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3일 수요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중

-'독자에게' 중-
어리석음, 과오, 죄악과 인색에
정신은 얽매이고 몸은 듥볶이니,
우리는 친숙한 뉘우침만 키운다.
거지들이 몸에 이를 기르듯.

-'알바트로스' 중-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물리니,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 중-
<악마>로부터 왔건 <하느님>에게서 왔건 무슨 상관이랴? <천사>이건 <시레네스>이건, 무슨 상관이랴? - 빌로드 같은 눈을 가진 요정이여,
운율이여, 향기여, 빛이여, 오 내 유일한 여왕이여! -
세계를 덜 추악하게 하고, 시간의 무게를 덜어만 준다면!

-'시체' 중-
그때엔, 오 나의 미녀여, 말하오.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썩어문드러져도 내 사랑의 형태와 거룩한 본질을
내가 간작히고 있었다고!

-'심연에서 외친다' 중-
얼어붙은 태양의 차가운 냉혹함.
옛날 <혼돈>의 세계 같은 끝없는 이 어둠,
아, 이보다 더한 공포는 없소.

미련한 잠에 빠질 수 있는
천한 짐승의 팔자가 나는 부럽소.

-'환영, I.어둠' 중-
<운명>이 이미 나를 유배 보낸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굴 속;
(중략)
거기서 나는 음산한 식욕 가진 요리사,
내가 내 심장을 끓여 먹는다.

-'환영, IV.초상화' 중-
그 중 무엇이 남아 있는가? 오 두렵다, 내 넋이여!
남은 건 오직 퇴색한 삼색의 소묘 하나뿐,

그것도 나처럼 고독 속에 스러져가고,
몹쓸 늙은이 <시간>은
날마다 그 거친 날개로 문지른다......

<삶>과 <예술>의 검은 말살자여,
너는 내 기억 속에서 절대로 죽이지 못하리라.

-'독' 중-
아편은 끝없는 것을 더욱 넓히고,
무한을 더욱 늘이며,
시간을 키우고 쾌락을 더욱 파고들어,
우울하고 서글픈 쾌락으로
내 넋을 채운다, 넘치도록 가득.

-'돌이킬 수 없는 일' 중-
당신은 생각나게 한다, 저 따스하고 안개 낀 하얀 날들을,
홀린 마음을 눈물로 녹이는 날들을,
가슴을 쥐어짜는 알 수 없는 아픔에 흔들려
너무 곤두선 신경이 잠자는 정신을 비웃을 때에.

-'흐린 하늘' 중-
저 오래된 지겨운 <회한>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살아 움직이고 꿈틀대며
우리를 먹으며 살아간다, 송장 파먹는 구더기처럼,

-'가을의 노래' 중-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안녕,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빛이여!
내겐 벌써 들린다, 음산한 소리 울리며
안마당 돌바닥 위에 떨어지는 장작 소리.

분노, 미움, 떨림과 두려움, 그리고 강요된 고역,
이 모든 겨울이 이제 내 존재 속에 들어오면,
내 가슴은 지옥 같은 극지의 태양처럼
얼어붙은 붉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리.

-'슬프고 방황하여' 중-
말해봐요, 아가트여, 그대 마음 때때로 날아가는지,
이 더러운 도시의 검은 대양에서 멀리 떠나,
처녀성처럼 푸르고 맑고 또 깊은
찬란하게 빛나는 또 하나의 대양을 향해?
말해봐요 아가트여, 그대 마음 때때로 날아가는지?

-'쾌활한 사자' 중-
나는 유언도 실고 무덤도 싫다;
죽어 남의 눈물을 빌기보다,
차라리 살아서 까마귀떼 불러
내 더러운 해골 구석구석 쪼아 피 흘리게 하리.


