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9일 수요일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 중

나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의미니 이유니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이 동굴 세계에서 교양 있고 깨인 그림자로 인정 받는 지름길이었다.

시간이 변화를 뜻한다면, 실제로 이곳엔 시간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일정한 형체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이곳의 시간은 흡사 걸쭉한 죽과도 같아서, 끊임없이 저어 줘야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만약에 손을 떼면, 언제 움직였냐는 듯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려 이전과 이후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들에게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야 .진짜 노예만도 못한 노예, 진짜 죄수만도 못한 죄수가 바로 그들이야.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노예, 갇혀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는 죄수......

이브리는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도 다른 그림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 베히모트가 하는 말은 진실이 아니라고...... 왜냐면 저 바깥에 우리들이 원래 살았던 세상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잠시 망설였다.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스라임의 동굴' 중>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아마도 끝없는 알파벳의 사슬 중간쯤에 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 사슬이 끝이 없다면, 어디쯤 와 있는지를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 사이 나는 입구에서 한없이 멀어지기만 했다. (중략) 나는 이 여행 내내 뒷걸음질만 쳤다. (중략) 단지 한 과제의 자리에 그 이전의 과제가 맞물려 있을 뿐이다.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중>

우리는 갇혀 있다네, 스스로 선택하라는 선고가 내려졌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수없이 많은 불확실성 중에
어떻게 인간은 모든 것을 아는 듯이 결정할 수 있는가
미래가 어떨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을
그것을 안다 해도 이미 한 발은 묶여 있는 것을
왜냐면 모든 것은 정햬져 있기 때문에

모든 불신은, 결정할 수 있는 힘도 없이 뭔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고통 속에서 싹틉니다.

자유의 감옥에 맞선 끊임없고 황당한 싸움은 나를 이렇게 소진시켰습니다. 나는 더 이상 희망을 갖지도, 두려워하지도, 무엇을 위해 애쓰지도, 무엇에 대해 기뻐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문들에 대한 나의 관심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문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자유의 감옥' 중>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게 그들에겐 혼란스럽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그래서 어서 깨어나고만 싶은 꿈이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달갑지 않은 낯선 세계에 유배되어 그 안에 머물도록 단죄되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향수에 빠져,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현실'만을 그리워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중략) "나는 그 의미가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중략) 삶에 대한 희망과 의식을 버리면 사는 게 얼마나 수월해지는가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미련 없이 버려라! 알겠나!"
이 대화 이후, 마토에게는 변화가 생겼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언제나 그에게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까닭 모를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간혹 그 슬픔은 잠시 뒤편으로 물러서기는 했어요, 그를 완전히 떠난 적은 한시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가 투토 에니엔테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면 되새길수로, 그 그림자는 조금씩 거두어지고 있었다. 전혀 새로운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새로운 감정을 그는 자유의 가벼움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공허의 가벼움이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그는 다시 한번 이름을 바꿨다. 옛이름은 과거의 인생과 함께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길잡이'라는 의미의 '인디카비아'라 칭했다.
사람들이 이 이름의 뜻을 물어 오면 그는 습관처럼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길잡이 노릇을 하는 이정표는 비바람에 부서지고 썩기까지 해서, 그 자체론 아무 가치도 없는 나무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무 토막은 자신의 몸 위에 무엇이 씌여 있는지 스스로 읽을 수 없다. 설사 그것을 읽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안내하는 그 목적지에는 결코 가볼 수도 없다. 하긴 자신이 세워져 있는 그곳에 머무르는 게 그의 존재 목적이기도 하다. 이정표는 자신이 가리키는, 바로 그 목적지만 빼곤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으며, 그곳이 어디든 그의 가치는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 목적지야말로 이정표가 아무 쓸모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일한 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인디카비아 자신은 지금 자신이 안내하려는 그 목적지에 있는 게 아니므로, 그 길을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말이다.......

