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30일 월요일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중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또 만약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이끌어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생생한 희망과 두려움 속에서 불확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는 누구나 고통을 느끼지만, 만약 마음이 편해지도록 위로나 주는 동화에 의지해 살고 싶지 않다면 그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을 망각해서도 안 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답변을 찾았다고 자신을 설득해도 안 된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 연구자를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 처음 이 두꺼운 책을 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읽을수록 빠져들게 되는 책. 이제 겨우 고대에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을 지났다. 수 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놀라우리만큼 많다는 점이 행복하다. 인간은 시대를 초월해서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 대한 안도. 과학과 철학과 신학의 출발점이 거의 같다는 점에 대한 기분좋은 느낌. (현대에 있어 지나치게 전공을 가르고, 마치 과학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같은 분야에서도 서로의 분야를 자로 긋듯이 가르는 것이 팽배한 지금, 그것이 못마땅한 나에게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준 듯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고, 시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생각들을 읽어나가는 재미.-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주제 사라미구의 "돌뗏목"중

옳은 것이 틀린 것을 만들어 내고, 틀린 것이 옳은 것을 낳지. 괴로운 사람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로군. 이봐, 슬퍼하는 친구, 위로라는 건 없어, 인간은 위로할 수 없는 존재거든.
어쩌면 주제 아나이수의 이런 의견이 옳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위로받지도 않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동, 어는 모로 보나 무의미하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행동을 보면, 인간이 언젠가는 인간의 어깨에 기대 울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이미 너무 늦었을 때일 수도 있고, 이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일 수도 있지만.

(중략)

삶을 바꾸는 데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이 생각하고, 이것저것 재보고 망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곤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우리는 원형의 운동을 하며 시간의 행로를 따라 움직인다. 더 이상 어쩔 힘이 없는 먼지 구름처럼, 낙엽처럼, 파편처럼. 차라리 허리케인이 부는 땅에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을. 그러나 어느 때는 딱 한마디면 된다. 가서 바위가 지나가는 것을 봅시다.

(중략)

하느님과 저 아들의 개가 원한다면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날 것이니.

(중략)

그렇게까지 해서 잠깐 더 사는니 죽는 게 낫다.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기다리면서. 멀리 고요한 산, 장밋빛 아침, 뜨거운 오후의 짙푸른색, 별이 뜬 하늘을 응시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 때가 찾아와도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겠어.

- 사라미구의 환상적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느날 이유없이 땅이 갈라져 이베리아 반도가 바다를 표류하게 되었을 때, 과학도 종교도 아무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을 때,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욕구중에 하나인 확실성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라미구는 특유의 해학적 필치로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을 날카롭게 비꼰다. 이 극한적 상황,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상황 (실제로 물리적 피해가 아무런 것도 없는 상황에 확실성만 결핍된 상황)에 4명의 이상한 우연의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삶에 비할 바 없는 놀라운 여행을 한다. 그들의 여행은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조용하고 여유롭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멈춘 이 돌뗏목에서 이 4명만이 진정한 삶을 살았다. 결국 나머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 생도 이 끝없는 외부의 불확실성 속에 그냥 우왕좌왕하는 것만이 아닐까? 사라미구가 말한대로 "주기의 순환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은 사람뿐이다. 사람에게는 한번뿐 그 이상은 없다." 고 말이다.

2011년 5월 3일 화요일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중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길을 반밖에 안내려갔는데도, 이 집이 안 보였어요. 집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게 됐죠. 동네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몇 피트 앞밖에 안 보였어요. 사람도 하나 안 보였고요. 모든 게 초현실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실제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했던 거죠. 다른 세계, 사실이 사실이 아니고 삶이 스스로에게서 숨을 쉴 수 있는 곳, 그런 세계에 혼자 있는 것, 저기 항구 너머, 해안 따라 길이 뻗어 있는 곳에선 땅 위에 서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인지 바다 밑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물속에 오래전 빠져버린 것 같은. 전 안개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 같았어요. 그렇게 유령 속에 유령이 돼 있으니까, 죽여주게 편안하던데요.


(중략)

아님, 잊기 위해 취하든가요. (보들레르의 산문시 <취하라>를 냉소적인 열정을 담아 비통하고 멋지게 읊는다.)

언제나 취해 있으라. 다른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것뿐. 시간의 무게가 어깨를 아프게 짓눌러 땅바닥에 짓뭉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무엇에 취하냐고? 포도주에, 시에, 미덕에,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저 취해 있으라.
그리고 이따금, 궁전의 계단이나 도랑가 풀밭 위에서, 그대 방안의 쓸쓸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가 반쯤 혹은 전부 가시면, 바람에게 파도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무엇이든 날아다니거나 한숨짓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들에게 물어보라, 지금이 무얼 할 시간인지. 그려면 바람에 파도, 별, 새, 시계 그대에게 답하리니.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고통받는 시간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취해 있으라! 술에, 시에, 미덕에, 그대 원하는 대로.'

(중략)

사실 전 언제나 어색한 이방인, 누군가를 원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대상도 못 되는 이방인, 어디에 속하지도 못해서 언제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처럼 살 거예요!


- 살아생전 출판을 원치 않았던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불편한 마음으로,  그 씁쓸한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불안하게 책장을 넘겼다. 시대가 권하는 상식, 그러니까 누군가 그렇게 느끼고 행동해야 마땅하다는 그 일반적인 생각,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가족에 대한 상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은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고 최고의 편안함과 안락의 원천이라는 이 쓸데없는 강요된 생각에 오히려 깊이 상처입고,  두려움에 떨고, 죄책감에 찌들고, 자신의 내면으로만 깊이 기어들어가게 되는. 누구하나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상처 하나 있지 않을까? 다만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회가 사람을 더욱 병들게 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