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8일 목요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 중_3_ 생애와 사상 by 전양범

1920년에 쓴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적어도 뭔가 다른 것을 원한다네. 많은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오늘날의 현실인 붕괴 현상 속에서 '좋든 싫든' 경험하고 있는 것을, 그것으로부터 '문화'가 태어날지 아니면 몰락을 재촉하는 것이 태어날지 하는 문제는 제쳐 두고."
또 1921년에 쓴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그리고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겠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는 내 철학적 임무를 현대 일반에 대한 문화 문제에 맞추어 재단하지는 않을 걸세.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그리고 나에게서...... 유래된 사실을 바탕으로 내 일을 하겠네. 이 사실과 더불어 실존하는 것이 격동하는 것이라네."

이 책의 진의는 그때마다 항상 애매함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리하여 '존재와 시간'이 현대의 사상계에서 깊은 애매함에 둘러싸여 있으며, 스스로 그 애매함을 발산하고 있다는 사정이 한층 명료해졌다. (중략) 그것은 하이데거 '자신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알았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과거가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알 수 없게 되어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의 첫머리에 나와 있는 플라톤의 말이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의 현존재는 타인의 지배아래 자기 자신을 잃고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평균성을 기준으로 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안심한다.

세계에 몰입하여 '사람'으로 해소되고 자기 자신을 잃고 있는 현존재의 일상적인 모습을 하이데거는 '퇴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상성에서는 아야기되는 것에 관계를 나누어 갖는 대신에 단지 이야기되는 그것만이 중요해진다.

이 잡담 속에서는 애매함이 그 내용의 진정성을 잃게 하여 현존재의 가능성을 질식시킨다.

거꾸로 말하면 퇴락이란, 자기 자신일 때 느끼는 이 까닭모를 불안함을 피하기 위해 본디적인 자기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까닭 모를 불안함을 견뎌야만 한다.

이른바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게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해 왔고,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을 죽음의 거울에 비추면서 살아간다면, 그 순간을 자신의 삶 전체를 살아나가는 것처럼 충실하게 살아갈 것이다.

과학은 무를 알려고 하지 않고, 또 무는 논리학에서도 파악되지 않는다. 무는 불안하다는 기분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불안은 존재자 전체를 사라지게 하고, 우리는 아무런 버팀목도 없는 동요 속에서 무를 경험하는 것이다.

"불안한 무의 밝은 밤에 비로소 존재자 그 자체의 근원적인 열림이 생기는, 그것은 즉 존재다이고 - 무는 아니라는 것을"

형이상학이란 그리스어 meta-physica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하이데거는 이용어는 나중에 존재자를 '넘어서 (meta)' 나아가는 물음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형이상학이란 존재자를 초월하는 물음'이고 이것은 무에 대한 물음 속에서 생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언어의 작용은 종종 시를 통해 해명된다. 언어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시작(詩作)' 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의 시작이란 문학작품으로서의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앞서는 더욱 근원적인 인간의 본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중략) '시작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사는 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시작이란 존재의 말에 대한 응답이라고 보아도 좋다.

'존재는 사색을 통해서 언어로 온다'

즉 주관주의는 '존재망각'에 기초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존재망각의 한복판에 있다.

인간의 역사는 존재망각의 역사이며, 현대는 그것이 극도에 이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횔덜린의 시를 인용하여 '결핍된 시대' 또는 '세계의 밤의 시대'라 불리는 존재망각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대의 기술적 세계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본연의 모습을 설명한 <평정>이라는 소설 속에서도 하이데거는 '기다리는 것'을 설명한다. (중략)
또한 기다리는 것은 '망보는 것', '지켜보는 것'이다. 지켜보는 것은 '사는 것'이다. (중략)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며 '존재의 문지기'이다.