우울

내겐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계산서들, 시의 원고와 연애편지, 소송 서류, 연가들,
영수증에 돌돌 말린 무거운 머리타래로
가득 찬 서랍 달린 장롱도
내 서글픈 두뇌만큼 비밀을 감추지 못할.
그것은 피라미드, 거대한 지하 매장소,
공동묘지보다 더 많은 시체를 간직하고 있는 곳.
- 나는 달빛마저 싫어하는 공동묘지,
거기 줄을 이은 구더기들은 회한처럼 우글거리며,
내 소중한 시체를 향해 언제나 악착같이 달라붙는다.
나는 또한 시든 장미꽃 가득한 오래된 규방,
거기 유행 지난 온갖 것들 널려 있고,
탄식하는 파스텔 그림들과 빛바랜 부셰의 그림들만
마개 빠진 향수병 냄새를 맡고 있다.

눈 많이 내리는 해들의 무거운 눈송이 아래
우울한 무관심의 결과인 권태가
불멸의 크기로까지 커질 때, 
절뜩이며 가는 날들에 비길 지루한 것이 세상에 있으랴.
- 이제부터 너는, 오, 살아 있는 물질이여!
안개 낀 사하라 복판에 졸며
막연한 공포에 싸인 화강암에 지나지 않으리;
무심한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지도에서 버림받아,
그 사나운 울분을 석양빛에서만 
노래하는 늙은 스핑크스에 지나지 않으리.

-'우울' 중-
나는 비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같아,

-'시계' 중-
진동하는 <고통>이 두려움 가득한 네 심장에
머지않아 과녁처럼 꽂히고,
(중략)
<지금>은 말한다, 나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더러운 내 대롱으로 네 생명 빨아올렸다!

-'장님들' 중-
아무도 그들의 무거운 머리가 생각에 잠긴 듯
길바닥 쪽으로 숙여진 것을 본 적이 없다.

-'밭 가는 해골' 중-
너희의 등뼈나 껍질 벗겨진
근육의 힘을 다해
파 뒤집는 그 땅에서

무슨 기묘한 추수를 끌어내어,
어느 농가의 광을
채우려 하는가? 말하라.


-'어스름 새벽' 중-
거품 이는 피에 끊기곤 하는 흐느낌처럼,

-'살인자의 술' 중-
아내가 죽어 나는 자유다!
그러니 나는 실컷 마실 수 있다.
돈 한 푼 없이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고함 소리 내 가슴을 찢었지.

-'여행' 중-
얄궃은 운명, 목표는 수시로 바뀌어,
아무데도 없는가 하면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인간>은 결코 지칠 줄 모르는 희망을 품고,
휴식을 찾아 미친놈처럼 줄곧 달린다!


경고자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 있는 자는 누구나
가슴속에 한 마리 노란 <뱀>을 가지고 있어,
그것은 옥좌에나 앉은 듯 자리잡고,
"하고 싶다!" 하면, "안 돼!" 하고 대답한다.

여  사티로스나 닉스들이 지켜보는
눈 속에 네 눈을 잠글라치면,
<이빨>은 말한다: "네 의무를 생각하라!"

아이를 낳고, 나무를 심고,
시구를 다듬고, 대리석을 조각하노라면,
<이빨>은 말한다: "오늘 저녁까지 살 줄 아느냐?"

무엇을 계획하건, 무엇을 바라건,
인간을 한순간도 살지 못한다.
이 견딜 수 없는 <독사>란 놈의
경고를 받지 않고는.

-'심연' 중-
파스칼은 심연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늘 붙어다니는 심연.

'이카르의 한탄' 중-
창녀의 정부들은
배부르고 편하고 행복하겠구나;
그런데 나는 구름을 껴안았다가 
팔이 부러졌다.

