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9일 토요일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 중

삶의 의미가 없어져도 여전히 삶은 남는다.


이리하여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더 이상 우리의 존재를 보증해주지 못한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스스로 행동하기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니체는 담벼락에 달려들어 부딪치지만 스티르너는 궁지에 몰려서도 웃는다.


역사적 기독교는 자연을 송두리째 죄의 원천으로 만들어버리게 된다......(중략)......그러나 기독교는 삶에 있지도 않은 가공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허무주의적인데도 말이다.
(중략)
신과 도덕적 우상을 제거하고 난 이세계에서 인간은 이제 주인 없는 고독한 존재다. 누구보다도 니체는 이러한 자유가 손쉬운 것일 수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바로 이 점으로 해서 니체는 낭만주의자들과 구별된다. 이러한 사나운 해방으로 인하여 니체는, 새로운 비탄과 새로운 행복을 고통스럽게 맛보게 되리라고 그가 말했던 그 사람들의 대열에 서게 된다......(중략)......더 이상 신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 고통으로부터 태어나 삶의 고통에 내던져진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법과 질서를 찾아내는 일은 인간의 몫, 오직 인간만의 몫이다. 그리하여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시대가, 사력을 다한 정당화의 탐구가, 대상없는 향수가,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가슴을 찢는 물음, 즉 내 집처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학 자문하는 절실한 물음"이 시작된다.
니체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기에 정신의 자유가 안락함이 아니라 인간이 갈구하는 위대함, 힘든 투쟁을 통해서 점차 획득하게 되는 위대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략)
그는 지성과 결합된 용기를 믿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이름으로, 용기를 지성에 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켜 놓았다......(중략)......어떤 한 예외적인 영혼의 고결함과 고뇌에 의해 조명받은 한 사상이 전세계의 눈앞에서 거짓들의 퍼레이드와 수용소에 산적된 끔찍한 시체들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예는 아직 없었다.


신은 죽은 게 아니라 굴러 떨어진 것이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반은 인간에게 가해진 불의를 보면서 신에게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의에 대하여 보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되씹어보고 가슴속에서 보다 비통한 불꽃을 태운 끝에 그는 '설령 당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를 '당신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변화시켜버렸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군인이라면 명령이 살인을 요구할 때 살인하지 않는 것은 범죄가 된다.
불행하게도 명령은 선을 행하기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다. 교조적인 순수 역동성은 선이 아니라 오로지 효율성만을 향해 나아가게 마련이다.


노동이 본래의 고귀함을 잃고 비천한 것으로 전락해버릴 때, 비록 그 노동이 삶 전체의 시간을 다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우리는 그에게서 배웠다. 이 생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절망 -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절망이 그 어떤 희망보다 낫다-을 이루는 것이다. 이 사회가 내세우는 구실이야 가지가지이지만 이 사회가 누리는 비천한 쾌락이 실은 수백만의 죽은 영혼들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과연 그 누가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죽이고 죽는 대신에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됨됨이를 창조하기 위해 스스로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는 것을.


빈곤은 때때로 행복한 이미지들을 보면 고통스러워 고개를 돌려버리는 법이다.

모순은 이런 것이다. 즉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면서도 그 세계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들은 세계에 집착하며, 거의 대부분 세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세계를 아주 망각하기를 바라기는커녕 그들을 오히려 세계를 충분히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괴로워한다.

이 예술은 죽음과 망각의 힘에 대항하여 이 세계와 존재들의 아름다움과 동맹하고 있다.

반항하는 인간의 논리는 인간 조건의 불의에 또 다른 불의를 보태지 않도록 정의에 봉사하고, 세상에 가득한 거짓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명료한 언어를 쓰고, 인간의 고통에 맞서서 행복을 위하여 투쟁하는데 있다.
(중략)
그의 유일한 미덕은 암흑 속에 빠져 있어도 암흑의 어지러운 현기증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데 있고 악의 사슬에 묶여 있어도 집요하게 선을 향하여 힘겹게 나아가는 데 있다.

