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1일 금요일

말라르메(Mallarme)의 시 중 -민음사 '목신의 오후'에서 발췌-

<창>

슬픈 병원에 비쳐서,
텅빈 벽, 권태로운 대십자가를 향해
일상의 백색 휘장처럼 피어오르는
역한 내음의  향연에 지쳐서,
빈사의 환자는 늙은 등을 추켜 세우고

몸을 이끌고 다가가
메마른 얼굴의 흰 수염과 뼈를,
곱고 맑은 광선이 잡아당기는 창에 댄다.
썩은 환부를 덥히려는 것이 아니라
돌 위에 내리는 햇빛을 보려 함이다.

젊었을 적 그의 보물, 그 옛날 동정의
피부를 빨아들이려 찾아가듯,
열에 뜬 입, 푸른 하늘에 굶주린 입으로
오래 오래 쓰디쓰게 입맞춤하며
황금빛으로 데운 유리창을 더럽힌다.

꿈에 취하여, 이제 그는 살고 있다.
죽음의 유약의 몸서리침도, 탕약도,
강요당한 침대도, 기침도 모두 잊는다.
저녁이 기와 지붕들 사이에 피를 흘릴 때,
빛이 넘치는 지평선에 눈을 보내고,

추억이 가득 차 오히려 무심하게
갈래 갈래 찢기는 야성의 번갯불을 얼러 잠재우며,
보는가, 백조같이 아름다운 황금 노예선들이
향기 젖은 분홍빛 강 위에 잠자는 것을.

이처럼, 행복의 의자에 깊이 파묻힌
모진 마음의 인간이 역겨워,
오직 살아 있는 것은 식욕,
젖 먹이는 아내에게 가져다 주려고 오물을 찾아 안간힘을 쓰는 인간이 역겨워.

나는 도망친다, 나는 모든 창에 매달려 삶에게 등을 돌리고 싶다, 하여,
순결한 <영원>의 아침이 금빛으로 물들이는
구원의 아침 이슬로 축복받고 씻겨서
그 창 유리 속에 내 얼굴을 비치면

나는 천사가 된다! 그리고 나는 죽어
--- 창 유리는 예술이어라, 신비여라 ---
<아름다움>이 꽃피는 태고적 하늘에
꿈의 왕관을 쓰고
나는 새로 태어나고 싶다!

그러나 오호라! 속세가 주인이라,
악몽은 때때로 이 확실한 피난처까지
찾아와 내 속을 뒤집고
어리석음의 더러운 구토가
푸른 하늘 앞에서도 코를 막게 한다.

오, 쓰디쓴 맛을 나는 나여,
모욕받은 괴수처럼 수정을 부시고 깃털 없는 내 두 날개로 도망칠 방법이 있는가
--- 영원 속에서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바다의 미풍>

오!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노라.
떠나 버리자, 저 멀리 떠나 버리자.
새들은 낯선 거품과 하늘에 벌써 취하였다.
눈매에 비친 해묵은 정원도 그 무엇도
바닷물에 적신 내 마음을 잡아 두지 못하리,
오, 밤이여! 잡아 두지 못하리,
흰빛이 지켜 주는 백지, 그 위에 쏟아지는
황폐한 밝음도,
어린아이 젖 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리! 선부여, 그대 돛를 흔들어 세우고 닻을 올려
이국의 자연으로 배를 띄워라.
잔혹한 희망에 시달린 어는 권태는
아직도 손수건의 그 거창한 작별을 믿고 있는지.
그런데, 돛들이 이제 폭풍을 부르니
우리는 어쩌면 바람에 밀려 길 잃고
돛도 없이 돛도 없이, 풍요한 섬도 없이 난파하는가
그러나, 오 나의 가슴아, 이제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어라.


<백조>

순수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오늘은
취한 날개를 쳐서, 떠나 버리지 못한
비상의 투명한 빙하가
서릿발 아래로 위협하듯 찾아드는
이 모진 잊혀진 호수를 찢어 줄까!

흘러 간 시절의 백조는 이제 기억한다.
모습은 찬란하나, 불모의 겨울 근심이
서슬 푸르게 번쩍거리도록
찾아가 살아야 할 악사를 노래하지 못한 죄로, 헤어나려고 애쓰나 희망이 없는 저의 신세를.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저에게 내리는
이 백색의 죽음 같은 고뇌를,
새는 저의 목을 다 늘여 빼고 뒤흔든다.
그러나 저의 날개깃이 매여 있는
이 땅의 혐오를 어이 뒤흔들랴.

저의 순수한 빛이 이곳에 지정해 준 유령의 모습,
무용한 유형 속에서, 백조의 신세로 하여 얻어 입은 차디찬 모멸의 꿈에
가만히 멈추어 몸을 맡긴다.



