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30일 목요일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중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Epicuros 는 기원전 311년 처음 미틸레네 학화를 세운 다음, 람프사코스에 이어, 307년 이후 아테네에서 학파를 세웠고, 기원전 271년 또는 270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에피쿠로스는 힘든 청년 시절을 보낸 이후에는 아테네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단지 건강이 나빠서 고생했을 따름이다. 그에게는 집 한 채와 분명히 집과 따로 떨어져 있는 정원이 하나 있었고, 그 정원에서 가르쳤다. 처음에 학파의 회원은 에피쿠로스의 형제 세 사람을 비롯한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으나, 아테네에서 철학을 배우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그들의 자식들, 노예들, 헤타이라들이 들어오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커졌다. 에피쿠로스의 적들이 헤타이라의 입회를 빌미로 이따금 추문을 퍼뜨렸는데, 분명히 이는 공평치 않은 처사였다. 에피쿠로스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우정을 맺는 아주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인물로, 공동체에 소속된 회원들의 어린아이들에게도 상냥하고 유쾌한 편지를 쓰곤 했다. 그는 감정을 표현할 때 고대 철학자들이 나타내리라 예상되는 점잔 빼는 행동과 자제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의 편지들은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었다.

"나는 빵과 물로 살 때 몸이 쾌락으로 충만하며, 내가 사치스러운 쾌락에 침을 뱉는 까닭은 사치스러운 쾌락 자체가 나쁜 탓이 아니라 그것에 뛰따르는 불편한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한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시달렸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법을 터득했다. 인간이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스토아 학파가 아니라 바로 에피쿠로스였다. 

부와 명예 같은 욕망이 무익하고 헛된 까닭은 만족할 수 있는 때에도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어 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최고선은 사려이며, 사려는 심지어 철학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어떤 형태의 문화이든 다 피하라"

에피쿠로스의 의견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쾌락 가운데 제일 안전한 것은 우정이다.

신들이 우리 인간 세상의 정세를 걱정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자유의지가 있으며, 우리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운명의 주인이 된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면 죽음도 나쁜 것은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운문으로 쓴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다. (이하)

인간 생명이 땅에 엎드려
종교의 잔혹성 아래
무참히 짓밟혀 처참하게 부서지고,
잠시 종교가 저 위 하늘나라에서 얼굴을 내밀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 인간을 짓누를 때,
처음으로 한 그리스인이 용감히
종교에 맞서 도덕의 눈을 치켜떴네.
분연히 일어나 종교에 도전한 최초의 인간이었네.
신들에 대한 숱한 이야기에도, 번갯불에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네.
오, 모든 것이 그의 영혼 속 대담한 용기를 더욱 북돋아
자연의 굳게 잠기 문을 헤치고 들어간
최초의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네.
그리하여 정신의 강렬한 기운이 널리 퍼져,
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세계는 불타는 성벽을 넘어
저 멀리 여행을 떠나
정신과 영혼이 아득히 멀리 넓고도 넓게
측량할 길 없는 우주 구석구석까지 미쳤네.
그때 이래 우리에게 정복자로 개선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지식을
둘 다 가져와서,
어떤 원리에 근거해 살물이 제각각 제한된 힘을 갖고
깊숙한 곳에 숨은 경계석을 갖게 되는지 가르쳤네.
그리하여 이제 종교는 인간의 발 아래 내던져져 짓밟히게 되었다.
그 사람의 승리가 우리를 하늘 높이 드높이네.

에피쿠로스 복음은 에피쿠로스 사후 6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상의 삶이 주는 비참한 고통 때문에 더욱 압박을 받게 될수록, 철학과 종교에서 더욱 강력한 처방을 계속 요구했다.


- 내가 대학때 배운 철학강의에서 '에피쿠로스 = 쾌락주의, 현실의 쾌락을 중요시한다.'라고만 배우고는 끝이었다. 이 책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기전까지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어감으로 인해 마치 에피쿠로스 학파가 신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학파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에피쿠로스는 현실의 절제와 만족에 촛점을 두고 있다. 전체의 철학사에 걸쳐 종교에 혹은 신, 사후, 윤회 등에 의존하지 않고, 현세에 중심을 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쾌락주의라는 그릇된 어감의 단어보다는 현실주의나 인본주의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기원전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기원전 이후 이러한 철학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신이나 절대자'보다는 '인간'을, '내세'보다는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며 절제하는 삶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설파한 에피쿠로스의 용기와 지혜가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