존재 자체가 더 큰 사기이며 허상인데 그 속에서 무얼 더 속이고 말고 한단 말인가?
<'길잡이의 전설' 중>


- '자유의 감옥'은 그의 다른 단편집 '거울 속의 거울'과 같은 철학적 물음들을 제시하고 있으나 공간적인 주제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엔데는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의 정형성과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 속의 공간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그 속성이 극대화되어 묘사되고 (모든 것이 반복되는 동굴, 선택의 문에 갇힌 자유의 죄수, 목적지를 지향하는 이정표 등), 이 공간을 극복하여 더 고차원적인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미지의 공간 (현실적 굴레를 벗어낫 철학적 사유의 자유로서의 공간)으로의 도약을 종용한다. 그 공간에 대한 정의나 실마리는 없으나, 그는 마치 자신을 '길잡이'로 묘사한 그 이정표처럼 어떠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가 가리키는 초현실적 공간으로의 이동을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인식, 반복의 안락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는 용기, 선택한 것을 추구하는 집념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 이후에 그 공간에 도달해서는? 그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미지의 공간이며 그 스스로 말한 것처럼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은 이정표가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진부한 현실에 안주하며 미스라임의 동굴의 그림자처럼 매일을 반복하며 존재의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한번은 꿈꾸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상상력의 대가가 철학적 질문을 던질 때, 안이한 삶을 불편하게 휘젓는다.

2014년 1월 27일 월요일

카뮈의 '작가 수첩 3' 중

어떤 날 저녁에는 그 감미로움이 끝나지 않은 채 오래 이어진다.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도 땅 위에는 이런 저녁들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면 죽는 데 도움이 된다.

'세심하다고 해서 한 인간이 위대해지는 건 아니다. 위대함은 맑은 날처럼 하늘의 뜻에 따라 찾아오는 것.'

한 순간이 지나자 그 문장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진동했고,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나는 심지어 최악의 도덕적 과오의 순간에도 명예에 대한 관심을 결코 버릴 수가 없었는데 금세기가 도달한 극도의 타락을 목도하면서도 나는 용기가 없었다.

나는 시민권이 없는 존재다.

이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챔피언들로서 저주의 안락한 진지 속에 파묻혀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하면 술책을 일삼는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장차 쓸 나의 책들은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책들이 시대에 복종하기보다는 시대를 스스로에게 복종시키기를 바란다.

40세가 되면 사람은 자신의 한 부분이 소멸되는 것을 용납한다. 다만 다 쓰지 못한 이 모든 사랑이 지금 나로서는 감당할 힘이 없는 한 작품을 일으켜 세워 빛나게 해주기를 하늘에 빌 뿐.

끊임없이 자기들 몫을 내놓으라고만 한다. 그들은 나의 정력이 무진장이라고 여기는지 자기들에게 내 힘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기진맥진할 지경인 창조의 정열에 나의 모든 힘을 바쳐버렸기에 그 밖의 것을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헐벗은 자이다.

지칠 줄 모르는 개떼들 같은 어둠.

일본으로 가는 말로에 대하여 V.R. 부인이 하는 말. "그는 그곳으로부터 돌아오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는 때가 오는 것이다.

보클뤼즈. 저녁의 빛은 술처럼 섬세하게 금빛을 띠며, 때로는 가슴에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저 고통스러운 수정들을 천천히 녹인다.

내겐 실질적인 시간이 없습니다. 특히 마음내키는 대로 친구들을 만나고 지낼 내면적 여유가 없습니다. (중략)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내 책들을 쓸 시간과 내면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그 동안에도 삶은 여전히 계속해야 하고 작업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은 계속되고, 나는 어떤 아침이면 소음에 지치고, 끝도 없이 계속되는 작업에 기가 꺾이고, 아침에 자고 깨면 신문 속에서 넘쳐나는 세상의 광기에 기진맥진한 나머지, 그리고 결국 나 한 몸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임을,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을 다 실망시키고 말 것임을 확신하 나머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고만 싶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더러는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이타주의는 쾌락처럼 하나의 유혹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자연스럽게 지불할 것.

