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9일 일요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1" 중

지금 가스등을 끈 것이다. 마지막 하인은 가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약없이 밤새도록 괴로워해야 한다.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의 새벽녁, 평소에 잠자는 자세와 다른 자세를 취하고 독서하다가 잠들었을 때, 단지 팔의 위치가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 태양의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뒷걸음질치게 할 수 있으므로, 눈 뜬 순간에는, 이미 일어날 시간인 줄 모르고서 지금 막 잠든 줄로 여길 때도 있을 것이다.

제가 신문을 비난하는 건 날마다 하찮은 것에 우리의 주의력을 돌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본질적인 것이 씌어 있는 서적을 한평생 서너 번밖에 읽지 않습니다. (스완의 말 중)

회상에 있어서 콩브레는 마치 얇은 한 개의 계단으로 이어진 2층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콩브레에는 마치 저녁 일곱시 시각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묻는 이가 있다면, 콩브레는 다른 것도 다른 시간도 있었다고 나는 대답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것은 단지 의지에 의한 기억, 의지의 기억에 의해서 회상되는 것이며, 그 기억이 주는 과거에 대한 정보는 참된 과거를 무엇 하나 간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의지해 콩브레의 그 밖의 것을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갖지 않았으리라. 그러한 모든 것은 실제로 죽고 만 것이다. 나로서는. 
영영 죽었는가? 그런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은 모두 우연에 달려 있다. 그리고 두번째의 또 하나의 우연. 곧 우리의 죽음이라는 우연은, 흔히 첫번째의 우연이 가져다 주는 은혜를 오래도록 기다리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의 과거도 그와 마찬가지다. 과거의 환기는 억지로 그것을 구하려고 해도 헛수고요, 지성의 온갖 노력도 소용없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이 물질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우연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나는 자기에게 다시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그 미지의 상태는 무엇이었나, 아무런 논리적인 표시를 가져다 주지 않았지만, 그 명백한 행복감과 실존감으로 다른 온갖 잡념을 소멸시켰던 그 미지의 상태는 무엇이었냐고. 나는 그 상태를 다시 출현시키려고 애쓴다. 사고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차의 첫 숟가락을 마신 순간으로 돌아간다. 돌일한 상태를 발견하나, 새로운 광명은 없다. 나는 정신에게 더한 노력을, 도망쳐 가는 감각을 다시 한 번 붙잡아 데려오기를 요구한다. 정신은 감각을 다시 붙잡으로 애쓴다. 이러한 정신의 비약이 아무것도 안 깨지게, 나는 온갖 장애물, 온갖 잡념을 물리치고, 옆방의 기척에 귀를 막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한다......(중략)......그러자, 나의 몸 안에, 깊은 심연에 빠진 닻처럼 끌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 무엇이 움직이기 시작해, 떠오르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감촉한다. 그것이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올라온다. 나는 그것의 저항을 느끼며, 그것이 지나오는 거리의 소란한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자아의 밑바닥에서 그와 같이 떨고 있는 것, 그것은 그 미각과 결부되어 그 미각의 뒤를 이어 자아의 거죽으로 올라오려는 심상, 시각의 추억임을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멀리, 너무나 어렴풋이 파닥거린다. 뒤숭숭한 색채의 포착할 수 없는 회오리가 빙빙 돌면서 내는 무색의 반영을 나는 그 형태는 식별할 수가 없고, 잔뜩 믿는 유일한 통역자처럼 그 반영에 대하여, 그것과 동시에 태어나고, 그것과 떨어질 수 없는 반려의 표시인 그 미각을 번역해 주기를 청하며, 그것이 어떠한 특수한 상황, 어떤 과거의 시기와 관련이 있는지 가르쳐 주기를 청할 수도 없다.
(중략)
이 추억, 이 옛 순간은 과연 나의 맑은 의식의 표면까지 도달할 것인가? 나는 모른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안 느낀다. 추억이 멈추고 다시 가라앉았나 보다. 그것이 다시 한 번 어둠 속에서 다시 올라오리라는 것을 누가 알랴? 열 번이나 나는 다시 시작해 가라앉은 추억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때마다, 온갖 어려운 소임, 중대한 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나태가 머리를 쳐들고, 그런 따위는 그만두고 단지 수고 없이 되새기는 오늘의 권태나 내일의 욕망을 생각하면서 차라도 마시라고 권유한다.