-25년간에 걸쳐 단 한 권의 시집을 낸 보들레르, 실어증에 걸린 채로 46세의 나이로 참담한 생을 마감한 천재의 시들은 너무도 저돌적이다. 그 자신이 말한듯이, ("이해받지 않는 데에, 또는 극히 조금밖에 이해받지 않는 데에 어떤 영광이 있다면, 나는 이 조그만 책에 의해 대번에 그 영광을 획득했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조금의 허풍도 없이, 말할 수 있다.") 그의 글은 아무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글은 아니다. 오히려 고독한 영혼들이 어둠을 감수하고라도 아름다움을 찬미하고자하는 열망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일 것이다.
그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죽음'의 테마는 그의 삶에 대한 열망을 더 강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삶과 예술을 결국 사라지게 만드는 구더기들, 시간을 그는 증오했다. 그의 시집의 제목에도 보여지듯, 그가 추구하는 바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다.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가는 괴물이고, 시간은 그의 하수인이다. 생전에 얻지 못한 명성을 사후에 얻었다. 그가 증오했던 '거친 날개로 문질러 사라지게 만드는 시간'이 이번엔 그에게 반대로 작용했다. 과연 그는 무덤에서 기뻐할까?
그의 섬뜩한 문구에서도 그가 추구한 아름다움을 본다. 그것은 화려한 비단구렁이의 관능적인 자태를 몰래 엿보는 듯한 등골이 서늘한 아름다움이다. 그는 이미 인간의 삶의 허무를 꿰뚫어 보고 이를 달랠 수 있는 하나의 길, 또한 인간이 가진 유일무이한 능력인, '미의 관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태양은 그의 시 속에서 언제나 차갑다.

2012년 5월 9일 수요일

블라드미르 나보코프의 '절망' 중

손이 떨린다. 고함치고 싶다. 아니면 뭐라도 박살 내고 싶다.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싶다...... 이런 기분으로는 이야기를 차분히 펼쳐나갈 수 없다. 심장을 긁어댄다. 끔찍한 느낌이다. 진정해야 한다.

내면을 긁는 느낌이, 참을 수 없이 가려운 느낌이 다시 자라났다. 지독한 의지박약. 끔찍한 공허.

때때로 나를 휘감는 까닭 모를 우수는 내가 정신병동에서 삶을 끝낼 징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 스스로의 모델이 되는 데 몹시 익숙해져버렸다. 바로 그 까닭에 내 문체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

거울, 거울,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울, 거울, 거울. 실컷 지껄여들 보라지. 난 두렵지 않다. 거울.

바다는 영혼의 동요.

작가는 끝내지 않은 초고는 공개하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당신 얼굴에는 뭔가 이상한 게 있어요. 뭐랄까, 당신 얼굴선은 그리는 족족 제 연필 밑에서 미끄러집니다. 한번 미끄러지면 없어져 버리네요.

한길에서는 우편 배달부가 모자를 움켜쥐고 뒷걸음질 친다. 나는 힘겹다......

나는 시를 지었고, 아는 사람들의 명예를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손상시키는 긴 이야기들을 남몰래 지었다.

나는 끝없는 긴 복도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바닥에 자리한 문. 문을 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엄두를 못 낸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다가가서 문을 열어젖힌다. 그와 동시에 신음하며 잠에서 깨어난다. 문 뒤에서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바로 완전히 텅 빈, 백색 도료를 새로 칠한 벌거숭이 방. 더는 아무것도 없다.

자네가 내 걸 훔치면 아마 난 으쓱한 기분마저 들 거야. 도둑질이야말로 물건에 보내는 최고의 찬사란 말이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일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 진지하고 전지전능한 어떤 불멸의 존재가 인체모형을 가지고 노는 짓 따위의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쏟는다는 사실을 수긍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중략) 내가 신에 관한 이야기는 낯설고 끔찍하다. 나는 그게 전혀 필요없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내 존재의 독재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노리도, 그 어떤 황홀경도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내 처지에 대한 생각을 거두게 하지 못한다. 신의 노예라는 처비 말이다. (중략) 그러나 불멸이라는 고문만은, 이 차가운 하얀 강아지들만은 거절하겠다. 날 가게 놔두라. 조금의 애정 표시도 참지 않을 것임을 너희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중략) 아니, 이방인에게는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라.

문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이제 계속하자.

그러니 예술적 허구가 삶의 진실보다 사실적이다.

