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0일 금요일

밀란 쿤데라의 '농담' 중

여러 해 동안 나를 내 고향으로 이끌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 도시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벌써 15년 전부터 다른 곳에 살고 있었고, 이곳에는 이제 아는 사람도 친구도 몇 없었던 것이다(남아 있는 친구도 피하고 싶다). 어머니도 내가 돌보지 않는 낯선 무덤 속에 묻혀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왜 그토록 자유가 필요한 거죠?" 나는 물었다. - "그러면 당신은요?" 그가 말했다.

그와 논쟁을 하면, 나는 정말 누구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진리를 내게 납득시키려고 애쓸 수 있는 오랜 친구가 옆에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특별히 구체적인 것은 없고, 다만 "너는 그렇게 행동하니까"라는 것이었다 -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데?" - "언제나 묘하게 웃쟎아" - "그래서? 난 즐거움을 표현한는 거야!" - "아니야, 너는 혼자서만 마음에 담아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웃어"

나는 다른 사람이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고 혁명 자체가, 시대 정신이 틀릴 수도 있으며, 나 하나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미소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곧 내 안에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하고 싶다.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 그때의 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신도들에게 근원적이고도 영원한 죄인임을 상기시키는 기독교의 저 막강한 힘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나는(우리 모두가 그랬다) 혁명과 당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래서 장난으로 썼다 해서 내 엽서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길들여지게 되었으며, 머릿속에서 자아 비판의 검토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인격 박탈은 처음 얼마간은 마치 안개 속에서처럼 분간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중략) 시간이 가면서 안개는 천천히 걷혀갔고, 그와 함께 그런 비인격화의 어스름 속에서도 사람들의 인간적인 요소가 조금씩 눈에 띄게 되었다.

그 어떤 병사도 이 정치적인 행동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저 지배자 앞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무의미한 몸짓으로만 여겼다.
나는 그렇게 해서 결국은 나의 저항이 헛된 것이며, 내가 다르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므로 이제 오로지 나에게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삶의 길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었다.

그랬다. 모든 끈이 끊어져 있었다.
모두 끝났다. (중략) 내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 그것을 나는 이전의 그 어는 때보다 더 내밀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았던 시간, 일로 사랑으로 온갖 노력들로 탈바꿈된 그런 시간, 내가 하는 일들 뒤에 살그머니 숨은 채 얌전히 있어서 그저 무심코 받아들였던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옷을 다 벗고, 그 자체로, 자신 본래의 진짜 모습으로 나에게 오고 있었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어(이제 나는 순수한 시간, 순수하게 텅 빈 시간을 살고 있었으므로), 내가 단 한순간도 그것을 망각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무게를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로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날 저녁부터 내 안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내 안에 다시 누군가가 살게 된 것이었다. 나의 내면은 마치 방처럼 휘 청소가 되고 어떤 사람이 거기에 살게 되었다.

그녀의 삶 속에서는 세계동포주의와 국제주의, 철저한 경계와 계급 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정의에 대한 논쟁들, 전략과 전술이 동반된 정치,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일들(너무도 전적으로 시대의 것이어서 곧 그 용어조차도 뜻모를 소리가 되어버릴 일들)을 하다가 나는 파멸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바로 그 일들에 계속 집착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해 있었다. (중략)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시베리아에서 여섯 달이 지난 후)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리워져 있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잊혀져 있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서 자꾸만 그 강당, 백 명이 손을 들어 내 삶의 파탄을 결정했던 그 강당이 떠오르곤 했던 것이다. 그 백 명의 사람들은 언젠가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을 나를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중략) 추방이 아니라 교수형이 제안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랬다고 해도 모두 손을 들었으리라는 결론이 나올 뿐 다른 결론에 이르러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중략) 그러니 인정하시라. 당신을 유배보내거나 사형시킬 태세가 되어 있는 이들과 같이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그들과 친해지기가, 그들을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나는 혼란스러워하면 이 역할 저 역할 왔다갔다하던 끝에, 결국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어쩔 줄 모르다가 붙잡힌 것이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중략)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그리고 길을 따라 보이는 풀들은 너무도 푸르러서 손으로 쓰다듬어보지 않을 수 없다.

폭신한 풀로 덮인 땅이 등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등으로 땅을 더듬어본다. 등올 땅을 꽉 받치고, 나는 땅에게 너무 무거울까봐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내 위에 온 무게를 다 싣고 기대라고 말한다.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이 떠나버린 그 처녀성의 화관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우리 삶이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데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지금 내가 기독교인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믿지 않는 이들과 똑같이 살고 있는 가짜 기독교인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인이란 말은 다르게 산다는 것을 뜻하는데 말이다.

그녀는 아들 녀석과 가족의 미래를 생각했다. (중략) 그 끊임없는 걱정, 내일을 위한 그리고 다음해를 위한 걱정, 하루하루 그리고 앞으로 올 세월들에 대한 걱정을 보면선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동으로 앞으로 움직여가는 보도(시간)와 그 위에서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나)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런데 그 보도는 나보다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내가 달려가는 방향과 반대편에 있는 목적지로 서서히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중략)
과거에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중략)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그렇다,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넥이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 이 책은 몇 사람의 입장, 주인공 루드빅과 주변 인물들 (헬레나, 야로슬라브, 코스트카)의 목소리로 이야기 되고 있다. 무심함의 매력과 조소어린 농담을 즐겨하던 루드빅은 별 것 아니 한 사건(농담처럼 보낸 엽서)으로 급우들에 의해 트로츠카주의자로 몰려 정치범으로 복역하게 된다. 5년간의 탄광 및 감옥 생활 후, 루드빅은 다시 재기에 성공하나 그는 그 과거의 시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의 매력과  농담은 외적으로 여전히 보여지나 그의 내면은 매우 불안정하며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루드빅의 복수는 제마넥의 부인인 헬레나와 간통을 통해 제마넥에게 충격을 주려하나 (제마넥은 자신의 파멸을 주도했던 인물), 제마넥과 헬레나는 이미 헤어진 것과 진배없었고, 세월이 흘러 제마넥은 과거의 생각을 가진 제마넥이 아님을 발견하고 루드빅은 충격과 패배감에 휩싸인다. 결국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루드빅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농담'처럼 변해버린 상황. 그러나, 자신의 신조대로 열심히 살았던 친구 야로슬라브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던 헬레나의 인생들 역시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농담'처럼 되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쿤데라는 매우 중요한 시선을 이 책에 담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나 시대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역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맹목으로 따르는 행위, 특히 정신적으로 아직
 성숙되지 않은 젊은이들의 역사적 행위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또한, 역사 속의 개인,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농담처럼 되어버린 주인공과 주번인물들의 인생속에서 역사에 대한 어떠한 태도나 자세도 시대에 따라서는 비극적 웃음거리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존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 그 답은 없다. 그러나, 의문을 던져볼 필요는 있다는 것. 우리가 생각없이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관, 삶의 방식들을 시간의 자를 놓고 바라볼 필요는 절대적으로 있다는 것!

2012년 3월 29일 목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3부 대타존재, 제2장/제3장 -

제2장 몸

나의 몸을 '살아간다.'

하나의 몸을 가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의 근거로 있는 것이고, 자기 존재의 근거로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나의 몸'인 것은' 내가 존재하는 한에서이다. 내가 나의 몸으로 '있지 않는 것은' 내가 나의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는 한에서이다. 내가 나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의 무화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의 몸을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벗어나는 것은, 끊임없이 내가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이며,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자기를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어 하고 있는 이 병든 몸마저도,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에 의해, 나는 그것을 몸에 떠맡은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시도를 향해 병든 몸을 뛰어넘는다. 나는 병든 몸을 나의 존재에서의 필연적인 장애가 되게 한다. 내가 병든 나를 선택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내가 어떤 방법으로 나의 병든 몸을 구성할지 ('견딜 수 없는 것'으로서, '굴욕적인 것'으로서, '숨겨야 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으로서, '자존심의 대상'으로서, '내 실패의 핑계' 등으로서 구성할지) 선택하지 않는 한, 나는 병든 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파악한 몸은, 바로 '하나의 선택이 그곳에 존재한다'고 하는 필연성, 다시 말해 '나는 "단번에 모든 선택"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필연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유한성의 내 자유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선택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세계에 대한 순수의식으로서의 의식을 조건짓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몸은 의식을 바로 그 자유 자체 속에서도 가능하게 한다.

오히려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타동사로 사용하여, '의식은 그 몸을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몸에 대한 의식은 측면적이고 회고적이다.

만일 내가 아무리 독서에 열중해 있더라도, 나는 세계를 존재에 이르게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독서는 자신의 본성 자체 속에 하나의 필연적인 배경으로서 세계의 존재를 내포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내가 세계에 대한 의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내가 세계를 '배경으로서'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색깔과 운동을 놓치지 않는다. 온갖 소리가 끊임없이 나에게 들려온다. 다만, 그런 것들은 나의 독서 배경을 이루고 있는 무차별적인 전체 속에 사라지고 있다.

내가 아무리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떨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맛, '나의' 그 무미건조한 맛을 나의 대자에 의해 끊임없이 파악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른 곳에서 <구토>라는 이름 아래 써던 바로 그것이다.



제3장 타자와의 구체적인 관계

타자는 나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다.' 그런 자로서 타자는 내 존재의 비밀을 쥐고 있다. 타자는 내가 '무엇인지'[내가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 존재의 깊은 의미는 나의 밖에 있고, 하나의 부재 속에 갇혀 있다. 타자는 나에 대해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1) 그래서 '내가 그것으로 있으면서 그것에 근거를 부여할 수 없는 즉자'로부터 내가 도피하는 한에서, 밖으로부터 나에게 부여된느 이 존재를 부정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번에는 내 쪽에서 타자에게 대상 존재를 부여하기 위해 타자 쪽으로 다시 돌아설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자의 대상 존재는 타자에게 있어서 나의 대상성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런 반면, 자유로서의 타자가 나의 즉자 존재의 근거인 한에서, 나는 타자에게서 자유라고 하는 그 성격을 없애지 않은 채, 그 자유를 회복하고, 그 자유를 빼앗으려고 시도할 수 있다. 사실, 만일 내가 나의 즉자존재의 근거인 자유를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나 자신의 근거가 될 것이다. 한쪽은, 타자의 초월을 초월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반대로 타자로부터 초월이라고 하는 그 성격을 없애지 않고 그 초월을 내 안에 삼켜버리는 것이다. (중략) 나는 내 존재의 근원 자체에 있어서 타자를 대상화하려고 하는 기투, 또는 타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기투이다.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런 두 가지 시도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 한쪽은 다른 쪽의 죽음이다.  (중략) 우리는 우선 대자가 타자의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할 때의 태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1. 타자에 대한 첫번째 태도 - 사랑.언어.마조히즘

의식이라고 하는 자격에 있어서, 타자는 나에 대해, 나에게서 나의 존재를 훔친 자인 동시에,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거기에 존재하게' 하는 자이다. (중략) 즉 나는 내 대타-존재의 책임자이기는 하지만 내 대타-존재의 근거는 아니다.

분명히 사랑은 '의식'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이는 '소유'라는 이 관념은, (중략) 그러나 거기에는 바로 어떤 종류의 아유화(appropriation)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경우 우리는 자유로서의 한에서의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타인 속에서 쉰다. (중략) 나는 욕망되기를 원한다. (중략) 자신이 이미 하나의 '대상' 이외에, 즉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즉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를 시도한다. 


사랑받고 싶다는 나의 요구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사실적 한계인 이 사실성, 결국 마지막에는 '그 자신의' 사실성이 될 이 사실성은 '나의' 사실성이다. (중략) 그러므로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은 타인을 그 사실성에 감염시키는 일이며, 복종하고 자기를 구속하는 하나의 자유[타자의 자유]의 조건으로서 끊임없이 우리를 재창조하도록 타인을 강제하려고 하는 일이다. 그것은 자유가 사실에 근거를 부여하고자 하는 동시에, 사실이 자유에 대해 우위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많일 이 결과가 이룩될 수 있다면, 그 결과로서 가장 먼저 나는 '타인'의 의식 속에서 '안전하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상대는 '시선'이다.

유혹한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 밑에 나를 두는 일이며, 타자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일이다. 유혹한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 '보이게 되는' 위험을 범하는 일이고, 나의 대상존재에 의해, 또 나의 대상존재 안에서,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는 나의 '존재'를 잃고, 나는 나 자신의 책임에, 나 자신의 존재 가능에 맡겨진다.

타인의 타성을 그에게 보존하게 한 채로 이 타인을 흡수하려는 대신, 나는, 나를 타자가 흡수하도록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주관성에서 탈출하고자 타인의 주관성 속에 자기를 잃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 시도는 구체적인 면에서는 '마조히스트'적인 태도로 나타날 것이다.