다시 말해, 그 냄새는 과수원에서 찬장으로 옮겨진 그해의 모든 맛있는 젤리, 잘 익은 맛있는 젤리다. 철따라 변하지만, 세간과 하녀처럼 그 집의 특유한 냄새, 따끈한 빵의 보드라움으로 서시의 짜릿함을 조절하는 냄새, 마을의 큰 시계처럼 한가로우나 시각을 어기지 않는 꼼꼼한 냄새,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질서 있는 냄새, 돈담무심하면서도 선견지명이 있는 냄새, 세탁물의 냄새, 아침 일찍 일어난는 냄새, 신앙심의 냄새, 평안을 즐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불안의 증가밖에 가져다 주지 못하는 평안을 즐기는 냄새, 그리고 거기서 살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는 이의 눈에는 시의 큰 저수지 같아 보이나 실은 산문적인 것밖에 즐기지 못하는 냄새. 


나의 사사로운 생활의 보잘것없는 사건을 나의 손으로 조심스럽게 파내, 그것들을 살아 있는 물이 흐르는 어떤 고장 안의 이상한 모험과 동정으로 가득한 삶으로 내가 바꾼 일요일의 화창한 오후여, 내가 그대를 생각할 때, 아직도 그대는 그 아름다운 삶을 나의 머리에 떠오르게 하며, 그대의 조영한, 잘 울리는, 향기로운, 맑은 시간의 ,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너머로 천천히 변해 가는 잇따른 결정 속에 - 나는 독서에 골몰하고 낮 더위가 쏟아지는 동안 - 그대는 그 아름다운 삶을 조금씩 형성하다가 마침내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그대는 아직도 실상 그 아름다운 삶을 그대 속에 품고 있구나.

레오니 고모를 위하여, 삶은 이처럼, 항상 한결같이 그녀가 짐짓 꾸며 보이는 경멸과 깊은 애정과 더불어 '작은 타성'이라고 일컫는 안온한 천편일률 가운데 지나갔다. 고모에게 보다 유효한 섭생을 권해 본댔자 소용없음을 알고서, 차차 이 타성에 경의를 표하게 된 집안뿐 아니라, 집에서 세 거리가 떨어진 동네에서 짐 꾸리는 인부가 궤짝에 못질하기 전에, 고모가 '쉬고 계시지나 않은지' 프랑수아즈에게 물으러 사람을 보내는 촌락에 있어서마저, 모든 사람에 의해 보호되었던 이 타성.

고모에게 시작되고 있던 것은 - 이는 평소보다 약간 일찍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 죽음의 채비를 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도기적인 상태인 번데기 속에 들어가 버리는 노년의 크나큰 체념인데, 이 체념은 서로 가장 깊이 사랑하던 옛 애인들 사이에서도, 보다 정신적인 유대로 맺어진 벗들 사이에서도 - 어느 해를 최후로 삼아, 서로 만나기 위해 필요한 여행이나 외출을 중지하고, 서로 편지 보내기를 그만두고, 이승에서 이제는 못 할 줄 알게된, 그런 정신적인 유대로 맺어진 벗들 사이에서조차도 - 오래 끌어온 삶의 마지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자 나에게는, 이 자기라는 것이, 다른 인간들과 같은 식으로 살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죽으리라, 나는 그들 속에서 쓰는 소질을 전혀 타고나지 않은 수효 안에 들어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되었다........나의 사상은 허무하다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절박한 감정은 나에게 마구 주는 어떠한 아첨말보다 더 값어치가 있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선행을 칭찬받는 악인이 갖는 양심의 가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런 문학적인 전념에서 아주 떠나, 더구나 그것과는 아무 관계 없이, 느닷없이 한 지붕이, 돌 위에 보이는 태양의 반사가, 길의 냄새가 나에게 어떤 특별한 기쁨을 주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또 내가 걸음을 멈춘 것은, 나보고 붙잡으로 오라고 초청하고 있는데도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발견 못 하는 그 무엇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의 건너편에 숨겨 두고 있는 성싶어서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 숨겨진 것이 눈길이 미치는 것 중에 있다고 느껴, 거기에 그대로 서서 꼼짝하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몰아쉬고, 눈에 비치는 것의 형상 또는 냄새의 건너편으로 나의 사념과 함께 가려고 애썼다.......(중략).....나는 지붕의 선, 돌의 색조를 정확히 회상하려고 전념하였다. 그러자 그 까닭을 이해함없이, 나에게는 그것들이 충만해지고 스스로 막 열리고, 그 덮어 숨기고 있는 것을 나에게 내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중략).......그러나 적어도 그 인상들은 나에게 까닭 모를 기쁨을, 일종의 풍요한 환상을 주어, 그럼으로써 한 거대한 문학 작품을 위한 철학적인 주제를 탐구할 때마다 반드시 내가 경험한 권태와 무력감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형태와 냄새 또는 색채의 인상에 의해 나의 의식에 가해진 의무 - 다시 말해 그 인상들 뒤에 숨은 것을 인식하려고 애쓰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나는 곧 그 노력을 모면해 주는 동시에 그 노고에서 구해 줄 구실을 나 자신에 찾았다.