- 완벽한 언어 유희. 나는 이보다 더 언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글의 중간 중간 자신의 필명을 뜻하는 글자를 넣거나, 철자를 뒤집어 이중의 의미를 가지도 한다. 원문으로 읽을 수 없는 게 아쉽다.) 그의 글은 새롭고, 충격적이다. 마치 아름다운 모델이 화려한 옷을 걸치고 런웨이를 걸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무대는 독자와 평등하지 않다. 작가는 독자보다 훨씬 높은 무대를 설치해 놓고 내려다 보고 있다. 그의 태도는 세련되었으나 냉소적이다. 작가는 마치 비웃음을 머금고 독자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는 독자의 관심을, 독자의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한다.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인 게르만이 그러하듯이.
게르만 이외의 인물들은 모두 둔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게르만 만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꿰뚫어보고, 누구든지 속여넘길 수 있는 두뇌를 가진 것처럼 묘사되지만, 결국 현실에서 패한 것은 게르만이다. 그래도 그는 개의하지 않는다. 그의 모습에 아마도 작가의 이중적인 모습이 어느정도 투영된 것이라 생각된다.
게르만은 자신과 똑같이 닮은 부랑자를 발견하고, 살인 및 사기 계획을 세운다. 플롯은 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은 극히 복잡한 미로이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나오려 해도 길을 잃은 듯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 당황스러움을 작가가 마치 보는 듯해 낯 뜨겁다. 결과적으로 게르만이 살해해 생명보험을 타려고 했던 그 부랑자는 게르만과 전혀 닮지 않았다. 자신만 그렇게 느낀 것이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건 여기서 나는 삶에 대한 한 인간의 '착시'를 본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보는 대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의 우월한 명석함도 작가의 눈에서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를 비웃으며, 또한 그 비웃음이 자신을 향한다. 그렇다. 그만 그렇게 느낀 것이다. 세상은 동조하지 않는다.
블라드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태생이지만, 독일, 프랑스, 미국, 스위스 등으로 이주했다. 그가 코넬대학에서 10년동안 교수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웠다. 이 이타카에 10년동안 그가 살았었다니. 그의 유명한 작품, '롤리타'는 아마도 여기서 쓰여졌으리라. 존경하는 작가가 살았던 곳에서 산다는 것. 멋진 일이다.

2012년 5월 8일 화요일

파스칼의 '팡세' 중

배를 탄 손님 중에서 집안이 제일 좋은 사람에게 배의 키를 잡게 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헛됨을 못 보는 자는 그 자신이 참으로 헛된 것이다.

영광의 단맛은 하도 큰 것이어서 그것을 어떤 것에 붙여 놓든지, 비록 죽음에다 붙여 놓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한다.

병은 우리의 판단력과 감각을 망친다. (중략)
우리 자신의 이익도 역시 우리의 눈을 기분 좋게 현혹시키는 기묘한 연장이다.

"그대는 어째서 그대의 이익을 위해서 나를 죽이려는 거요? 나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아니, 뭐라고! 그대가 강 건너편에 살고 있지 않느냐 말이오. 벗이여, 그대가 이쪽에 살고 있다면 나는 살인자일 것이고, 그대를 이렇게 죽이는 것이 옳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가 저쪽에 살고 있으니 나는 용감한 사람이고, 또 내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이요."
(- 국수주의, 집단 이기주의의 옳지 못함 -)


내가 채우고 있고 내가 보기까지 하는 조그만 공간, 내가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도 못하는 그 무한하고 무량한 공간 속에 깊이 잠긴 조그만 공간을 앞서갔고 또 뒤따르는 영원안에 흡수된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을 생각하면 "memoria hospitis unius diei praetereunitis (지나가는 하루해 길손의 추억)" - 내가 저기 있지 않고 왜 하필이면 여기 있는가, 하고 놀랍고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저기가 아니고 여기에 있으며, 저때가 아니고 하필이면 지금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지금 여기에 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인도로 나에게 차례가 왔는가?


다수성은 그것이 공개적이고, 또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무능한 사람들의 의견이다.


절름발이는 우리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는데, 둔한 정신은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냐하면 절름발이는 우리가 똑바로 걷는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둔한 정신은 우리야말로 다리를 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다면야, 우리는 그를 동정하지 분노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존엄성을 공간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내 사고를 조절하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땅을 차지한다 해서 가진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으로 따지면 우주가 나를 포함하고 나를 한 개의 점처럼 집어 삼킨다. 그러나 사고로는 내가 우주를 포함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비참함을 깨닫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폐위된 왕이 아니고서는 누가 자신이 왕이 아님을 불행으로 여기는가?


