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5일 화요일

야스퍼스 (Karl Theodor Jaspers)의 '철학학교' 중

철학은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보편적입니다. (중략) 지식은 끝이 없고 저마다 흩어져 있습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는 지식의 도움을 빌려 유일한 중심에 도달하고자 합니다. 단순한 지식은 하나의 퇴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그때마다 하나의 전체가 됩니다. 지식은 합리적인 것이며, 누구의 오성도 이를 똑같이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철학은 전체를 이해함으로써 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사유방식입니다.

철학적 사유에 관해서 말하더라도, 우리는 철학적 대기권의 무한한 공간에서 불과 한두 번의 공기를 호흡할 뿐입니다.
(중략) 그리고 철학적 사유의 순수한 공기도, 그 속에서 호흡하며 사는 실존의 작용이 있어야만 힘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해답도 궁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모든 해답은 새로운 물음들을 낳습니다. 결국 궁극적 물음은 해답 없이 남게 되지만, 그렇다고 공허한 물음으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궁극적 물음은 충실한 고요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 고요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는 갈기갈기 찢겨 버렸습니다.

인간의 실존적 재앙은, 과학적으로 얻어진 지식이 존재 그 자체로 생각될 때와 과학적으로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비존재로 인식될 때에 시작됩니다.

철학은 이러한 걸림돌을 헤치고 나가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주는 일을 과제로 삼는 것입니다.

우주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중략) 우주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점점 더 신속한 상품 교환을 낳는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으로 현존재가 변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견실함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싫든 좋든 변해 가는 순간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중략)
어느새 싹튼 이 공공연한 기만 상태를 숨긴다 해서, 그것에 따르는 결과마저 피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세계에서의 항구성의 소멸은 인간적인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 존재 자체마저 엄습합니다. 결혼.우정.일에서의 성실함은 의심을 받습니다.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항구성이 자취를 감추고 무엇 하나 믿을 만한 것이 없어집니다.
(중략)
정신을 공허해지고, 세계는 삭막하고 재미없는 유흥의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번창하고 있습니다. (중략) 낡아서 썩어 버린 장엄한 무대 장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은 그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자신이 닫힌 문 앞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를 비방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인간은 저마다 온갖 거짓 위안을 물리치고, 최악의 사태와 마주하고도 고유한 성실성을 잃지 않으며, 무지의 신앙에 근거해서 꾸밈없이 하루하루의 일과를 다하며 태연하게 죽어 갑니다. 이들 인간에게는 얼마나 많은 자유와 소박한 존엄이 존재합니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빛나는 인간됨이겠습니까!
만일 역사가 본디부터 그 속에서 계획되고 있는 인류의 자기 붕괴 과정으로 파악된다면 이러한 것은 잊혀집니다. 사랑, 진지성, 인간의 위대성, 인간이 창조한 작품의 우수성, 이 모든 가치는 그 상징적 존재에 의하여, 어떠한 몰락의 과정에서도 그것을 버려 두지 않는 그 무엇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역사와 현대를 바라다본다는 것, (중략) 그것의 본질은 바로 책임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너머 바깥쪽을 내다보지는 못합니다. 철학적 통찰이 비로소 이 세계 속에 감금당한 우리를 놓아줍니다.

해답은 결국 결단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실재 세계가 나와 무관한 것이 되도록 버려두고 싶은가? 나는 실재 세계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그저 이 세계를 수동적으로 견디어 나가고만 싶은가? 나는 어떠한 일에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가? 나는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은가? (중략)
이러한 일들이 싫다면, 그럼 나는 나의 생활 현실과 나의 책임과 인식을 통하여, 이 현상 세계 안에서 명백성에 도달하고 싶은가? 현상 세계의 이 명백성을 넘어선, 어는 다른 곳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가능한 명백성에 도달할 절대적인 길이 우리에게 있다고 기대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현상은 결코 허상이 아니며 인생은 절대 꿈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존재로서 태어났지만 현존재로서 자기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이러이러한 민족.성.시대.문화권.사회적 및 경제적 상황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는 인간, 즉 이러한 모든 것의 외부에다, 이러한 모든 것의 저편에다 자신을 세워 놓고, 이러한 모든 것 속에 역사적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인간, 이런 인간은 대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중략)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때, 이제껏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에 의하여 존재 의식은 충만해집니다.

인간은 세계로부터도, 역사로부터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자신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현존재에 묶여 있으면서도 자신을 초월하려 합니다.

