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5일 일요일

장 그르니에의 "섬" 중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을 말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있음을 체험했으니 말이다.

몸과 혼으로 알려하지 않고 지능으로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악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현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다 깊고 더 심각한 문제였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내게도 어떤 이상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심>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겨가게 된다. 나는 유희에 말려들고 덧없는 것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절대를 찾는다. 입을 다물고 무시해 버리지는 않고 나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계속 불러 일으키고 있다. 상표가 다른 두 자루의  펜을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참혹하다.......(중략).......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덜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중략)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노라면 이런 가득함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즉 그냥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
(중략)
우리들에게는 마땅히 해야할 일이란 없으며 우리들의 입장이란 성립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갖 수증기라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도시를, 어떤 짐승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여자를, 어떤 친구를 사랑하는 것 - 우리는 머릿속으로 이런 것을 서로 구별하려고 애쓰고, 마음속으로는 이런 것이 다 같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규칙 따위와는 상관없는 활동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어내고 규칙이 정해져 있는 활동에는 규칙을 없애버린다. 가면을 벗어 내팽개친다. 그 가면 대신에 다른 가면을 쓴다. 나중 것이나 먼저 것이나 매한가지이고 먼저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중 것도 중요하다.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ㅇ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음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사상의, 그의 마음의 무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



비록 내가 그것에서 헤어난다 한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아니 과연 이제 내가 그것에서 헤어날 수 있기나 한가? 내게는 그것이 아쉽지만 그것은 나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세계는 저절로 주어지는 구경거리이며 나는 그 구경거리의 장면들이 현실이며 그 배우들이 현실임을 믿는다. 세계는 오직 내가 깨어 있는 순간에만 제가 부재함을 알린다........(중략)....... 내가 잠들면 나는 <그것>에 가까워지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려 한다. 나는 돌이 우물 속 깊이 떨어지듯 그의 속으로 떨어진다.


-알베르 카뮈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장 그르니에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책. 그가 담고 있는 사상의 무게가 존재의 허리가 휘도록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그르니에는 그 무거운 부조리함을 부드럽게 받아들여 가볍게 승화시키고 있다. 그는 꿰뚫어보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그의 글 속에 삶의 공허함을, 부조리함을 포근하게 담는다. 그래서, 이 짧은 글이 그토록 매력적인가 보다.

2011년 11월 19일 토요일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 중

삶의 의미가 없어져도 여전히 삶은 남는다.


이리하여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더 이상 우리의 존재를 보증해주지 못한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스스로 행동하기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니체는 담벼락에 달려들어 부딪치지만 스티르너는 궁지에 몰려서도 웃는다.


역사적 기독교는 자연을 송두리째 죄의 원천으로 만들어버리게 된다......(중략)......그러나 기독교는 삶에 있지도 않은 가공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허무주의적인데도 말이다.
(중략)
신과 도덕적 우상을 제거하고 난 이세계에서 인간은 이제 주인 없는 고독한 존재다. 누구보다도 니체는 이러한 자유가 손쉬운 것일 수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바로 이 점으로 해서 니체는 낭만주의자들과 구별된다. 이러한 사나운 해방으로 인하여 니체는, 새로운 비탄과 새로운 행복을 고통스럽게 맛보게 되리라고 그가 말했던 그 사람들의 대열에 서게 된다......(중략)......더 이상 신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 고통으로부터 태어나 삶의 고통에 내던져진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법과 질서를 찾아내는 일은 인간의 몫, 오직 인간만의 몫이다. 그리하여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시대가, 사력을 다한 정당화의 탐구가, 대상없는 향수가,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가슴을 찢는 물음, 즉 내 집처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학 자문하는 절실한 물음"이 시작된다.
니체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기에 정신의 자유가 안락함이 아니라 인간이 갈구하는 위대함, 힘든 투쟁을 통해서 점차 획득하게 되는 위대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략)
그는 지성과 결합된 용기를 믿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이름으로, 용기를 지성에 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켜 놓았다......(중략)......어떤 한 예외적인 영혼의 고결함과 고뇌에 의해 조명받은 한 사상이 전세계의 눈앞에서 거짓들의 퍼레이드와 수용소에 산적된 끔찍한 시체들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예는 아직 없었다.


신은 죽은 게 아니라 굴러 떨어진 것이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반은 인간에게 가해진 불의를 보면서 신에게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의에 대하여 보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되씹어보고 가슴속에서 보다 비통한 불꽃을 태운 끝에 그는 '설령 당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를 '당신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변화시켜버렸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군인이라면 명령이 살인을 요구할 때 살인하지 않는 것은 범죄가 된다.
불행하게도 명령은 선을 행하기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다. 교조적인 순수 역동성은 선이 아니라 오로지 효율성만을 향해 나아가게 마련이다.


노동이 본래의 고귀함을 잃고 비천한 것으로 전락해버릴 때, 비록 그 노동이 삶 전체의 시간을 다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우리는 그에게서 배웠다. 이 생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절망 -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절망이 그 어떤 희망보다 낫다-을 이루는 것이다. 이 사회가 내세우는 구실이야 가지가지이지만 이 사회가 누리는 비천한 쾌락이 실은 수백만의 죽은 영혼들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과연 그 누가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죽이고 죽는 대신에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됨됨이를 창조하기 위해 스스로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는 것을.


빈곤은 때때로 행복한 이미지들을 보면 고통스러워 고개를 돌려버리는 법이다.

모순은 이런 것이다. 즉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면서도 그 세계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들은 세계에 집착하며, 거의 대부분 세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세계를 아주 망각하기를 바라기는커녕 그들을 오히려 세계를 충분히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괴로워한다.

이 예술은 죽음과 망각의 힘에 대항하여 이 세계와 존재들의 아름다움과 동맹하고 있다.

반항하는 인간의 논리는 인간 조건의 불의에 또 다른 불의를 보태지 않도록 정의에 봉사하고, 세상에 가득한 거짓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명료한 언어를 쓰고, 인간의 고통에 맞서서 행복을 위하여 투쟁하는데 있다.
(중략)
그의 유일한 미덕은 암흑 속에 빠져 있어도 암흑의 어지러운 현기증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데 있고 악의 사슬에 묶여 있어도 집요하게 선을 향하여 힘겹게 나아가는 데 있다.

만일 반항하는 인간이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는 침묵과 타인의 예속을 선택하는 셈이다.


