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5일 일요일

장 그르니에의 "섬" 중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을 말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있음을 체험했으니 말이다.

몸과 혼으로 알려하지 않고 지능으로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악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현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다 깊고 더 심각한 문제였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내게도 어떤 이상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심>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겨가게 된다. 나는 유희에 말려들고 덧없는 것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절대를 찾는다. 입을 다물고 무시해 버리지는 않고 나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계속 불러 일으키고 있다. 상표가 다른 두 자루의  펜을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참혹하다.......(중략).......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덜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중략)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노라면 이런 가득함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즉 그냥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
(중략)
우리들에게는 마땅히 해야할 일이란 없으며 우리들의 입장이란 성립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갖 수증기라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도시를, 어떤 짐승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여자를, 어떤 친구를 사랑하는 것 - 우리는 머릿속으로 이런 것을 서로 구별하려고 애쓰고, 마음속으로는 이런 것이 다 같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규칙 따위와는 상관없는 활동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어내고 규칙이 정해져 있는 활동에는 규칙을 없애버린다. 가면을 벗어 내팽개친다. 그 가면 대신에 다른 가면을 쓴다. 나중 것이나 먼저 것이나 매한가지이고 먼저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중 것도 중요하다.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ㅇ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음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사상의, 그의 마음의 무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



비록 내가 그것에서 헤어난다 한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아니 과연 이제 내가 그것에서 헤어날 수 있기나 한가? 내게는 그것이 아쉽지만 그것은 나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세계는 저절로 주어지는 구경거리이며 나는 그 구경거리의 장면들이 현실이며 그 배우들이 현실임을 믿는다. 세계는 오직 내가 깨어 있는 순간에만 제가 부재함을 알린다........(중략)....... 내가 잠들면 나는 <그것>에 가까워지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려 한다. 나는 돌이 우물 속 깊이 떨어지듯 그의 속으로 떨어진다.


-알베르 카뮈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장 그르니에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책. 그가 담고 있는 사상의 무게가 존재의 허리가 휘도록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그르니에는 그 무거운 부조리함을 부드럽게 받아들여 가볍게 승화시키고 있다. 그는 꿰뚫어보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그의 글 속에 삶의 공허함을, 부조리함을 포근하게 담는다. 그래서, 이 짧은 글이 그토록 매력적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