니체: <새벽>. '자기 자신의 생각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묵과하지도 말고 숨기지도 말라. 이는 그대가 그대의 생각에 대하여 지켜야 할 으뜸가는 신의이다.'

고독의 불가능에 대한 희곡.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나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포석이 깔린 널찍널찍한 큰길들을 좋아한다. 벽들 못지않게 빈 공간으로 건설한 도시. 나는 니체가 일을 했고 나중에는 광기의 발작을 일으킨 비아 카를로 알베르토 6번지에 있는 집을 보러간다. 나는 오베르베크의 도착, 미쳐버린 니체가 광란하고 있는 방안으로 들어갈 때, 그리고 울면서 오베르베크의 품안으로 달려드는 니체의 행동을 전하는 이야기를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의견들은 없고 당파심들만 있다. 자유주의자는 거의 없고 가난과 그것의 이용, 그리하여 조금씩 조금씩 어떤 무기력 속에 빠진다.

사람은 누구나 다 최초의 인간이며 아무도 최초의 인간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을 되찾아야겠다. 나는 힘이 필요하다. 삶이 손쉬운 것이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삶이 어려운 것이라면 나도 그것에 버금가는 힘을 갖고 싶다.

최초의 인간.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에, 혹은 그저 상당히 비슷한 상황에서라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했던 것이기에 그 자신도 그렇게 했던 모든 일을 생각하노라면, 결국은 그것이 쌓여서 하나의 삶을 이루게 되는,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그 삶을 이루게 되는 그 모든 것을 -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택하여 살 줄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죽고마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 삶을 이루게 되는 그 모든 것을 생각하노라면.'

내겐 직업이 없고 오로지 소명받은 천직이 있을 뿌니다. 그리하여 나의 일은 외로운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값하는 인물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자기들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 이 사람들 앞에서 나는 쓸쓸한 기분에서 헤어날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이 자신의 일에 불평하고 있을 때조차 나는 카뮈가 느꼈던 그 쓸쓸한 기분과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나' 때문에 나는 그들의 삶과 같은 삶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델로스와 신트가 리니아 뒤로 차츰 차츰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의 슬픔과 너무나도 흡사한 묘한 슬픔을 느낀다. 처음으로 나는 내가 죽기 전에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고통스러운 느낌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땅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바다와 섬들 위에는 다시 변화하는 색깔들. (중략)
이 군도를 떠나는 절망감. 그러나 절망감 그 자체도 좋다.

나는 내 삶이 끝날 때 산 세폴크로의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 그 길을 천천히 따라 내려가고 싶고 여린 올리브 나무들과 키 큰 사이프러스나무들 사이로 걷고 싶고, 두꺼운 벽들과 서늘한 방들을 갖춘 어느 집에 저녁빛이 골짜기로 내려 덮이는 광경을 좁은 창문으로 내다볼 수 있는 아무 장식없는 방 하나를 얻고 싶다. 나는 아레조에 있는 프라토 공원으로 돌아가서 저녁에 요새 위의 소로를 산책하면서 이 비길 데 없는 땅 위에 밤이 덮여오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또...... 어디에 가나, 언제나 나 자신도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이 고독에의 욕구,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는 내밀한 심사와 더불어 일종의 죽음의 예고와도 같은 이 고독에의 욕구.

시대를 불행의 시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평탄한 시대라기보다는 그들의 악덕의 안전이다.'

햇빛이 사치인, 은행구좌가 없으면 나무도 없는 곳인 파리. 세계에 교훈을 주겠다는 파리.

때때로 나는 내 주변에서 나와 같은 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에 대하여 엄청난 애정을 느끼곤 한다.