그러나 참된 삶이란 이 가슴 찢는 고통 한가운데에 있다. 참된 삶은 이 가슴 찢는 고통 그 자체이며, 빛의 화산 위를 비행하는 정신이며 형평에의 열광이며 절도를 지향하는 불굴의 집념이다..... 지성과 용기의 언어이다.
(중략)
인간은 통제되어야 할 모든 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통제할 수 있다. 인간은 수정되어야 할 모든 것을 창조 속에서 수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어린애들이, 완전한 사회에서조차, 여전히 부당하게 죽어갈 것이다. 인간은 최대한으로 노력함으로써 다만 세계의 고통을 산술적으로 감소시키기를 꾀할 수 있을 따름이다. 불의와 고통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을 것이고 아무리 한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추문임에 변함이 없을 것이다.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왜?"라는 의문의 절규가 계속하여 울려 퍼질 것이다. 예술과 반항은 오직 최후의 한 사람이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중략)
그들은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잊고, 연기처럼 허망한 권력을 위하여 인간의 실감 나는 무게를 잊고, 찬란한 도시를 위하여 변두리의 비참을 잊고, 헛된 약속의 땅을 위하여 일상의 정의를 잊는다. 그들은 개인들의 자유에 절망하고 인류의 기이한 자유를 꿈꾼다. 그들은 고독한 죽음을 거부하고 엄청난 집단적 임종의 고통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세계를, 살아 있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중략)......사는 법과 죽는 법을 배울 것, 그리고 인간이 되기 위하여 신이 되기를 거부할 것.
사상의 정오에서, 반항하는 인간은 이처럼 인간 공동의 투쟁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신성을 거부한다. 우리는 일편단심의 땅 아티카를, 대담하고 소박한 사상, 명철한 행동, 그리고 지자(지식있는 자)의 너그러움을 택할 것이다.
(중략)
우리 각자가 다시금 스스로의 진가를 발휘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에 반하여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 즉 자신의 밭에서 얻는 보잘것없는 수확과 저 대지에 대한 짦은 사랑을 획득하기 위하여 팽팽하게 활을 당겨야 하는 이 시간, 마침내 한 인간이 탄생하는 이 시간, 시대와 시대의 풋풋한 열광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활이 휘고 활등이 운다. 최고조의 긴장의 절정에 이르러 곧은 화살은 더없이 단단하고 더없이 자유롭게 퉁겨져 날아갈 것이다.

- 카뮈의 소설과 사뭇 같고도 다른 느낌,  여러 다른 방대한 관점을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루고 있는 이 "시론"은 무척 생소하면서도 신선한 것이었다. 시니컬하면서도 무심하게 인간존재의 본질이나 사회의 모순을 꼬집어 내는 그의 소설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이고 웅변적인 그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부조리한 운명을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자연을 긍정하고, 지성과 용기를 통하여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2차대전 시기였으며,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이념과 구호가 휘날리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서의 정의와 존엄을 높이 세우고, 신을 제외한다하더라도, 인간만으로 당당하게 현재를 살아갈 것을 역설하는 그의 신념이 멋지고, 부럽다.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뿐더러, 과학과 물질문명에 묻혀버린 현대에 와서는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의 주체인 인간으로서 그가 말한대로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겨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고, 고통스럽더라도 당당하게 살도록. 다른 인간이 존엄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1년 11월 5일 토요일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중 2

*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있다.
가능성이 필연성을 뒤로 하고 독주하면,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자기가 돌아가야 하는 필연적(명증적)인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가능성의 절망이다. 이와 같이 자기는 추상적인 가능성이 된다.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몸부림치며 날뛰다가 지쳐 버린다. 그러나, 이 가능성의 장소에서 걸어 나올 수도, 또 어떤 장소로 도달하지도 못하나다. 도달하는 곳이란 필연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중략)
갈망의 가능성은 이와 비슷한 것이다. 가능성을 필연성으로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그는 가능성의 뒤를 쫓아간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이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가능성의 결핍은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다.


* 지상적인 것에 대해서, 또는 지상적인 어떤 개별적인 것에 대한 절망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고 외부로쿠터의 압박에 굴하는 것이지 내부로부터 행동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다.
(중략)
그를 절망으로 떨어뜨릴 만한 어떤 일이 들이닥친다(느닷없이 부닥친다). 이것은 그런 절망 이외의 방법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는 자기 속에 반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절망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 된다.
(중략)
그러나 그가 절망하고 있다고 자칭하며 마치 죽은 사람 같은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있을 때
사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그'라고 하는 인간 속에는 말하자면 아직 생명이 있다. 거기서 갑자기 일체의 것이 모습을 바꾸고 모든 외적인 것이 다시 나타나 원하는 것이 채워지기라도 하면, 생명은 그의 속에서 되살아나고, 직접성도 다시 일어나 그는 새로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중략)
이러는 가운데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 밖에서의 구원이 오면, 이 절망자의 생명도 되살아나게 된다. 그러면 그는 그가 그만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는 자기가 아니었고, 자기였던 적도 없다. 그는 다만 직접적으로 규정된 대로 살아가는 것 뿐이다.


* 영원한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것이 모든 절망의 정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 절망은 앞서 말한 절망보다는 질적으로 더 깊은 것으로서, 세상에서는 드물게 보는 절망에 속하는 것이다...(중략)... 이런 절망상태의 자기야말로 정말 철저하게 안 보이는 장막(최초의 자기를 철저히 가리는 절반의 회귀)이며 그 배후에 자기가 앉아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열심인 것이다. 게다가 그 자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의 자기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밀폐라고 부른다. (중략)
그러나 그 같은 자기는 현실 속에는 생존하고 있지 않고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황야라든지, 수도원 또는 정신병원 같은 데로 가 있는 게 아닐까. 그는 단지 다른 사람과 같은 복장을 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통 외투를 입은 현실의 이방인적 인간일뿐인가. 과연 그런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일에 관해서 그는 누구에게도, 단 한 사람에게도 털어 놓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중략)
이에 반해 그는 드문드문 고독에 대한 욕구를 느낀다. 고독은 때로는 호흡처럼, 또 어떤 때는 수면처럼 그에게는 생명처럼 필수적인 것이다. 그가 이 생명의 필수물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남보다 더욱 깊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고독에 대한 욕구는 인간 속에 정신이 있다는 증거이고, 또 그 정신을 재는 척도이다. '단순히 지껄이기만 하는 비인간적 세상사람'은 고독에 대한 욕구를 느끼기는 커녕, 단 한 순간이나마 고독하게 있어야 되기라도 하게 되면, 마치 군서조처럼 곧장 죽어버린다. 어린애는 자장가를 불러 재워야하듯이 이런 사람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자든지, 기도하든지, 무엇에 열중하든지 하기 위해서 사교상의 소란스러운 자장가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그러나 고대에도, 중세에도 이 고독에 대한 욕구는 알고 있었기에, 그 의미에 존경이 바쳐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교로 날이 새고 해가 지는 현대에 있어서는 범죄자에 대한 형벌로써 외에는 달리 쓸 줄 모르게 되었으니, 그 정도로 지금의 사람은 고독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현대에서는 정신을 가진다는 것이 죄를 범한다는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런 사람들,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범죄자 부류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이 틀어박혀 밀페되어 있는 절망이 절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유지될 경우, 그에게는 자살이 가까이 다가서는 위험이 될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렇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무엇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해 꿈에도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자살은 절대적으로 틀어박혀 있는 사람의 위험이다.


약함의 절망(일반적 의미로는, 절망하여 자기를 체념하고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나, 반항의 절망(일반적 의미는, 절망하여 자기자신이고자 재창조 하는 것) 중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좌절은 단독자에게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즉 인간 각자를 단독자나 단독의 죄인으로 만드는 데서 그리스도교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천지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좌절의 가능성들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단독자 각자를 향해 '너는 믿을지어다, 즉 너는 좌절하든지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 절망에 대한 여러 방향의 다각적이고, 깊이 있는 고찰이 키에르 케고르가 이룬 업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절망이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괴로운 상태임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간적이고 고귀한 가치로 간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개인의 절망의 여러 단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위에서 말하고 있는 저차원적인 절망과 고차원적인 절망. 인간이라면 그 모두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다만 소리높여 말할 수 없고, 입을 잠그고, 방문을 닫고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아닐까? 현대에 와서 내가 보는 또 하나의  절망은 '좌절을 모르는 조직 속에 인간됨을 빼앗긴 개인의 소리없는 절망'이다. 개인의 죄는 묻기가 쉬워도 여러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운 조직의 죄를 묻기는 어렵다. 죽지 않는 조직속에 유한한 개인의 운명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싶다.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존재이유를 자신의 내면에게 끊임없이 묻거나 아니면 그 물음을 아예 차단해 버리는 슬픈 개인의 삶들.......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중 1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을 말하는 것이다.