결핍된 시대 또는 세계의 밤의 시대란, '가버린 신들은 이제 없고, 와야할 신들은 아직 없는 시대', 즉 신들의 부재의 시대를 말한다. (중략)
여기서 말하는 신들을 존재라 해도 좋다. (중략)
시인을 '집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세계라는 집의 친구란 어떤 사람일까. 하이데거는 헤벨의 말을 따라, 그것을 지구에 대한 달에 비유한다. 달은 밤에 우리에게 부드러운 빛을 내려준다. 그 빛은 달이 스스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여 보내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친구인 시인은 세계의 밤에 혼자 깨어 있는 자이다. 그는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다시 지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세계를 밝힌다. 그는 사람들이 존재로부터 받고 있으면서도 밤에 자는 사이에 잊어버린 것을 지켜보고, (중략)
하이데거가 설명하는 시인은 이처럼 그가 들은 말을 전함으로써, 존재망각이라는 밤에 사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시인이 단순히 문학작품으로서의 시를 만드는 특이한 재능을 지닌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본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중략) 사람이 세계에 사는 본질적인 모습, 존재의 목자로서의 본모습을 시인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 특별히 해설 부분을 다시 적은 것은 '존재와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다른 부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은 '존재와 시간'으로 발화된 듯 하나 아직 전파의 단계는 아닌 것 같이 생각되었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소중히 여긴 것에 대해, 시작(詩作)의 역할에 대한 믿음을 가진 것에 대해 너무도 기쁘고 안도한다. 문학작품이 단순한 유희거리가 아닌, 존재 자체를 밝혀줄 수 있는 존재로부터 나온 등불과 같은 것임을 일깨워준 것은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스스로 밤에 혼자 깨어있는 사람, 존재자체로의 불안과 더불어 사람속에 녹아들어가지도 못하는 외로움을 더하고도 존재에게 빛을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은 그 누구나이고 그 누구도 아닐 수 있다. 다만 그것은 매순간의 선택, 하이데거가 말한 결단성을 가지고 자신을 세계속에 던짐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내게 주어진 하나의 삶, 하나의 순간, 세계를 전부로 만드는 하나의 연약한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으로서, '어떻게'라는 문제를 손에 쥐었다. 어렵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놓아버리고 싶고, 잠 못 드는 순간이 이어지더라도 나의 존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침묵하고', '기다리고', '지켜보고', '써내는' 그런 삶, 모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세기의 철학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모두의 비웃음을 안고도 불안한 밤, 현존재를 비추는 달로써...... 삶의 의미를, 혹은 무의미를 찾아.
니체가 말한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 하이데거에 의해서도 마찬가지, 그것도 매순간......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 중_2_ 제2편

이해란 본디 어떤 의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투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가능을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는 관심이다. 관심 내부에는 사실성 (세계 속에 내던져진 성질), 실존(기투), 퇴락이 포함되어있다. (중략) 현존재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는, 관심을 통해 자신의 내던져진 성격상의 사실로서 끊임없이 존재한다. (중략) 그리고 현존재가 실존하면서 자기 존재가능의 근거이기도 하다는 사실 역시 전적으로 같은 이유다. 현존재가 그 근거를 스스로 구축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현존재는 그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짐의 무게가 기분에 의해 현존재에게 무거운 짐으로 나타난다.
(중략) 그것은 오직 현존재 자신이 이미 내던져져 있는 곳에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기투하는 존재양상일 수밖에 없다. 현존재가 자기인 이상 자기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마련해야만 하는데, 이 현존재인 자기는 결코 그 근거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지 못한다. 그런데도 자기는 계속 실존하면서 사신이 근거가 되는 일을 떠맡아야 한다. 스스로의 내던져진 성겨적인 근거를 존재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존재의 밑바탕에 있는) 관심이 관련되 있는 존재가능이다.
현존재는 내던져진 존재로서 실존하면서, 즉 자신의 근거가 되면서 스스로 모든 가능성 뒤에 부단히 서 있다. (중략)
현존재가 자신의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의 실존에 통해서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가능성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그런 이해를 통해 내던져진 존재자로서 존재함으로서이다.

이 존재자가 해야 할 일은, 그 책임을 본디적으로 짊어진 채 존재하는 일이다.
위 해석에 따르면 양심이 호소하는 소리를 올바르게 듣는다는 것은, (중략) 가장 고유한 자신의 본디적 책임을 지면서 존재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를 기투하는 행위다.

일상성은 현존재를 배려해야 할 존재, 다시 말해 관리해서 끝마쳐야 할 용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경우 '인생'이란 수지가 맞든 안 맞든 일종의 '사업'인 셈이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에 포함되어 있는 개시성의 3가지 구성 요소를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첫째 요소는 불안한 심경이다. 둘째 요소는 가장 고유한 책임 있는 존재를 향한 자기 기투로서의 이해이다. 마지막 셋째 요소는 침묵을 지키는 이야기이다. 이 3가지로 구성되는 개시성은, 현존재 자신에게 있어 그의 양심에 의해 증명되는 본디적 개시성이다. 이 두드러지는 본디적 개시성은,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의 책임 있는 존재를 향해, 침묵을 지키고 불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기투함을 뜻한다. 이 두드러지는 개시성을 이제부터 결단성 (決斷性, Entschlossenheit) 이라 부르겠다.