2. 타자에 대한 두 번째 태도 - 무관심.욕망.증오.사디즘

타인의 절대적인 주관성을 함께 무시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안심한다. 나는 '뻔뻔스러워'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타인의 시선이 나의 가능성들이나 나의 몸을 응고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중략)
세상에는 '타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이 - 순간적인 무서운 번뜩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 죽어가는 인간이 있다. 그러나 완전히 그런 상태에 빠져 있을 때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불충분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이 없으면, (중략) 나는 '태어났는데'도 나를 존재시키는 배려를 나 혼자에게밖에 맡겨둘 수 없다고 하는 이 사실을, 완전히 알몸 그대로 파악하게 된다.

타인의 '대아-대상성'을 통해 '타인'의 자유로운 주관성을 빼앗으려 하는 하나의 근원적인 시도는 '성적 욕망'이다.

나는 하나의 인간존재를 원하는 것이지, 한 마리의 곤충이나 연체동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내가 인간존재를 원하는 것은, 그 인간존재가, 그리고 내가, 세계 속에, 상황 속에 존재하는 한에서이며, 그 인간존재가 나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타인'이고, 또 내가 그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타인'인 한에서이다.

사디스트가 두 손으로 반죽하고, 자신의 주먹 아래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이다.

3. '함께 있는 존재'(공동존재)와 '우리'

'우리'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때 군중들 속에서 사랑의 근원적인 기도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 이 사람이 제삼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삼자가 집단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희생함으로써 집단 전체를 그 대상존재 자체 속에서 구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적인 '우리'는 - '대상-우리'로서의 한에서 - 이를 수 없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각각의 개별적인 의식에 제시된다. 그런데도 각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원둘레를 계속 확대해 감으로써 인류적인 '우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류적인 '우리'는 하나의 공허한 개념에 머물며, 우리라고 하는 말의 통상적인 사용을 가능한 한 확장한 것에 대한 하나의 단순한 지시이다.

이 가능성들의 이런 기투는 세계의 형상을 정적으로 규정한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도는 순간마다 세계를 변화시킨다.

- 샤르트르의 '몸'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유용하다. 그는 '의식이 몸을 살아간다'라는 것으로 존재를 정의함으로써, 의식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대부분 사람들은 몸에 의해 많은 생각들이 지배받는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우리가 의식으로서 인정하기 전까지 이 몸에 의해 발생되는 많은 것들은 대자에게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게 몸에 대한 주도권을 넘기고, 많은 부분에서의 몸에 대한 진정한 통제가 가능해진다.
또한,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의 샤르트르의 고찰은 어느정도 시니컬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을 많은 부분 반영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포장지 아래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을 서로 쟁취하려는 혹은 자유로운 의식을 타인에게 홀라당 주어버리는 (타인의 의식에 자리를 얻기 위해) 행위는 말하여지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존재는 홀로 존재의 증명일 수 없으므로 타인의 의식에 자리를 차지하여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암암리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쟁탈/헌납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더 커 갈 것이다. (특히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근거가 전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는 나에 대한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나에 대한 타인의 판단의 내 존재의 의미가 되므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존재근거를 집단적 목표에서 찾으려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 소위 이념적 집단 행동들이 많은 경우 이러한 존재의 약점에 근거하고 있다. 개인에게 존재를 던질 정도로 중요했던 이념적 집단 행동이 세월이 지나면, 아무 의미도 없이 퇴색되어 버리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스스로 존재를 세우고, 타인의 자유로운 의식에서 진정으로 인정받을 때, 진정한 존재의 근거를 찾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


2012년 3월 28일 수요일

'마지막 사진 한 장' 중, 베아테 라코타 글, 발터 셀스 사진

우리는 몇 주 동안 그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카메라와 녹음기에 담으며 죽음을 체험하고 싶었다. 예전엔 누구나 어릴 때부터 죽은 식구들의 얼굴을 보며 자랐다. 죽음이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엔 고통과 죽음을 쉽게 외면할 수 있다. 죽음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죽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희미해져 버렸다. 그래서 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략)
호스피스 병원은 이런 감정을 추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죽음을 볼 수는 있다. 양로원, 중환자실, 사고 현장...... 하지만 그런 곳에서의 죽음은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거의 일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호스피스 병원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현대 의학의 덕분이긴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최대한 고통없이, 가능한 한 맑은 의식 속에서 지낼 수 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작별을 고해야 하며, 삶을 정리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이 이제 곧 끝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혹은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무엇도 위안이 되지 않는 사람들, 죽음과 무에 대한 두려움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우리는 인간이 참으로 모순된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살날이 얼마 남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실제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 본 순간에 솟구쳐 오른 감정의 힘은 예상치 못한 변화나 결심을 불러왔다. 한 노숙자는 호스피스 병원에 와서 술과 담배를 끊었다. 매일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고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한 후에야 그는 죽을 수 있었다.

매일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살인이나 전쟁, 자연재해에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너무도 자세하게 기록한 기사를 읽는다. 하지만 일상적인, 자연적인 죽음의 기사나 사진은 보기가 아주 힘들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종말을 너무 일찍 떠올리게 될까 봐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에서 눈길을 돌리는 것보다는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오히려 죽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행동이 아닐까?


하인츠 뮐러 (71세)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이 아닌 것처럼. 개와 작별을 고하는 것이 그에겐 너무 힘겹다.


에델가르트 클라바이 (67세)
죽음은 아주 힘들 일이지. 빈말이 아니야. 죽음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냥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지. 정한 대로 되는 거야. 생명을 받았고, 그 생명을 살아야 했고, 이제 다시 반납하는 거지. 태어나 강보에 싸였다가 또 다른 덮개에 싸여 돌아가는 거야.

그래, 살아보지 못한 삶. 나 역시 그런 게 있어.

내가 죽은 후에도 누군가 내 눈동자에 담긴 그리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죽음은 졸업시험이야. 누구나 혼자서 치러야 해. 내 인생이 그러했듯 아주 조용히, 검소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인간은 죽은 순간까지 인간을 그리워하지. 사람의 체온이 필요해. 그렇지 않아?

이상하게 겁이 나. 너무 너무 무서워. 이렇게 신앙심이 깊은데도 말이야. 예전부터 나는 겁이 많았지. 통증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결국 내 꼴이 이렇잖아. 그게 너무 슬퍼.


클라라 베렌스 (83세)
식욕이 떨어지면 끝난 거야.

죽음은 두렵지 않아. 어떤 상상을 하느냐고? 그냥 사라지는 거야.

그래, 다시 태어난다면 다른 인생을 살 거야.
하지만 또 한 번의 삶이 있을까? 난 없다고 생각해.


미하엘 라우어만 (56세)
그는 정말 멋지게 살았다.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그러느라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일도 두렵지 않다.


로스비타 파홀레크 (47세)
내세울 만한 게 없는 인생이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살고 싶지 않았고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미치도록 살고 싶어졌다.

"다들 영원히 살 것처럼 바쁘게 오가네요."


게르다 슈트레히 (68세)
딸은 어머니의 손을 쓰다듬으며 울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딸을 외면한다.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미하엘 푀게 (50세)
건강할 때 그는 한 번도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종양이 그의 언어능력을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코르티손이 도움이 된다면 의사의 판단이 옳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에 가까이 다가가는 조용한 의학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그런 의료진이 필요하다.


바르바라 그뢰네 (51세)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어요. 그게 너무 슬퍼요. 늘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쓰러질 때까지 죽어라 일만 했어요. 1년에 일주일 이상 쉬어본 적이 없었어요. 치료 센터가 웬만큼 자리를 잡아서 이제 좀 여유를 갖고 여행을 다니려던 참이었죠. 가르다 호수로, 추크슈피체 산으로. 하지만 그것마저 내 차지가 아니었네요.


볼프강 코트찬 (57세)
늘 삶만 생각했지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죽음을 기다려요.
하지만 남은 하루하루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답니다. 한 번도 구름을 쳐다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젠 모든 게 달라 보여요. 구름도, 꽃병의 꽃도...... 갑자기 모든 게 소중해요.

그날은 밤새도록 함박눈이 내렸다. 뇔커는 병원 문 앞에서 솜처럼 하얀 눈을 뭉쳐 큰 눈덩이를 만든 다음 허겁지겁 뛰어서 코트찬의 병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이 서서히 녹아 물이 되는 걸 지켜보며 물이 다시 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사라지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었을 거예요.


베아테 타우베 (44세)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이겨야 해.
사방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애들에게 네가 필요해.
당시 막내 예시카는 세 살, 이자벨이 다섯 살, 멜라니가 열 살, 첫째 티에모가 열한 살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문했다.
진정으로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자기가 어머니를 위로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자신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늘 무언의 비난이 공중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의술이 발달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요즘엔 죽음을 집중의학 및 하이테크 의학을 무기로 삼아 싸워야 하는 적군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그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오래 산다. 그 대가는 통증과 구토, 쇠약,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동반한 채 몇 년씩 질질 끄는 중병이다.

지금도 여전히 고통의 기간이 불필요하게 연장되고 있다. 자비로운 죽음은 소생술로 저지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배를 뚫어 인공영양을 공급한다.
환자가 임박한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사들이 환자와 함께 기분 전환에 불과한 의학적 모헙에 뛰어든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을 거두는 그곳, 병원보다 더 죽음을 배척하려는 노력이 강하게 각인된 곳은 없어 보인다. 이곳의 의사들은 치유를 원한다. 따라서 죽어가는 환자는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니 치유의 장소에선 죽어가는 사람도 배척을 당하는 것이다.

- 이 책은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온 사람들의 생전과 사후의 모습의 사진들과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공장소에서 읽다가 울까봐 몇 번을 덮었다 다시 폈다. 그들이 내 친구이자 가족인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사실처럼 변함없는 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외면받는 진리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우리도 죽는 다는 사실에 등을 돌리고 산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진짜 이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산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며, 옷장을 가득 채우고, 집을 꾸민다. 알 수 없는 미래에 투자하고, 현재를 잊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뒤통수를 친다. 아무리 죽음을 가깝게 보고 산다 할지라도 자신의 죽음은 예기치 못할 사건이며,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에 우리가 가장 잘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지 않을까.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다를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회한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죽음을 전제한 우리의 삶을, 그때가 왔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 가야 하는 것 같다.
더불어, 현대 의학 및 사회 풍조가 불러온 죽음에 대한 외면, 도피, 거부 등에 대한 각성이 (이 책에 언급된 대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병원에 들어선 순간, 인간은 존엄성을 잃은 하나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마지막 시간들을 한 존재로서 충실하게 보낼 수 있도록 사회적인/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듯 하다.
지금은 너무도 쉽지만,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고, 말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3부 대타존재, 제1장 타자의 존재 -

생각건대 부끄러움은 본디 '자인'이다. 나는 타자가 나를 보는 그대로 내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한다.

사실, 실재적인 것 가운데 타자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있을까? 그것은 나와 똑같은 본질을 가진 하나의 사고하는 실체이다.

타자의 존재에 대한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전제, 즉 '타자는 사실 "타인"이다. 다시 말하면 나"로 있지 않은" 나이다'라는 전제가 도사리고 있다.

내가 타인에게 나타나는 대로, 나는 존재한다. 또, 타인은 그가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고, 나의 존재는 타인에게 의존하므로 내가 나에게 나타나는 방식 - 다시 말해 나의 자기의식이 발전하는 계기 - 은 타인이 나에게 나타나는 방식에 의존한다. 타인에 의한 나의 승인의 가치는 나에 의한 타인의 승인의 가치에 의존한다. 그런 뜻에서 타인이 나를 하나의 몸에 묶여 있는 자, '생명'에 급급한 자로서 파악하는 한에서, 나는 내 스스로 '한 사람의 타인'일 뿐이다. 타인에게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의 생명을 걸고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사실 자기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은, 자신이 대상적인 형태 또는 어떤 한정된 존재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명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타인에게 보여 주는 일이다. (중략) 그것은 내가 나의 생명을 거록 나서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나의 감각적 존재를 '위험에 노출함으로써' 이것을 무시한 것인데, 타인은 반대로 생명과 자유에 집착함으로써, 그가 대상적인 형태에 묶여 있지 않은 자로서 처신할 수 없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외적인 사물 전반에 묶여 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비본질적'인 것으로 나에게 나타난다. 그는 '노예'이고 나는 '주인'이다.  그에게 있어 본질로 있는 자는 나이다.

개별자가 요구하는 것은 개별자로서의 자기완성이다. 개별자는 자기의 구체적인 존재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지, 보편적인 구조의 객관적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자기의식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문제인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순수한 내면성이다. 의식은 끊임없이 자신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자기'에 대한 지향이다. (중략) 나는 나한테서 달아날 수가 없다. 나는 나를 뒤에서 다시 붙잡는다. 그리고 설사 내가 나를 대상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해도, 이미 나는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대상의 핵심에 있어서 나로 있을 것이며, 또 이대상의 바로 중심부에서 나는 그것을 쳐다보는 주관으로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실재론.관념론. 후설. 헤겔의 경우에는, 의식개체 서로 간의 관계의 형식은 '......에 대하여 있음'이었다. 바뀌 말하면, 타자는 그가 나에 '대해' 존재하거나 내가 그에 '대해' 존재하는 한에서 나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나를 구성하기까지 했다. (중략) 그런데 '......와 함께 있음'은 매우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중략) '~와 함께'는 차라리 이 세계의 경영을 위한 일종의 존재론적 연대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중략)
타인은 '대상'이 아니다. 타인은 나와의 연관에 있어서 여전히 인간존재이다. 타인이 나를, 나의 존재에 있어서 한정하는 경우에 의지처로 삼는 존재는 '세계-속-존재'로서 파악된 순수한 그 자신의 존재이다. (중략) 우리의 관계는 '정면으로부터'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측면으로부터'의 상호의존이다. (중략)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고, '자기를 존재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존재시킬' 때의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바로 그러므로, 내가 자유롭게 내 존재를 본래성 또는 비본래성에 있어서 이루는 한에서, 나는 타자에 대해 나의 존재에 대한 책임자이다.

