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5일 월요일

주제 사라미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중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황소들이 이미 경험한 것보다 더 큰 지옥은 있기 힘들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양쪽에서 황소들의 몸에 매여 있는, 여러 종류의 불꽃놀이 폭죽에 불이 붙여지고, 상당한 시간 동안 폭죽이 폭발하여 투우장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동안, 황소들은 산 채로 구워지고 있었다. 주앙 5세와 그의 신하들이 그 비참한 죽음에 갈채를 보내는 동안, 광분한 그 저주받은 짐승들은 비명을 지르며 투우장 안을 이리저리 내달렸다. 황소들은 살육당하면서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다른 누군가를 죽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광장에서는 불에 탄 살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 냄새는 종교 재판의 성대한 비비큐에 코가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역거움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게다가 황소들은 결국에는 누군가의 식탁에 오르는 것으로 끝장이 나서, 좋은 용도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반면 말뚝에 묶인 채로 불에 탄 유대인의 유해는 그가 남길 수 있는 자산의 전부였다.

- 사라미구의 독특한 해학적인 문장으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어 내는 그의 천재성은 언제나 나의 경탄을 불러 일으킨다. 믿음이 아무런 믿음이 없는 것보다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명분을 주는 듯 하다.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 역사에 저지른 죄악의 양을 보면 말이다.  때론 무언인가에 대한 "믿음"이 혹은 그 "믿음을 지키려는 욕망"을 가진 자가 같은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잔혹함이 이성과 상식의 선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보면 몸서리가 처진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믿음을 가진 자"가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러도 그 "믿음"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이 정당화되리라는 그 엄청난 착각에 대한 무모한 "믿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중에서

천성적으로 소심한 소냐는 예전에도 자기가 누구보다도 더 쉽게 파멸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든 대가를 치르는 일 없이 그녀를 쉽게 모욕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든 고분고분하게 대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느낀 절망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모든 일을, 심지어 이런 일마저 아무 불평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순간은 너무나도 힘겨운 것이었다.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어 누명을 벗었는데도, 처음 느꼈던 경악과 충격이 사라지고 이제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깨닫게 되자, 의지할 데 없이 나약한 자신의 처지와 모욕감이 그녀의 심작을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견디다 못해 방을 뛰쳐나가 자기 집으로 뛰어갔다.

- 등장인물 중 한 명도 진심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죄와 벌" 중, 동의가 가는 한 부분.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대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님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로 타인하게 잔인하고 몰인정하게 대하는 것을, 누구도 그럴 권리를 그들에게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4월 3일 일요일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 중에서

"정풍이야".
정풍이 뭔진 몰라도 녀석이 좋아하는 바람인 건 분명했다. 축축하고 더러운 녀석의 운동화가 경쾌하게 빗속을 날았다. 푸른 셔츠도, 작업반 바지도, 양말도 날아갔다...... (중략)
승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늘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마주 선 우리 사이의 1미터는 단순한 물리적거리가 아니었다. 건너갈 길 없는 차원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같은 세계에 함께 존재한 적이 있다는 증거는 만식 씨의 헬멧 뿐이었다.......(중략)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는 누구일까. 나, 나는.......(중략)
승민은 손을 내밀었다. 머뭇 머뭇 맞잡았다. 손을 떼자 손바닥에 승민의 시계가 놓여 있었다. "이제 빼았기지 마." 승민의 눈이 고글 속에서 웃고 있었다. "네 시간은 네 거야."
시계를 쥐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걸었다.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절벽 끝까지 단숨에 뛰었다. 숨을 턱 끝으로 몰아내며 조명탄 마개로 힘껏 쳤다. '훅'소리와 함께 불꽃이 올라왔다. 나머지 하나에도 불을 붙인 뒤 양손에 나눠 쥐고 승민을 향해 돌아섰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뿌연 연기가 하늘 로 치솟았다. 오렌지 빛 섬광이 나를 가뒀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주변이 환해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승민이 오고 있었다. 헬멧의 전등을 끄고 먹빛 땅거미를 통과해 오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질주해오고 있었다. 노란 캐노피가 승민의 머리 위에 벽을 세우고 따라왔다. 5미터, 4미터......
승민의 발이 지상에서 떨어졌다. 허공을 디디며 가볍게 떠올랐다. 수리호가 뿜어내는 상승기류를 타고 거침없이 하늘로 비상했다. 비상의 한 지점에서 글라이더가 반 바퀴를 돌았다. 일순, 글라이더 주변이 환해졌다. 승민이 헬멧의 전등을 켠 것이었다. 불빛은 아주 잠깐 거기 머물렀다. (중략)
몸이 떨려왔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떨림이었다. 목과 가슴사이에선 불처럼 뜨거운 것이 오르내렸다. 그 뜨거운 한기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날아간 자에 대한 '경외', 갈 곳이 없는 자의 '절망'.
절벽 끝에 누웠다. 하늘이 까맸다. 별들은 내게 너무도 멀었다.

- 중략 -

석양의 잔광이 하늘을 태우고 있었다. 저 불길이 가시고 나면 저녁 별이 뜰 테지.
하모니카 소리가 가슴을 두들겼다. 심장 안에서 피가 요동쳤다. 몸의 움직임도 피의 요동만큼 격렬해졌다.
넌 누구냐?
승민이 물었다.
알아맟혀 봐.
내가 대답했다.
새야?
아니.
비행기?
아니.
그럼 누구?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 웃음과 눈물과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던 소설,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청년의 극단적인 다른 성향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에의 동경, 삶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 등이 고스란히 전해졌던. 승민의 무모하면서 끊임없는 자유로의 도전을 지켜보면서 삶에서 회피했던 수명이 자신의 삶에 대해 새로운 발걸음을 디디게 되는, 또 인간이기에 독자로서 같은 감정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멋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