- 비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생명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유려한 문장에 비수를 꽂듯 깃들어 있는 말라르메의 시를 대하면서, 원어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현실에 매여 있는 이상을 추구하는 정신은 항상 떠남과 비상을 갈망하나 벗어날 수 없다. <창>의 빈사의 환자가 갈망하는 아름다움과 비상, <바다의 미풍>에 드러난 떠남에 대한 열망, <백조>에 드러난 헤어나려고 애쓰는 날개짓에 매여 있는 그 몸부림에, 말라르메가 원했던 그 이상에 대한 갈구가 문장의 비참한 아름다움 속에서 울부짖는 것 같다. 위대한 시인의 글은 어떤 세월을 지나 읽히던 간에, 잠잠했던 가슴을 뒤흔들어 영혼에 소름을 돋게 한다.

2014년 2월 17일 월요일

주제 사라미구의 '동굴' 중

그는 사소한 일들을 하며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채웠다. 그 중에는 불필요한 일도 있었다. 가마를 꼼꼼히 살펴보고 청소하는 일 같은 것, 그는 천정에서 바닥까지, 안에서 바깥까지, 이음매와 타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가마를 청소했다. 마치 사상 최대 규모로 불을 지필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는 다 똑같아요. 다른 건 시간이지. 하루가 끝날 때면 항상 이십사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져요. 그 시간 속에 아무것도 없을 때도, 하지만 아버지의 하루나 아버지의 시간은 그렇지 않죠.

개들이 어떤지 알잖니, 주인이 못되게 굴어도 주인은 주인이지. (중략) 저 적당한 이름이 있어요. 그게 뭔데. 파운드(Found).

우리 개가 누군가한테 발견되려고 일부러 길을 잃은 거라면, 우리도 찰흙 속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찾을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그건 모험이야, 실패할지도 몰라.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일도 실패하는 경우를 봤잖아요.

권위주의적이고, 사람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모호하고, 때로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는 흔해빠진 말, 농담처럼 지혜의 샘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그런 말들은 악성 전염병이다. 지금까지 지구를 강타한 것들 중에서 제일 악질인 전염병. 혼란에 빠진 사람에게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마치 자신을 아는 것이 쉬운 일인 것처럼. 모든 것에 무심한 사람에게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말한다. 매일 이 말을 뒤집어 버리며 즐거워하는 잔혹한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우리는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라고 말한다. 마치 느슨하게 감겨 있는 실의 끄트머리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그 끝을 계속 잡아당기기만 하면 반대편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실이 얽히지도 않고 헝클어지지도 않아서 매끄럽게 계속 풀려나오는 것처럼. 실이 이렇게 풀려나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여기서 흔해빠진 표현을 한 번 더 써도 된다면, 인생이라는 실타래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중략) 첫걸음이 실의 끝자락처럼 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첫걸음은 길고 고통스럽고 느린 과정이며, 그 첫걸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첫걸음은 마치 눈면 사람처럼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첫걸음은 첫걸음일 뿐이다. 그 전에 있었던 일은 거의 가치가 없다.

전날은 우리가 지금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하루에 영향을 미쳐, 인생은 마치 돌멩이를 짊어지고 가듯이 모든 전날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지. 짐이 너무 무거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수고가 끝난 거야, 어느 날의 전날이 아닌 날은 마지막 날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동안 책을 읽으면서도 그냥 종이 위에 있는 단어들밖에 읽지 못해. 그 단어들이 빠르게 흐르는 강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걸 결코 깨닫지 못하지. 징검다리는 우리가 반대편 강가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려고 그 자리에 있는 거야. 중요한 건 바로 그 반대편 강가야. 다만. 다만 뭐요. 다만 그 강에 강변이 여러 개가 아니라 두 개만 있다면, 독자들이 각자 자기만의 강변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겠죠, 그러면 우리가 꼭 가봐야 하는 강변은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요.

우리가 시간이 없다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항상 시간을 맞춰서 가거나 시간보다 뒤에 가지만 결코 시간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시프리아노 알고르는 아무것도 아닌 바보취급을 받으면서 이런 모욕을 꼭 참아야 하는 건지, 저 사람들 말이 무조건 옳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저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바로 그렇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개들은 원래 이렇다. 가끔 주인 대신 생각을 해준다.

가끔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말했다. 파운드처럼요. 그래, 개는 저보다 주인을 더 잘 알 걸. 거울에 비친 제 모습도 몰라보잖니. 어쩌면 개의 거울은 그 주인인지도 모르죠, 어쩌면 개가 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은 주인뿐인지도 몰라요.