나의 '죽음에의 존재'의 돌연한 드러내 보임이 홀연히 나를 하나의 절대적인 '공통의 고독'속에 떠오르게 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독까지 올려놓는 것은, 그런 공동존재의 공통의 지반 위에서이다.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원하고 있던 것, 즉 '자신의 존재 속에 타자의 존재를 품고 있는 하나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사실 내가 '그 사람과 함께' 존재하는 이 인간존재는, 그 자신이 '세계 속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의 세계의 자유로운 근거이며, 그 자신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이 인간존재는 '그 자신에게 있어서' 존재한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세계를 '치명적'인 세계로서 구성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인간존재를 그 자신의 온갖 가능성인 구체적인 존재로 구성할 수는 없다.

타자의 자유는, 내가 그에게 있어서 그것으로 있는 이 존재의 불안한 불확정을 통해 나에게 드러내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 존재는 나의 가능이 아니다. 이 존재는 항상 내 자유 속에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존재는 반대로 내 자유의 한계이며, '카드의 이면'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내 자유의 '이면'이다.
(중략) 여기서 문제는 타자의 자유 속에, 그리고 타자의 자유에 의해 묘사되는 나의 존재이다.

타인의 이 가능성은 거기에 존재한다. 나는 이 가능성을, 이른바 부재하는 가능성으로서, '타인의' 가능서응로서, 나의 불안에 의해, '그다지 안전하지 않은' 이 은신처를 포기하는 나의 결심에 의해, 파악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가능성은 타인이 '나를 엿보고 있는 ' 한에서 나의 비반성적 의식에 대해 현전하고 있다.

그에 비해, 타인의 나타남은 상황 속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하나의 국면이 나타나게 한다. 나는 그 국면의 주인이 아니며, 이 국면은 원리적으로 나에게 탈출한다. 왜냐하면 그 양상은 '타인에게 있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드가 절묘하게도 '악마의 몫'이라고 부른 그것이다.
이것은 예견할 수 없는, 게다가 실재하는 '이면'이다. 이를테면 카프카의 <심판>과 <성> 속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런 예견 불가능성이다.

나는 타자의 평가에 몸을 내맡긴다. 또한 그것을 나는 단순한 '코기토'의 행사에 의해서도 파악한다. '시선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인식할 수 없는 평가의, 특히 가치평가의, 인식되지 않는 대상으로서 나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부끄러움 또는 자부심에 의해, 나는 그런 평가들에 정당성이 있음을 인정한는 동시에, 또한 이 평가들을 단순한 평가에 불과한 것으로서, 즉 주어진 것에서 모든 가능성을 향한 하나의 자유로운 초월로서 받아들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중략) 그러므로 '보이고 있다'는 것은 나의 자유가 아닌 하나의 자유에 대한 하나의 무방비한 존재로서 나를 구성한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는, 나는 세계 한복판에 응고된 것으로서, 위험에 처한 것으로서, 치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나를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세계 속에서의 나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며', 내가 있는 이 세계가 어떤 면을 타자를 향해 돌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타자의 '시선' 이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겨졌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샤르트르가 타자에 대한 논의에 있어, '타자의 나에 대한 시선 및 평가에 대한 나의 자유의 부재'에 대해 지적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가 느꼈던 것은 무엇일까? 타자의 시선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박탈감이었을까? 타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조정하려고 했던 무력감이었을까? 나 역시 타인의 시선에 따라 나의 생을 살아왔다. 나의 생각위에 타자의 시선을 놓고, (특히 나에게 가까웠던 사람들의 시선들) 그 감탄적 시선에 최대치가 되려고, 혹은 비판적 시선의 최소치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깨달은 것은 중요한 것은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에 대한 타자의 평가가 나의 손에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내 생의 의미가 기쁨이 타자의 눈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았지만, 나는 깨달았다.)
다른 깨달음은,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도 타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샤르트르가 지적한 대로 "~와 함께"있는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속에 타자의 존재를 품고 있는 하나의 존재'이기에, 나도 '타자'로서의 역할을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수행한다. 나는 타자로서 기억하려고 애쓴다. 타자의 생이 내가 존재하는 한, 기억 속에 존재할 수 있도록 기억하려 애쓴다. 그것이 내가 나의 삶을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나의 태도이며,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성에 대한 나의 작은 '반항'이다.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2부 대자존재, 제3장 초월 -

그래서 결굴 인식과 인식하는 것 자체는,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주어지며', 존재가 없는 것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떠올라 온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식은 다만 존재가 '거기 있게' 할 따름이다.

'인식하다'와 '존재하다'의 내적인 관계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말은 우리가 방금 존재론적 의미와 인식론적 의미를 이중으로 부여하여 사용한 '이루다(realize, 실감하다)'라는 말이다.

내가 항상,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 저편에서, 나 자신에게 장차 와야 할 것으로 있는 한에서, 내가 현전하고 있는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향해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것으로서 나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갖가지 도구의 무한지향은, 결코 내가 있는 그대로의 대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면 갖가지 도구의 전체는 나의 모든 가능의 엄밀한 상관자이다. 게다가 나는 나의 모든 가능성으로 '있으므로' 세계 속에서의 갖가지 도구의 질서는 나의 모든 가능성이, 즉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 즉자 속에 투영된 영상이다. (중략) 그것은 오히려 '세계-속-존재'는 인간존재에 있어서, 세계를 그곳에 있게 하는 드러내 보임 그 자체에 의해, 근본적으로 세계 속에 자기를 상실하는 일이다. '세계-속-존재'라는 것은 느슨해지는 일 없이, '무언가 도움이 될' 가능성조차 없이, 도구에서 도구로 지향되며, 반성적인 순환 이외에 아무런 의지처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에 '"목적이 되는 무엇인가"의 연쇄는 "목적이 되는 누군가"에 이르러 정지된다'는 말로, 우리에게 이론을 제기해 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중략)
'목적이 되는 누군가'는, 도구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즉자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략) 이것은 우리가 항상 타인을 하나의 특수한 형식의 도구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다만 우리가 세계에서 출발하여 타인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도구 복합의 무한지향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대자가 자기를 향한 그 비약과 상관적으로, 거부로서 자기 자신의 결여로 있는 한에서, 존재는 세계라는 배경 위에 대자에 대해 '사물-도구'로서 드러내 보여지며, 세계는 도구성이라는 지시적 복합의 무차별적인 배경으로서 나타난다. (중략)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살고 있다. '생활 - 노동'이라는 이 전체의 '의미'에 대한 문제, 즉 '살고 있는 내가 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이 일하기 위한 일이라면, 어째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대자 자신에 의한 대자의 발견을 품고 있기 때문에 반성적 차원에서밖에 제기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부정은 '반사-반사하는 것'의 존재방식에서는,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것'에 '대한' 부정으로서, 현실 존재에 대해 나타나며, 또 이 부정은 자신이 존재 속에서 장래를 향해 과거에 도전함으로써, '이것'에서 자기를 해방하기 '위해' 과거에서 탈출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에 대한 대자의 관점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는 세계로부터의 이중의 도피이다. 대자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현전으로서, 세계 한복판에서의 자신의 존재에서 탈출하는 동시에, 자신이 현전하고 있는 그 세계에서 도피하낟. 가능은 이런 도피의 자유로운 종착점이다. (중략) 오히려 대자는, 다만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하나의 초월적인 것을 향해 도피할 수 있을 뿐이다. (중략) 진부한 비유이나마, 내 생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의 비유를 쓰는 것이 허락된다면, 끌채의 멍에목에 매달려 있는 당근을 쫓아 가느라고, 뒤에 있는 수레를 끌고 가는 당나귀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기 바란다. 당근을 덥석 물려는 당나귀의 모든 노력은 결과적으로 수레 전체를 전진하게 만들지만, 당근 자체는 언제까지나 당나귀로부터 같은 거리에 머물러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의 가능을 쫓아서 달리지만, 이 가능은, 우리의 질주 자체가 나타나게 하는 가능이며, 우리의 질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가능은 우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달리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달리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종착점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그쪽을 향해 달리는 정도에 따라 고안되고 투영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는 질주가 내던져 버리는 이 의의를 질주에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가능은 대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피의 의미는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


- 세계에서 인지되고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도구성'은 슬프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부분은 내가 너무도 혐오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려 했던 사실이다. 나는 '조직 속의 인간', '인간의 도구화'가 무엇보다 싫었다. 존재의 가치가 그 존재가 가진 도구적인 부분에 의해 판단되는 것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러한 도구적인 인간은 본질적 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도구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화된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전적으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이 수행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은 쉽게 다른 인간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간의 본질적 요소에 기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도구적 요소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직속에서 떠났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나를 도구로 보고 있다. 아직은 유용한 도구. 세계가 요구하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나 스스로 그 도구적 유용성을 사용하기 거부하는 도구.
그러나, 그 세계에서 존재의 현전에 대한 초월적 도피가 (당근을 쫓아가는 당나귀에 질주에 비유되어 조소를 자아내더라도), 그 도피, 그 '질주'가 분명 용기있고, 의미있는 일임을, 인간존재로서 세계에 대항해 내던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존엄성'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2부 대자존재, 제2장 시간성 -

존재하는 존재는 전적으로 다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략) 존재는 자기의 과거를 '잊어버린' 것도 아니다. 잊어버린다는 것도 또 하나의 연결방식이 될 것이다. 과거는 말하자면 꿈처럼 존재로부터 빠져나간 것이다.

이미 죽은 피에르에 대해 (중략) 따라서 그것은 '나의' 현실성의 과거이다. 사실 피에르는 나에게 있어서 존재한 것이고, 나는 피에르에게 있어서 존재한 것이다. 곧 분명하게 알 수 있겠지만, 피에르의 존재는 나의 뼛속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피에르의 존재는 '세계-속에서의, 나에게 있어서의, 또 타자에게 있어서의' 하나의 현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고, 이런 현재는 피에르가 생존해 있었을 때의 '나의' 현재였다. (중략) '죽음 속에 있는 무서운 사실은 죽음이 삶을 '운명'으로 바꾼다는 것'이라고 말로는 그렇게 표현했다. (중략) 죽은 피에르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늘에 와서는 오직 나만이 나의 자유에 있어서 그 책임자이다. 그리고 어떤 생존자의 구체적인 과거의 영역으로 옮겨지지 않고, 그 영역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 죽은 자들은 '과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그들의 과거도, 모두 소멸되어 버렸다.
따라서 각각의 과거를 '가진' 각각의 존재가 있다.

극한까지 가서 나와 나의 죽음 사이가 무한소가 된 순간에는, 나는 이미 나의 과거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과거만이 나를 한정할 것이다.

더 이상 남아 있는 패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놀라움과 함께 깨달을 때, 그를 때려눕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영원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바꾼 것과 같이 죽음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합체시킨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의 판단 앞에 방어할 수단도 없이 존재한다. (중략)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죽음은 이 도약을 다른 것들과 함꼐 응고시킨다. (중략)
죽음에 의해 대자가 통째로 과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한에 있어서, 대자는 영원히 즉자로 변한다.

그러나 과거로서의 한애서 과거의 내용에 대해서,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없앨 수 없고, 그것에 아무것도 더할 수도 없다. 바꿔 말하면, 내가 그것으로 있었던 과거는 그것이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즉자이다. 나는 과거와의 존재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런 과거와의 존재관계는 즉자형의 관계이다.

과거라고 하는 이 사실적 존재 때문에, 나는 어떤 순간에도 외교관으로도 선원으로도 있지 않고 교수로 있는 것이다. 하기야 이 경우에도 나는 이런 교수의 존재를 연기할 뿐이지, 결코 완전하게 이 교수라는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는 먼저 즉자적이다.

즉자인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대자이다. (중략) "한편으로는 우리는 기꺼이 현재를 '존재'에 의해 정의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와 앞서 존재한 과거에 비해, 존재하는 것이 현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재를 그것으로 있지 않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직접적인 과거와 미래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엄밀한 분석은, 사실 이미 무한소의 한 순간밖에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후설이 그 '내적인 시간의식에 대한 강의'에 가리킨 것처럼, 무한하게 진행된 분할의 이상적인 종국이자, 하나의 무이다."