세상 속에서 세인들이 기도하는 일에 대한, 애매하고 시기심 섞인 약속이나 수다스러운 우호관계 등으로부터 진정한 상호관계가 탄생할 리 없다.

현존재가 자신을 단호하게 내보이는 모습, 즉 결단성은 무엇을 위한 결단성일까? (중략)
이처럼 세인 속에 녹아들어 있던 현존재가, 자신을 불러 일깨우는 소리를 듣고 그에 따르는 것이 바로 결단성이다. 그래도 세인의 비결단성은 여전히 지배력을 휘두를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단하 실존을 아래로 끌어내리지는 못한다. (중략)
결단성을 통해 현존재는 가장 고유한 자기 존재가능에 접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던져져 있는 존재가능이므로, 특정한 사실적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기투할 수밖에 없다. 결단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결단성의 결단을 통해 현실적으로 간으한 것을 비로소 발견하며, 심지어 그것을 세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서 가능한 형태로 장악할 수 있다.
(중략) 우리가 마주치는 온갖 사정이나 우연한 사건 등 객체적인 혼합물 따위를 상황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상황은 오직 결단성에 의해서만, 또 결단성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실존하면서 스스로 현으로 존재하는 자신이 그 현을 향해 결단하고 있을 때에만, 온갖 사정이 지닌 그때그때의 사실적 적소성이 비로소 자신을 향해 개시된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동세계와 환경세계로부터 때가 되었다는 듯이 우리 앞에 뚝 떨어지는 일도, 그 우연을 받아들일 결단성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럼 세인에 대해서는 어떨까? 위와는 반대로, 상황이 세인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굳게 닫혀 있다. 세인으 고작 '일반 정세'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세인은 눈앞의 '기회'에 정신이 팔려, 온갖 '우연'을 조합하여 현존재를 요리한다. (중략)
결단성은 현의 존재를 상황의 실존 속으로 가져온다. (중략) 대신 양심은 우리를 상황 속으로 불러낸다. (중략) 결단성은 상황 속에 이미 몸담고 있고, 현존재는 결단하는 현존재로서 이미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존재는 침묵하면서 불안을 받아들이는 결단성을 통해 근원적으로 고독해짐으로써 본디적 자기가 된다. 본디적 자기존재는 침묵하는 것이므로 '내가, 내가......'라고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다. 그 존재는 침묵한 채 자기 스스로 그것으로서, 본디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내던져진 존재자인 것이다. 결단하는 실존의 침묵이 드러내는 자기야말로, '자아'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기 위한 근원적인 현상적 지반이다.

이 도래 (到來, Zu-kunft) 는 그때마다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향해 오는 것으로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으로서 실존하고 있다.

환경적 존재자는 이제 적소성을 잃었다. 내가 실존하고 있는 세계는 무의미함의 바다 밑으로 잠겨 버렸다. (중략) 불안은 '세계의 무'에 임할 때 불안감을 느낀다.  (중략) 적소성을 잃어버린 존재자는 공허한 비정함으로 현존재에게 다가온다. (중략) 그런데 이 공허한 세계에서 '이해'는, 불안을 통해 결국 세계내존재 그 자체와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불안이 최종적으로 임하는 대상은 바로 세계내존재다. (중략)
불안은 세계의 무의미성을 열어보인다. 이 무의미성은 배려 가능한 것들의 무성(無性)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자신이 배려해 온 일에 일차적으로 바탕을 두었던 실존의 존재가능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행위는 이제 불가능하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불가능성이 나타난다는 말은, 본디적 존재가능의 희미한 가능성을 목격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한다.
(중략) 불안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섬뜩함 속으로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적나라한 현존재'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이 선험적 본디성 안에서 스스로 존재가능했었다는 점으로부터 자기를 이해하고, 이 세계 속에서 죽음을 응시해야하는 고통을 견뎌 내면서, 자기 자신인 존재자를 그 세계 속으로의 피투성에서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의 사실적인 '현'을 결단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상황에 대한 결의를 뜻한다.

가능성을 선험하면서 자기 내부에서 죽음의 위력을 키워 나갈 때, 현존재는 죽음을 향해 자유로워지며 그 유한한 자유에 깃드는 자신의 '압도적인 힘'에서 자시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때그때의 선택이 스스로 선택한 것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 유한한 자유에 있어,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떠맡겨져 있는 '무력(無力)'을 받아들이고 그곳에 개시되어 있는 상황의 모든 우연들을 투찰하게 된다. 그러나 운명적인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인 이상,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재에서 실존한다.