이 세상에는 죽음이나 강제의 힘과 나란히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설득의 힘이 한 가지 존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나는 이제 어떤 관계도 견디지 못한다. 어찌나 맹렬히 자유를 갈구하는지 점점 더 고독만을 찾게 되는데 고독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끊임없이 F. 생각을 한다. 걱정이다.
저녁. 나 자신 때문에, 황량한 사막 같은 내 천성 때문에 낙담한 채로.

불교란 종교로 변한 무신론이다. 허무주의로부터 '출발한' 거듭나기.

켈라Cayla를 방문하다 : 고독하고 조용한 그곳 주위로 세계가 와서 죽는다.

행복 자체 속에서도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끊임없는 노력을, 이 공허한 고행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하여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이 부름을 포기해버리고만 싶은 유혹은 강하다.

29일에서 30일로 가는 밤 : 끝도 없는 고뇌.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을 하지 말 것.

물 속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억누르기 어려운 충동.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배의 뒤, 성난 물결 한가운데 버려진 인간의 고독.

지배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주기 위하여 가장 큰 힘을 회복해야 한다.

진실 속에, 진실을 위하여 산다는 것. 우선 자신의 실제 됨됨이의 진실. 사람들을 대할 때 구성하는 것을 포기할 것. 존재하는 것의 진실. 현실을 가지고 꾀를 쓰지 말 것. 그러므로 독창성과 그 무력함을 받아들일 것. 무력함에까지 그 독창성에 따라 살 것. 그 중심에서는 마침내 존중받는 존재의 무한한 힘을 가지고 하는 창조.

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살지 못한다. 나는 약간의 고독이, 영원의 몫이 필요하다.

바람이 뿌리고 바람이 거두었지만 그래도 창조자인 것, 수세기에 걸쳐서 단 한 순간을 사는 것이 자랑스러운 인간은 그런 것이다.


- 많은 책 들 속에서 카뮈의 글만큼 '진실'을 울리는 것은 없는 듯하다. 그의 글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신의 진실에 와서 박힌다.
그의 30대 후반에서 47세의 죽음까지 쓰여진 노트. 카뮈는 일찍 알려진 성공한 작가이고, 마흔 네살에 노벨상을 수상한 당시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작가로서 얼마나 그보다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작가 수첩은 많은 고뇌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특히 노벨상 수상 이후 그의 고뇌는 더 무거워진 듯 하다. 일반 사람들과 점점 멀어져가는 듯한 괴리감, 오해받는 그의 입지와 글들, 진실로 위대한 작품 창작에의 욕구 등이 그의 병약한 신체와 더불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다. 이 노트가 없었다면 우리는 카뮈에 대한 많은 부분들을 놓치고 말았으리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의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희망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짧은 노트를 통해 그의 죽음이 어떠했으리라는 생각을 그려 볼 수 있다. 그가 니체의 광기어린 아파트의 생을 머릿속에 그려봄으로써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듯이 카뮈의 어린 시절의 장소들, 티파샤, 지중해의 군도, 그리스, 이태리의 작은 마을 들을 들리게 된다면 분명 눈물이 솟구치리라.
그토록 집요하게 진실을 원했던 카뮈, '나의 직업은 책을 쓰는 일과 나의 가족, 나의 민족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는 싸우는 일이다. 그것이 전부다.' 라고 말했듯이 글로써, 그가 이 세상을 얼마나 진실되게 사랑했는지 언제나 이방인으로서 느끼면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연대감과 연민을 가졌었는지 지금의 삶에 용기와 의미를 주는 위대한 사람이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돌을 굴려 올린 시시포스와 같은 사람.

2014년 1월 26일 일요일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니까.