'대자'가 현전하는 것은 모든 즉자존재에 대해서이다. (중략) 그러나 대자는 현재를 세계 속에 들어오게 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현재가 무언가에 대해 현전적으로 있을 때의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순간의 형태로 '현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중략) 현재는 공통현전적인 존재 밖으로의 도망이며, 자신이 그것으로 있었던 존재로부터 자신이 그것으로 있을 존재를 향한 도망이다. 현재로서의 한에서는, 현재는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것(과거)으로 있지 않고, 자신이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미래)로 있다.

즉자는 미래로 있을 수도 없고 미래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저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을 때, 보름달은 인간존재에 대해 드러내 보이는 '세계 속에서'만 미래적이다. '미래'가 세계 속에 도래하는 것은 인간존재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미래'는 오로지 존재의 저편에 위치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대자의 현전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내가 그것으로 있는 '대자'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은 바로 나 자신이다. (중략) 그러므로 '미래'는 내가 존재의 저편에 있는 하나의 존재에 대한 현전으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에서 나이다. 나는 '미래'를 향해 나를 기투함으로써 내가 결여하고 있는 것과, 즉 그것이 나의 '현재'에 종합적으로 부가되면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게 되는 것과, 미래애서 융합하려고 한다. 따라서 대자가 존재의 저편에 있어서의 존재에 대한 현전으로서 있어야 하는 것은, 대자 그 자신의 가능성이다. '미래'는 이상적인 지점으로, 거기서는 사실성(과거)과 대자(현재)와 그 가능(장래)의 갑작스럽고 무한한 압축이 마침내 자기를 대자의 그 자신에 있어서의 존재로서 나타낼 것이다. 대자가 그것으로 '있는' 미래를 향한, '대자'의 기도는 '즉자'를 향한 하나의 기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자'는 자신의 미래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자는 자기 앞에, 그리고 존재의 저편에서만, 자신이 있는 것의 근거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란 내가 자유롭지 않다면 내가 그것으로 있었을 것이고, 내가 자유로워야만 내가 그것으로 '있어야 하는 것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거기서 우리가 앞에서 기술한 그 불안이 생겨난다. 불안은 내가, 내가 있어야 하는 이 미래로 있는 데 충분하지 않은 데서 온다. (중략) 자신의 '가능'에 매달리려 해도 헛일이다. (중략)
한 마디로 대자는 자유롭다. 그리고 대자의 자유는 이 자유 자체에 대해 이 자유 자체의 한계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것이다.

즉 '모든 "지금"은 곧 "지난 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갉아먹고 구멍을 뚫는다. 시간은 분리한다. 시간은 달아난다.
(중략) 시간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있었던 것으로부터, 내가 있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사물들로부터, 타자로부터 나를 분리시킨다. 거리의 실제적 척도로서 선택된 것은 시간이다. (중략) 세계와 인간의 시간적 모습은 '앞'과 '뒤'의 산산이 부서진 상태로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분쇄의 단위, 즉 시간적 원자는 '순간'일 것이다. 이 순간으 어느 일정한 순간의 '앞에', 그리고 다른 순간의 '뒤에' 자기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자신의 형태의 내부에는 앞도 뒤도 포함하지 않는다.
순간은 불가분적이고 무시간적이다.

또 시간성은 존재도 아니고, 오히려 존재 자신의 무화라는, 존재의 내부구조이며, 대자존재에 고유한 '존재방식'이다. '대자'는 '시간성'이라는 디아스포라(Diaspora, 분산-점착)적인 형태로 자신의 존재로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현재'는 마치 금방 메워지고는 끊임없이 재생하는 끊임없는 '존재의 구멍'이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경과한다. 또 현재는 마치 '즉자'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도피이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경과한다. 이 즉자의 덫은 이미 어떤 대자의 '과거'도 아닌 하나의 '과거' 속에 현재를 끌어넣는 즉자의 마지막 승리에 이를 때까지 현재를 위협한다. 이런 즉자의 마지막 승리는 바로 죽음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체계 전체의 과거화에 의한 '시간성'의 근본적 정지이고, 또는 이른바 '즉자'에 의한 인간적 '전체'의 탈환이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 살아남아 있는 추억은 하나의 과거적인 '지금'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일꺠워지기를 기다리는 한에서 하나의 미래적인 '지금'이다.

- 시간에 관한 샤르트르의 고찰. '과거'를 하나의 '즉자'로 보는 것은 내게 하나의 유용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과거'를 즉자의 하나의 예인 '의자'에 비유해 보자. '의자'는 앉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의자를 나의 의식 속에서 자꾸만 나에게 앉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앉는 행위가 가장 쉬운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앉는 대신 이 의자를 무시하거나 안 보이는 곳에 가져다 놓거나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심적으로우리가 과거를 통제하는 데 용이하게 쓸 수 있다. '우울증'이라는 과거병력을 가진 사람에게 '우울'이라는 과거적 생각이 떠오를 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데로 우울한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 의자에 앉는 것처럼 가장 쉬운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의자'로 환원해 창고에 넣고 닫아버리거나(무시하거나), 위에 화분을 올려놓는 받침대로 사용하거나(다른 용도로 변화시키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즉자이므로, 현재의 우리가 변화시킬 수는 없으나 그에 대한 태도는 우리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
또한, 현재가 존재하지 않음. 과거와 미래의 전제만이 현재를 정의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현재는 미래로의 기투를 하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인 것이다. 따라서, 미래는 존재에게 있어 완전한 주체적인 자유를 부여한다. 이 불안과 함께 오는 자유로운 존재는 미래에 도래할 세계의 가능성이다.  죽음이 존재를 즉자로 굳혀버리기 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있고자 하지만 있지 않는 그 모습으로 최대한 몸을 던져 가까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마술같은 매력!
또한, 죽음이 존재를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기억이 현재 존재할 수 있다는 그의 논의가 나의 그동안의 관점과도 일치하는 점에 너무도 반갑다. 마치 샤르트르의 생각이 현대까지 살아 숨쉬고, 논의되고, 반박되고, 공감될 수 있는 것처럼. 시간성에 묻히지 않을 수 있는 영원한 즉자적 존재의 창조가 현재 기투하는 지금 있지 않는 그러나 있어야 할 나의 미래의  존재이다.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2부 대자존재, 제1장 대자의 직접적 구조 -

'그것이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으로 있고,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다'는 이 필연성이 의식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해 보자.

그러나 의식의 핵심에서 나타나는 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되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대자는 그 자신의 무로 있어야만 한다. 의식인 한에 있어서의 의식의 존재는 자기에의 현전으로서 '자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것이며, 또 이런 존재가 그 존재 속에 지니고 있는 이 아무것도 아닌 거리, 그것이 '무'이다.
(중략) 무는 항상 하나의 '딴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딴 것'이라는 형태로서만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존재의 불안정을 자기에게 배당하는 하나의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 이것이 대자의 책무이다. (중략)
무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무화이다. (중략) 무는 존재의 무이므로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만 존재에 올 수 있다. 물론 무는 인간존재라는 특이한 존재로 말미암아 존재에 온다. 그러나 이 특이한 존재는 그것이 그 자신의 무의 근원적 기도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한, 자기를 인간존재로 구성한다. 인간존재는 그 존재 안에서,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 존재의 핵심 속에서 무의 유일한 근거라는 한에서만 존재이다.

세계 속에 던져져 있고, 하나의 상황 속에 버려져 있는 한에 있어서 대자는 존재한다.
(중략) 사실상 데카르트는 자기의 발견을 이용하고자 할 때, 그는 스스로 불완전한 한 존재로서 자기를 파악한다. '왜냐하면 그는 의심하기 때문이다.' 

대자는 의식으로 자기를 근거 세우기 위해서 즉자로서의 자기를 상실하는 즉자이다. (중략) 만일 즉자존재가 그 자신의 근거로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존재의 근거도 될 수 없다면, 근거는 일반적으로 대자와 함께 세계에 온다. 대자는 무화된 즉자로서 스스로 자기의 근거를 세우는데, 뿐만 아니라 대자와 한께 비로소 근거가 나타난다.
(중략) 의식은 그 자신의 근거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단순한 즉자가 무한으로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발적이다. 절대적 사건, 다시 말해 대자라는 사건은 그 존재 자체에 있어서 우발적이다.

초승달에 그 초승달로서의 존재를 부여하는 것은 보름달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규정하는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자기 밖에서 자기가 있지 않은 존재에까지, 즉 자기의 '의미'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인간적 초월과 상관관계에 있는 현실존재자의 존재 속에서 하는 일이다. 
(중략) 욕망은 '......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결여'가 아니면 안 된다. 욕망은 존재의 결여이다. 욕망에는 그 가장 내면적인 존재 속에서 자기가 욕망하고 있는 존재가 따라다니고 있다. 
(중략) 결함을 가지 현실존재가가 그것을 향해 자기를 뛰어넘거나 뛰어넘어지고, 그로 인해 결함을 가지 자로서 자기를 구성할 때의 '부재'이다. 인간존재의'......을 위하여'는 어떤 것일까?
(중략) 인간존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이다.

인간존재는 그 존재에 도래하는 데 있어서 자기를 불완전한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존재는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이 독특한 전체의 현전으로, 자기를 '있지 않은 한에 있어서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중략) 그러나 인간존재가 그것을 향해 자기를 뛰어넘는 존재는 하나의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이 존재는 인간존재의 핵심에 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인간존재 자체일 뿐이다. (중략)
신이란 그것이 완전히 긍정성이고, 세계의 근거인 한에 있어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존재인 동시에 의식이고, 자기 자신의 필연적 근거인 한에 있엉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는 존재이며, 또 그것이 있지 않는 것으로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인간존재는 자기의 존재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존재이다. (중략)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본디 불행한 의식이며, 이 불행한 상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를 가지고 있는 고뇌이다. 이 고뇌는 치밀하고도  객관적인 전체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중략) 이런 고뇌는 이 나무나 이 돌과 마찬가지로 침투할 수 없는 것, 농밀한 것으로 세계의 한복판에 존재한다. 이런 고뇌는 지속된다. 요컨대 이런 고뇌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중략) 그것은 내가 고뇌를 만들고, 그 고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고뇌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나는 나의 고뇌가 나를 붙잡아 폭풍처럼 나한테서 넘쳐 흐르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나는 나의 자유로운 자발성 속에서 고뇌를 존재에까지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고뇌로 있고 싶고 동시에 고뇌를 당하고 싶지만, 나를 나의 밖으로 데리고 나갈 이 거대하고 불투명한 고뇌는, 끊임없이 그 날개로 나를 가볍게 스치기만 할 뿐 나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나는 탄식하고 있는 이 나밖에, 신음하고 있는 이 나밖에,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고뇌를 이루기 위해 고뇌하는 희극을 쉴새없이 연기해야 하는 나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중략) 나의 고뇌는 그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 있는 것에 대해 고뇌하고, 그것이 있는 것으로 있지 않은 것에 대해 고뇌한다. (중략)
나의 고뇌는 그것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으므로 쓸데없이 많은 말을 늘어놓지만, 그것의 이상은 오히려 침묵이다. 조각상의 침묵,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을 가리고 침울한 상태에 잠겨 있는 인간의 침묵이다. 그러나 이 침묵의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이다. 그 사람 자신으로서는 끝없이 얘기를 계속하고 있다. (중략) 그 자신으로서는 그가 스스로 원하지 않음으로써 원하고, 스스로 원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이 괴로움, 끊임없이 하나의 부재가 따라다니는 이 괴로움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여기서 부재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무언의 고뇌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고뇌하는 대자의 이를 수 없는 구체적인 '전체 고뇌하는 '인간존재'의 '목표(le pour)'가 부재하는 것이다.

자기란 가치이다. (중략) 가치의 존재는 가치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로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로서 있는 한에서의 가치의 존재, 그것은 존재를 갖지 않은 것의 존재이다. 따라서 가치는 파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가치는 그 행위들의 저편에 있는 하나의 사물로서, 이를테면 숭고한 행위들의 무한한 향상의 극한으로서 주어진다. 가치는 존재의 저편에 있다. (중략) 인간존재는 가치를 세계에 도래하게 하는 것임을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그 가치는 하나의 존재가 그곳을 향해서 자기의 존재를 뛰어넘는 것을 존재의 의미로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가치를 부여받은 존재는 모두, '......을 향한' 자기의 존재로부터의 이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는 이 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존재가 자기에게 근거를 부여하는 한에 있어서 이 존재를 따라다닌다. 요컨대 가치는 '자유'를 따라다닌다. (중략) 오히려 이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이런 가치의 존재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자신을 있기 하기 때문이다. 

인간존재는 넓은 의미에서 대자와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는 다만 존재의식으로서 자기를 존재시키는 대자의 비조정적 반투명성과 함께 주어진다. 가치는 도처에 존재하면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반사 - 반사하는 것'의 무화적인 관계의 핵심에, 현전하면서도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으며, 다만 나의 존재를 현전하게 하는 이 결여의 구체적인 의미로서만 체험된다. 가치가 명제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치가 따라다니는 대자가 반성의 시선 앞에 나서야 한다. 사실, 반성적 의식은 반성되는 '체험'을 그 결여적인 본성 속에서 정립하고, 동시에 가치를 '결여를 입는 것'의 손이 닿지 않는 의미로서 꺼내온다. 