- 프루스트가 어떠한 생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 후회나 회한의 마음으로 쓴 것으로 생각되지도,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의 글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그가 그의 과거에게 생생한 현실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에게 불가능한 '영원'의 옷을 입힌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언제나 내가 가져왔던 의문, '과연 한 인간의 생이, 한 인간의 기억이 그토록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한 인간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어느정도의 해답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가 묘사한 어린시절의 종탑, 콩브레, 게르망트, 메리글리즈 산책,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스완, 질베르트 등은 아직 그의 묘사의 색채를 더해서 더할 수 없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에게 내가 느끼는 또 하나의 동질감은 그의 묘사적 노력, 어떠한 장면이나 모습에 대한 기쁨(혹은 슬픔, 경이 등)과 그것에의 묘사에의 노력, 이다. 어느 순간 느껴지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과 그 광경의 작은 부분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붙잡고 싶게 느껴지는 그 마음이 혼자만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남은 10권의 책을 (그의 죽을 때까지의 10여년의 저작을) 기다린다.



2012년 1월 24일 화요일

카뮈의 "여름" 중

<미노타우로스 또는 오랑에서 잠시> 중

이젠 사막이라곤 없다. 섬들도 없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아쉽다는 느낌은 있다. 세계를 알려면 때로는 딴 데로 고개를 돌리기도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려면 잠시 그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힘을 얻는 데 필요한 고독은, 정신이 집중되고 용기가 가늠되는 긴 호흡은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남은 것은 대도시들뿐이다. 다만 거기에도 또한 조건들이 필요하다.

딴 사막들, 영혼도 의자할 곳도 없는 딴 곳들이 있어야 한다. 오랑은 그런 곳의 하나다.

오랑은 단단한 하늘로 뒤엎인 둥그렇고 누런 큰 담이다. 처음에는 미궁속을 헤매며 아리아드네의 신호인 양 바다를 찾는다. 그러나 억압적인 황갈색 거리에서 뺑뺑 돌게 되며 끝내는 미노타우로스가 오랑 시민들을 먹어치운다. 그것은 권태다. 오래 전부터 오랑 시민들은 헤매지 않게 되고 말았다. 잡아먹히기로 승낙한 것이다. 

공허, 권태, 무관심한 하늘, 이런 곳들의 매력은 무엇들인가? 그것은 아마도 고독이고, 또 어쩌면 계집일지도 모른다.

허무는 절대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세계다.


<명부의 프로메테우스> 중

오늘날의 인류는 오로지 기술만을 필요로 하고 오로지 기술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 인색한 시대에, 헐벗은 나무들에, 이 세계의 겨울에 굴하는 것일까? 그러나 빛을 그리는 이 향수는 내가 옳음을 인정해준다.


<수수께끼> 중

세계의 부조리는 어대 있는가? 이 눈부신 햇빛인가 아니면 햇빛이 없던 때의 추억인가? 기억 속에 이렇게도 많은 햇빛을 담고서 내가 어떻게 무의미에다 걸고 내기를 할 수 있었던가? 내 주변에서는 그래서 놀란다. 나도 때로 놀란다. 바로 그 태양이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그리고 빛이 너무 강렬해지다 보면 우주와 형상들을 캄캄한 눈부심 속에 응고시키고 마는 것이라고 남들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티파사에 돌아오다> 중

나는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낯이 익은 얼굴들에서 내 나이를 읽어내곤 했다. 나는 다만 그 사람들이 나와 함께 젊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젊지 않다는 것을 알 뿐이었다.
티파사로 돌아가게 될 순간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대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자신의 젊음의 고장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스무 살 적에 사랑했거나 강렬하게 즐겼던 것을 마흔 살에 다시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광기, 거의 언제나 벌을 받게 마련인 광기다.