길고 여윈 얼굴에 피로한 눈빛과 애써 지은 냉소적인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고, 누구에게서도 편지가 오지 않았으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할 때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


스스로의 표현대로 '체면과 품위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일시적인 사랑이었지도 모른다는 것은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아내만 없었다면 오래 전에 외교관직에서 물러나 이탈리아의 어촌에 가서 살았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류트' 중>

그들은 고속도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스팔트가 눈에 젖어 그들의 발아래에서 반짝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부르크까지 육십오 킬로미터가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왔다. 노인은 글자를 힐끔 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다 왔다" 하고 그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이애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이애는 환자랍니다. 이애의 부모는 죽었고, 이 가엾은 어린것에게도 불행이 닥쳤지요. 오!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군인들이란 다 그러니까,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그 일은 이 어린 것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사의 말대로 심리적인 실명입니다. 이애는 세상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 거지요. (중략) 문제는 그때 이후 이 어린것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린 겁니다. 다시 말해서 두 눈을 자기 내부에 가두어버린 거죠.

우리 인간들은 말이죠.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겨우 출발했을 뿐이니까,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정말 어떤 존재가 될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표지판이 나왔다. 남자는 고개를 내밀고, "함부르트, 백이십 킬로미터"라고 씌여진 표지판을 읽었다. 그는 서둘러 안경을 벗었다. 놀라움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벌어진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서툰 운전사는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육십킬로미터나 더 멀리 데려다놓았던 것이다.  (중략)
"가자"하고 남자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제 다 왔단다."
<'지상의 주민들' 중>


- 로맹 가리의 16편의 단편. 로맹 가리라는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또다른 필명인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낸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에서였다. 그 책에서 주인공의 슬픈 운명을 필연적으로 사는 천진한 소년의 목소리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커다란 굴레 아래서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의 모습을 약간은 희극적으로 시니컬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지상의 주민들'이라는 단편에서는 인간 스스로 서로에게 만들어 낸 비극 속에서 상처받은 인간이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가두어버리고, 그럼에도 부조리한 희망 (다가가려할수록 멀어지는 희망)으로 걸어가는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맹 가리는 사람의 어떠한 부분이 가장 아픈지 글의 손톱으로 정확히 찔러 대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흉터를 헤집어 눈 앞에 들이댄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내밀한 상처를 안고 받고 살아가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자살로 마감했던 그의 생, 운명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너무도 컸던 것은 아닐까?


장석주의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중

<검은 오버>

검은 오버를 입고 산책길에 나선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며
나는 검은 오버가 무겁다고 느낀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의 죄가 아니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가 항상 너무 많은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 속에 수천 평의 추억들이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검은 오버는 번개다
검은 오버는 빈 들판이다
검은 오버는 컹컹 짖는 밤의 개다
검은 오버는 내 속에 질척거리는 진눈깨비 내려치는 길이다
검은 오버는 알 수 없는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던 
청춘의 한때
증오의 대상이던 아버지다
이제는 온갖 병치레를 하며 졸아든 아버지다

검은 오버에는 창문을 흔드는 바람이 들어 있다
검은 오버에서는 건초 냄새가 난다
검은 오버에는 오래전에 죽은 자들의 다문 입이 숨어 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검은 오버를 즐겨 입었다, 늦은 밤에
귀가하는 아버지의 검은 오버의 어깨에는 
별들이 함부러 묻어 있곤 했다, 아버지는
검은 오버를 사랑했다, 검은 오버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는 내게 이르시기를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말아라,
검은 오버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거라,
검은 오버는 내 인생에 유익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검은 오버가 싫다
검은 오버는 너무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누른다

<'후생' 중>

금생은 미혹이다, 미혹의 삶을 허물어
길을 만든다. 길은 어둠 속에서 수천 갈래의 길이 된다.
허공에서 우는 봉두난발의 한 넋이 있어
이천 년 후에나 올 애인을 기다리며
흙이 되어, 바람이 되어, 강물이 되어
길을 헤매이리라.
낮게 웅크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대가 남긴 것은
무르팍에 몇 개의 아문 흉터,
부디 다음 생에서는 만나지 말자.
더 이상 덧날 상처는 만들지 말자.
흐르는 물 위에 쓴 편지를
몇 겁 뒤에 읽을 애인이여,
나는 벌써 끊은 한 모금의 담배를 빨고,
남은 생을 주저 없이 어둠 속으로 던진다.