만일 반항하는 인간이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는 침묵과 타인의 예속을 선택하는 셈이다.


그러나 참된 삶이란 이 가슴 찢는 고통 한가운데에 있다. 참된 삶은 이 가슴 찢는 고통 그 자체이며, 빛의 화산 위를 비행하는 정신이며 형평에의 열광이며 절도를 지향하는 불굴의 집념이다..... 지성과 용기의 언어이다.
(중략)
인간은 통제되어야 할 모든 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통제할 수 있다. 인간은 수정되어야 할 모든 것을 창조 속에서 수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어린애들이, 완전한 사회에서조차, 여전히 부당하게 죽어갈 것이다. 인간은 최대한으로 노력함으로써 다만 세계의 고통을 산술적으로 감소시키기를 꾀할 수 있을 따름이다. 불의와 고통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을 것이고 아무리 한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추문임에 변함이 없을 것이다.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왜?"라는 의문의 절규가 계속하여 울려 퍼질 것이다. 예술과 반항은 오직 최후의 한 사람이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중략)
그들은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잊고, 연기처럼 허망한 권력을 위하여 인간의 실감 나는 무게를 잊고, 찬란한 도시를 위하여 변두리의 비참을 잊고, 헛된 약속의 땅을 위하여 일상의 정의를 잊는다. 그들은 개인들의 자유에 절망하고 인류의 기이한 자유를 꿈꾼다. 그들은 고독한 죽음을 거부하고 엄청난 집단적 임종의 고통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세계를, 살아 있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중략)......사는 법과 죽는 법을 배울 것, 그리고 인간이 되기 위하여 신이 되기를 거부할 것.
사상의 정오에서, 반항하는 인간은 이처럼 인간 공동의 투쟁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신성을 거부한다. 우리는 일편단심의 땅 아티카를, 대담하고 소박한 사상, 명철한 행동, 그리고 지자(지식있는 자)의 너그러움을 택할 것이다.
(중략)
우리 각자가 다시금 스스로의 진가를 발휘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에 반하여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 즉 자신의 밭에서 얻는 보잘것없는 수확과 저 대지에 대한 짦은 사랑을 획득하기 위하여 팽팽하게 활을 당겨야 하는 이 시간, 마침내 한 인간이 탄생하는 이 시간, 시대와 시대의 풋풋한 열광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활이 휘고 활등이 운다. 최고조의 긴장의 절정에 이르러 곧은 화살은 더없이 단단하고 더없이 자유롭게 퉁겨져 날아갈 것이다.

- 카뮈의 소설과 사뭇 같고도 다른 느낌,  여러 다른 방대한 관점을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루고 있는 이 "시론"은 무척 생소하면서도 신선한 것이었다. 시니컬하면서도 무심하게 인간존재의 본질이나 사회의 모순을 꼬집어 내는 그의 소설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이고 웅변적인 그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부조리한 운명을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자연을 긍정하고, 지성과 용기를 통하여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2차대전 시기였으며,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이념과 구호가 휘날리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서의 정의와 존엄을 높이 세우고, 신을 제외한다하더라도, 인간만으로 당당하게 현재를 살아갈 것을 역설하는 그의 신념이 멋지고, 부럽다.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뿐더러, 과학과 물질문명에 묻혀버린 현대에 와서는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의 주체인 인간으로서 그가 말한대로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겨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고, 고통스럽더라도 당당하게 살도록. 다른 인간이 존엄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1년 11월 5일 토요일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중 2

*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있다.
가능성이 필연성을 뒤로 하고 독주하면,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자기가 돌아가야 하는 필연적(명증적)인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가능성의 절망이다. 이와 같이 자기는 추상적인 가능성이 된다.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몸부림치며 날뛰다가 지쳐 버린다. 그러나, 이 가능성의 장소에서 걸어 나올 수도, 또 어떤 장소로 도달하지도 못하나다. 도달하는 곳이란 필연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중략)
갈망의 가능성은 이와 비슷한 것이다. 가능성을 필연성으로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그는 가능성의 뒤를 쫓아간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이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가능성의 결핍은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다.