당장 내일 일도 잘 모르겠네, 그가 말했다. 꼭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아, 한발짝 내디딜 때마다 언제라도 바닥에 넘어져버릴 수도 있지. (중략) 그래, 옛날에는 몇 년씩 걸리던 일이 지금은 몇 주나 며칠 만에 끝나버린다는 게 다를 뿐, 어느 날 미래가 아주 짧아질 거다,

그가 지극히 사악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기회, 즉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전혀 없는데도 무조건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기쁨을 누릴 기회를 잃어버려서 화를 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중략) 기초 응용심리학을 다룬 책을 아무 거나 골라서 행동에 관한 장을 펼치면, 성질 고약한 인간들이 대개는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에게도 이 그릇들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릇들이 다시 필요해지는 날까지 그곳에 계속 숨어 있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아, 우리가 직접 만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것이 현실이든 꿈이든 똑같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자기 손으로 직접 부숴버렸다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책을 선반에 꽂아두거나, 트렁크에 넣어두거나, 먼지가 쌓이고 좀이 슬도록 내버려두거나, 어두운 지하실에 처박아두기도 한다. 몇 년이 지나도록 눈길 한 번, 손길 한 번 주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책은 전혀 개의치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내용물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도록 입을 꼭 닫은 채. (중략) 그러면 마침내 부름을 받은 책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멍청하게 굴지 마라. 내가 일을 끝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종 누군가가 어깨에 손만 올려놓아도 울음이 터질 때가 있듯이, 우리는 순수하게 우리를 반기는 개를 보며 잠깐 동안이나마 세상의 고통, 슬픔, 실망과 화해할 수 있다.

이번에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가 뺨을 타고 흐르는 고통스러운 눈물 몇 방울을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점뿐이다. 그가 오랫동안 꾹꾹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언제라도 터져나올 것 같았던 눈물. 알고 보니 그 눈물은 지금의 이 슬픈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달도 없는 이 밤, 아직 체념을 하지 못해 고독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 고독한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다지 신선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은 파운드가 시프리아노 알고르에게 다가가 그의 눈물을 핥아준 것이었다. (중략) 주인과 개는 극소에 두 시간이 넘도록 머물렀다, 각자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서. 이제는 주인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므로 개가 닦아줄 눈물도 없었다. 어쩌면 이 주인과 개는 세상이 뒤집어져서 모든 것이, 심지어 지금까지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까지도 제자리를 되찾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이 빙빙 돌 것 같아서 감히 가까이 다가가 보지도 못한 창문 두 개와 창백한 가구가 갖춰진 삼십사 층 새 집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뚫고 지나가며 그곳에 뿌리르르 내린 생각은, 앞으로 평생 동안 이곳에 사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상주경비원 마르살 가초의 아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신분이 전혀 없고, 자기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딸 또는 아들 외에는 아무런 미래가 없는 삶이라니. (중략) 인형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인형에 색칠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색칠은 그녀가 해야 할 일었다. 그녀가 입을 크게 벌리고 히죽 웃으면서 혀를 쭉 내민 파운드를 옆에 눕힌 채 뽕나무 밑에서 사나흘 동안 색칠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가능한 말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시프리아노 알고르는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지만, 눈은 계속 감겨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노인이 우는 것만큼 슬픈 일은, 그렇게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은 없다.

공방, 가마, 건조대, 헛간,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들이요, 이것보다 더 큰 공동묘지가 있을까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뭔가를 갖고 있으면서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걸 실천에 옮길 수 없는 기분이 느껴져.

거기서 뭘 보셨는데요, 죽은 사람들은 누구고요. 그 사람들은 우리다,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람들은 우리야, 나, 너, 마르살, 센터 전체, 어쩌면 이 세상 전체일 수도 있고.

살다 보면 자기 몸 하나만 가지고 다녀도 충분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난 돌 의자에 묶여서 벽만 바라보며 여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오늘 아무리 행복하다 해도 내일의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샘의 물로 사막에서 느끼는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없다는 것을.

거기서 나온 다음에 뭘 먹고 살려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중략) 그냥 살다보면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마치 그 흐름에 반항할 힘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강이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고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와요, (중략)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질문이지만 우리는 도저히 그 질문을 무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게 정말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나. 마르살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게 최선의 선택인지 최악의 선택인지 저도 몰라요. 그냥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에요.

난 이미 모든 걸 버렸는걸요. 그 물병을 가슴에 안았을 때 이미 모든 것에 등을 돌렸어요.

비가 내리면 이 인형들은 진흙으로 변할 것이고, 햇빛에 그 진흙이 마르면 흙먼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게 될 운명이다.