절망하고 있는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사상으로서의 절망을 생각한다면, 절망에는 큰 장점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 장점은 똑바로 서서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을 우월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이 장점은, 인간의 정신이라고 하는 무한히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이다......(중략)......
그러나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최대의 불행이요 비참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파멸이다. 

절망하는 사람은 죽을 수가 없다. "칼이 사상을 죽일 수가 없는 것처럼" 절망도 절망의 근저에 있는 영원한 것, 즉 자기를 녹여 없앨 수는 없다. 절망의 "구더기는 죽지 않고,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 절망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스스로가 바라는 것을 이룩할 수 없는 무력한 자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언젠가 모래시계가, 이 세상의 모든 모래시계가 멈추는 날이 오면, 그리고 속세의 소란이 침묵하고 쉴 새 없는 무익한 분주함이 종말을 고할 때가 오면, 그때는 그대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부자였는지 가난뱅이였는지, 남의 종이었는지 독립한 인간이었는지, 행복했었는지 불행하였는지, 또 그대가 왕위에 있으면서 왕관의 빛을 받고 있었는지 혹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천한 신분으로서 그날그날의 노고를 걸마지고 있었는지, 그대 이름이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인지, 사실 또 이 세상이 존속해 온 동안 기억에 남아 왔는지, 아니면 그대는 이름도 없이 무명인으로서 수많은 대중에 섞여 함께 뛰어 돌아다녔는지, 그리고 그대를 둘러싼 영광이 모든 인간적인 묘사를 능가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더없이 가혹하게 불명예스러운 판결이 그대에게 내려졌는지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것들에 관계없이, 영원히 그대에게, 그리고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오로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묻는다. 그대는 절망하고 살아왔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그대는 그대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 아니면 이 병을 마치 죄 많은 사랑의 과일을 그대 가슴속에 감추듯이 비밀로 간직한 채 살아왔는가, 또는 절망 속에서 미쳐 날뛰어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면서 살아 왔는가.
만일 그대가 절망하고 살아왔다면, 그대가 다른 면에서 무엇을 손에 넣었든 또 무엇을 잃어 버렸든 당신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영원은 그대를 모른다. 즉 영원은 근본적으로 그대를 모른다. 그러나 더 무시무시한 점은, 알려져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영원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은 그대를 그대의 자기와 함께 절망 속에 굳게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순간순간에 생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겉으로 보기엔 보통 인간으로서 평범한 일에 종사하면서 결혼하고, 애를 낳고, 존경을 받거나 명성을 얻기도 하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더 깊은 의미에서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가지고 크게 떠들어 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최대의 위험이 세상에서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조용히 행해지고, 거기에는 또한 상실감도 없다. 다른 것이라면 팔 하나, 다리 하나, 아내, 또는 그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잃어버렸을 때는 곧 알게 되면서도 말이다.


그와 같은 인간은 자기 주위에 있는 많은 인간의 무리를 보고 여러 가지 세상사적인 속된 일에 종사하며, 분주히 일하면서 세상일에 익숙해짐에 따라 자기 자신을 망각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또한 자기를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편이, 즉 원숭이처럼 흉내나 내며 있는 것,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평범한 하나가 되어 섞여 있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며 안전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절망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중략)...... 그런 사람은 조약돌처럼 깎이고 닦여서 화폐처럼 유통된다. 세상은 그들을 절망하고 있다고 보기는커녕 흔히 그렇듯 인간다운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모험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 그럴까? 모험을 하면 잃어버리는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이 된다. 그러나 모험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때야말로, 모험을 했다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그것만은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을 것, 즉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잃어버릴 리가 없었을 것을 무서울 정도로 쉽게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무이기나 한 것처럼 지극히 쉽게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중략)...... 비겁하게 온갖 지상적인 이익을 획득한다고 하면, 그래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 '절망'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고민했던가? 이 책을 펼치기 전 '죽음에 이르는 병'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했었다. 그것이 여러차원의 '절망'에 귀결된다고 케고르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절망'은 무엇보다 인간다운 것 (여기서 말하는 저차원적인 절망이 아닌,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과 절망에의 의지) 이다. 여기서 케고르가 묘사한 저차원적인 절망은 진정으로 절망스럽다. 인간의 본질적 가치 (여기서는 '자기'로 표현된다.) 는 무시된 채, 인간의 주변적 가치로만 판단되고, 사용되고, 소모되는 현대의 삶에 있어서 케고르의 경고를 한 번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키에르 케고르의 "불안의 개념"

만일 사람이 딱  한 번 참여할 수 있다면, 순간의 왈츠를 단 한 번만 출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삶을 영위한 것이며, 그는 더 불운한 삶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삶 속으로 뛰어드는, 그리고 사납게 앞으로 계속 돌진하면서도 결코 삶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삶을 이미 영위해 버린 것이다.......(중략)......비록 사람들이 절망의 초조감을 가지고 돌진하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하여간 제일 가까운 것을 움켜잡는다.

외면적인 재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넓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고통과 불안을 택하는 사람들, ......(중략)...... 거기에는 이 일을 하기로 결단한 데 대해 후회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순간, 만약 자신이 가진 재능의 직접적 성향을 따랐더라면 자기 앞에는 틀림없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를 좋은 인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을, 아니 때로는 아마 절망에 가까운 생각을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면,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차단되고, 또 미소를 담은 재능의 길은 자기가 단절했기 때문에 상실된 것같이 느껴지는, 그 진퇴양난의 무서운 고비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이렇게 알리는 것을 들을 것이다. "자, 내 아들아! 계속 나아가거라, 모든 것을 잃는 자야말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유가 죄를 두려워할 때 자유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중략)
죄에 대한 자유의 관계는 불안이다. 그것은 자유도 죄도 아직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ㅈ유가 이렇게 모든 정열을 기울인 소망을 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서, 자신 속에서 한 조작의 죄도 볼 수 없을 만큼 죄를 멀리하려 할 때, 자유는 죄를 응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응시는, 마치 가능성의 내부에서 채념한다는 것도 하나의 소망이듯이 불안의 양의적인 응시인 것이다.

악마적인 것은 어떤 무엇인가를 가지고서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불안에 떤다는 게 대체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하나의 모험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이제껏 불안해진 적이 없기 때문에, 혹은 불안 속에 빠져 버리기 때문에 멸망하고 만다. 그래서 불안을 바르게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동물이나 천사였다면 불안해지는 일은 없었을 거이다. 인간은 하나의 종합(정신에 의한 마음과 육체의 종합)이기 때문에 불안해 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불안이 깊으면 깊을수록 인간은 위대하다.