<'슬픔' 중>

누가
울음의 타는 끝을 보아라
온 산을 불지르는 진달래 철쭉꽃 같은
슬픔의 내 넋에 타는 불을 보아라
슬픔도 그렇게 타며 움직이는 슬픔만 와라
깃발처럼 천년 풍우에 헐벗은 깃발처럼
지금도 살아 펄럭이는 슬픔만 안겠다

<'나의 시' 중>

1
희망
모든 가난한 사람의 빵이 아니듯
나의 시는
나의 칼이 아니다. 
캄보디아나 아프리카 신생 공화국 같은 곳에서
빈혈의 아이들이 쓰러져 가고 있을 때
백지의 한 귀퉁이에
얌전히 적혀 있는 나의 시는 
나의 칼이 아니다.

2
내 생각의 서랍을 열면
그 어두운 구석에 숨겨져 있는
추억이라는 오래된 빵에
파랗게 피어 있는 곰팡이,
먹어서 허기를 면할 수도
갈아서 무기로 쓸 수도 없는 
그것이 나의 시다.

<등에 부침>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들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따.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 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 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으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 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한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폐허주의자의 꿈' 중>

3
무너진 것은
무너지지 않은 것의 꿈인가? 
어둠은 산비탈의 아파트 불빛들을 
완벽하게 껴안음으로 아름다워진다.
살아 더도는 내 몸 어느 구석엔가
몇 번의 투약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몇 마리 기생충,
그것이 나를 더욱 나답게 하는 것인가?
효용 가치를 상실하고 구석에 팽개쳐져 
녹슬고 있는 기계, 이 세상에 꿈은 있는가?
녹물 흘러내린 좁은 땅바닥에
신기하게도 돋고 있는 초록의 풀을
폐기 처분된 기계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장석주의 시는 조용하나 높은 파고를 가진 밤바다의 밀물같다.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거울 속의 거울' 중

1.
미안해. 난 이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할 수가 없어.

아니, 네가 내 말을 듣게 되는 순간이 오기는 하는 걸까?
내 이름은 호르야.

하긴 설사 네가 이런 내 부탁을 받아들여 나에게 다가온다 해도, 너 스스로 감당해야 할 침묵은 여전히 넘치도록 남게 되겠지. 아무튼 내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선 네 목소리가 필요해.

호르는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그 어떤 외침의 잔향들과 때때로 부딪히게 돼. 아니, 거의 항상 부딪히고 있다는 게 맞을 거야.

내 이름은 호르야.
나 스스로 호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게 맞겠지. 나 아니면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겠어.

나를 호르라고 불러 줘.
하지만 나, 호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오로지 단 한 명일까? 아니면 나는 둘이고, 그래서 그 두 번째 사람의 체험까지 나의 것으로 갖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저 수많은 사람은 아닐까? 그리고 '또다른 나'이기도 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저 바깥에서, 저 맨 마지막 벽 너머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희는 들을 수 없는 나의 말을 듣는가? 지금 들을 수 있는가? 아니면 시간이 없는 곳에서라면 들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나여, 너 역시 나를 찾고 있는가? 너 자신인 호르를 찾는가? 나에게 있는 너의 기억을 찾고 있는가? 우리는 별과 별 사이만큼이나 무한한 공간을 한발 한발 서로 상에 사이 겹치면서 다가서고 있는 것일까?

5.
막은 여전히 오르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스스로 따져 보았다.  자신이 춤 출 준비를 하고 여기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을 혹시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중략) 그러다 결국, 나에게 아무 연락도 없이 공연이 취소된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여기 서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을 까맣게 잊고 모두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 버린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난 여기에 얼마나 서 있었던 것일까? (중략) 그렇다, 그는 침착하게 집중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를 향해 뛰쳐나가야 할지 그는 자신이 없었다.