결단성 속에는, (가능적으로) 선험하면서, 또 자신을 순간의 현에 전승하면서 부탁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결단성의 일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빌헬름 딜타이와 파울 요르크 폰 발텐부르트 백작과의 왕복서한' 중>
"아무리 실재적인 것이라 해도, '물자체'라고 간주하기만 하고 실제로 체험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그림자가 될 뿐입니다." (중략)
"이렇게 나는 조용한 자기 대화를 즐기고, 역사의 정신과의 교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중략) 그 일을 추구하는 노력은 야곱의 격투와도 비슷해서, 격투하는 사람 자신에게 반드시 이익을 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요르크는 역사의 근본적 성격이 '잠재세력'임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다. (중략)
"철학하는 일은 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처럼 '해시계'를 보고 알아내는 시간, 하지만 또 어는 회중시계를 봐도 직접 알아낼 수 있는 이 시간은, 대관절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오히려 '시간'은 먼저 '하늘'에서 나타난다.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시간에 순응할 때' 시간을 발견하는 장소가 바로 하늘이다. 그래서 '시간'은 이따금 하늘과 동일시되기조차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마음이나 마음의 정신 이외에, 헤아리는 소질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즉 마음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이리하여 나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넓이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의 넓이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것이 마음 그 자체의 넓이가 아니라면 놀랄 일입니다."

그 '진보'의 한 걸음마다 정신은 자기의 목적에 대해 진실로 적대적인 장해로서의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가야만 한다. 정신의 발전 목표는 '자기 자신의 개념을 달성하는' 일이며, 그 발전 자체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벌이는 엄격하고 무한한 투쟁'이다.

시간이란 '외적'인 직관된 자기이며, 자기에게 '파악되지 않은' 순수한 자기이다. 즉 단순히 직관된 개념이다.

존재 전반의 '이념'의 근원과 가능성에 대해 형식논리학적 '추상'을 써서 살펴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음과 해답의 정확한 지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의 기본적인 물음을 해명하는 '길'을 추구하며, 그 길을 실제로 '걷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단 하나의' 길인지, 아닌지, 또 그것이 애초에 '제대로 된' 길인지 어떤지는, 그 길을 걸은 다음에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존재의 해석을 둘러싼 싸움은 조정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은 아직 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까닭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싸움에 불붙이는 일 자체가 이미 상당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근본적인 탐구는 오로지 이를 위한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온 것일까?



- 답은 없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작에서는 답은 없다. 그러나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존재의 근원이자 본질임을 그는 주시하고 있다. 또한, 그 문제를 제시하고, 생각하고, 결단하고, 자신을 대면하는 일. 그것이 존재를 현존재로 만드는 핵심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말하고 있는 것처럼 존재론의 해명을 위해서는 실제로 그 '길을 걷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방법이나 정의도 내려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각 존재만이 자신의 유일한 답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서 있는 것, 걷는 것, 자신이 그 길을 걷는 것을 인지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것이다.
결단성을 가지고, 불안함을 가지고, 이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의미자체를 현존재의 손에 들려준 것, 인간의 가치를 인간에게 회귀시켜준 것 (오직 퇴락의 길을 걷지 않고 자신을 결단성 속에 내던지는 사람에게만 한해서), 그것이 하이데거의 크나큰 업적이 아닌가 한다.
하이데거는 그의 사색의 결실을 통해 세상-내-존재로서 진정한 현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출발선 상에 우리를 세워 놓았다. 이 어렵고도 불안한 길, 순간 순간을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이 길. 죽음이라는 한정속에 시간의 거울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는 그런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발광(發光)하여 주변의 존재들을 비추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를, 이 철학과 사색이 매장된 미디어의 암흑속에서 간절히 바래본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 중_1_ 서론, 제1편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쉬지 않고 치열하게 매달리며 탐구했던 존재에의 물음이지만 그 뒤 침묵해버리고 만다. (중략)
사람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불필요하다고 선언하고 나아가 이 물음을 소홀히해도 좋다고 시인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물에 대한 이 보편적.직접적 개념이 가장 명백하고 더 이상의 어떤 논의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마음도 어떤 의미에서 존재자다' 라고 하였다. (중략) 이 각별한 보편적 존재자, 즉 '모든 존재자와 합치할 수 있는 본성을 갖춘 존재자'는 바로 마음(anima)이다.