-키에르 케고르가 평생 남다른 '죄의식과 불안'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인이었다면 그렇게 고통받지 않아도 되었을 이 불안이 오히려 그의 맑은 영혼을 비춰주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인 환경이 이 남다른 성찰을 더 깊게,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안에 지지 않고 그것을 보듬어 않고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대한 의지를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2부 중

자연을 거울삼아 - 한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할 때,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꽤 정확한 묘사가 아닐까? 즉, 그가 높게 자란 황금빛 보리밭을 거닐기를 좋아한다는 것,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 저녁의 숲과 꽃의 빛깔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연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크고 윤기 있는 잎을 달고 있는 호두나무 아래에 있으면, 마치 가족 곁에 있는 듯한 느긋함을 느낀다는 것,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산 속에서 몇 개의 작은 외딴 호수를 발견하는 일인데 그것은 그에게 그 곳에서 고독 자체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라는 것, 또한 그는 가을이나 초겨울 저녁 창가에 가만히 다가와서 영혼이 없는 모든 소리를 벨벳 커튼처럼 삼켜버리는 저 안개 낀 여명의 잿빛 적막을 사랑한다라는 것, 아직 침식되지 않은 바위를 지금까지 남아 태고의 일을 이야기하려는 말 없는 증인처럼 느끼고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 왔다는 것, 끝으로 꿈틀거리는 뱀 껍질과 '맹수의 아름다움'을 지닌 바다와는 친숙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라는 식의 묘사다.

비평가들을 동정해서 - 곤충들이 찌르고 쏘는 것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다. 비평가들의 경우도 그와 똑같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피일 뿐, 우리의 고통은 아니다.

내 머리는 나 자신의 목 위에 제대로 얹혀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면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이 가련한 녀석만이 나 자신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은가를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가' 잘못된 머리가 얹혀진 원주 입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아름다워지려는 의지 속의 체념 - (중략)... 언젠가 위대한 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영혼의 문이 넓은 사람의 매혹을 거뒤들이기 위하여.

의도를 잊는다 -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대개 여행 목표가 잊혀진다. 거의 모든 직업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선택되고 시작되지만,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되고 만다. 의도를 잊는다는 것은 행해지고 있는 어리석은 행위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능. 집이 불탈 때 사람들은 먹는 일조차 잊어버린다. - 그러나 불이 꺼진 후에는 잿더미 위에 앉아 다시 먹는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가 오래도록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그대를 들여다볼지니.

긍지 있게 그리고 침착성을 가지고 살라. 언제나 초연하라. - (중략)... 용기, 통찰, 공감, 고독, 언제나 이 네가지 덕의 소유자가 되라.

자기의 나쁜 사정을 다른 사람 탓으로 하든, 자신의 탓으로 하든 - 전자는 사회주의자가 하는 짓이며, 후자는 그리스도교가 하는 짓이다. - 아무런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상승하는 최고의 삶은 누리기 위해, 퇴락하여 가는 삶의 가장 가차 없는 압박과 제거를 요구하는 모든 경우를 위해, 예를 들면 생식의 권리를 위해, 태어나는 권리를 위해, 사는 권리를 위해 의사에게 새로운 책임을 지우는 것,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을 때 자랑스럽게 죽는 것,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밝고 즐겁게 자식들과 다른 이들 속에서 이루어진 적당한 시기의 죽음, 그리하여 죽어가는 사람이 아직 현실적으로 생존하여 진정한 이별을 고하는 것, 그와 똑같이 자신이 달성하고 의욕을 가진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 인생의 총계가 가능한 죽음.

그러나 과연 내가 오늘날 읽히는 것만이라도 바라고 있는지 결국 누가 알겠는가? 시간의 이빨에 견뎌내는 사물을 창조한는 것, 형식에서 보더라도, 실질에서 보더라도 조그마한 불멸성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 나는 이 이하의 것을 내 자신에게 요구할 만큼 겸손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 니체의 글 속에 나는 그의 인간 안에 있는 '초인'에 대한 희망을 본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누구보다 숭고한 인생을 고귀하게 살았던 그, 그의 고독이 절정에 이르러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지경이 이르렀다해도, 그 순간에도 자신을 다지고 펜을 잡았을 것이다.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깊은 공감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다시 본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1부 중

개인은 자신이 심은 나무에서 손수 과일을 따려 하기 때문에 100년 동안이나 계속 똑같은 손질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다음 세대에게 그늘을 제공할 나무들을 더 이상 심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의 느린 화살 - 가장 고귀한 종류의 미는, 갑자기 매혹시키는 그런 미나, 태풍처럼 취하도록 덮쳐오는 미가 아니라, 인간이 거의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지니고 있는 듯한, 또한 꿈속에서 우연히 만나는 일도 있지만 겸손하게 우리 마음에 걸려 있다가 드디어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고, 우리의 눈을 눈물로, 우리의 마음을 동경으로 채우듯, 천천히 스며드는 듯한 미다. 우리는 미를 보고 무엇을 동경하게 되는가? 아름다움에는 많은 행복이 결부되어 있으리라고 우리는 공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오류다.

손으로 하는 일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 말하지 말라! ...(중략)... 그들은 자신에게 그것을 위한 시간을 부여했다....(중략)... 밤낮으로 이러한 것들의 수집자가 되어라. 이와 같은 다양한 수업으로 이삼십 년을 보내도록 하라. 그 다음 작업실에서 창작되는 것은 거리의 빛 속에 나가도 좋다.

물러선 것이지 뒤돌아간 것은 아니다. - (중략)... 단지 적당한 시기에 그 영역에서 떨어져 나오기만 하면 그는 더욱 급속히 전진할 것이다. 그의 발은 날개를 달고 있다. 그의 가슴은 더 조용히 숨을 길게, 참을성 있게 호흡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는 도약하는 데 충분한 여지를 얻기 위하여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그래서 이 후퇴에는 뭔가 무서운 것, 위협적인 것마저 있을 수 있다.

자유정신의 조심성 - (중략)... 그러나 이따금 그에게는 자유의 일요일이 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삶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까지도 조심스럽고 숨이 짧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식의 목적에 필요한 한에서만 애착과 맹목의 세계에 관계하려 하기 때문이다.