나는 그 시간이면 기진한 동작으로 간신히 조금씩 부풀어오르곤 하는 바다를 바라보았고, 존재가 말라붙어버리지 않고서는 오랫동안 속여서 달랠 길은 없는 두 가지의 갈증, 즉 사랑과 찬미라는 갈증을 충분히 채우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니까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그 불행으로 죽어가고 있다. 피와 증오가 마음 자체를 말려 죽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언덕 위에서 쉬고 잠잘 수도 있고 아니면 범죄 속에 기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의 한쪽 몫을 포기한다면 스스로 존재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이리하여 삶의 그 어는 것 하나도 마다하지 않고 살려는 의지가 있으니 이는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중하는 미덕이다.

그렇다.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 하면 모멸당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해내기가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그 어느 한쪽에도 불충실하고 싶지는 않다.

티파사 동쪽에 있는 생트 살자 언덕 위에서는 저녁 속에 무엇인가 깃들여 살아 있다. 아직은 밝은 것이 사실이지만 빛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느 어떤 쇠잔하 기미가 낮의 끝을 예고해 주고 이씨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때로는 아직 훤한 하늘에 첫 별이 뜨는 시각, 가녀린 비를 맞으며 나는 안다고 여기기도 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마 늘 알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도 그 비밀을 원하지 않으며 아마 나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 그래서 나는 내 가족들과 떨어질 수가 없다. 돌과 안개로 지은 부유하고도 끔찍한 도시들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내 가족들 가운데서 나는 살고 있다. 그 가족은 밤낮으로 목청 높여 지껄이며 그 무엇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그 가족에게 모두가 다 굽힌다. 그들은 모든 비밀에 대하여 귀가 먹었으니까 말이다. 나를 떠받쳐주는데도 그들의 권력이 내게는 따분하기만 하고 그들의 고함 속리에는 진력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도 어느 날엔가 우리가 기진하여 피로와 무지로 하여 죽을 차비를 하게 될 때엔 나는 떠들썩한 우리들의 묘지를 버리고 그 골짜기 속 바로 그 빛 아래로 찾아가 누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바다 -항해일지-> 중

나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비틀거리고 실수를 해서 성공을 놓친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때 나는 혼자인 것을.

나는 아직도 기다린다. 어느 날이 와서 마침내......

부드러움이 길게 연장되는 어던 밤들에는, 그렇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그런 밤들이 땅과 바다 위에 되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죽는 데 도움이 된다.

만일 내가 싸늘한 신에 둘러싸여 세상 모르게,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죽어야 한다면 마지막 순간에 바다가 내 감방을 가득 채우고 밀려와 내 힘 이상으로 나를 떠받쳐서 미움 없이 죽도록 나를 도와줄 것이다.

어느 갑작스러운 사랑, 어느 위대한 작품, 결정적인 행위, 변모를 가져다주는 사상은 어떤 순간 억누를 수 없는 매혹에 겹쳐 바로 그런 견딜 수 없는 불안을 갖다 준다. 존재의 감미로운 고뇌, 그 이름을 알지 못할 위험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절묘한 느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느 것인가? 다시금, 끊임없이 우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자.

나는 언제나 난바다에서, 위협을 받으며, 당당한 행복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 현실의 한복판에서 이상을 놓지 않으며 자연에 귀속하는 낙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카뮈의 산문집 "여름", 자연을 위에도 밑에도 놓지 않으면서 껴안으면서도 관조하고,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도 삶을 더 치열하게 느끼는 그의 모습이 그의 글 속에서 느껴진다. 그의 글은 아름다우면서도 힘이 넘치고, 감미로우면서 씁쓸하다. 소낙비처럼 혹은 진한 땡볕처럼 마음을 두드려대는 그의 글에 한동안 이 책을 놓지 못할 듯 하다.-

2012년 1월 23일 월요일

카뮈의 "결혼" 중

<티파사에서의 결혼> 중

본다는 것, 이 땅 위에서 본다는 것,
......
오직 바라보는 것이면 그만이었다.