'가능은 인간존재에 의해 세계에 찾아온다'고 하는 최초의 과학적 발걸음은 옳은 것이다.

'세계는 그것이 인식되는 한 나의 세계로서 인식된다'는 표현은 부조리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세계의 이런 아성은 달아나면서도 항상 현재적인 하나의 구조이며, 이 구조를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에 대한) 가능적인 모든 의식은 모든 가능에 대한 의식인데, 그런 모든 가능이 세계를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에 세계는 나의 세계('인") 것이다.

- 존재의 가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 언제나 존재의 이편에서 저편을 바라보는 한 사람으로서 느끼던 대중과의 괴리를 나에게서 덜어내어 준다. 존재란 우연한 절대적인 사전으로 규정지어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지워버림으로 하나의 짐을 덜어내고, 존재에 대한 고찰을 좀 더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듯하다. '고뇌'를 존재에게 따르는 필연으로 인정하고, '가치'를 향해 현존재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존재를, 세상속에 던져졌으나, 세상에 가능성을 부여하는 존재를, 그럼으로써 인간존재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샤르트르의 철학에 많은 위안을 얻는다. 언제나 현재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못하고, 그 있지 못함에 괴로워했던 내가 단순한 현실 부적응자가 아니라, 가치를 향해 고뇌를 안고 몸을 던지는 존재중 하나라는 사실에 기쁘다. 침묵 속에 가려진 말들. 꺼내진 심정. 존재로서의 공감......

2012년 3월 24일 토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제1부 무의 문제, 제2장 자기기만 -

인간존재는 단순히 세계 속에 '부정성'이 나타나게 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중략) 세계에는 자기의 사회적 존재가 오로지 '부'의 존재인 사람들 (파수꾼.감시병.간수 등등) 도 있으며, 그런 사람들은 한평생 이 지상에서는 하나의 '부'로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게 살다가 죽어갈 것이다. 그런 부류가 아닌 사람들도 사람인 한, 끊임없는 부정으로 자기를 구성하고, 부를 그들의 주관성 자체 속에 지니고 있다.
셸러가 '원한적인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뜻과 기능, 그것이 '부'이다. (중략) 즉,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존재에 있어서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중략) 차라리 인간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태도이기도 하고, 동시에 의식이 그 부정을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일정한 태도를, 선택하여 검토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 태도가 아마도 '자기기만'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허위가 하이데거의 이른바 '공존재(Mit-sein)의 정신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허위는 나의 존재, '타인'의 존재, 타인을 '위한' 나의 존재, 나를 '위한' 타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중략) 자기기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허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전적으로 다른 점은 자기기만에서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진실을 가리는 것이다. (중략) 그렇다 해도 자기기만은 인간존재의 그 밖의 모든 현상과 달리 '공존재'에 의해 조건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존재'는 하나의 '상황'으로 나타남으로써 자기기만을 부채질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기만은 언제라도 이런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다. 요컨대 자기기만은 밖에서 인간존재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중략) 어떤 최초의 의도, 하나의 자기기만적인 기도가 필요하다.

자기기만의 이런 온갖 양상 속에는 어떤 통일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모순되는 개념을 형성하는 일종의 기술, 즉 어떤 관념과 그 관념의 부정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을 형성하는 기술이다. 그렇게 하여 발생된 개본 개념을 하나의 '사실성'인 동시에 하나의 초월'이라고 하는 인간존재의 이중의 성질을 이용한다. 
(중략) 우리를 먼저 초월의 한복판에 던져 넣은 다음, 갑자기 우리를 우리의 사실적인 본질의 좁은 한계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런 구조는 저 유명한 문구 '그는 그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 되었다',

나의 행위 가운데 어떤 하나에 나의 시선과 타자의 시선, 이 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나에게는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쪽의 시선에 비치는 행위와 다른 쪽의 시선에 비치는 행위는 결코 똑같은 구조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훨씬 뒤에 가서 우리가 보여주게 되겠지만, 또 누구나 그렇게 느끼겠지만, 나의 존재의 이 두 가지 모습 사이에는, 마치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나 자신의 진실이지만, 타자는 나에 대해 왜곡된 영상밖에 가지지 않는 것과 같은 식으로 외관과 존재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타자에게 있어서의 나의 존재와 나 자신에게 있어서의 나의 존재가 동등한 존재 자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분열하는 하나의 종합이 생기는 것이며, 대자가 대타에서, 대타가 대자에서 끊임없이 달아나는 숨바꼭질이 일어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오로지 그가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오로지 그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이것이 그 이상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즉자의 정의 - 또는 이른바 동일률이 아닐까? 사물의 존재를 이상으로 세우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이런 존재는 인간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동일률의 원칙은 보편적으로 보편적인 공리는커녕, 단순히 영역적으로 보편성을 가진 종합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 아닐까? (중략) 인간존재가 필연적으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 있을 수 있어야만 한다. 

카페의 종업원은 자신의 신분을 가지고 놀며 자신의 신분을 '실현한다.' (중략) 그들의 신분은 모두 의식으로 되어 있다.
공중은 그들이 그 신분을 하나의 의식으로서 실현하기를 요구한다. 식료품 가게 주인, 양복점 주인, 경매인 등에게는 각자의 춤이 있다. 이 춤으로서 그들은 자기의 손님에게 자신이 식료품가게 주인, 양복점 주인, 경매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 (중략) 마치 우리는, 그가 그곳에서 도망치지나 않을까, 그가 갑자기 그의 신분에서 빠져 나와 그의 신분을 떠나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다. 

나의 의식은 그것이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대상 또는 상태가 어떤 것이든, 적어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그러나 후설이 정확하게 본 것처럼 나의 의식은 근원적으로 타자에게는 하나의 부재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나의 의식은 나의 모든 태도와 나의 모든 행위의 의미로서는 항상 현존하는 대상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항상 부재하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의 직관에는 하나의 끊임없는 질문으로서,  더 정확하게 말해 하나의 끊임없는 자유로서 자기를 내주기 때문이다. (중략) 그의 자유로운 판단은 늘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중략)
상대편의 판단은 항상 나의 모든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저 너머에 있어서 이 판단을 환기시키려고 해도 되지 않는 일이다. 상대편의 판단은 그것이 그 자체로서 나의 노력에 힘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면 결코 나의 노력을 통해 환기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자기를 밖으로부터 환기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미래는 처녀이고, 모든 일은 나에게 허용되어 있다. 

즉 나의 일상적인 존재에 있어서도, 나는 사실은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를테면 '슬프게 있다'의 있다 -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은 존재방식에 있어서, 내가 그것으로 있는 것 - 와, 내가 나에게 감추고자 하는 '용감하게 있지 않다'의 '있지 않다' (비존재) 사이에는, '아니-있음'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것, 이것이 존재론적 앎이다. (중략) 자기기만이 가능한 조건은, 인간존재가 그 가장 직접적인 존재에 있어서, 즉 반성 이전의 코기토의 내부구조에 있어서, 그것이 있지 않은 그대로의 것으로 있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참된 문제는 분명하게 자기기만이 신앙이라는 점에 있다. 자기기만은 냉소적인 허위일 수도 없고, 대상의 작관적인 소유라는 뜻에서의 명증일 수도 없다. 그러나 대상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또는 대상이 불명확하게 주어졌을 때, 그 대상과 존재의 밀착을 신념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때의 자기기만은 신념이며, 자기기만의 본질적 문제는 신념의 문제이다. 
자기를 설득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 낸 그런 개념을 우리가 자기기만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략) 자기기만은 너무 지나치게 요구하지 말자고 하는 결심, 납득이 가지 않을 때도 그대로 만족하자는 결심, 확실하지 않은 진리에 대한 자기 동의를 결의를 통해 강행하려는 결심 속에 전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기기만의 이 최초의 계획은 신앙의 본성에 대한 하나의 자기기만적인 결의이다.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믿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자기가 믿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이 자괴는 모든 신앙의 바탕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나를 용감하다고 '믿으려' 하는 순간, 나는 내가 비겁하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중략) 이런 신념들은 신념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자체를 드러내 보인다. 


- 이 '자기기만'에 대한 서술은 논리적인 서술이기로 느껴지기보다는, 내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는 '타자의 의식'이다. '타자'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은 전적으로 나의 외부에 있다. 따라서, 타자의 의식에 대한 나의 의식은 철저한 부재로 남는다. 그러나, 타인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우리는 타자에 대한 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의식적인 노력이 때로는 성실하게, 혹은 불성실하게 수행될 수 있으나, 큰 차이는 없다고 샤르트르는 말한다. 이 역할이나 신분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존재에 있어 '즉자'나 '대자'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신념이나 신앙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믿는다'라는 것 자체가 '믿지 않는다'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믿는 것'이라는 행위에는 그 저변에 '불확실성'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결심'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역할을 성실하게 하기 위해 불확실한 신념에 몸을 던지는 행위 (자기기만적 행위)를 배제한 존재가 어떠한 존재로 남을 수 있을지 알고 싶다. 마치 투명인간이 옷을 벗었을 때 남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싶은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투명인간이 옷을 벗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그는 분명 존재한다'. 존재와 무가 하나라는 샤르트르의 논점을 서서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지금 그대로 있지 않은 나'를 위해 움직이는 '대자'로서 살아나감을 넓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존재의 의미는 '나를 던지는' 행위에 의해 그 의미를 갖는가?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중

유니스: (마침내) 무슨 일이죠? 길을 잃었나요?
블랑시: (약간 신경질적으로)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유니스: 여기가 거기에요.

블랑시: (자기 술잔을 내려다본다. 손에 든 술잔이 떨린다.) 넌 내 전부야. 그런데도 너는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구나!
스텔라: (진심으로) 언니, 그런 게 아니란 거 알면서 그래.

블랑시: 스텔라. 너 나를 비난하려는 거지, 네가 나를 비난하려는거 알아....... 하지만 욕하기 전에 이걸 생각해 봐...... 너는 떠나 버렸다는 걸! 나는 남아서 고생, 고생했다고! 너는 뉴올리언스로 와서 네 살 길을 찾았지! 나는 벨 리브에 남아서 그곳을 지켜 보겠다고 애썼어! 널 나무라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모든 짐을 내가 지고 말았지.
스텔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혼자 살아나가는 거였어, 언니.
(블랑시가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한다.)

스텔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높고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떠나고 싶어, 떠나 버리고 싶다고!


- 이 희곡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극히 과장된 성격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현실부적응자라고 말할 수 있는 블랑시는 허영많고, 연약하고, 알코올 중독이며 음탕하면서도 고귀한 척 하는 인물이다. 이에 대립해 스탠리는 육욕적이고, 폭력적이지만 호탕한 인물로 그려진다. (블랑시의 동생이자 스탠리의 아내인) 스텔라만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되는 인물이다.
나는 양면으로 극대화된 인물들 사이의 스텔라에게 주목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블랑시와 스탠리가 주목되는 반면) 스텔라는 현실을 인지하고, 이에 맞춰 살아갈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은 그녀 주변의 인물들이다. 극에서 스텔라에 의해 빚어지는 갈등상황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갈등은 그녀가 떼어낼 수 없는 주변의 인물들(혈육/배우자)에게서 온다. 처음에 그녀는 블랑시에게 떠나 그녀의 삶을 모색한 것으로 극중에서 암시된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스탠리라는 블랑시와는 정반대의 다른 사람의 덫에 갇히게 된다. 극 중 그녀는 마치 현실에 최대한 안주하려고 보이나, 중간 중간 그녀의 간절한 "떠나고 싶음"에 대한 염원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 그녀는 승자의 편(스탠리)에 서서 패자의 편(블랑시, 스탠리에게 겁탈당하고 끝내 정신병원으로 보내짐)에 대한 가슴아픔을 그대로 받아든다. 삶의 틀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 상황을 탈출하고 싶은 일반적인 사람의 표상 (혹은 테네시 윌리엄스) 본인의 표상이 스텔라에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2012년 3월 22일 목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1부 무의 문제, 제1장 부정의 기원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식은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이 자체 속에 즉자를 향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기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상도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은 세계 속의 인간이다.

우리는 존재의 탐구를 목표로 출발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일련의 질문에 의해 존재의 핵심으로 인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막 목표에 손을 대려고 한 순간, 질문 자체 위에 던진 일별에 의해 뜻밖에도 우리는 무로 에워싸여 있음이 드러났다.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조건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밖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는 비존재의 끊임없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대답을 에워싸려 하고 있는 것 또한 존재이다. 존재가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탕으로 부각된다. 이 대답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존재는 '그것(cela)'이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rien)."

모든 것은 나의 주의가 향하는 방향에 달려있다.
내가 피에르를 찾으로 이 카페에 들어설 때, 이 카페의 모든 대상물은 종합적으로 배경으로서 구성되며, 그 배경 위에 피에르가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카페가 이렇게 배경으로 구성되는 것이 최초의 무화이다.