현존재란 스스로 존재하면서 스스로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는 존재자이다.

공동존재 (일상적인 나)와 공동현존재 (실체적.보편적인 나)가 그것이다.

세계에 근거하지 않은 단순한 주관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결코 주어져 있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우선 고립된 자아가 타인들 없이 주어지는 일도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이렇게 환경적으로 해방된 존재자는, 그 가장 고유한 존재의미에서 볼 때, 세계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공동으로 현존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그 동일한 세계 안의 내(內)-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이렇게 배려된 세계에 녹아 들어가는 존재가 아니다. 즉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존재에 녹아들어가는 자신이 아니다.

현존재는 일상적 상호존재로서 타인의 통치하에 있음을 의미한다. 현존재가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 현존재로부터 존재 (외면적.일상적 존재)를 빼앗아버렸다는 것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공동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되는, 눈에 뜨지 않는 타인의 지배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사실상 평균성 안에 살고, 그 집요하고 강력한 평균적 입장에서 그때마다 뭔가 타당한 대상을 정하고, 모든 평균적인 경향을 시인하고 호평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거부한다. 이 평균성은 허락된 기획의 가능범위를 미리 지도한다. 어떠한 예외도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그래서 아무리 고귀한 진가를 가진 것이라도 소리하나 내지 못하고 억눌리게 된다.

'현(Da)으로'는 '거기'와 '여기'를 동시에 가리킨다.

인간 안의 '자연의 빛'이라는 존재적 비유적인 표현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현'이라는 존재방식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이 존재자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조 그것을 의미한다. 이 존재자가 '조명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의거해서 세계내존재로서 밝에 비추어 준다는, 즉 다른 존재자에 의해 상호관계적으로 비추어진다는 말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 스스로 밝음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비추어진다는 의미이다. (중략) 현존재는 스스로의 개시성 (열어보이는 성질) 인 것이다.

심경(心境)은 현존재를 열어보인다. 즉, 그 '피투성 (세계 속에 존재로서 몸을 던짐)' 에서와 현존재의 존재와 더불어 그때그때에 이미 열어보여진 세계로의 '의존성'에서 열어보인다. 뿐만아니라, 심경 그 자체가 실존론적인 존재양식이며, 이 존재양식으로 현존재는 자기를 부단히 '세계'에 넘겨주고 있고, 자기 스스로 어떤 방식을 통해 회피하듯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회피하는 실존론적인 근본양식, 그것이 현존재 스스로의 '현 (現)'이다.

이해가 '기투(企投)'라고 불리는 실존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소음'을 '듣기' 위해서는, 미리 복잡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중략) 주관(主觀)을 발로 걷어차고 마침내 하나의 '세계성'에 도달하는 도약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감각의 혼잡이 먼저 형성되어야만 한다.

'자연의 빛'에 대해서 지적하고, 내존재의 개시성을 현존재의 '광명'이라고 불렀다. 현존재의 이 광명 속에서 비로소 시야라는 것도 가능해진다. 시야는 현존재에 적합한 모든 개시의 근본양식, 즉 이해를 염두에 두면서 존재자가 진정 자기 소유가 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 존재자란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상 모든 존재가능성에 따라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자이다.
(중략)
인식도 이미 '보는 욕망'에 의거해서 파악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략) 근원적이고 참다운 진리는 순수직관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 감관의 경험을 통틀어 '눈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이미 '현재 거기에' 있지만 - 다시 말하면 위협에 미치는 사물은 가슴이 답답하도록 숨이 막힐 만큼 가까이에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 그러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도대체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어떤지, 또 세계라는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지 어떤지 하는 물음은, 이미 세계 내에 존재하고 있는 현존재로서는 무의미한 물음이다 - 하지만 그 현존재 외에 누가 이 같은 물음을 설정할 수 있단 말인가.

로고스에는 비은닉성 '아 레테이아 (진리)'가 속해 있다. (중략) '자명하다고'

현존재의 존재기구에는 '기투'가, 즉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보이려는 존재가 속해 있다. 현존재의 존재구성은 세계 속으로 자기를 '기투'한다. 그서은 자신의 존재가능을 향해 자신을 열어보이는 존재다.

'영원한 진리'를 주장함은, 현존재의 현상적 근거인 '관념성'을 관념화된 절대적 주관이라는 것과 혼동함과 같이, 철학적인 문제성의 내무에서 아직도 철저하게 추방되지 못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잔재에 속한다.