또 우리는 하도 허영심이 많아서, 우리 주위에 있는 대여섯 사람의 존경으로 재미를 보고 만족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의 모든 불행이 꼭 한 가지, 즉 방안에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토끼는 우리에게 죽음과 비참을 보지 않게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사냥은 거기서 우리의 정신을 돌리게 하여 우리에게 그것을 막아주는 것이다. (중략)
그들은 자기들이 짐승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만일 이 직책을 얻으면 그 다음에는 평안히 쉴 줄로 생각한다. 그들의 탐욕이 채워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휴식을 찾는 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소란 밖에 찾지 않는 것이다. (중략)
이렇게 해서 한평생이 지나가는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이 사람은 불안해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자기 기질적으로 타고난 고유한 상태로 말미암아 불안을 느낄 만큼 몹시 불행하다. (중략)
내일 친구들 앞에서 남보다 잘 쳤다고 자랑하려는 목표가 있는 것이다. (중략)
내 생각에는 모두 다 어리석은 짓이다. (중략)
그는 지금 개들이 여섯시간째나 죽어라고 쫓아다니는 저 멧돼지가 어디로 지나갈지 살피ㅣ느라고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가 없다. 사람은 아무리 슬픔을 한아름 지니고 있어도, 누가 그로 하여금 어떤 심심풀이를 시작하게만 만들면 그동안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조심하여 살펴보라. 대장경이나 대법관이나 재판장이 된다는 것은 아침부터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도 남길 수 없는 그런 지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허영, 남에게 그것을 보여주려는 즐거움.
춤, 발을 어디다 놓을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즉,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생각하면 불행하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왕이 손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기묘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왕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할 것이니,

신의 행동은, 종교를 정신에는 이치로 넣고, 마음에는 은총으로 넣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정신과 마음에 강제와 협박으로 넣으려 하는 것은 종교를 넣는 것이 아니고 공포를 넣는 것이니, "Terrorem potius quam religionem (종교보다는 오히려 공포를 넣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계에서 가장 약한 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부수는 데는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로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부수어 버린다 해도 사람은 그를 죽이는 그것보다 훨씬 고귀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힘이 세대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런 것을 도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엄성은 완전히 생각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으로서가 아니라, 이것, 즉 생각으로 우리의 가치를 올려야 한다.

불가해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신앙과 착함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경험으로 안다.

-우리의 비참을-위로해 주는 유일한 것이 오락이다. 그러나 이 오락이 우리의 비참 중의 가장 큰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주로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게 막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멸망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근심 속에 빠지게 될 것이고, 이 근심이 우리를 격려하여 거기에서 놓여나올 수 있는 더 건실한 방법을 찾게 할 것이다. 그러나 오락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일에 대한 시장기가 없으면 그것에 물리고 만다. - 의덕에 대한 주림은 여덟째 참된 행복이다-.

자연스러운 문체를 보면 놀랍고 기쁘다. 왜냐하면 한 작가를 만날 줄 알았었는데, 하나의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당하지 말고 위험이 없을 때 죽음을 무서워하라 - 사람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


신이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신이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영혼이 육신과 함께 있다는 것도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나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거나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 등도 이해할 수 없고 - 원죄가 있다는 것도, 그것이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


-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서는 처음에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일생이 그보다 더 흥미로웠다. 그의 일생은 그가 비유한 너무나도 유명한 문구, '생각하는 갈대'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인정했지만, 그것의 허무함 또한 같이 보고 있었던 듯 하다. 그는 기독교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으나, 그것은 단순한 종교에의 귀의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했던 귀의이다. 그가 생각하는 갈대이기에 그렇게 많은 성경 구절들이 그의 글에 필요했으리라.
초반부의 '팡세'에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느껴진다. 또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경도 보인다. 이는 중후반부에 걸쳐 많은 성경 구절들 속에 묻혀진다. 아마도 약해진 건강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파스칼이 존경스러운 것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신념을 자신의 삶에서 진실되게 지켜갈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의 수학/과학적인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인간적인 부분을 고민했으며, 영혼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적 정신과 실존적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두가지 정신을 한꺼번에 가질 수 있는 것은 저주스러운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2년 5월 6일 일요일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 중