부정은 연속성의 갑작스러운 중단이다. (중략) 부정은 하나의 근원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다.

부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비존재가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 밖에서의 끊임없는 현전이라는 것이다. 즉 그 조건은, 무가 존재에 '항상 붙어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중략) 무에 대한 인간존재의 최초의 관계최초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또한 최초의 무화적 행위는 어떤 것일까?

존재와 비존재를 마치 그림자와 빛의 방식으로, 현실의 두 가지 상호 보충적 요소들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중략)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비존재는 두 개의 추상이며, 구체적 실재의 바탕에 있는 것은 양자의 결합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존재가 자기를 넘어서 '다른 것으로' 나가는 한, 존재는 오성의 모든 규정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존재가 자기를 뛰어넘는 한, 다시 말해 존재가 자기의 가장 심오한 갈피 속에서 자기 자신의 뛰어넘음의 근원인 한, 존재는 반대로 그것이 '있는' 그대로 오성에 나타날 것이고, 오성은 자기 자신의 모든 규정 속에 존재를 응고시킬 것이다. 존재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임을 긍정하는 것은, 적어도 존재가 그 자신의 뛰어넘음'인 한', 존재를 그대로 손도 대지 않고 내버려 두게 될 것이다.


비존재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존재의 심장부에서 하는 일이다. 헤겔은 "(존재와 무)는 모두 공허한 추상이며, 양쪽 다 똑같이 공허하다."고 말했는데, 이 경우 그는 공허가 '무언가의' 공허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는 그 자체와의 동일성보다 그밖의 다른 모든 규정의 공허이지만, 비존재는 존재의 공허이다. 다시 말해, 헤겔에 비해 여기서 상기해야 하는 것은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어떤 차이적 성질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무는 논리적으로 존재보다 뒤에 오는 것이다. 그 말은 무는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며, (중략) 우리가 무를, 거기서 존재가 생겨나는 하나의 근원적인 심연으로 내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존재는 무에 선행하는 것이며, 무에 근거를 부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존재가 무에 대해 논리적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가 구체적으로 그 효력을 이끌어 내는 것은 존재로부터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우리는 '무는 존재에 붙어다닌다'라고 표현한다. 요컨대 존재는 생각되기 위해서 전혀 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에 무의 흔적을 털끝만큼도 찾는 일 없이 존재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고찰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무는 빌려온 존재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무가 그 존재를 받아오는 것은 존재로부터이다. 무가 가지고 있는 존재적인 무는 존재의 한계 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 존재가 모두 사라졌다고 해서 비존재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렇게 되면 무도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비존재는 오직 존재의 표면에만 존재한다."

존재에는 하나의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해명해야 한다. (중략) '현존재(Dasein)'에 있어서도 무에 '직면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현상적으로 무를 발견하는 끊임없는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불안이다.
(중략)
인간은 이 복합체에서 출발하여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존재'는 그가 존재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는 한에서 나타난다는 것, 인간존재는 존재 속에서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다른 현편으로는 인간존재를 둘러싸는 이 존재가 세계의 형태를 가지고 인간존재 둘렝 배치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인간존재가 하는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존재가 존재를, 세계라는 형태로 구성된 전체로서 나타나게 하는 것은 오직 그가 존재를 넘어섬으로써만 가능하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모든 규정은 넘어섬이다. (중략) 인간으 세계의 저편에서 자기자신에게 자기를 알려 주고 지평선에서 출발하여 자기 자신을 향해 자기를 내면화시키기 위해 돌아온다. 인간은 '자기에 앞서 있는 존재이다'.

인간존재가 괴로움을 받고 투쟁하고 두려워하는 현실, 그 내부 구조 속에, 마치 존재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부정을 품고 있는 현실이 수없이 많다. (중략) 무는 오직 존재의 기반 위에서만 자기를 무화할 수 있다. 만일 무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 이전도 이후도 아니며, 일반적인 방식으로 존재 밖에서도 아니다. 무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존재의 핵심에서이며, 한 마리의 벌레로서이다.


'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는 '존재되는' 것이다. '무'는 자기를 무화하는 것이 아니다. '무'는 '무화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무를 세상에 도래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곧 또 하나의 문제를 유발한다. 즉 인간에 의해 무가 존재에 도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그 존재에 있어서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물음은 회의와 같이 하나의 행위이므로 현재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의 시간적인 작용이다. 이런 시간적인 작용은, '인간존재는 먼저 존재의 품안에서 쉬고 있으며, 이어서 하나의 무화적 후퇴에 의해 자기를 존재에서 분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를 의식하는 것은 불안에 있어서이다. 또 말하자면, 불안은 존재의식으로서의 자유의 존재방식이다. 불안 속에서야말로 자유는 그 존재 속에 그 자신을 위한 문제가 된다.
(중략)
먼저 키에르케고르가 정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불안은 이 점에서 두려움과 구별된다. 두려움은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 앞에서의 불안이다. 현기증이 불안인 것은,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은 그것이 밖에서 나의 생명과 나의 존재를 변경할 우려가 있는 한,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내가 이 상황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한, 이 상황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만일 나의 생명을 구하도록 나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내가 심연에 몸을 던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정적인 행위는 내가 아직 그것이 아닌 하나의 '나'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내가 아닌 내가, 내가 현재 그것인 나에게 의존하지 않는 한, 내가 현재 그것인 나는 그 자체로는 내가 아직도 그것이 아닌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현기증은 이런 의존의 파악으로서 나타난다.
나는 낭떠러지에 다가간다. 나의 눈길이 심연 바닥에서 찾고 있는 것은 '나'이다. 이 순간부터 시작해서 나는 나의 모든 가능과 희롱한다. 나의 눈은 심연을 위에서 아래로 계속 내려다보면서 있을 수 있는 나의 추락을 모방하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실감한다. 동시에 자살행위는 그것이 있을 수 있는 '나의 가능'이 된다는 사실에서 이번에는 이 자살행위가 이 행위를 채택하는 가능한 동기들을 나타나게 한다 (자살은 불안을 끝낼 것이다).

그것은 과거 앞에서의 불안이다.

본질은 '있었던 것'이다. 본질은 인간존재에 대해서 '그것은......이다'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불안의 경우에, 자유는 그것이 결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재촉받거나 방해받지도 않는 한, 자기 자신 앞에 불안해지는 것이다.
(중략) 사실 불안이란 하나의 가능성을 '나의' 가능성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중략) 이를테면 내가 쓰는 문장은 내가 쓰느 글자의 뜻이지만, 내가 써내려는 작품 전체는 또한 문장의 뜻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하나의 가능성이며 이 가능성에 대해 나는 불안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참된 '나의' 가능이며, 나는 내가 내일도 이 일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내일은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자유가 그 무화하는 힘을 행사할 수도 있다. 다만 이 불안은 이런 작품을 '나의' 가능성으로 인식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본질에서 나의 자유를 떼어 놓는 무 (나는 '이 책을 쓰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그 무엇도', 심지어 내가 원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도 나에게 그것을  쓰도록 강요할 수 없다)를 발견해야 한다.
(중략) 나는 나의 자유가 현재에 있어서든 미래에 있어서든, 내가 현재 있는 그대로의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자유인 한, 나의 가능으로서의 이 책의 저술 자체 속에서 이 자유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그러므로 일어나는 행위 자체는 사람을 안심시킨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행위는 '일은 나의 가능성인가?' 하는 물음을 면제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어나는 행위는 정적주의나 일의 거부, 종국에는 세계의 거부나 죽음 따위의 가능성을 인식할 여유를 나에게 주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해 자명종 소리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그 부름에 응하여 벌써 일어나 있는 한, 이 파악은 자명종시계의 소리에 그 요구를 부여하는 것은 나이고, 게다가 나뿐이라는 불안한 직관으로부터 나를 지켜 준다. 같은 방식으로 일상생활의 도덕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윤리적 불안을 배제한다. 내가 모든 가치에 대한 나의 근원적인 관계에서 나를 응시할 때, 그것에는 윤리적 불안이 있다. 사실, 가치는 하나의 근거를 구하는 요구이다. 그러나 이 근거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존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상적인 본성의 근거를 그 존재에 두는 가치는 모두, 바로 그 사실때문에 가치인 것을 그만두고, 나의 의지의 타율을 실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그 존재를 그 요구에서 끌어내는 것이지, 그 요구를 그 존재에서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 결과로서 나의 자유는 모든 가치의 유일한 근거이다.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내가 이러이러한 가치, 이러이러한 가치의 기준을 채택할 때, 그 정당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모든 가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나의 존재인 한, 나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는 내가 모든 가치의 근거 없는 근거인 것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중략) 모든 가치 앞에서의 이 불안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이상성의 승인이다.
그러나 보통, 나는 모든 가치를 매우 안심하는 태도로 대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상 내가 모든 가치의 세계 속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나의 자유에 의해 존재 속에 지탱되고 있다는 불안한 자각은 뒤에 오는 간접적인 현상이다. 직접적인 것은 긴박하게 닥쳐오는 이 세계이다. 내가 스스로 구속되어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나의 행위는 모든 가치를 자고새처럼 날아가게 한다. '비열'이라는 반가치가 내 안에 생기는 것은 나의 분개 때문이며, '위대성'이라는 가치가 나에게서 생겨나는 것은 나의 찬미 속에서다. 특히 내가 많은 금기에 실제로 복종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 금기를, 사실상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 나에게 나타낸다. 스스로 '성실한 신사'로 자처하는 시민이 성실한 것은, 도덕적 가치를 고려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세계 속에 나타나자마자 성실이라는 뜻을 가진 하나의 태도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실함은 하나의 존재를 획득한다. 그것은 새삼스럽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가치는 잔디밭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팻말과도 같은 수많은 작은 현실적 요구들로 나의 앞길에 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자명종시계와 팻말, 납세통지서.경찰관이 모두 다 불안에 대한 울타리가 되어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나에게서 멀어지자마자, 나는 미래에 기대를 걸야 하므로, 내가 나 자신을 향하게 되자마자 나는 곧 자명종시계에 그 뜻을 부여하는 자로서, 팻말에 따라 꽃밭이나 잔디밭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금하는 자로서, 상사의 명령이 긴급한 것임을 알고 있는 자로서, 자신이 쓰고 있는 책의 흥미를 좌우하는 자로서, 요컨대 자기 행동을 모든 가치의 요구에 따라 결정하기 위해 모든 가치들이 존재하게 하는 자로서, 나 자신을 발결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근원적이고 유일한 계획에 직면하여, 오직 홀로 불안 속에 떠오른다. 모든 방벽, 모든 울타리는 나의 자유의 의식에 의해 무화되어 무너진다. 가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사실을 거스르면, 나는 어떤 가치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것도 나 자신을 거슬러서 나를 안전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무로 말미암아 나는 세계에서도 나의 본질에서도 분리되어 있으므로, 나는 세계의 뜻과 나의 본질의 뜻을 스스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오로지 혼자서, 핑계도 대지 못하고 변명할 여지도 없이 그 뜻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불안이란 자유 자체에 의한 자유의 반성적인 파악이다. 이런 뜻에서 불안은 매개이다. 왜냐하면 불안은 그 자체의 직접적인 의식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요청의 부정에서 생겨나기 때문이고, 내가 스스로 구속하고 있던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할 때, 그리고 나 자신을 의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의 존재로 이전의 양해와 그 모든 가능의 판단 이전의 뜻을 가지는 의식으로서 파악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자유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든지, 우리가 어떤 변명의 필요를 느낄 때는 언제든지 결정론을 믿는 것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인'으로서, 또는 사물로서 '밖으로부터' 파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불안을 피한다. (중략) 그것은 이미 건설된 하나의 과정이며 명백하게 우리에게서 불안을, 즉 우리의 자유의 참된 '직접소여'를 은페하기 위한 과정이다.
(중략) 즉 나는 내가 피하고 싶어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계속 나와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대상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불안과 불안의 지향적 목표, 그리고 불안 속에 위안이 되어 주는 신화로의 도피는 모두 똑같은 의식의 통일 속에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요컨대 나는 알지 않기 위해서 피하는 것이지만, 나는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을 수 없고, 또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는 불안을 의식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불안은, 사실은 가릴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의식 속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 즉 '그것으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인간이 질문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가 그 자신의 무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인간이 근원적으로 존재에 있어서의 비존재에 속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그 자신에 의해서, 무에 전율하는 경우뿐이다. 그리하여 인간존재라는 이 시간적 존재 속에서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초월이 비로소 나타난다.

-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 '자유'를 가진 인간의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를 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인간, '무'라는 주제를 꺼내어 보이며 '언젠가 무로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 '무가 존재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의 논리.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도입부에는 이미 인간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을 바닥에 깔고 있다. 그는 세상의 주체로서의 인간, 모든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인간, 자유라는 위대하고도 무거운 짐을 지고 불안에 떠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눈 앞에 꺼내든다. 이 인간의 무한한 권위에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고, 존재라는 그 엄청난 사실을 외부로 던져버리지 않고, 받아들 용기. 그것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존재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그 존재의 위대성을 책임질 열쇠는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

2012년 3월 21일 수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1. 머리글 - 존재의 탐구

나타남은 본질을 감추고 있지 않다. 나타남은 본질을 드러내 보인다. 나타남이 '본질인 것이다'.