-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제목만으로도 그 매혹을 알 수 있는 책이었다. 많은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할 것 같아 시간을 미뤄 한꺼번에 읽었다. 처음에는 그의 사색에서 나온 철학적 진술이 기존의 다른 철학자들과는 사뭇 달라 혼란스러웠다. 이론적으로 설명하거나 검증이 전혀되지 않는 하이데거 자신의 사색에 기초한 생각의 나열은 동의를 불러 일으키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나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자세를 이해하고, 이 책이 미완성임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 내가 느꼈던 혼란스러움이 오히려 당연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더 큰 것임을 알게 되었다.
존재에 대한 치열한 물음은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만큼 많은 시간을 그 물음에 대답하고, 현존재를 정의하고, 현존재와 세계와의 관계를 규명하려 하고, 그럼에도 불투명한 현존재의 광명을 제시하려 애 쓴 사람도 없는 듯하다. 이후 샤르트르가 존재의 현존에 대해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규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하이데거의 이러한 철학적 노력이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하이데거의 사상중, 가장 내게 와닿은 멋진 부분은 현존재의 '광명'에 관한 부분이다. 어두운 전쟁의 상황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기본적 믿음과 신뢰를 놓지 않았던 하이데거의 사상이 미디어와 물질문명의 암흑에 덮여 인간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잃어버린 (타자에 의해서뿐 아니라 스스로 잃은) 현재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

아무것도 셈하지 않고, 무엇도 바라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 살다보면 사랑도 그렇게 완성될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어려서 잘 몰랐었지만 '아, 그떄 아버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힘들었구나' 하는 늦어버린 시간의 느낌을 만지게 된다. 그 목적지가 홍콩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떠났던 홍콩은 어떤 나라일까 앤드류는 상상했다.
일단 앤드류는 여행가방에다 아버지가 홍콩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홀로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들을 챙겨 담았다. 그리고 그걸 들고 홍콩에 와서는 사진의 배경이 된 곳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버지와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아버지처럼 똑같이, 혼자 삼각대를 놓고 말이다. (중략)
앤드류는 그냥 홍콩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일부분과 손을 맞잡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나의 퇴락은 어쩔 수 없겠으나 세상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보는 것에 대한 허기와, 느끼는 것에 대한 가난으로 내 자신을 볶아칠 것 같습니다. 이 오만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병률의 새 산문집을 맨헤튼의 한국서점에서 만났을 때 7년전 그렇게도 좋아해서 읽고 또 읽던 이병률의 '끌림'을 본 양 너무도 반가웠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그의 '끌림'만큼의 끌림은 없었고 사진과 글 속에 많이 지쳐보이는 작가를 보는 듯 했다.
글이 흘러넘쳐서 갈 곳을 찾지 못할 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2013년 3월 15일 금요일

장용학의 '비인탄생'

건너편 능선 저쪽에 저 끝까지 지붕이 이랑을 이룬 도회의 회색, 저것이 인간 정신의 피부란 말인가? 체온이었단 말인가?
그것은 묘지였다. (중략) 자연의 군더더기가 날려다 벌어지는 지정구역이었다. 인간은 말하자면 그 소제부이다. 그 쓰레기를 염색해서 뒤집어쓰고 그들은 그것을 문명이다 과학이다 예술이다 에티켓이다 축구시합이다 코카콜라다 하고 흥분한다. 흥분에서 가치가 생긴다는 것이다. (중략)
저 하늘의 맑음을 보고, 저 산의 숭엄함을 보고, 저 전야의 부드러움을 보고, 그리고 시선을 당기어 도시를 보아라. 지상에서 제일 지저분한 부분이 도시다. 그 속에 미가 있다면 어떤 미이고, 그 속에 의가 있다면 어떤 의이고, 리가 있다면 어떤 리겠는가.

그 손이 멈칫해졌다. 온몸이 옴투성인 것만 같은 것이다. 손으로 찝으면 살이 흐무러지면서 진물이 줄줄 흘러나올 것만 같다. 고름 부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뉘 집 아들이 아니고, 고름 부대인 것이다. 아직 흐무러지지 않아서 고름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을 뿐이다.

심심하지도 않을 텐데 몇 번을 그렇게 놀다가 무심결에 그는 그 티끌을 잡아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희미한 티끌이었다.
그저 기류를 타고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가지고 날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그 둘레에는 명주실 같은 무리가 걸려 있다.

내 눈에 일어나 현상인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제 마음대로 논다. 내 속에 나 아닌 것이 있는 셈이다. 나의 의지에 속하지 않는 나의 기능이 있다. 인간 속에 인간이 속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이것이 <무>라는 건가.......