- 사라미구의 책들 중,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다. 그의 저작 중 제일 좋아했던 '돌뗏목'보다도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 다시 책장을 돌아가 또 읽고 또 읽게 만든 책.
세상에서 필요 없어져가는 직업을 가진 도자기를 굽는 도공. 그의 생계는 그가 구운 도자기를 받아주는 센터라는 거대한 상업지구처럼 지칭되는 조직에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센터는 도자기를 반품하고 주문을 끊는다. 삼대를 걸쳐서 해오던 일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지게 된 위기를 맞는 나이 든 주인공은, 앞으로 상주 경비원이 될 사위를 따라 센터라는 거대한 상업/주거 컴플렉스에 가서 얹혀 살거나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주인공의 딸인 마르타는 아버지에게 도자기 인형을 만들 것을 제안하고 센터의 주문에 따라 많은 수의 인형을 모든 정열과 기술을 바쳐 제작하는데, 일부 완성품을 가지고 설문조사를 실시한 센터는 어느순간 주문을 취소한다. 헛된 희망에 몇 주를 보낸 나이든 도공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위와 함께 센터에 들어가게 된는데, 어쩔 수 없는 생계와 자본의 덫에 걸린 인간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다. 센터에 들어간 세 사람은 모두 다 삶의 터전을 잃은 듯한 박탈감에서 헤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센터에서 플라톤의 동굴에 묘사된 것도 똑같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본 세 사람은 각자의 결단으로 센터를 나온다. 그들은 앞으로의 생계는 막막하지만 나이 든 도공과 그의 새로운 연인, 임신한 딸과 사위, 개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무모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림자만 바라보고 사는 '동굴'을 떠나 햇빛이 비치는 진정한 삶으로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삶은 그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단순한 줄거리를 벗어나 사라미구가 78세의 나이에 쓴 글에 들어있는 그의 철학과 삶을 꿰뚫어 보는 묘사는 가슴을 절절히 울린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필요 없어져가는 일을 하는 도공 시프리아노 알고르거나 좀더 나은 생계를 보장하는 조직의 덫에 잡힌 경비원 마르샬일 수 있다. 알고르가 느끼는 상실감, 불안감, 박탈감, 늙어감에 대한 슬픔 등은 우리 모두 느끼는 공통적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라미구가 얼마나 구체화해서 전달하는지, 현실과 발전이라는 덫에 스스로 치인 우리들을 얼마나 아프게 찔러대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그릇과 같은 투박하고 진솔한 삶에 들어있는 아름다움들을 어떻게 그렇게 표현해 내었는지... 파운드와 그 주인과의 교감은 완전히 서로가 이해되지 않아도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발전이라는 명목의 현대화와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는지, 우리가 잃은 것들이 과연 얻은 것에 대비 잃을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생계의 보장과 생활의 안위 외에 먼지로 돌아가 운명을 지닌 인간의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한다. 동굴의 그림자를 보는데 익숙해진 인간을 결코 햇빛을 받아들이지는 못하리라. 조금씩 빛을 향해 눈을 돌려야만 진정한 세계를 보고 죽으리라. 돌의자의 묶여 동굴벽을 바라보다 죽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고개를 돌려 동굴 밖을 바라보고 한 발 한 발 옮길 것인가?
사라미구는 현실의 장벽은 외면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우리에게 동굴 밖의 삶을 제시할 뿐이다. 선택은 아마도 각자의 몫이리라. 플라톤의 말대로 동굴의 그림자만 보고 있는 사람을 억지로 동굴밖으로 끌어내려 한다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려 할 것이라는 것처럼. 스스로 깨닫고 걸어나가지 않으면 결코 나갈 수 없는 곳이 플라톤의 동굴이 아닐까?



2014년 2월 9일 일요일

윤동주의 '정본 윤동주 전집', 홍장학 엮음, 문학과 지성사, 중

<황혼이 바다가 되어>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잠기고......

저 ----- 웬 검은 고기 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꼬.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설움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뒹구오...... 뒹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오.


<팔복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아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별똥 떨어진 데' 중>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렸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 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 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반듯이 받들어 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박이 내려 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중략)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북이 어디냐. 아라!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화원에 꽃이 핀다' 중>

한 해 동안을 내 두뇌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일일이 헤아려 세포 사이마다 간직해두어서야 겨우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봄바람의 고민에 짜들고, 녹음의 권태에 시들고, 가을 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의 사색에 졸다가 이 몇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나의 일 년은 이루어집니다.

(중략)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 이상이견빙지 -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 - 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노변에서 많은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윤동주의 정본 전집을 읽으면서, 그의 글을 시간들을 따라 읽으면서, 단편적으로 접했던 그의 시에서 느꼈던 감동과는 조금 다른, 깊은 애잔한 슬픔의 울림이 올곧은 가느다란 의지를 감싸고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젊은 나이의 순절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카뮈와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불행의 시대를 아름다운 슬픔의 문장으로 시간을 초월해 남아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