'유한한 것 속의 무한한 것'

프루스트의 천재는 생산된 여러 가지 작품들로 환원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관점들의 무한성, 다시 말하면 우리가 프루스트 작품의 '무궁무진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관점의 무한성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나타남은 그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존재를 '현재(presence)'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왜냐하면 '부재(absence)' 또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상적 조건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신을 개시하는 정도에 따라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어떤 인식하는 의식이 자기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기 위해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이 의식이 이 인식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 '이전'에 '의식의 무'가 존재할 수는 없다. (중략) 의식의 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에는 존재했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의식 및 최초의 의식의 무를 재인저 종합으로서 내세우는 하나의 증인적 의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의식은 무에 선행하는 것으로, 존재로부터 '자기를 끌어낸다.'

존재의 절대자이지 인식의 절대자가 아니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인식된 절대자는 이미 절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지는 인식과 상대적이기 때문이다'락 하는 그 유명한 반박을 면하는 것이다. (중략) 의식은 실체적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의식이 나타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는 뜻에서 하나의 순수한 '나타남'이다. 그러나 의식이 절대자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순수한 나타남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하나의 전적인 공허 (왜냐하면 세계 전체는 의식 밖에 있는 것이므로) 이기 때문이며, 나타남과 존재가 의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물이 지각되는 한에서, 지각되는 사물의 한 존재가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런데 '지각되는 것'의 양상은 수동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현상의 존재가 그의 '지각되는'것 속에 깃든다면, 이 존재는 수동성이다. (중략) 그리하여 나의 존재는 내가 그 원천이 아닌 그런 존재 방식을 참고 견디어 내고 있다. 다만,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또한 나는 존재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이 사실에서 나의 존재는 항상 수동성의 저쪽에 자리잡는다. 예를 들면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은 '단호하게 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녀 나가는 하나의 태도이고,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만일 내가 언제까지나 '모욕 받은 자'로 있어야 한다면, 나는 나의 존재를 참과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상대성'과 '수동성'이라는 이 두 가지 규정은, 존재 방식에 관련된 것일 수는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존재 자체에는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존재현상의 뚜렷한 관찰은 흔히, 우리가 창조설이라고 부르는 매우 일반적인 편견에 빛을 잃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이 세계에 존재를 주었다고 상정한 경우에는, 존재는 항상 어떤 종류의 수동성에 더럽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에서의' 창조는 존재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다. (중략) 존재는 그 창조자에게 뚜렷이 반역하지 않고는 존재로 긍정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는 창조자 속에 녹아들어가 버린다.
(중략)
존재는 '자체(soi)'이다. 이것은 존재가 수동성도 능동성도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개념은 모두 인간적이며, 인간적 행위 또는 인간적 행위의 도구를 뜻한다. (중략) 존재의 즉자상태는 능동과 수동의 저편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부정과 긍정의 저편에 있다.

사실, 존재가 그 자체에 대해 불투명한 것은, 바로 그것이 자체에 의해 충만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는 그것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는 있다. 존재는 그 자체로[즉자로] 있다. 존재는 그것이 있는 것이다.

- 샤르트르를 읽어가는 첫 인상은 '니체'와 '카뮈'에게는 '경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직시'가 있다는 것이었다. 딱딱한 문체속에서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철학적 지성의 노력이 (비록 읽는 이에게 주는 감동은 덜하지만) 보다 이성적인 눈으로 접근하도록 유도한다.
인류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 것도 수천수만년, 개인이 같은 물음을 던진 것도 태어나 자신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한 이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얻을 수 없는 답에 샤르트르는 마침표를 찍듯이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자체이다'. 그렇다. 존재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 그 순간 존재 자체인 것이다.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던지기도 전에, 의식하지 못하는 식물인간이라도, 존재는 그 자체인 것이다. 자체로서 절대인 존재에 대한 샤르트르의 성찰이 시작되는 순간.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레싱의 "다섯째 아이" 중

이 말을 듣고 헤리엇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불쌍한 벤. 아무도 좋아하지 않다니. 자신은 분명히 좋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좋은 아버지 데이비드 역시 그 애를 거의 만지지 않았다. 그녀는 동물 우리 같은 침대에서 벤을 들어올려 커다란 침대로 데려가 같이 앉았다. "불쌍한 벤, 불쌍한 벤" 그녀는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그 애는 양손을 그녀의 셔츠를 잡아당겨 자신을 일으켜서는 그녀의 허벅지 위에 섰다. 딱딱한 작은 발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녀는 그 애를 쓰다듬으면서 자신에 대해 그 애가 부드러워지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녀는 곧 포기하고 다시 그 애를 침대 아니 우리 속으로 데리고 갔다. 눕혀졌다는 좌절감에서 벤은 울부짖었고, 그녀가 "불쌍한 벤, 소중한 벤"이라고 말하면서 두 손을 그 애에게 내말자 그 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을 끌어당겨 끙끙대며 일어서서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네달배기가...... 그 애는 성나고 난폭한 작은 괴물 같았다.

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여자, 그녀는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격렬하게 자신을 옹호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 그녀 자신의 인생에 해를 끼쳤다....... 데이비드의 인생...... 루크와 헬렌과 제인, 그리고 폴의 인생에도. 특히 폴의 경우가 가장 나빴다.
그녀의 사고는 이런 틀 안에서 맴돌았다.
(중략)
희생양, 그녀는 희생양이었다 - 헤리엇, 가정의 파괴자.

- 누구나 다 가정과 아이들을 생각할 때 그려지는 고정적인 모습이 있을 것이다. 밝고 따뜻하고 웃음이 넘치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헤리엇도 예외는 아니다. 식구가 많은 가정을 꿈꾸었던 헤리엇은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사서, 남편 데이비드와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 나간다. 그러다 그들이 다섯째 아이를 갖게 되는 순간, 이 모든 고정적인 가정의 모습이 사라지게 된다. 
그들의 다섯째 아이, '벤'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아이, 심지어 부모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부모가 두려워하게 되는 아이로 묘사된다. 원시인이 격세유전을 통해 다시 태어난 듯한 이 아이는 부모, 형제, 친척들로 외면받고 시설로 보내져 약물과다에 의해 곧 죽을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이 아이의 어머니인 헤리엇은 두렵지만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아이를 되찾아온다. 그녀의 결정으로 형제들과 남편, 그녀의 어머니, 그녀 자신의 생은 더이상 정상의 범위 돌아오지 못한다. 소통할 수 없는, 이해할 수도 없는, 더더군다나 사랑할 수도 없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 
이 소설은 우리가 가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헤리엇.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숨겨진 아이들. 이러한 가치관을 조장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속에서 우리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절망과 아픔들을 꾹꾹 눌러담아 숨겨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사회에서 주입된 가정의 고정관념에 의해 가정에서의 당연하게 발생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밀폐시켜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사랑할 수 없음에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 꿈꾸지 않았음에도 인정해야 하는 것들을 이제 밖으로 꺼내서 서로 위로할 수 있다면, 이제.

2012년 3월 19일 월요일

지드의 "새로운 양식" 중

내가 이미 이 지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내 입술이 이 지상의 이슬을 마시지 못하게 될 때 태어날 그대 - 어쩌면 훗날 나의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를 그대 -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대를 위해서이다. 아마도 그대가 산다는 것에 대하여 충분한 경의를 느끼지 못할 것이기에, 그대의 삶이라고 하는 그 경탄할 만한 기적을 제대로 찬탄하지 못할 것 같기에 말이다. 가끔 내게는, 그대가 나의 목마름을 가지고 물을 마시려는 것만 같고, 그대로 하여금 저 다른 존재를 애무하며 그에게로 쏠리게 하는 것은 이미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욕망인 것만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저마다의 동물은 한 뭉치의 기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존재하기를 좋아하고 모든 존재는 기뻐한다. 그 기쁨이 단맛이 들면 그대는 과일이라 부르고 그 기쁨이 노래가 되면 새라고 부른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하여 태어났음을 물론 자연의 모든 것이 가르쳐주고 있거늘, 식물이 싹 트게 하고 벌집에 꿀을 채우고 인간의 마음에 선의를 채워놓는 것은 모두가 쾌락을 향한 노래인 것이다.

나는 시대와 별 접촉이 없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들의 유희가 내겐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나는 현재의 저 너머에 관심이 있다. 나는 더 멀리 간다.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사활이 걸린 것처럼 보이는 것이 거의 이해가 되지 않게 될 어떤 시대가 오게 된다고 예감한다.

변덕스러운 영혼이여, 서둘러라! 가장 아름다운 꽃은 또한 가장 빨리 시든다는 사실을 알라. 그 꽃의 향기를 어서 빨리 허리 굽혀 맡아보라. 영원불멸인 것에는 향기가 없는 법.

비틀거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이론의 난간에 꼭 매달린다. 이론은 이론이고 이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냥 걷는 것은 싫다. 도약하고 싶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나의 과거를 밀어내고 부정하고 싶다. 더 이상 약속 같은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나는 너무 많은 약속을 한 것이다! 미래여, 나는 마음 변하면서 너를 사랑하고 싶다!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문제들'은 물론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완전히 해결 불가능한 것이다. - 그러니 그 해결에 따라 우리의 결정을 내리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그냥 지나가 버리자.
(중략)
이 거추장스러운 짐을 얼른 수화물 보관소에 맡겨놓자. 그리고 에두아르처럼 곧 그 보관증을 잃어버리고 말자.

오랫동안 나는 신이라는 말을 나의 극히 모호한 관념들을 부어 넣는 일종의 쓰레기통으로 사용해 왔음을 인정한다.......(중략)......내가 신을 생각하기를 멈추면 신은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이었다.

어떤 진화론자가 과연 애벌레와 나비 사이에 그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상정하겠는가 - 그게 바로 똑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말이다.
(중략)
그러나 인간이란 항상 있는 기적에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중략)
"너 자신을 알라." 위험한 동시에 추악한 격언이다. 스스로를 관찰하는 자는 누구든 발전을 멈춘다. '자신을 잘 알려고' 애쓰는 애벌레는 절대로 나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행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젊은 시절에 내가 할 수도 있었고 했어야 옳았으나 모랄 때문에 하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후회다. 지금은 더 이상 신뢰하지도 않는 모랄, 자신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 긍지를 느낄 정도로 나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이면서도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좋다고 믿었던 그 모랄 때문에 말이다.
(중략)
오늘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몇 가지 유혹에 졌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다른 유혹들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 유혹들이 이미 매력을 잃고 나의 사고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청춘을 어둡게 만든 것을, 현실보다 공상을 더 좋아했던 것을, 삶에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오!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것, 그러나 우리가 할 수도 있었을 모든 것...... 하고 이승을 떠나려는 순간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했어야 마땅한 모든 것, 그러나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것! 체면 걱정 때문에, 기회를 기다리다가, 게을러서, 그리고 "제길! 시간이 좀 먹나." 하는 생각만 줄곧 하고 있다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매일 매일,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 매 순간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결심, 노력, 포옹을 뒤로 미루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오! 뒤에 올 그대는 보다 민첩해져서 순간을 놓치지 말라!하고 그대들은 생각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적 지점에, 시간 속의 이 정확한 순간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 나는 두 팔을 한껏 길게 뻗어본다. 나는 말한다. 여기가 남쪽, 여기가 북쪽....... 나는 결과다. 나는 원인이 될 것이다. 결정적인 원인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하나의 기회!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싶다. 나는 내가 왜 사는가를 알고 싶다.

남에게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최악의 비겁한 짓들을 하게 된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공포감을 실제로 불러일으킬 만큼 두려운 괴물은 극히 드물다.

나는 인간을 축소시키는 모든 것을 미워한다.

그들의 지혜?......아! 그들의 지혜라면 대단한 양 떠들어 대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만사를 경계하고 위험을 피한 채 최소한으로 사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의 충고에는 항상 굳어지고 괴어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오직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뿐이다......(중략)...... 그렇다, 내가 비록 등불을 별이라고 인정하지 않아도 나의 하늘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내가 유령들에게 인도받지 않고 오로지 현실만을 사랑한다 해도 나의 의지는 결코 약해지지 않는다.

선별하는 미덕.

-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나는 사람이 죽는 걸 봤어...... 내가 본 바로는 대개 죽기 직전, 단말마의 고통이 지나고 나면 자극에 대한 감각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있지. 죽음이 푹신한 장갑을 끼고 달려드는 거야. 반드시 잠이 들게 하면서 목을 조이는 법이야.
(중략)
그렇지만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 죽음이란 끔찍한 거야. 그런 사람에게 종교는 때를 만났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지. "걱정하지 마라. 진짜는 저쪽 세상에서 시작인 거야. 넌 거기 가서 보상을 받게 돼." 그러나 살아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이승'인 것이다.