* 지상적인 것에 대해서, 또는 지상적인 어떤 개별적인 것에 대한 절망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고 외부로쿠터의 압박에 굴하는 것이지 내부로부터 행동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다.
(중략)
그를 절망으로 떨어뜨릴 만한 어떤 일이 들이닥친다(느닷없이 부닥친다). 이것은 그런 절망 이외의 방법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는 자기 속에 반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절망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 된다.
(중략)
그러나 그가 절망하고 있다고 자칭하며 마치 죽은 사람 같은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있을 때
사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그'라고 하는 인간 속에는 말하자면 아직 생명이 있다. 거기서 갑자기 일체의 것이 모습을 바꾸고 모든 외적인 것이 다시 나타나 원하는 것이 채워지기라도 하면, 생명은 그의 속에서 되살아나고, 직접성도 다시 일어나 그는 새로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중략)
이러는 가운데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 밖에서의 구원이 오면, 이 절망자의 생명도 되살아나게 된다. 그러면 그는 그가 그만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는 자기가 아니었고, 자기였던 적도 없다. 그는 다만 직접적으로 규정된 대로 살아가는 것 뿐이다.


* 영원한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것이 모든 절망의 정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 절망은 앞서 말한 절망보다는 질적으로 더 깊은 것으로서, 세상에서는 드물게 보는 절망에 속하는 것이다...(중략)... 이런 절망상태의 자기야말로 정말 철저하게 안 보이는 장막(최초의 자기를 철저히 가리는 절반의 회귀)이며 그 배후에 자기가 앉아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열심인 것이다. 게다가 그 자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의 자기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밀폐라고 부른다. (중략)
그러나 그 같은 자기는 현실 속에는 생존하고 있지 않고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황야라든지, 수도원 또는 정신병원 같은 데로 가 있는 게 아닐까. 그는 단지 다른 사람과 같은 복장을 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통 외투를 입은 현실의 이방인적 인간일뿐인가. 과연 그런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일에 관해서 그는 누구에게도, 단 한 사람에게도 털어 놓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중략)
이에 반해 그는 드문드문 고독에 대한 욕구를 느낀다. 고독은 때로는 호흡처럼, 또 어떤 때는 수면처럼 그에게는 생명처럼 필수적인 것이다. 그가 이 생명의 필수물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남보다 더욱 깊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고독에 대한 욕구는 인간 속에 정신이 있다는 증거이고, 또 그 정신을 재는 척도이다. '단순히 지껄이기만 하는 비인간적 세상사람'은 고독에 대한 욕구를 느끼기는 커녕, 단 한 순간이나마 고독하게 있어야 되기라도 하게 되면, 마치 군서조처럼 곧장 죽어버린다. 어린애는 자장가를 불러 재워야하듯이 이런 사람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자든지, 기도하든지, 무엇에 열중하든지 하기 위해서 사교상의 소란스러운 자장가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그러나 고대에도, 중세에도 이 고독에 대한 욕구는 알고 있었기에, 그 의미에 존경이 바쳐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교로 날이 새고 해가 지는 현대에 있어서는 범죄자에 대한 형벌로써 외에는 달리 쓸 줄 모르게 되었으니, 그 정도로 지금의 사람은 고독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현대에서는 정신을 가진다는 것이 죄를 범한다는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런 사람들,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범죄자 부류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이 틀어박혀 밀페되어 있는 절망이 절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유지될 경우, 그에게는 자살이 가까이 다가서는 위험이 될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렇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무엇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해 꿈에도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자살은 절대적으로 틀어박혀 있는 사람의 위험이다.