사는 시간이 따로 있고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도 따로 있다. 그건 좀 덜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

태양과 바다로부터 태어나서 그의 단순성 속에서 위대함을 찾아낼 줄 아는 저 활력에 차고 멋을 아는 한 종족, 바닷가에 우뚝 서서 그네들 하늘의 눈부신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져 보내고 있는 그 종족 전체와 사랑을 나누려는 의식과 그것을 사랑으로 삼는 자부심이 내게 있으므로.


<제밀라의 바람> 중

세상에는 정신 그 자체를 부정하는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정신이 사멸하는 곳이 있다. 내가 제밀라에 갔을 때 그곳에는 바람과 태양이 있었다...... 그곳에는 무겁고 틈새 하나 없는 거대한 침묵이 - 어떤 저울의 균형과도 같은 그 무엇이 지배하고 있더라는 사실이다. 새들의 비명, 구멍이 세 개 뚫린 피리의 고즈넉한 소리, 염소들이 바스락거리며 발을 옮겨놓는 소리, 하늘에서 울려오는 어럼풋한 소음, 그 하나하나가 다 그 장소의 침묵과 황폐함을 만들어내는 소리들이었다. 이따금씩 무언가 메마르게 탁 부딪는 소리,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는데 그것은 바로 돌들 사에에 가만히 엎드려 있던 어떤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기척이었다.

제밀라의 언덕에는 바람이 분다. 바람과 태양이 분간할 수 없도록 하나로 뒤엉키고 그로 인하여 폐허와 빛이 한데 뒤섞이는 그 엄청난 혼잡 속에서 무엇인가가 다듬어져가지고는 인간에게 사멸한 도시의 고독과 침묵과 더불어 인간의 정체를 측정할 수 있는 절도를 부여한다.
제밀라에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곳은 그저 지나가다가 발길을 멈추거나 거쳐가는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다른 어느 곳으로도 인도해주지 아니하며 어느 고장을 향하여 트여 있지도 않다. 그곳은 갔다가 되돌아오게 마련인 곳이다.


포기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을 별로 없다. 여기서 미래라든가 더 잘 되고 싶다는가 출세라든가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마음의 진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다음에는 또 다른 삶이 온다고 믿는 것이 내게는 즐겁지 않다. 내게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제밀라는...... 그리하여 그때 나는 문명의 참다운 단 하나의 진보, 한 인간이 이따금씩 마음을 두게 되는 그 진보는 바로 스스로 뚜럿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하는 것임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무대장치에도 불구하고, 죽는다. 남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 병이 다 낫거든......." 그런데 죽는다. 나는 그런 것을 원치 않는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참말을 하는 날도 있다. 오늘 저녁 제밀라는 참말을 한다. 얼마나 대단한 슬픔과 집요한 아름다움으로 참말을 하는가! 이 세계를 앞에 둔 채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으며 남이 거짓말을 해주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내 명징한 의식을 극한에까지 말고 나가서 나의 모든 아낌없는 질투와 공포와 더불어 나의 종말을 응시하고 싶다. 내가 세계에서 멀어져감에 따라, 그리고 영원히 지속하는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에 집착을 가짐에 따라, 나는 죽음을 더욱 무서워하게 된다. 또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곧 나와 세계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며 영원히 잃어버린 한 세계의 열광적인 이미지들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기쁨도 없이 완성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알제의 여름> 중

우리가 어떤 도시와 주고받는 사랑은 흔히 은밀한 사랑이다. 파리, 프라하, 심지어 피렌체 같은 도시들은 웅크리고 돌아앉아 있어서 그것 특유의 세계에 테를 두르듯 한계를 짓는다. 그러나, 알제는,...... 입처럼 혹은 상처처럼 하늘로 열려 있다. 우리가 알제에서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나 다 향유할 수 있는 것, 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바다, 어떤 햇빛의 무게, 인종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파리에서는 넓은 공간과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소리가 그리워진다. 여기서는 적어도 인간이 흡족함을 맛볼 수 있고 자기의 욕망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풍요함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이곳이 요구하는 것은, 혜안을 지닌 영혼,  즉 위안받으려 하지 않는 영혼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과 하늘은 남는다.