노년이 찾아오면 당신의 자연의 소리에, 세계 전체를 즐거움으로 지배하는 자연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가를 더욱더 깨닫게 된다. 노년에 그 정점을 갖는 이와 같은 인생은 지혜 속에도, 변함없는 정신적 기쁨의 부드러운 햇빛 속에도 정점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즉, 노년과 지혜를 당신은 인생의 한 산등성이에서 만난다. 자연이 그렇게 바랐던 것이다. 그 뒤 죽음의 안개가 다가오는 것은 때가 왔다는 것이며, 화를 낼 아무런 까닭도 없다. 빛을 향하여...... 당신의 마지막 움직임, 인식의 어떤 환호성...... 당신의 마지막 목소리.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직 종교개혁 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다. 어떻게 다를 수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의견이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한 몇 가지 수단을 더 이상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뛰어넘게 하며 우리가 높은 문화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지금도 종교개혁 시대의 방식으로 혐오와 분노의 폭발로 모든 의견을 공격하고 진압하는 사람은, 만약 다른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자기 적을 화형에 처했을 것이며, 만약 종교개혁의 적으로서 살고 있었다면 이단 심문의 모든 수단에 호소하였으리라는 것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이단 심문은 당시로서는 합리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온 영역에 선포되어야 했던 일반적 계엄 상태일 뿐이며, 모든 계엄 상태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방랑자 - 아주 조금이나마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밖에 느낄 수가 없다. 비록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가는' 여행자로서는 아니더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그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잘 관망하고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개개의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자신 속에 변화와 무상함을 기뻐하는, 뭔가 방랑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인간에게는, 피로할 때 휴식을 가져다 줄 도시의 문이 닫혀져 있는 것을 보게 될 심술궂은 밤들이 찾아올 것이다. 아마 거기에는 동방에서처럼 사막이 문까지 이어지고, 맹수가 어떤 때는 멀리, 어떤 때는 가까이서 울부짖고, 강풍이 휘몰아치고, 강도가 그의 수레를 끄는 짐승을 훔쳐 갈지도 모른다. 그때 그에게는 아마 사막위에 있는 또다른 사막과 같은 처참한 그의 마음은 방랑에 지쳐버린다. 그리고 아침 해가 분노의 신처럼 불타며 떠오르고, 거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는 여기에 살고 있는 자의 얼굴에서 아마도 문 밖에서보다 더 많은 사막.더러움.기만.불안정을 본다. 그리고 낮은 밤보다 심할 것이다. 이런 일이 언젠가 방랑자의 신변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보상으로 다른 지방과 다른 날들의 환희에 찬 아침이 온다. 그때 그는 희미한 빛 속에서 이미 뮤즈의 무리가 자기 곁에서 춤추며 사막의 안개 속을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뒤 그가 오전의 영혼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조용히 나무 아래를 거닐때 그 가지와 무성한 잎들 사이로 좋고 밝은 것이 그에게 던져진다. 그것은 산과 숲 그리고 고독 속에 살고 있고 그와 마찬가지로 또는 쾌활한 또는 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방랑자와 철학자인 그 모든 자유정신들의 선물이다. 새벽녘의 비밀에서 태어나 그들은 왜 열 번째와 열두 번째를 치는 종소리 사이의 낮이 이토록 순수하고 환하고 거룩하고 시원스러운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생각에 잠긴다. 그들은 '오전의 철학'을 찾고 있다.

-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처음 만났던 것은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집의 책장에 전집 중, 제목이 너무도 멋있어서 두꺼운 책을 꺼내 읽으려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린 나에게는 역부족이었었다. 나는 막연하게 니체의 반기독교적인 문장에 매료되어 그를 동경해왔던 것 같다. 니체의 글은 철학이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의 아포리즘은 반어적이거나 많은 경우 다양한 변장을 하고 나타나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단순한 문장만으로는 그의 철학을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 그의 철학에 나치에 이용되고, 단지 반신론자로서의 철학으로 오인되어 왔던 것 같다. 니체를 읽으려면 그의 저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에 칼날을 세우고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의 철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바이마르의 석양을 바라보는 죽기 전 미친 니체의 모습을 생각하며 울고 말았다. 그가 말한대로,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 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대들은 일체의 것의 회귀를 원한 것이다." 순간으로 영원을 이야기한 치열한 '자유정신'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카뮈의 '전락'중

수상한 존재가 그만 되려거든 그저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지요.

인간들의 상상력이란 왜 그렇게도 빈약하지요? 사람은 꼭 어떤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들 하거든요. 그렇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가질 않는 거예요. 그러니 자진해서 목숨을 끊어 남들이 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달라고 자신을 희생해서 무엇하겠는가 말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저들은 내 죽음에 대해서 어리석거나 천박한 이유를 붙이면서 이용하려고 들 겁니다. 이것 보세요, 선생. 결국 순교자는 잊혀져버리든가 비웃음을 사든가 아니면, 이용당하든가 어느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어요. 남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란다는 건 결단코 안 될 얘깁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던 원의 고리가 깨어져버리면서 저들은 재판소에서 그러듯이 자기들끼리 한 줄로 자리를 잡는 것이었어요. 무언가 심판받아야 할 것이 내게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나는, 요컨대 저들에게는 남을 심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소명의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성공한 낯짝은 남의 눈에 잘못 띄게 되면 미련한 당나귀라도 분통이 커지게 만들 지경이지요.

나는 능력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시민 정신이 투철한, 분개한, 너그러운, 협동적인, 모범적인 사람 등의 역을 연출했어요. 그만 해두죠. 이미 선생께서도 이해하셨겠지만, 요컨대 나는 저기 있으면서도 딴 데 가고 없는 저 네덜란드인들과 같았던 겁니다. 즉 내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나는 사실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지내면서도 그들과 이해관계를 함께하지 않는 터인지라 나는 내가 개입하여 하고 있는 일을 진지하게 믿고 있질 않았어요. 남들이 내 직업, 가족, 혹은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있어서 내게 기대하는 바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정중하고 또 동시에 무사태평했지만, 그떄마다 어쩐지 마음은 딴 데 있는 것만 같은 심정이서서 결국은 그 때문에 만사가 시들해져버리는 것이었어요.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어떤 이중심리 상태 속에서 산 셈이어서 내가 한 가장 심각한 행동은 흔히 내가 책임감을 가장 안 느끼면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 진실이란 건 말이죠 견딜 수 없을 만틈 지겨운 것이랍니다.

대답을 미리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똑같은 의문들과 대면한 채 끊임없이 그 누구에겐가, 아니 그 누구에게라 것도 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 전직 변호사 클라망스가 누군게에가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형식의 소설 '전락'에서 카뮈가 꼬집어 내는 인간의 작은 부분들, 수치스러운 부분이지만 인간이기에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그러한 부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그러나 용서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부분들을 읽어내려갔다. 그러기에 주인공 역시 그 자신을 '재판관 겸 참회자'라고 부르며, 신의 존재를 무시한다하더라도, 인간 자체로 충분히 죄인이 될 수 있는, 또한, 그 부도덕함을 인지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할만한 존재 자체를 보여준 듯하다. -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서문 중 - 자유의지에 대하여

그래서 나는 일찍이 필요에 의해 '자유정신들'을 고안해 냈다. '인간적이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우울하고도 용감한 책을 그 자유 정신들에 바친다.

육체를 지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라리라는 것을 적어도 나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다.

감정이나 공감은 깊이를 더해가고 이슬 섞인 온갖 종류의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자기를 지탱하게 하기 위해서 더 높고, 더 위대한 것, 더 풍부한 것을 남몰래 조금씩 끊임없이 부수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을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대는 '위계'의 문제를, 그리고 어떻게 권력과 권리와 원근법의 넓이가 서로 높아져가는가를 보아야 했다. 그대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젠 그만하자, 자유 정신으로 어떠한 '그대는 해야만 한다'에 자신이 복종해 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이 '가능한지', 비로소 무엇을 '해도 좋은지'를 이제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라 불리는 저 내면 세계의 모험가며 세계 항해자로서, 이와 똑같이 '인간'이라 불리는 모든 '더 고양되려는 자'나, '이미 겹쳐 쌓기를 내포하고 있는 자'의 측량사로서, 곳곳에 돌진하고, 공포심도 없이 아무것도 조소하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맛보고, 모든 것을 우연적인 것에서부터 정화하면서, 말하자면 가려내면서.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가 가장 다양하고 가장 모순된 곤궁과 행복의 여러 상태를 영혼과 육체로 경험해야만 했는가를 비로소 이해한다.

이 책은 무거운 의무의 압박이 없는 사람들에게 알맞다. 또한 이 책은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을 기대하며 과잉을 요구한다. 시간, 하늘이나 마음의 명쾌함, 가장 대담한 의미에서의 '한가함'등의 과잉을.......