인간은 우주로 나아가려 하지만 결코 우주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중략) 이것은 결코 좌절이 아니라, 한계입니다.
(중략) 오늘날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등산가의 모험이 우주비행사의 모험보다도 훨씬 내용이 풍성합니다. (중략) 우주비행이 자랑하는 것은 겨우 기술의 완벽성뿐입니다. 이 완벽성은 공허함 위신을 낳으므로, 기술적인 스포츠의 최고 기록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테의 환상의 원리 - 교만한 지식욕과 재능에서 생기는 몰락 - 는 오늘날 새로운 형태를 띠고 현실적인 것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술적 실현은 인류의 자멸을 실제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지점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이루어지면 인간은 자기가 불확실하고 내던져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사실을 숨기지 않고 사유하려면,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합니다. 눈을 또렷이 뜨고 분별심을 잃지 않으면서 어둠 속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의식 속에서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지고 끝까지 성실하게 남고자 한다면, 그는 타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그가 자기 속에 이러한 존엄을 지니고 있고, 또 모든 타인 속에서 이 존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정치가는 (중략) 자유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들의 행위 전체로써 그것을 위해 싸웁니다. (중략)
정략가는 이와 다릅니다. 그들은 편의주의적인 현실주의자로 기업 경영자이며, 교활한 인간이고 협잡꾼입니다. 그들은 자유의 이름 아래 거리낌없이 자유의 여러 조건에 어긋나는 행위를 합니다. 그들은 가면이 벗겨지면 거짓말과 기지를 써서 피합니다. (중략) 그들은 자유의 파괴자들입니다.
이러한 정략가는 아무런 사명감도 없으면서, 자기의 임무를 하나의 직업으로 삼습니다.

경제적인 번영 가운데에는, 그대로 적당히 살아가는 데에는, 단순한 흥분 가운데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습니다. (중략) 책임의 분담은 책임의 상실을 가져왔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또는 절대적 진리의 이름으로 권위를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뿐이며, 신이나 진리 자체는 아닙니다.

비록 인간이 폭력의 입에 삼켜질지 모른다 해도, 인간의 진리는 역시 이러한 자유에 이르는 인간의 길이었습니다. 좌절은 자유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영광이, 그의 몰락으로 인해 부정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지구가 그 어느 날 우주의 바다에서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스스로 몰락해 사라져 버린다 해도 말입니다.

실천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비로소 무엇이 인간에게 중요한가 하는 것이 수면 위에 떠오릅니다.

진리의지는 개방성을 촉구하고, 권력의지는 폐쇄성으로 몰아갑니다. (중략)
권력의지는 가면으로 자기를 꾸밉니다. (중략)  진리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폐쇄성과 거짓이 최후의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침묵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거짓되게 됩니다. (중략)
공적으로 중요한 일에 대하여 침묵함으로써 모든 사태의 경과는 거짓이 됩니다. 공공의 허위는 개인적인 허위의 거울입니다.

칸트의 정언적 명령에서 양심에 대한 요구의 핵심을 찔렀습니다. 즉 너는 너의 행위로써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에서는 너의 행동 원칙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 사건은 우주적 사건입니다.

자유의 길이 불가능한 듯 생각될 때에도, 막다른 골목같아 보이는 길이 우리의 과제이며 우리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하는 확신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신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중략)
신이라는 암호를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말로서 듣는 수밖에 없습니다. 암호가 들리지 않게 되면, 우리 주위는 어둡고 황량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암호를 들었다고 해서 평안에 다다를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영원한 것은 훗날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므로 마치 죽음이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부활의 약속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교의입니다. (중략) 시체의 부패입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중략) 그러나 영원에의 충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멸망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시간성이란 실재의 생성을 뜻합니다. 생성은 처음도 끝도, 근원도 목적도, 그리도 바닥도 없습니다. 시간성의 경험은 우리가 현존재로서 움직이고 있는, 이 감정적인 현재에서 완성합니다.
반면 무시간성은 모든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영원성이란 시간적으로 현존하는 것과 무시간적인 존재, 즉 시간 속에서 시간을 거스르며 시간적인 동시에 무시간적인 것과의 통일을 말합니다. 영원성은 무시간적인 비현실에도, 시간적인 실재에도 대립한다는 뜻에서의 영원한 현실입니다. 이 영원성의 경험은 오직 실존에만 귀속됩니다. 경험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영원성은 하나의 부조리입니다.
이 부조리 - 시간 안에서의 영원성 경험

순간은 시간적이지만 그것이 실존적으로 채워질 때, 이 순간을 모든 시간을 덮는 영원에 관여합니다.