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아무 이의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괴리!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이 잔상의 일종이든 괴리이든 그것은 내가 아니다. 적어도 현재의 나는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현재로 나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생이라는 것의 자세인가?
무가 유를 제거하고 있다. 과거가 현재에다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 구멍을 메우는 작업이 <생>이라는 말인가?그러서 아무리 나를 꽉 붙잡으려고 나를 꼭 껴안아도, 어디론지 내가 흘러나가 버리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땅이 아닌 땅에서 나의 땅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거기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나는 여기서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살고 있다. 이것은 나의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가 아닌 곳에서 살아야 하는 모욕. 인간이란 모욕인가? 모욕에 그쳐야 하는 것이 인간이란 이름인가......?

사람의 미골은 꼬리가 있었던 기념이 아니라 이제부터 거기서 꼬리가 생겨날 징조인지도 모른다. 파리가 이렇게 번식하는 공기 속에서 그렇게 딴딴하게 달려 있었던 꼬리가 없어졌을 리 없다. 그렇게 미학적인 인간이 그렇게 미학적인 꼬리를 없애버렸을 리 없다. 그러게 고적보조회 회원이 되기를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그 <고적>이 인멸되어 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을리 만무다.
이제 거기에 꼬리가 나봐라. 인생이 얼마나 부드러워지고, 세계가 얼마나 밝아질 것이겠는가. 사람들은 우선 자기가 땅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깨치게 될 것이고, 하늘이 높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서 있는 것이 어쩐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설레어질 것이고, 마침내 두 손으로 땅을 짚을 것이다. 마음에는 지동설의 현기증이 비쳐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손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만둘 것이다. 만들어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물건은 필요없게 될 것이다. 모든 물건이 없어질 것이다. 이름이 없어진다. 이름이 죽는다......

우습지도 않다. 슬프지도 않다. 그저 그렇다. 더 우습고 더 슬픈 것이 저 도시에는 전봇대의 수효보다 많으니 말이다. 그 쓰레기더미를 좋게 표현하면 신화의 숲이다. 거기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공공연하게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양담배 서너 갑과 목숨이 흥정되는 수도 있다.

저 방에서 어머니의 신음 소리도 곤히 잠들고, 지상은 깊은 무에 젖어 있고 하늘에선 별들이 소리없이 영겁의 곡성을 뿌리고 있는데, 나는 소변을 보겠다고 허정허정 변소를 찾아간다. 이것이 산다는 건가? 이렇게 치사스러워야 생인가? 그래도 바지가 흘러 내릴까봐 춤을 꼭 잡아쥐고 허정거려야 삶이 살아진단 말인가? 지저분한 그 생을 비단에 싸듯 꼭 싸들고 소변을 보는 나의 그림자. 생의 비극적 포즈, 그런 소변을 보고 나서도 후련해하는 내 마음......

아들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저렇게까지 해서 먹여 주는 것일까?

죽음이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중지였다. 중지된 채로 흐지부지해져 버리는 것이었다. 중지된 채로 영원히 그러고 있어야 하는 무료......


- 전후 50~60년대의 한국 단편을 손에 든지 며칠, 그리고 아름다운 문체와 깊이를 가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장용학의 '비인탄생'을 읽으며, 그 철학과 문장이 샤르트르의 '구토'와 비견할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오히려 문장의 유려함은 그 이상으로 생각된다.
인간존재와 도시로 비견되는 사회의 대립구조, 자신의 어머니조차 부양하지 못하고 굶겨죽이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못하는 주인공, 자연으로의 회귀에 대한 열망, 죽음으로도 그 존엄을 회복하지 못하는 존재의 무보더 더한 처량함, 등이 지적이고도 유려한 문장으로 살아난 듯 하다. 단편임에도 장편에 못지 않는 무게와 철학을 지닌 소설.
요즘들어 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마치 소설이라는 형식만을 위해 쓰여진 듯한 글들을 읽으며 낙담한 마음이 전세대의 치열한 단편들을 읽으며 위로받은 듯 하다. 이렇게, 이렇게 써야하는 것이다. 단 한줄을 쓰더라도 자신을 속이는 일 없이!