동지여, 아무것도 믿지 말라. 증거가 없이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말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입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형편없는 종교라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하나같이 열광적인 신념들을 불러일으켰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은 죽고,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 알려는 욕망은 의혹에서 생겨난다. 믿는 것을 그치고 앎을 얻도록 하라. 사람은 증거가 없을 때에만 강요하려 드는 것이다. 자기를 과신하지 말라. 강요당하지 말라. 

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서는 눈뜬장님이고 그들이 어쩌다가 자연을 바라보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관찰할 줄은 모르니 말이다.

그대가 자양분을 찾아야 할 곳은 다름 아닌 현실 속이다. 벌거숭이로 굳세게 일어서라. 막이 찢어지도록 터뜨려라. 모든 후견인들에게서 떨어져라. 곧게 자라기 위하여 용솟음치는 수액의 충동과 태양의 부름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중략)
그대의 조상들이 먹고 소화한 것을 다시 먹으려 들지 말라. 아비의 그늘 밑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퇴화와 위축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듯이 플라타너스나 단풍나무의 날개 달린 씨앗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라.

고개 숙인 이들이여, 자 이제 고개를 들어라! 무덤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눈길이여, 고개를 들어라! 텅 빈 하늘을 향해서가 아니라 저 대지의 지평선을 향하여 일어서라. 굳세게 갱생하여, 죽은 자들의 악취가 진동하는 언저리를 박차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동지여, 그대의 발길이 가는 그곳으로, 그대의 희망이 부르는 대로 전진하라. 과거의 그 어떤 사상에도 매이지 말라. 미래를 향하여 몸을 던져라. 더 이상 시를 꿈의 영토 속으로 옮겨놓지 말라. 현실 속에서 시를 읽어내어라. 시가 아직 현실 속에 있지 않거든 그 속에 시를 심어라. 

나는 순간이 가져오는 것을 본다. 그 순간이 내게서 앗아가는 것을, 그리고 내가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해 본다. 뱃머리에 서 있는 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오직 광대한 공허뿐......

나는 다 살았다. 이제 그대 차례다. 이제부터 자네에게서 나의 젊음이 연장될 것이다. 내 그대에게 권능을 넘겨준다. 그대가 내 뒤를 잇는 것을 느낀다면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울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희망을 건다.

동지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말라.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굳게 믿어라.

- 지드가 28세때 발표했던 '지상의 양식' 이후, 66세 발표한 '새로운 양식'의 도입부를 읽고 나서 혼란스러워졌다. 이 세상에서의 열렬한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작가의 태도가 신에 대한 문제와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이타성에 관한 문제를 일부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점점 읽어나감에 따라 '현실에의 인간 존재의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하는 지드의 언어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 작품이 수년간의 노트를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모순된 작가의 글이 인간으로서의 의구심과 흔들림을 볼 수 있는 부분으로 내겐 받아들여진다. 흔들리며, 불안함을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열렬히 찬미하고, 맨발로 땅을 딛는 그의 글이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오늘도 이 창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있음을, 그 순간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음을, 그러한 순간을 선택한 나에게 용기를 주는 작품.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지드의 작품과 거의 동시에 읽었다. 그토록 서로 다른 접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같은 가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일까?)

2012년 3월 17일 토요일

지드의 "지상의 양식" 중

......우리의 나아갈 길들이 확실치 않아서 우리는 일생동안 괴로워했다. 그대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생각해보면 선택이란 어떤 것이든 무서운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시선 속에 있을 뿐 바라보이는 사물 속에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평화로운 나날보다는, 나타나엘이여.차라리 비장한 삶을 택하라. 나는 죽어서 잠드는 휴식이외의 다른 휴식을 바라지 않는다. 

기다림! 무엇의 기다림이란 말인가? 하고 나는 외쳤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 무엇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나는 하늘이 새벽의 기다림으로 전율한는 것을 보았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오, 나타나엘이여 그대의 머리가 피로한 것은 모두 잡다한 그대의 재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그 '모든 것들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리하여 그대는 삶만이 유일한 재산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나타나엘이여, 나는 더이상 죄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 그대에게 '순간들'을 말해 주리라. 그 순간들의 '현존'이 얼마나 힘찬 것인지 그대는 깨달았는가? 그대가 그대 생의 가장 작은 순간에까지 충분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 순간이, 이를테면 지극히 캄캄한 죽음의 배경 위에 또렷이 드러나지 않고서는 그런 기막힌 광채를 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대는 깨닫지 못하는가?
만약 무슨 일이든 그것을 할 시간이 내게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증명되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중략)...... 그리고 이 생을 살고 나서 내가 밤마다 기다리는 잠보다 좀 더 깊고 좀 더 많이 망각하는 잠 속에서 쉬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내가 하는 일이란 그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밖에 못 될 것이다.

새벽은 왔으나 바다는 가라앉지 않았고, 육지는 아직 멀어 출렁거리는 수면 위에 나의 상념은 비틀거렸다.
온몸에서 가시지 않는 파도의 멀미, 저 넘실거리는 장루에 무슨 상념을 붙들어 맬 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파도여, 보이는 것은 저녁 바람에 흩어지는 물뿐인가?......(중략)......물결은 지나가고 눈은 그것들을 분간하지 못한다. 형상도 없이 동요하는 바다여, ......(중략)...... 오직 형태만이 돌아다닐 뿐. 물은 휩쓸렸다가 파도와 헤어져 결코 함께 가는 법이 없다. 모든 형태는 지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같은 존재로 나타날 뿐이다. 각각의 존재를 통하여 형태는 계속되다가 다음에는 그 존재를 포기한다. 나의 영혼이여! 어떠한 사상에도 얽매이지 말라. 어느 사상이든 난바다의 바람에 던져버려라. 바람은 네게서 그것을 걷어내 가리라. 너 자신이 사상을 하늘에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부단히 움직이는 물결들이여! 나의 사상을 그처럼 비틀거리게 만든 것은 너희들이다! 너는 아무것도 파도 위에 세울 수 없으리라. 어떤 무게로 눌러도 파도는 달아나고 만다.

시간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선택이 내게는 고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르지 않은 걸 버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시간이 좁다는 것과 시간이 하나의 차원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끔찍한 마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폭이 널따란 어떤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것은 한낱 선에 지나지 않았고, 나의 욕망들은 그 선 위를 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 짓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이것을 하면 곧 저것이 아쉬워져서 번번이 애타는 마음으로 두 팔을 벌린 채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중략)......선택이란 영원히, 언제까지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걸 의미했다. 
...... 그것밖에 소유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나는 두려운 것이다.

봄, 대지의 냄새, 들판에 자욱이 돋아나는 풀, 강 위에 서리는 아침 안개, 그리고 초원에 번지는 저녁의 습기. 나는 수많은 도시를 지나갔고 그 어디에서도 발길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였다. 지상에서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부단한 유동성들을 뚫고 영원한 열정을 몰아가는 자는 행복하다고. 나는 미워했다. 가정을, 가족을, 사람들이 휴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곳을. 그리고 변함없는 애정, 일편단심의 사랑, 사상에 대한 집착 - 올바름을 훼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대기 상태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방랑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더 이상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바람은 밖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가정이여, 나는 너를 미워한다!

'이 매혹적인 아침, 이 안개, 이 빛, 이 서늘한 공기, 네 존재의 고동, 네가 이런 것에 송두리째 너를 바칠 줄 안다면 그것들은 너에게 얼마나 더 큰 감동을 줄 것인가. 너는 그 속에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네 존재의 가장 귀한 부분이 갇혀있는 것이다. 너의 아내, 너의 아이들, 너의 책들, 너의 공부가 그 귀한 부분을 놓아주지 않으 채 네가 신과 접촉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너는 생의 벅차고 온전하고 직접적인 감동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그 밖의 것을 잊어버리지 않은 채? 네 사고의 습관이 너를 방해하고 있다. 너는 과거에 살고 미래에 살고 있어서 아무것도 자연 발생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중략)......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네가 알기만 한다면, 너는 이 순간 아내도 자식도 잊어버리고, 지상에서 홀로 신 앞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기억하고, 마치 너의 모든 과거, 사랑, 지상의 모든 관심사를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난다는 듯 떠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다.

쓰러진 나무들 위에 내리는 가을빛이 찬란했다. 그 광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나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기서 늙음을 보았던 것이다.


내가 나의 신변에 일어난 사건들 덕택에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사건들이 나에게 유리하긴 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나의 행복이 부유한 재산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지도 말라. 지상에 아무런 집착도 갖지 않는 나의 마음은 항상 가난하였다. 그러므로 죽기도 수월할 것이다. 나의 행복은 열정으로 이룩된 것이다.


나날이 있고 또 다른 나날이 있다. 수많은 아침과 저녁이 있다. 
무감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새벽이 되기도 전에 일어나는 아침들이 있다. - 오! 가을의 회색빛 아침! 휴식을 취하지 못한 영혼이 지칠 대로 지치고 타는 듯한 불면에 시달린 나머지 못 더 자고 싶어 하며 죽음의 맛을 헤아려 본다.

메날크여, 떠남에서 그대가 그토록 좋아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는 대답한다. - 미리 느껴지는 죽음의 맛이라고

떠나자! 그리고 그냥 아무 곳이서나 발길을 멈추자!

나는 어슬렁거리며 떠도는 모든 것을 스칠 수 있기 위하여 스스로 어슬렁거리며 떠도는 자가 되었다. 어디서 따뜻하게 몸을 녹여야 할지 모르는 모든 것에 대하여 나는 따뜻한 정으로 반해 버렸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열렬하게 사랑했다.

생각이 많아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의 얼떨떨한 머리. 떠나야만 하는 장소들. 조그만 방. 여기서 잠시 동안 나는 머리를 기대고 쉬었다. 나는 느꼈다. 생각했다. 밤을 세웠다. - 사람들은 죽는다! 어디서든지. (살기를 그만두게 되면 거기가 곧 아무 데나이고 아무 데도 아닌 것이다.) 살았기에 나는 여기에 있었다.
두고 떠난 방들! 결코 한 번도 슬픈 것이기를 바라지 않았던 출발의 황홀함. 열광은 언제나 여기 이것을 지금 소유하는 데서 왔다.
그러므로 한순간 여기 이 창문에 기대어 내다보자......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지금 이 순간이 떠나야 하는 순간 직전의 순간이기를 나는 바란다....... 거의 끝나가는 이 밤 속에서 행복의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몸을 기울이기 위하여.
참한 순간이여, 광대한 창공에 여명의 물결을 부어라......

가을날 벌판에 소나기를 맞으며 외따로 서 있는 나무. 벌겋게 물든 잎새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깊이까지 젖은 땅속에서 물이 오랫동안 그 뿌리를 적셔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신의 계명들이여, 너희가 나의 영혼을 병들게 했다.
너희는 내가 목을 축일 수 있는 유일한 물 주위를 벽으로 막아놓았다.

멋들어진 집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집에서도 나는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닫히는 문들이, 함정들이 두려운 것이다. 정신을 가둔 채 닫히는 밀실.


(나타나엘이여, 이 새로움을 찾는 극성스러운 욕망을 그대에게 설명할 수는 없다.......(중략)......매일 같은 무어인의 카페를 찾아가 저물어가는 시간을 보낸 것은 저녁마다 달라지는 각 존재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였고 시간이 아주 작은 공간을 서서히 변화시키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흐느낌. 꼭 다문 입술. 너무나  큰 확신들. 상념의 고뇌. 내 무어라 말할까? '진정한 것들' -타자- '그의' 삶의 중요성. 그에게 말할 것......

나타나엘이여,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거기에 만족하지 말라. 너의 진실이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찾아진다고 믿지 말라. 그 점을 무엇보다도 부끄럽게 생각하라. 내가 너의 양식들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너는 그걸 먹을 만큼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의 침대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너는 거기에서 잠잘 만큼 졸리지 않을 것이다.
내 책을 던져버려라. 이것은 인생과 대면하는 데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자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너 자신의 자세를 찾아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하지 말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 - 글로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면 글로 쓰지 말라. 너 자신의 내면 이외의 그 어는 곳에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리고 초조하게 혹은 참을성을 가지고 너 자신을 아! 존재들 중에서도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라.


-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으며 그의 표현과도 같이 잘 익은 과일을 나무에 손을 뻗쳐 따 한 입 깨물어 그 과즙이 목을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너무도 적극적이고 열렬하여 벼랑에서 떨어질듯한 불안감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듯 느껴진다. 그는 인생의, 삶의 열쇠를 외부로부터 빼앗아 각자의 개인의, 우리의, 나의 손에 쥐어준다. 삶의 주체로서, 주인으로서, 내가 선택한 삶이 어디로 향하든지 간에 그 책임을 질 인간으로서, 또한 그 여정을 인식하고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서, 받아쥔 열쇠를 손을 펴 대면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과연 내게 있을까?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진다. 인간에게 주어진 그 초라하고도 위대한 순간을 이 눈부시게 풍성한 지상이라는 곳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우리에게 다시 각성시켜준 지드에게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