이런 환경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좋다는 안이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중략)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이란 없었다. 사소한 불장난, 몇 번의 킬킬대는 웃음, 잠깐의 당혹감, 그리고 나서 처음 짓게 되는 낯설고 침착한 표정. 다시금 찌들린 집안 살림이 시작되고 첫아이가 태어난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한 후 잠깐 사람들 틈에 끼지만 여자들의 말은 처음부터 누구나 건성으로 들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여자들 자신도 점점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게 되고 혼자말이나 중얼거리게 된다. 나중엔 두 다리로 서는 게 불편해지고, 혈관 경련이 오고, 잠자면서 중얼대기 시작하고, 자궁암에 걸리고, 드디어 죽게 되면 예정된 섭리는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을의 여자 아이들이 많이들 하고 노는 말잇기 놀이도 <피곤하고 / 기진하고 / 병들고 / 죽고> 라는 식으로 여자의 삶을 나타냈다.

빨랫줄 위에 매달리는 물방울, 어둠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 앞으로 펄쩍 뛰어드는 두꺼비들, 모기들, 곤충들, 낮에도 날아다니는 나방들, 통나무 헛간의 널빤지들 속에 있는 벌레들과 지네들, 누구나 이런 것들에 길들여져야 했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했다. 그건 그녀가 아이였을 때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건 최초로 가진 소망이었고, 그 소망을 끊임없이 말하다 보니 급기야는 고정 관념이 되어버렸다.

이 시기 동안 나의 어머니는 스스로의 껍질에서 벗어나 제 힘으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범을 보이느라 나름대로 주어진 삶을 살았다. 그들은 보라는 듯이 적게 먹었고, 보라는 듯이 서로의 앞에서 침묵했으며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상기시키기 위해 고해 성사를 하러 갔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지쳐갔다. 자신을 설명하려는 작은 시도도 쓸데없는 말대꾸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될 수도 없었다. 그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어서 그녀에게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름대로 삶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었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은 쉽게 상처를 입었고 그런 마음을 화난 듯 과장된 위엄 뒤에 감추었지만 아주 사소한 일에도 곧 공포에 질린 채 무방비의 얼굴을 내비치곤 했다.

그녀는 존재했고 성장해 갔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집안일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는 생활 형식에서 우정이란 기껏해 봐야 서로 친숙한 것을 의미했을 뿐 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똑같은 걱정거리를 갖고 있다는 게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중략) 결국 개인에게서 인간적인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개성>이란 그저 욕설로나 알려져 있었다.

자유 의지에 따라 사는 것, 가령 평일에 산보를 간다든지, 두번째로 사랑에 빠진다든지, 여자가 혼자 술집에서 과일주를 마신다든지 하는 등의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괴물이나 하는 짓이었다. (중략)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의식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에는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개인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욕구를 조금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질문들은 모두 공허한 말이 되어버렸고 대답 또한 너무 상투적이어서 거기에 인간이 포함될 필요는 없었고 사물로도 족했다. (중략) 이렇게 위안을 주는 물신 앞에서 사람들은 죽어갔다.

오늘이 어제였고, 어제의 모든 것이 예전대로였다.

그녀는 신문을 읽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책을 더 좋아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자신의 삶의 여정과 비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지금까지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문학은 그녀에게 자신을 생각하도록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추위와 배고픔, 주위에서 비난을 받는 것은 모두 그녀의 책임이라고 느꼈다. 경멸했던 남편도 그녀가 느끼는 죄의식 가운데 하나였고 그가 그녀 없이 지내야 했을 때면 그를 진심으로 염려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는 간단히 죽어버렸을 것이다.