우리는 모든 사물을 인간의 두뇌를 통해 관찰하는 것인 만큼, 이 머리를 잘라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머리를 베어 버린다며, 그때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마치 강한 신앙이 그 신앙의 강함을 증명하기는 하지만, 믿게 된 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보다 잘 인식하기 위해서만 계속 살아갈 정도로 삶의 일상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많은 것을, 그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질투나 불만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좀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풍습.법도.사물의 관습적 평가 등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는 이 경지의 즐거움을 전할 것이며, 아마도 그것 이외는 전해야 할 어떤것도 '갖지'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하나의 결여감, 오히려 체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보다 많은 것을 원한다면, 그는 호의적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자신의 형제, 즉, 행동의 자유인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아마 약간의 조소도 띨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사정이 있으므로.

- 니체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대한 정의나 묘사를 읽음으로서 안도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현대에서 인간의 자신이 속한 조직, 자신의 역할, 자신의 직업 등으로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더이상 인간으로서 어떤 성향을 가진, 생각을 가진, 기품을 가진, 덕을 가진 인간으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니체가 일찍이 깨달았듯이 전자의 인간이 후자의 인간으로서의 성향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라는 것, 또한, 후자로서의 인간적 성향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매우 어려우며 어떠한 포기 내지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니체가 마지막 문장에 언급한 듯이, 그 '자유'에 '특별한 사정', 나의 언어로 '전자로서의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맛본 불만족과 좌절, 체념의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동감한다.-

2011년 6월 30일 목요일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중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Epicuros 는 기원전 311년 처음 미틸레네 학화를 세운 다음, 람프사코스에 이어, 307년 이후 아테네에서 학파를 세웠고, 기원전 271년 또는 270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에피쿠로스는 힘든 청년 시절을 보낸 이후에는 아테네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단지 건강이 나빠서 고생했을 따름이다. 그에게는 집 한 채와 분명히 집과 따로 떨어져 있는 정원이 하나 있었고, 그 정원에서 가르쳤다. 처음에 학파의 회원은 에피쿠로스의 형제 세 사람을 비롯한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으나, 아테네에서 철학을 배우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그들의 자식들, 노예들, 헤타이라들이 들어오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커졌다. 에피쿠로스의 적들이 헤타이라의 입회를 빌미로 이따금 추문을 퍼뜨렸는데, 분명히 이는 공평치 않은 처사였다. 에피쿠로스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우정을 맺는 아주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인물로, 공동체에 소속된 회원들의 어린아이들에게도 상냥하고 유쾌한 편지를 쓰곤 했다. 그는 감정을 표현할 때 고대 철학자들이 나타내리라 예상되는 점잔 빼는 행동과 자제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의 편지들은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었다.

"나는 빵과 물로 살 때 몸이 쾌락으로 충만하며, 내가 사치스러운 쾌락에 침을 뱉는 까닭은 사치스러운 쾌락 자체가 나쁜 탓이 아니라 그것에 뛰따르는 불편한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한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시달렸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법을 터득했다. 인간이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스토아 학파가 아니라 바로 에피쿠로스였다. 

부와 명예 같은 욕망이 무익하고 헛된 까닭은 만족할 수 있는 때에도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어 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최고선은 사려이며, 사려는 심지어 철학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어떤 형태의 문화이든 다 피하라"

에피쿠로스의 의견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쾌락 가운데 제일 안전한 것은 우정이다.

신들이 우리 인간 세상의 정세를 걱정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자유의지가 있으며, 우리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운명의 주인이 된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면 죽음도 나쁜 것은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운문으로 쓴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다. (이하)

인간 생명이 땅에 엎드려
종교의 잔혹성 아래
무참히 짓밟혀 처참하게 부서지고,
잠시 종교가 저 위 하늘나라에서 얼굴을 내밀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 인간을 짓누를 때,
처음으로 한 그리스인이 용감히
종교에 맞서 도덕의 눈을 치켜떴네.
분연히 일어나 종교에 도전한 최초의 인간이었네.
신들에 대한 숱한 이야기에도, 번갯불에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네.
오, 모든 것이 그의 영혼 속 대담한 용기를 더욱 북돋아
자연의 굳게 잠기 문을 헤치고 들어간
최초의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네.
그리하여 정신의 강렬한 기운이 널리 퍼져,
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세계는 불타는 성벽을 넘어
저 멀리 여행을 떠나
정신과 영혼이 아득히 멀리 넓고도 넓게
측량할 길 없는 우주 구석구석까지 미쳤네.
그때 이래 우리에게 정복자로 개선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지식을
둘 다 가져와서,
어떤 원리에 근거해 살물이 제각각 제한된 힘을 갖고
깊숙한 곳에 숨은 경계석을 갖게 되는지 가르쳤네.
그리하여 이제 종교는 인간의 발 아래 내던져져 짓밟히게 되었다.
그 사람의 승리가 우리를 하늘 높이 드높이네.

에피쿠로스 복음은 에피쿠로스 사후 6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상의 삶이 주는 비참한 고통 때문에 더욱 압박을 받게 될수록, 철학과 종교에서 더욱 강력한 처방을 계속 요구했다.


- 내가 대학때 배운 철학강의에서 '에피쿠로스 = 쾌락주의, 현실의 쾌락을 중요시한다.'라고만 배우고는 끝이었다. 이 책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기전까지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어감으로 인해 마치 에피쿠로스 학파가 신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학파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에피쿠로스는 현실의 절제와 만족에 촛점을 두고 있다. 전체의 철학사에 걸쳐 종교에 혹은 신, 사후, 윤회 등에 의존하지 않고, 현세에 중심을 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쾌락주의라는 그릇된 어감의 단어보다는 현실주의나 인본주의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기원전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기원전 이후 이러한 철학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신이나 절대자'보다는 '인간'을, '내세'보다는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며 절제하는 삶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설파한 에피쿠로스의 용기와 지혜가 존경스럽다.

2011년 5월 30일 월요일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중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또 만약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이끌어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생생한 희망과 두려움 속에서 불확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는 누구나 고통을 느끼지만, 만약 마음이 편해지도록 위로나 주는 동화에 의지해 살고 싶지 않다면 그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을 망각해서도 안 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답변을 찾았다고 자신을 설득해도 안 된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 연구자를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 처음 이 두꺼운 책을 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읽을수록 빠져들게 되는 책. 이제 겨우 고대에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을 지났다. 수 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놀라우리만큼 많다는 점이 행복하다. 인간은 시대를 초월해서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 대한 안도. 과학과 철학과 신학의 출발점이 거의 같다는 점에 대한 기분좋은 느낌. (현대에 있어 지나치게 전공을 가르고, 마치 과학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같은 분야에서도 서로의 분야를 자로 긋듯이 가르는 것이 팽배한 지금, 그것이 못마땅한 나에게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준 듯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고, 시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생각들을 읽어나가는 재미.-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주제 사라미구의 "돌뗏목"중

옳은 것이 틀린 것을 만들어 내고, 틀린 것이 옳은 것을 낳지. 괴로운 사람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로군. 이봐, 슬퍼하는 친구, 위로라는 건 없어, 인간은 위로할 수 없는 존재거든.
어쩌면 주제 아나이수의 이런 의견이 옳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위로받지도 않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동, 어는 모로 보나 무의미하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행동을 보면, 인간이 언젠가는 인간의 어깨에 기대 울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이미 너무 늦었을 때일 수도 있고, 이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일 수도 있지만.