어떤 땅과 맺고 있는 관계, 몇몇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을 느낀다는 것, 가슴이 제게 맞는 조화를 찾을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있음을 안다는 것, 한 사람의 얼마 안 되는 일생에 있어서 이만한 것이면 벌써 많은 확신이라 할 수 있다. 아마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모든 것이 이 영혼의 고향을 동경한다...... 나는 세상에 초인적인 행복이란 없다는 것을, 하루 해의 곡선을 초월한 저 너머의 영원이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이 덧없으나 근본적인 부를, 이 상대적인 진실들만이 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그밖의 것들, '이상적인 것들'을 이해할 만큼 충분한 영혼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나는 천사들의 행복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저 하늘이 나 자신보다 더 오래 계속하여 존재하리라는 사실뿐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 바로 영원이 아니라면 무엇을 영원이라 부를 것인가?.......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순수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순수하다는 것은 피의 고동치는 소리가 오후 두 시의 태양의 폭력적인 맥박과 하나가 되는 곳, 세계와의 혈연관계가 실감되는 저 영혼의 고향을 다시 찾는 것이다.


<사막> 중

우리는 이제 우리 동시대 사람들을 잘 바라보지도 않게 되었다. 오로지 그들에게서 우리의 처신에 필요한 방향과 규칙만을 찾는 데 급급한 탓이다.

사람이 가슴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늘이 피렌체 들판의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들을 엄청나고 말없는 슬픔으로 뒤덮어가기 시작하는 어떤 저녁, 나는 이 진실이 자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고장의 슬픔은 아름다움에 대한 한갓 주석만은 결코 아니다. 저녁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 속에서 무엇인가의 응어리가 풀려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오늘 내가 어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지성이 아름다움 속에 몸을 던지면 허무로 식사를 하게 된다. 위대함이 목을 죄는 듯한 이 경치들 앞에서는 인간의 사념들 하나하나는 인간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이토록 당혹스러운 확신들로 곧 거부되고 깔리고 짓깔리고 연멸된 나머지 이 세계 앞에는 그저 진실이라고는 수동적인 진실밖에 알지 못하는 저 무형의 반점, 혹은 그 빛깔, 혹은 그 태양밖에 남은 것이 없게 된다.

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미 수없이 많은 눈들이 이 풍경을 응시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 내게는 그 풍경이 마치 하늘의 첫번째 미소와도 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나를 나의 밖으로 끄집어내놓는 것이었다. 나의 사랑과 이 돌의 아름아운 절규가 없다면 모든 것이 다 무용하다는 것을 그 풍경은 내게 확신시켜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 풍경이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위대한 진실은 바로 정신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마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햇살에 따뜻해진 돌, 혹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흠씬 키가 크듯 위로 솟구치듯 시프레나무, 바로 그것이 '이치에 맞는다'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를 금그어주는 경계선이라는 사실이다. 유일한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이 없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한다. 그것은 나를 저 극한에까지 떠밀어간다. 세계는 분노하지 않은 채 나를 부정한다. 피렌체의 들판 위에 내리는 저녁빛속에서 나는 어떤 예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내 두 눈에 눈물이 괴지 않았더라면, 내 속을 가득 채우는 시의 소리 높은 흐느낌이 세계의 진실을 잊어버리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이미 다 정복당해버린 것과 같은 그 예지의 나라를 향하여.

- 카뮈의 이른 저작인 산문집, "결혼"을 여러번 되풀이 해서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 하나 하나를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당시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가 의미한 바의 모두를 이해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알제' 혹은 '티파샤'와 같은 장소가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장소에,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경외로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리라. 때론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느라, 혹은 뛰어가기 바빠 앞만 보느라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무언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니. 내가 카뮈를 어떤 작가보다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문장은 대담하고, 아름다우면서, 솔직하다는 것이다. 카뮈에게서 문장을 위한 문장은 없다. 그는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인간을 생각하고, 인간의 운명을, 죽음을, 삶을 그의 생각에 담았다. 자연에 압도되지도 않고, 영원에 기가 죽지도 않으면서, 순간을 대표하는 인간과 영원을 대표하는 자연의 대립적이면서 아름다운 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