언젠부턴가 그는 막이 열릴 거라는 믿음을 접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기다리는 데 열중하느라 자기가 왜 기다리는지조차 잊었다.

10.
행성이 도는 것처럼 천천히, 두꺼운 판자로 된 커다란 원탁이 돌고 있다. (중략) 이 모든 것들의 한가운데, 자기로 만든 작은 인형처럼 가냘프고 깨지기 쉬운 네가 앉아서 함께 돌고 있다.

"떨어지는 것을 배우라!"

그런데 뭔가 달라지고 있다. (중략) 너로 하여금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든 그 타인이 지금 머물고 있다.

"너는 자유롭게 되거나, 아니면 너는 존재하지 않게 될거야."

11.
눈을 감는다. 얼굴의 내부, 그밖엔 아무것도 없다.
어둠, 공허.
귀향.

여기 누군가 생각한다. 귀향을 위해, 나는 끝없는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중략) 대체 나는 무엇을 바랐던 걸까?
이제 집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은 이 어둠과 공허뿐이다. 나는 미리 깨달았어야만 했다. 우리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야말로 이 세계가 존재하도록 자기 주변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13.
"아시겠어요? 난 이제 노인이에요. 그런데 난, 인생을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모든 게 삭제돼 버렸다고요."

"그녀는 나를 찾게 될까? 저 너머 또다른 문 뒤에서......."

22.
이젠 여행에서 기대할 만한 최소한의 그 무엇도 없었다.
(중략) 이렇게 그는 수많은 비밀을 보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정작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에 대한 비밀은 거기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비밀을 찾지 못했기에 다른 모든 비밀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한 임의의 형태에서 실로 놀라운 예술작품을 창조해낸 것은 결국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온 힘이었을 것이다. (중략) 그의 창조적인 정신은 그 속에서 본질적인 것을 들여다보았고, 또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 본질적인 것이 겨우 현실이 되었다.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침묵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럴진대, 왜 저를 슬프게 하려고 하십니까?"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수집해 과분하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4.
"그리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가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게다가 그 양쪽 끝이라는 게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중략) 도대체 무엇 때문에 광대는 그렇지 않아도 이미 불확실할 대로 불확실한 자신의 존재를 또다시 목숨을 건 게임에 내던지는 걸까요?"

25.
"당신의 향수를 잊어버리면 안 돼요. 이 여자는 당신한테서 모든 걸 앗아갈 거예요! 당신에게서 당신 자신을 앗아간다고요!"

29.
분장 아래 또 다른 얼굴 하나가 드러난다. 그것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아직 아무도 아닌 자의 얼굴, 그냥 그 무언가의 얼굴이다.  그것은 그에게도 아주 낯선, 항상 낯선, 그런 얼굴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견뎌 내고 있다면, 게다가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나보다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면....... 나는 내 평생을 두고 기다렸어. 그리고 깨어날 거란 기대 속에 늙어버렸지.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그냥 생각이 같은 걸로 치부하지.

깨어나려고 바라기만 해도 범죄라고 했지.

곧 깨어날 거라면 무서울 게 뭐 있나. 나 역시 꿈에 지나지 않아. 우스꽝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게 바로 나라는 존재야.

그는 한심할 정도로 방향감각이 없다. 그는 걷고 또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장님처럼 걷는다. 평생을 두고 걸어왔듯이 그가 걷는다. 
누구나 평생을 두고 걷는 거야. 다음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다음 걸음이 계속 딱딱한 바닥을 밟게 될 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텅 빈 공간으로 빨려 들어갈지 모르는 채 말이야. 이 세상은 닳고 닳아 가고 있어.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새로 결심을 해야 해.