약함의 절망(일반적 의미로는, 절망하여 자기를 체념하고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나, 반항의 절망(일반적 의미는, 절망하여 자기자신이고자 재창조 하는 것) 중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좌절은 단독자에게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즉 인간 각자를 단독자나 단독의 죄인으로 만드는 데서 그리스도교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천지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좌절의 가능성들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단독자 각자를 향해 '너는 믿을지어다, 즉 너는 좌절하든지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 절망에 대한 여러 방향의 다각적이고, 깊이 있는 고찰이 키에르 케고르가 이룬 업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절망이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괴로운 상태임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간적이고 고귀한 가치로 간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개인의 절망의 여러 단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위에서 말하고 있는 저차원적인 절망과 고차원적인 절망. 인간이라면 그 모두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다만 소리높여 말할 수 없고, 입을 잠그고, 방문을 닫고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아닐까? 현대에 와서 내가 보는 또 하나의  절망은 '좌절을 모르는 조직 속에 인간됨을 빼앗긴 개인의 소리없는 절망'이다. 개인의 죄는 묻기가 쉬워도 여러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운 조직의 죄를 묻기는 어렵다. 죽지 않는 조직속에 유한한 개인의 운명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싶다.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존재이유를 자신의 내면에게 끊임없이 묻거나 아니면 그 물음을 아예 차단해 버리는 슬픈 개인의 삶들.......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중 1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을 말하는 것이다.

절망하고 있는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사상으로서의 절망을 생각한다면, 절망에는 큰 장점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 장점은 똑바로 서서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을 우월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이 장점은, 인간의 정신이라고 하는 무한히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이다......(중략)......
그러나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최대의 불행이요 비참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파멸이다. 

절망하는 사람은 죽을 수가 없다. "칼이 사상을 죽일 수가 없는 것처럼" 절망도 절망의 근저에 있는 영원한 것, 즉 자기를 녹여 없앨 수는 없다. 절망의 "구더기는 죽지 않고,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 절망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스스로가 바라는 것을 이룩할 수 없는 무력한 자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언젠가 모래시계가, 이 세상의 모든 모래시계가 멈추는 날이 오면, 그리고 속세의 소란이 침묵하고 쉴 새 없는 무익한 분주함이 종말을 고할 때가 오면, 그때는 그대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부자였는지 가난뱅이였는지, 남의 종이었는지 독립한 인간이었는지, 행복했었는지 불행하였는지, 또 그대가 왕위에 있으면서 왕관의 빛을 받고 있었는지 혹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천한 신분으로서 그날그날의 노고를 걸마지고 있었는지, 그대 이름이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인지, 사실 또 이 세상이 존속해 온 동안 기억에 남아 왔는지, 아니면 그대는 이름도 없이 무명인으로서 수많은 대중에 섞여 함께 뛰어 돌아다녔는지, 그리고 그대를 둘러싼 영광이 모든 인간적인 묘사를 능가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더없이 가혹하게 불명예스러운 판결이 그대에게 내려졌는지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것들에 관계없이, 영원히 그대에게, 그리고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오로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묻는다. 그대는 절망하고 살아왔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그대는 그대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 아니면 이 병을 마치 죄 많은 사랑의 과일을 그대 가슴속에 감추듯이 비밀로 간직한 채 살아왔는가, 또는 절망 속에서 미쳐 날뛰어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면서 살아 왔는가.
만일 그대가 절망하고 살아왔다면, 그대가 다른 면에서 무엇을 손에 넣었든 또 무엇을 잃어 버렸든 당신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영원은 그대를 모른다. 즉 영원은 근본적으로 그대를 모른다. 그러나 더 무시무시한 점은, 알려져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영원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은 그대를 그대의 자기와 함께 절망 속에 굳게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순간순간에 생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겉으로 보기엔 보통 인간으로서 평범한 일에 종사하면서 결혼하고, 애를 낳고, 존경을 받거나 명성을 얻기도 하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더 깊은 의미에서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가지고 크게 떠들어 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최대의 위험이 세상에서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조용히 행해지고, 거기에는 또한 상실감도 없다. 다른 것이라면 팔 하나, 다리 하나, 아내, 또는 그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잃어버렸을 때는 곧 알게 되면서도 말이다.


