 말하여지지 않는 그런 진실이다.
그의 메모들에서 보여지는 작가로서의 다짐, 열망들을 다시 만나면서, 이 순간의 무한한 기쁨.
단지 삶을 위한 삶을 아닌,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의미를 찾는 인간의 용기. 반가울 뿐이다.
인생의 의미를 남기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을 마다한 카뮈와 니체. 그들이 남긴 발자국. 세월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적어도 내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