<난 집에 있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집 근처 어디론가 달려나가고 만다. (중략) 난 이제 시간이 있어도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쳐도 난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단다.>

사진을 찍을 때면 그녀는 이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마에 주름을 지우고 미소를 지으려고 양 뺨을 부풀렸지만 홍채의 한가운데서부터 풀려버린 동공을 지닌 두 눈은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을 내보였다.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진통제를 몽땅 입안에 털어놓고 거기에다 갖고 있는 신경안정제도 모두 먹어치웠다. 그녀는 생리대까지 끼운 위생 팬티에 팬티 두 개를 더 껴 입고, 머릿수건으로 턱을 단단히 묶고는 전기 담요도 켜지 않은 채 무릎까지 내려오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몸을 쭈욱 뻗고 양손을 가슴 위에 포갰다. 장례식을 어떻게 지내달라는 것만 씌어 있는 편지의 마지막 대목에 가서야 그녀는 <드디어 평화롭게 잠들게 되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썼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죽은 자를 보면서 그들이 점차로 자신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아직도 그 죽은 몸뚱이는 끔찍하게 버림받아서 사랑을 갈망하고 있는 듯 보였다.

-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매우 사실적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작가로서의 시선이 아들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의 어머니의 일생에 대한 날카로운 연민을 가진 성찰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하지 못할 말을 꾹 다물고 참고 있는 여인을 대신해서 누군가 서술해주는 느낌마저 든다.
가난과 사회적 압박 (말하여지지는 않지만 당연시 되어온) 속에서 여자로서의 일생은 무언가를 소망하기도 전에 이미 정하여져 버린 것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그녀는 생각할 줄 알았고, 소망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부딪혀 좌절했다. 그러나, 처음엔 그 좌절로서 죽음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죽음도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전까지는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 죽음이 그녀의 무언가에 대한 갈망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쩔 땐 사방이 막힌 벽에 서 있는 듯 느껴진다. 아무리 무엇을 어떻게 해봐도,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고,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할 듯 느껴질 때,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냥 계속 그대로 묶인 몸을 움찔거리기만 할 것인가?
책을 읽는 동안 가슴에 답답하고, 목까지 무엇인가 울컥 차올라 어쩔 줄 몰랐다. 눈을 돌려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눈 앞에 펼쳐놓은 듯 마음만 아프다. 인간의 삶이, 희생이, 그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 어찌해야 할까? 존재가 그냥 살아감으로 끝날 때. 언제나 말하듯이 그 살아감도 녹록치 않을 때. 존재의 존엄은, 그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답은 모르고, 마음만 편치 않다.


지드의 '위폐범들' 중

무슨 일이건 당신에게 그렇게 해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소위 기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걸 테지. 어머니도 꽤 괴롭혔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어. 만약에 누구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말일세. 난 아버지가 주위 모두를, 가령 하인이거나 개거나 말이거나 정부 등을 괴롭혔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나 친구는 예외였어. 친구는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제각기 모두 '야아!' 하는 안도의 숨을 쉬어. 소위 '자기 분야에 있어서는 훌륭한 사람이었을 테지. 그러나 그 분야가 뭔지 나는 알 수가 없었어.

'만약에 네가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한단 말인가? 만약에 네가 그것을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면 언제 한단 말인가? 그는 생각했다. '해야 할 큰 일들', 그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느꼈다. 걸으면서 그는 '큰 일들.' 하고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그것이 어떤 일들인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선 당장은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중략)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다.

선원 두 사람이하나는 도끼, 하나는 식칼을 들고 무엇을 했는지 아세요......? 밧줄에 매달려서 우리 보트에 올라오려는 사람들의 손가락이며 손목을 마구 내리찍고 있었어요. 선원 중의 한 사람이 - 또 한 사람은 흑인이었어요. - 추위와 놀라움, 그리고 공포로 이를 딱딱 마주치던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한 사람이라도 더 올라와 보슈, 우리는 모두 끝장이에요. 배는 꽉 찾으니까.' 하고 중얼거렸어요. (중략)
내 일부는 부르고뉴 호와 함께 물속에 침몰해 버렸고, 앞으로는 산더미 같은 세심한 감정 따위가 타고 올라와서 내 마음을 침몰하게 하지 못하도록 그 손가락이며 손목을 찍어 버릴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된 거예요.


평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냉담하더라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수의 책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그는 다시 한 번 그런 것은 그에게는 이무렇지도 않다고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그가 보기에 파사방은 예술가라기보다는 하찮은 작품을 쓰는 글쟁이였다. 그런 친구 생각은 그만두자......