2013년 3월 11일 월요일

S.E. Bronner 의 'Camus, Portrait of Moralist' 중

The men of my race arrive on wingless, eyeless ships.     -Andre Malraux-

His childhood taught him a singular understanding of misery, which made his empathy with the disempowered genuine. (skip) a hatred of intolerance,

"religious atheism." Its philosophical proponents, such as Friedrich Nietzsche, Martin Heidegger, and Karl Jaspers, were all radical invidulualists and sophisticated intellectuals. Whatever their youthful concerns or their political passions, as mature thinkers they belonged to no church, embraced no form of religious dogma, and founded no mass movement.
All of them emphasized the role of personal experience and the responsibility of the individual in shaping his or her fate.

"One solitary geranium, its leaves both pink and red, and a great silent feeling of losss and sadness that teaches us to know the pure and beautiful face of death"

<The Stranger>
a man commited to remaking his life in the shadow of death.

Meursault, is that man. Society must elicit a reason for his actions, and since he refuses to provide one, the prosecutor portrays him as a cold-blooded psychopath. (skip) The act without purpose indeed mirrors a world without meaning.

Society offers no answers. Its hypocritical moralism is reflected in trial of Meursault

"What the priest attempts to do, in Meursault's eyes, is to steal from him that life which has become his good in the face of death, to take away the value which has revealed itself against the background of death."

<Sisyphus>
the lack of a predetermined meaning creates the possibility of living life more fully, and this possibility can only become manifest by "keeping the absurd alive"

a new existensial challenge: the possibility of experiencing happiness without hope.
(나는 여기서 happiness라는 표현은 Camus의 의도에서 볼 때 적절치 않은 듯하다. life itself 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듯하다.)

Young people all over the worldin the 1930s considered democracy impotent, humanism worthless, and individualizm decadant. (skip) Millions were sacrificed and many millions more suffered war and deprivation for these utopian ends.

To lose one's life is no great matter; when the time comes I'll have the courage to lose mine. But what's intolerable is to see one's life being drained of meaning, to be told there's no reason for existing. A man can't live without some reason for living. (in Caligula)

<The Plague>
Its sober prose, its careful construction, and its deliberate understatement all contribute to its enduring success. (skip) "no question of heroism in all of this. It's matter of common decency. That's an idea which may make some people smile, but the only means of fighting the plague is - common decency."

the just society of the future cannot rest on the sacrifice of innocent individuals in the present.

Politics are made for men and not men for politics. We do not want to live on fables. In the world of violence and death around us, there is no place for hope. But perhaps there is room for civilization, for real civilization, which puts truth before fables and life before dreams. And this civilization has nothing to do with hope. In it, man lives on his truths.

To understand this world, one must sometimes turn away from it; to serve men better, one must briefly hold them at a distance. (in Summer)

No man can say what he is. But sometimes he can say what he is not. Every one wants the man who is still searching to have already reached his conclusions. (in The Enigma)

the famous words by Walter Benjamin:"Only for the sake of the hopeless is hope given to us."

Poor people's memory (skip) it has fewer landmarks in space because they seldom leave the place where they live, and fewere reference points in time throughout lives that are gray and featureless. Of course there is the memory ofthe heart that they say it is the surest kind, but the heart wears out with sorrow and labor, it forgets sooner undre the weight of fatigue. Rememberance of things past is just for the rich. For the poor it only marks the faint traces on the path to death. (In The First Man)

He refused to bend his principles in response to the exigencies of political pratice,

Perhaps because he had turberculosis, he never turned death into a fetish as Heidegger did, and surely because he once knew real poverty, he never idealized the poor as Sartre did.
(skip) Sisyphus, Meursault, Rieux, and the rest all exhibit a mixture of skepticism and tolerance, lucidity and courage, a sense of responsibility and a willingness to learn. Even Clamence had his moments. (skip) he worte of Sartre's Nausea that "in a good novel all the philosophy is passed along through the images."

"We must serve justice because our condition is unjust, increase happiness and joy because this universe is unhappy. Likewise, we must not condemn others to death because we have been given the death sentence." (In Notebooks)

Camus wanted to make people face themselves.

only by recognizing the vanity of attempting to change everything is it possible to change some things.

- '내가 원하는 한 마디를 하지 못할까 두렵다.'라고 했던 카뮈의 글은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의 글과 행동, 그 어떤 것도 나의 이상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다. 카뮈가 말하는 'common decency',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얼마나 남아있는가?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 존재 자체를 극진한 눈으로 바라보는 카뮈는 20세기의 Prometheus인 듯 느껴진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그 인간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사회와 조직, 이념에 의해 인간의 의미를 잃고 희생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카뮈의 긍정이 그의 글 속에 녹아 여태 마음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