(중략)

삶을 바꾸는 데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이 생각하고, 이것저것 재보고 망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곤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우리는 원형의 운동을 하며 시간의 행로를 따라 움직인다. 더 이상 어쩔 힘이 없는 먼지 구름처럼, 낙엽처럼, 파편처럼. 차라리 허리케인이 부는 땅에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을. 그러나 어느 때는 딱 한마디면 된다. 가서 바위가 지나가는 것을 봅시다.

(중략)

하느님과 저 아들의 개가 원한다면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날 것이니.

(중략)

그렇게까지 해서 잠깐 더 사는니 죽는 게 낫다.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기다리면서. 멀리 고요한 산, 장밋빛 아침, 뜨거운 오후의 짙푸른색, 별이 뜬 하늘을 응시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 때가 찾아와도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겠어.

- 사라미구의 환상적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느날 이유없이 땅이 갈라져 이베리아 반도가 바다를 표류하게 되었을 때, 과학도 종교도 아무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을 때,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욕구중에 하나인 확실성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라미구는 특유의 해학적 필치로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을 날카롭게 비꼰다. 이 극한적 상황,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상황 (실제로 물리적 피해가 아무런 것도 없는 상황에 확실성만 결핍된 상황)에 4명의 이상한 우연의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삶에 비할 바 없는 놀라운 여행을 한다. 그들의 여행은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조용하고 여유롭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멈춘 이 돌뗏목에서 이 4명만이 진정한 삶을 살았다. 결국 나머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 생도 이 끝없는 외부의 불확실성 속에 그냥 우왕좌왕하는 것만이 아닐까? 사라미구가 말한대로 "주기의 순환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은 사람뿐이다. 사람에게는 한번뿐 그 이상은 없다." 고 말이다.

2011년 5월 3일 화요일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중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길을 반밖에 안내려갔는데도, 이 집이 안 보였어요. 집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게 됐죠. 동네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몇 피트 앞밖에 안 보였어요. 사람도 하나 안 보였고요. 모든 게 초현실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실제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했던 거죠. 다른 세계, 사실이 사실이 아니고 삶이 스스로에게서 숨을 쉴 수 있는 곳, 그런 세계에 혼자 있는 것, 저기 항구 너머, 해안 따라 길이 뻗어 있는 곳에선 땅 위에 서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인지 바다 밑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물속에 오래전 빠져버린 것 같은. 전 안개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 같았어요. 그렇게 유령 속에 유령이 돼 있으니까, 죽여주게 편안하던데요.


(중략)

아님, 잊기 위해 취하든가요. (보들레르의 산문시 <취하라>를 냉소적인 열정을 담아 비통하고 멋지게 읊는다.)

언제나 취해 있으라. 다른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것뿐. 시간의 무게가 어깨를 아프게 짓눌러 땅바닥에 짓뭉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무엇에 취하냐고? 포도주에, 시에, 미덕에,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저 취해 있으라.
그리고 이따금, 궁전의 계단이나 도랑가 풀밭 위에서, 그대 방안의 쓸쓸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가 반쯤 혹은 전부 가시면, 바람에게 파도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무엇이든 날아다니거나 한숨짓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들에게 물어보라, 지금이 무얼 할 시간인지. 그려면 바람에 파도, 별, 새, 시계 그대에게 답하리니.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고통받는 시간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면, 취해 있으라. 계속 취해 있으라! 술에, 시에, 미덕에, 그대 원하는 대로.'

(중략)

사실 전 언제나 어색한 이방인, 누군가를 원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대상도 못 되는 이방인, 어디에 속하지도 못해서 언제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처럼 살 거예요!


- 살아생전 출판을 원치 않았던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불편한 마음으로,  그 씁쓸한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불안하게 책장을 넘겼다. 시대가 권하는 상식, 그러니까 누군가 그렇게 느끼고 행동해야 마땅하다는 그 일반적인 생각,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가족에 대한 상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은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고 최고의 편안함과 안락의 원천이라는 이 쓸데없는 강요된 생각에 오히려 깊이 상처입고,  두려움에 떨고, 죄책감에 찌들고, 자신의 내면으로만 깊이 기어들어가게 되는. 누구하나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상처 하나 있지 않을까? 다만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회가 사람을 더욱 병들게 하는 듯 하다.-

2011년 4월 25일 월요일

주제 사라미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중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황소들이 이미 경험한 것보다 더 큰 지옥은 있기 힘들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양쪽에서 황소들의 몸에 매여 있는, 여러 종류의 불꽃놀이 폭죽에 불이 붙여지고, 상당한 시간 동안 폭죽이 폭발하여 투우장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동안, 황소들은 산 채로 구워지고 있었다. 주앙 5세와 그의 신하들이 그 비참한 죽음에 갈채를 보내는 동안, 광분한 그 저주받은 짐승들은 비명을 지르며 투우장 안을 이리저리 내달렸다. 황소들은 살육당하면서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다른 누군가를 죽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광장에서는 불에 탄 살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 냄새는 종교 재판의 성대한 비비큐에 코가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역거움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게다가 황소들은 결국에는 누군가의 식탁에 오르는 것으로 끝장이 나서, 좋은 용도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반면 말뚝에 묶인 채로 불에 탄 유대인의 유해는 그가 남길 수 있는 자산의 전부였다.

- 사라미구의 독특한 해학적인 문장으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어 내는 그의 천재성은 언제나 나의 경탄을 불러 일으킨다. 믿음이 아무런 믿음이 없는 것보다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명분을 주는 듯 하다.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 역사에 저지른 죄악의 양을 보면 말이다.  때론 무언인가에 대한 "믿음"이 혹은 그 "믿음을 지키려는 욕망"을 가진 자가 같은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잔혹함이 이성과 상식의 선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보면 몸서리가 처진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믿음을 가진 자"가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러도 그 "믿음"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이 정당화되리라는 그 엄청난 착각에 대한 무모한 "믿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중에서

천성적으로 소심한 소냐는 예전에도 자기가 누구보다도 더 쉽게 파멸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든 대가를 치르는 일 없이 그녀를 쉽게 모욕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든 고분고분하게 대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느낀 절망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모든 일을, 심지어 이런 일마저 아무 불평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순간은 너무나도 힘겨운 것이었다.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어 누명을 벗었는데도, 처음 느꼈던 경악과 충격이 사라지고 이제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깨닫게 되자, 의지할 데 없이 나약한 자신의 처지와 모욕감이 그녀의 심작을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견디다 못해 방을 뛰쳐나가 자기 집으로 뛰어갔다.