그와 같은 인간은 자기 주위에 있는 많은 인간의 무리를 보고 여러 가지 세상사적인 속된 일에 종사하며, 분주히 일하면서 세상일에 익숙해짐에 따라 자기 자신을 망각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또한 자기를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편이, 즉 원숭이처럼 흉내나 내며 있는 것,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평범한 하나가 되어 섞여 있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며 안전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절망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중략)...... 그런 사람은 조약돌처럼 깎이고 닦여서 화폐처럼 유통된다. 세상은 그들을 절망하고 있다고 보기는커녕 흔히 그렇듯 인간다운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모험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 그럴까? 모험을 하면 잃어버리는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이 된다. 그러나 모험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때야말로, 모험을 했다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그것만은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을 것, 즉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잃어버릴 리가 없었을 것을 무서울 정도로 쉽게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무이기나 한 것처럼 지극히 쉽게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중략)...... 비겁하게 온갖 지상적인 이익을 획득한다고 하면, 그래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 '절망'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고민했던가? 이 책을 펼치기 전 '죽음에 이르는 병'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했었다. 그것이 여러차원의 '절망'에 귀결된다고 케고르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절망'은 무엇보다 인간다운 것 (여기서 말하는 저차원적인 절망이 아닌,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과 절망에의 의지) 이다. 여기서 케고르가 묘사한 저차원적인 절망은 진정으로 절망스럽다. 인간의 본질적 가치 (여기서는 '자기'로 표현된다.) 는 무시된 채, 인간의 주변적 가치로만 판단되고, 사용되고, 소모되는 현대의 삶에 있어서 케고르의 경고를 한 번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키에르 케고르의 "불안의 개념"

만일 사람이 딱  한 번 참여할 수 있다면, 순간의 왈츠를 단 한 번만 출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삶을 영위한 것이며, 그는 더 불운한 삶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삶 속으로 뛰어드는, 그리고 사납게 앞으로 계속 돌진하면서도 결코 삶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삶을 이미 영위해 버린 것이다.......(중략)......비록 사람들이 절망의 초조감을 가지고 돌진하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하여간 제일 가까운 것을 움켜잡는다.

외면적인 재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넓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고통과 불안을 택하는 사람들, ......(중략)...... 거기에는 이 일을 하기로 결단한 데 대해 후회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순간, 만약 자신이 가진 재능의 직접적 성향을 따랐더라면 자기 앞에는 틀림없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를 좋은 인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을, 아니 때로는 아마 절망에 가까운 생각을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면,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차단되고, 또 미소를 담은 재능의 길은 자기가 단절했기 때문에 상실된 것같이 느껴지는, 그 진퇴양난의 무서운 고비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이렇게 알리는 것을 들을 것이다. "자, 내 아들아! 계속 나아가거라, 모든 것을 잃는 자야말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유가 죄를 두려워할 때 자유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중략)
죄에 대한 자유의 관계는 불안이다. 그것은 자유도 죄도 아직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ㅈ유가 이렇게 모든 정열을 기울인 소망을 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서, 자신 속에서 한 조작의 죄도 볼 수 없을 만큼 죄를 멀리하려 할 때, 자유는 죄를 응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응시는, 마치 가능성의 내부에서 채념한다는 것도 하나의 소망이듯이 불안의 양의적인 응시인 것이다.

악마적인 것은 어떤 무엇인가를 가지고서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불안에 떤다는 게 대체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하나의 모험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이제껏 불안해진 적이 없기 때문에, 혹은 불안 속에 빠져 버리기 때문에 멸망하고 만다. 그래서 불안을 바르게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동물이나 천사였다면 불안해지는 일은 없었을 거이다. 인간은 하나의 종합(정신에 의한 마음과 육체의 종합)이기 때문에 불안해 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불안이 깊으면 깊을수록 인간은 위대하다.

-키에르 케고르가 평생 남다른 '죄의식과 불안'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인이었다면 그렇게 고통받지 않아도 되었을 이 불안이 오히려 그의 맑은 영혼을 비춰주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인 환경이 이 남다른 성찰을 더 깊게,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안에 지지 않고 그것을 보듬어 않고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대한 의지를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