미련조차도, 뭔가 채워지지 못한 느낌조차도. 시간이 서서히 빌려 입은 모든 옷을 벗겨 버리고,  진정한 모습이 다시 나타나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상대방인 내가 그러한 꾸밈에 심취하고 있었다면. 이 가슴에 껴안은 것은 결국 주인 없는 하나의 장식, 하나의 추억...... 슬픔과 절망뿐일 것이다.

내 가슴은 타인과의 공감에 의해서만 뛴다. 나는 타인에 의해서만 살고 있는 것이다.

파사방에게는 예술 작품이 목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수단이다. 그가 내건 예술적 신념이라는 것이 그렇게 극성스럽게 단호한 것은 그 신념에 깊이가 없는 까닭이다. 성격에서 우러나는 은밀한 요구가 그 신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의 신념은 다만 시대에 영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신념의 표어는 기회주의다.
[철봉], 처음에 가장 현대적으로 보이는 것이야말로 머지않아 가장 케케묵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나하나의 아첨과 가식은 후에는 모두 영락없는 주름살이 되는 것이다.

머물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험난한 것에 대한 일종의 동경, (자기 자신과의) 영합에 대한 혐오감, 이것이야말로 유년시절에 받은 나의 청교도적 교육에서 비롯된 것으로, 내가 가장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중략)
아아, 이런 나를 뒤에 놔두고 갈 수 있다면!

노부인이 분명히 지어낸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중략) 아무튼, 뒤에 남는 것은 생활 때문에 서로 얽매였으나, 서로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제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이런 겁니다. 즉 살아가며 처신하는 데 있어 하나의 목적에 눈길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가?
(중략)
저도 그것을 밤새도록 따져 봤어요. '제가 마음으로 느끼는 이 힘, 이것을 무엇에다 써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가장 보람 있게 활용할 수 있을까?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면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 목적을 어떻게 고를 수 있는가? 그것에 도달하기 전에 어떻게 그 목적을 알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목적없이 산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분에 맡기는 거지.
(중략)
우선, 그리고 오랫동안 아무런 해안도 만나지 않고 지내리라는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운 땅을 발견할 수 없어. 그런데 우리나라 작가들은 먼 바다를 두려워해. 말하자면 바닷가만 따라다니는 자들이지.
(중략)
규칙 없이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남이 주는 규칙도 원치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규칙을 세워야 할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한 것 같군. 그 규칙을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해야지. 자기 자신의 발견을 목적으로 삼는 거야.

- 이 소설은 잘 짜여진 소설은 아니다. 처음에 중요하게 부각됐던 인물들이 중간에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인물들이 아무 배경없이 갑자기 나타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의미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소설이나 희곡 (영화) 에서일 뿐이라고 지드 자신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그렇다. 현실은 언제나 뒤죽박죽인 법이어서, 결과의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소설은 매우 느리게 시작한다. 마치 담아낼 것이 너무 많은 수레를 오르막으로 천천히 밀고 올라가는 느낌이다. 그러다 소설의 중후반부에 언덕길의 꼭대기에서 수레를 내리막으로 밀어버리는 것 같다. 그것도 수레의 손잡이도 잡지 않은 채 마음대로 언덕 길을 굴러내려가는 수레를 작가가 꼭대기에서 바라보든 듯한. 그것도 그가 잔뜩 실어논 개념과 상황이 가득찬 채. 결국 수레는 거꾸로 박혀버린다. 마치 소설 중 보리스의 죽음이 어이없게 등장해 허탈함을 안겨 주는 것처럼.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그러한 것처럼, 소설은 부분 부분 그의 주옥같은 생각들을 담고 있다. 그의 생각이 두서없이 불쑥 튀어나오기에 그것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하나는 '위폐'에 대한 개념이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위폐처럼 사람도 위폐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번지르르한 글을 쓰는 파사방이라는 작가를 통해 '위폐'의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인물들이 어느정도 자신의 만들어진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성과 감성에 흔들리며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며, 그러나, 후반부의 베르나르와 에두와르의 '목적'에 대한 대화를 통해 지드는 '진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생을 추구하는 몇몇 인물들을 통해 삶에 있어서의 가치와 의미를 고민하고, 자신의 발견을 추구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