- 등장인물 중 한 명도 진심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죄와 벌" 중, 동의가 가는 한 부분.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대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님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로 타인하게 잔인하고 몰인정하게 대하는 것을, 누구도 그럴 권리를 그들에게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4월 3일 일요일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 중에서

"정풍이야".
정풍이 뭔진 몰라도 녀석이 좋아하는 바람인 건 분명했다. 축축하고 더러운 녀석의 운동화가 경쾌하게 빗속을 날았다. 푸른 셔츠도, 작업반 바지도, 양말도 날아갔다...... (중략)
승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늘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마주 선 우리 사이의 1미터는 단순한 물리적거리가 아니었다. 건너갈 길 없는 차원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같은 세계에 함께 존재한 적이 있다는 증거는 만식 씨의 헬멧 뿐이었다.......(중략)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는 누구일까. 나, 나는.......(중략)
승민은 손을 내밀었다. 머뭇 머뭇 맞잡았다. 손을 떼자 손바닥에 승민의 시계가 놓여 있었다. "이제 빼았기지 마." 승민의 눈이 고글 속에서 웃고 있었다. "네 시간은 네 거야."
시계를 쥐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걸었다.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절벽 끝까지 단숨에 뛰었다. 숨을 턱 끝으로 몰아내며 조명탄 마개로 힘껏 쳤다. '훅'소리와 함께 불꽃이 올라왔다. 나머지 하나에도 불을 붙인 뒤 양손에 나눠 쥐고 승민을 향해 돌아섰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뿌연 연기가 하늘 로 치솟았다. 오렌지 빛 섬광이 나를 가뒀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주변이 환해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승민이 오고 있었다. 헬멧의 전등을 끄고 먹빛 땅거미를 통과해 오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질주해오고 있었다. 노란 캐노피가 승민의 머리 위에 벽을 세우고 따라왔다. 5미터, 4미터......
승민의 발이 지상에서 떨어졌다. 허공을 디디며 가볍게 떠올랐다. 수리호가 뿜어내는 상승기류를 타고 거침없이 하늘로 비상했다. 비상의 한 지점에서 글라이더가 반 바퀴를 돌았다. 일순, 글라이더 주변이 환해졌다. 승민이 헬멧의 전등을 켠 것이었다. 불빛은 아주 잠깐 거기 머물렀다. (중략)
몸이 떨려왔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떨림이었다. 목과 가슴사이에선 불처럼 뜨거운 것이 오르내렸다. 그 뜨거운 한기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날아간 자에 대한 '경외', 갈 곳이 없는 자의 '절망'.
절벽 끝에 누웠다. 하늘이 까맸다. 별들은 내게 너무도 멀었다.

- 중략 -

석양의 잔광이 하늘을 태우고 있었다. 저 불길이 가시고 나면 저녁 별이 뜰 테지.
하모니카 소리가 가슴을 두들겼다. 심장 안에서 피가 요동쳤다. 몸의 움직임도 피의 요동만큼 격렬해졌다.
넌 누구냐?
승민이 물었다.
알아맟혀 봐.
내가 대답했다.
새야?
아니.
비행기?
아니.
그럼 누구?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 웃음과 눈물과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던 소설,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청년의 극단적인 다른 성향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에의 동경, 삶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 등이 고스란히 전해졌던. 승민의 무모하면서 끊임없는 자유로의 도전을 지켜보면서 삶에서 회피했던 수명이 자신의 삶에 대해 새로운 발걸음을 디디게 되는, 또 인간이기에 독자로서 같은 감정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멋진 이야기-

2011년 3월 26일 토요일

보부아르의 "편안한 죽음"중에서

'그 사람도 죽을 나이가 됐지' 하는 말. 노인들의 슬픔, 노인들이 쫓겨가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도 어머니에 대해서마저 그런 상투적인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일흔이 넘은 자기 부모나 조부모가 숨을 거둔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쉰 살이나 된 여자가 자기 어머니가 죽었다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나는 그 여자가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차피 죽을 운명일 테니까. 여든 살이면 그야말로 죽어도 좋을만큼 많으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는다.
어머니도 연세가 연세인지라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어도 그 때문에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대한 끔찍한 경악스러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암, 혈전증, 패충혈 따위의 병은 저 넓은 하늘에서 비행기의 엔진이 갑자기 멈추는 것만큼이나 예상할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일이다.
어머니가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다 죽어 가는 상태에서 한 순간 한 순간 속에 깃들인 무한한 가치를 확인하던 때 어머니는 희망을 갖고 기운을 냈다. 하지만 어머니의 헛된 집념은 마음을 달래주는 일상이라고 하는 막을 찢어 버렸다.
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는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비록 그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가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솔직하면서도, 때론 객관적인 시선으로 쓴 글이다. 우린 때론 남의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곤 한다. 죽을 때가 됐지, 죽는 게 났지.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면 우리는 끝없는 당혹감에 왜 나라는 질문을 알 수 없는 절대자에게 쉼없이 던지게 될 것이다.

2011년 1월 27일 목요일

단테의 신곡중에서

지옥의 제구 영역으로 들어가네
신대의 거인의 손을 빌려
내려가네
지옥의 밑바닥

고요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소리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짙은 어둠 속으로 바늘 같은 한 줄기 바람이 불어갔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중략-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떨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대기조차 바르르 떨리고 있었따. 팽팽하게 긴장된 시간 속을 무거운 발자국 소리만이 뚜벅 뚜벅 길을 가고 있었다.

- 단테의 신곡 중 문학적인 표현이 내게 가장 와 닿은 부분이다. 가장 무섭도록 살벌한 지옥의 밑바닥이 마치 우리가 사는 현실에 어떤 순간을 묘사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 마음의 지옥이, 우리가 사는 지옥이, 현실의 지옥이 시간을 따라 흘러갈 때.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그 곳에, 당신은...





나그네여,
그대의죄를 씻어라.
죄가 무거울수록,
정화의 고행도 힘드나니
나그네여,
그대의 죄를 씻어라.

"이런 높고 험한 곳에 서려면 날개가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힘든 일이야. 날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날개가 없어.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 역시 뛰어 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을 가지고 발 아래를 잘 살피는 것 뿐이지 않을까. 그리고, 시간을 지워버릴 것....... 조금 전까지 밑바닥에 있던 우리가 이렇게 높은 곳에 올랐다는 것은, 우리가 날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 단테가 묘사한 지옥같은 현실을 겪고 있다고 느껴질 때, 앞으로 한발짝도 내딛기 힘들게 느껴질 때,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고 한발씩 내디디다 보면, 어느순간 그 절망이, 어둠이, 헤어날 수 없음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진짜 우리가, 내가 날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 지옥같은 순간에서 벗어난 것은?

2011년 1월 21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행락지 중에서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절보다 현재에 와서 이것은 더 심하게 변했다. 사람들은 TV, 핸드폰, 인터넷 등에 시간을 보내느라 정작 생각할 시간을 잊어버린 듯 하다.
동물과 차별화된 특징인 "사고하는 능력"이라는 것이 시험볼 때만 필요한 인간의 슬픈 현대 문명이란.......

2011년 1월 1일 토요일

샤르트르의 '구토'중

내 생각이 옳다면, 또 축척되어가는 모든 징조가 내 삶의 새로운 파괴의 전조라면, 나는 정말 두렵다. 나의 생활이 풍부하다든지, 충족되어 있다든지, 귀중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생겨나려고 하는 것, 나를 사로잡으려는 것...... 이 두렵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가? 연구와 저술, 그 모든 것을 계획 속에 남겨두고 또다시 가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수개월 또는 수년이 지났을 때, 지쳐빠져서 실망한 모습으로 새로운 폐허의 한복판에서 깨어나게 될 것인가? 너무 늦기 전에 나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을 똑똑히 알고 싶다.

- 같은 두려움...... 같은 공포. 두려움을 외면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아는 두려움. 내가 정말 그 두려움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 두려운. 시작도 못한 채 생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달려갔는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정말 나의 두려움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출발점에 선 나-

샤르트르의 '구토'중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두렵다-나는 그것에 뒷덜미를 잡혀서, 높은 파도처럼 들어올려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 한 존재에게 절실함이 이 세상에서 여분의 존재일수도, 인간존재는 그토록 부조리하면서도 슬픈 운명을 타고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