그러나 만일 철학이라는 것이 전연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도한 정치 운영은 많은 정치가들에게 한결 쉬워집니다. 대중과 공무원이 만일 사유하지 않고 다만 주입된 지성만을 지닐 때, 그들을 다루기는 한결 쉬워집니다. 인간이 진지해지는 것을 사람들은 막아야  합니다. (중략)
이리하여 철학은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적들 대부분은 실정도 제대로 모르는 자들입니다. 부르주아적인 자기 만족, 인습적 생활, 경제적 번영에 대한 만족, 오직 기술적 유용성 하나만을 따지는 과학의 평가, 무제약적인 권력의지, 정치가들의 당파 근성, 이데올로기의 광신, 유능한 저술가들의 문학적 명성을 향한 의지, 이들 모든 것은 비철학 속에서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들의 비철학은 그런 대로 철학이기는 하지만 전도된 철학이라는 것, 그리고 이 비철학은 일단 밝음 속에 내놓으면 저절로 분리되고 말리라는 것, 이러한 일을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는 것은 인간의 품위입니다.

그는 망상속에서 행복을 얻기보다는, 차라리 진리와 가까워져서 좌절하기를 바랍니다.
존재하는 것은 마땅히 드러나야 합니다.

철학은 심연 앞에 서 있습니다. 철학은 이 심연으로부터 눈을 가려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 심연을 치워 버릴 수도 없습니다.

철학은 만인을 위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까지도 그랬고, 오늘에 와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고, 결코 이대로 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철학이 하나하나의 인간에게 어떤 것일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볼 때, 철학은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학이야말로 인간이 자유 속에서 자기의 길을 찾는 크고도 유일한 힘인 것입니다. 이 힘만이 내적인 독립성을 가능케 해줍니다.

- 이 철학학교 (Kleine Schule des Philosophischen Denkens), 즉 사유하는 작은 철학 학교라는 의미의 책은 야스퍼스가 83세에 강연한 철학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비교적 적은 양의 원고에 비해 여러 분야에 대한, 우주, 생명, 역사, 현대, 지식, 인간, 정치, 인식, 가치, 심리학, 사회학, 공개성, 암호/신, 사랑, 죽음, 철학에 대한, 그의 철학이 집대성되어 있는 책이다.
실존적 가치관을 가진 야스퍼스의 세계관과 인간관, 정치/사회/개인의 철학으로의 요구, 영원과 시간성에 관한 논의는 너무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니체나 키에르 케고르, 하이데거와 그 기본적 실존적 가치를 같이하고 있으나 좀 더 논리적이고 명확한 시각과 언어로서 철학을 제시하는 야스퍼스의 통찰과 노력에 깊이 감사한다. 아직 읽을 수 있는 그의 저작이 많이 남아있음에 기쁨을 느끼는 현시대의 한 사람으로서 '시간을 초월한 위대함과 영원성'을 야스퍼스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감의 바다에서 한참은 즐겁게 유영할 듯 하다.


2014년 4월 8일 화요일

Carol Rifka Brunt의 "Tell the Wolves I'm Home"중

A hot tear ran down my cheek.
Then, into the silence, over the top of everything, came a long, sad howl. For a second it felt like the sound had come from inside me. Like the world had taken everything I was feeling and turned it into the sound.

I put everything in the back of my closet with teapot and the first note from Toby, and then I fell asleep. The bed was warm and ordinary and perfect, and it had been such a long, long day. Probably the longest day of my life. I felt like I had proof that not all days are the same length, not all time has the same weight. Proof that there are worlds and world and worlds on top of worlds, if you want them to be there.

Toby was loose. Attached to nothing. Except maybe to Finn. That's what I started to figure out. Without Finn, Toby was like a kite with nobody holding the string.

I meant it seriously. I really wondered why people were always doing what they didn't like doing. It seemed like life was a sort of narrowing tunnel. Right when you were born, the tunnel was huge. You could be anything. Then, like, the absolute second after you were born, the tunnel narrowed down to about half that size. (skip) On and on through the years until you were stuck.

you can still see the five black buttons. NOt the way that were, not clumsy and thick, but more like shadows. Like small eclipsed moons, floating over my heart.


- 천천히 문장을 곰곰히 새기면서 읽었다. 많지 않은 등장 인물과 연극세트와도 같은 배경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지... 14살 소녀인 June을 통해서 서술되는 이 이야기는   그녀가 사랑하는 삼촌이자 대부인 Finn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이 소설은 죽음, 사랑, 상처, 우애, 진실, 질투, 아집, 포용, 성장, 화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읽을수록 사랑하게 되는 그런 진실되고 따뜻한 소설. 용기가 없어 누군가를 잃기 전 언제든 다시 읽어도 좋을 그런 소설. 아름다운 문장에 진실함이 소록소록 묻어나 오래도록 마음에 끈끈하게 묻어있을 그런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