마치 세상 돌가는 것을 관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항상 조금씩 비틀거리며 왠지 머뭇거리는 듯,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 머뭇거림을 극복하려는 듯 걷는다.

나라는 존재는 종잡을 수 없고 우스꽝스러워. 하지만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로운 결정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나에게 주어진 적이 없어. 인간에겐 현재 자신의 모습만 의미가 있지. 자유는 언제나 미래 속에만 있는 거야. (중략) 나중에 보면 일어난 일은 모두 필연이지만, 일어나기 전까진 그 무엇도 필연이 아니지. 오로지 문제는 꿈에서 깨어나는 거야.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의 꽁무니만 쫓아서 달리고 있어. (중략) 언제나 다음 순간에 있고, 언제나 미래에 있어. 그리고 미래는 어두워. 우리 눈앞에 놓인 뚫고 나갈 수 없는 검은 벽이야. 아니, 미래는 우리 두 눈 가운데를 세로로 가르며 지나가고, 우리 머리를 가로로 가르며 지나가. 우리는 눈이 멀었어. 미래 앞에서 눈이 먼 거야.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것을 결코 보려고 하지 않아. 우리는 코가 깨지기 전까지 결코 다음 1초를 보지 않지. 우리는 우리가 이미 본 것만 봐. 그러니까 그건 결국,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는 얘기야. 아무것도.

꿈꾸는 사람이 깨면 그 꿈은 어떻게 되는지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고요? 그러면 꿈꾸던 사람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요? (중략) 우리는 모두, 그 누구도 꿈꾸지 않은 단 하나의 꿈일까요?

30.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저기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는 거."

"그러니까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문을 지키느냐고?"


- 미하엘 엔데의 30편의 단편과 그의 아버지의 초현실주의 그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거울 속의 거울'. 미국에서 절판된 책이 너무 비싸 망설이고 있다가 한국어 번역판을 보고 바로 사서 하루에 읽어내려간 책. 그러나 그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 하루를 쉬고, 다음날 그의 다른 단편, '자유의 감옥'을 모두 읽고, 오늘 '거울 속의 거울'로 다시 돌아왔다. 결코 쉽지 않은 그의 상상.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의 무한한 반복, 그 마지막 반복을 구별해내기조차 불가능한 실재하지 않는 상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엔데는 현실이 더이상 현실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러나 너무도 현실의 어떤 모습과 닮아 있어 이에 대한 인식과 의미를 던진다.
문, 시간, 광대, 들리지 않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장면, 꿈꾸지 않는 꿈, 목적없는 기다림, 의미없는 반복 등의 초현실적인 그의 소설이 그토록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현실의 어떤 면과 너무 닮아서인 듯.
그의 소설은 '시작'이다. 그의 소설에 '끝'은 없다. 시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지고,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용기를 촉구한다. 무엇하나 정해진 것, 분명한 것은 없고, 이 끝없는 미로 속에서 '존재의 실재'조차 확실치 않을 때, 그는 타성에 젖은 삶을 버리고 어디론가의 '도약'을 요구한다. 그 도약이 어디로 어떻게 이끌게 될 지는 그도, 나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 단편들에서 엔데는 철학에 신비함의 옷을 입혀 우리 눈 앞에 들이댄다. 볼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몫일 뿐, 마치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 '호르', 가 들려지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인 것처럼.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카뮈의 '최초의 인간' 중

여기서는 쓸데없는 것들마저도 가난했다.
(중략) 그는 항상 죽음처럼 헐벗은 가난의 한가운데서, 보통 명사들속에서 성장했다. 반면에 삼촌댁에 가면 고유 명사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이었다. 그는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1905년 그의 아버지는 스무 살이었다. (중략) 르베스크 씨는 아버지와 동시에 징집을 당했다. (중략) 코르므리와 르베스크는 협로의 저 아래에서 보초 교대를 하게 되어 있었다. (중략) 그는 목이 칼에 찔려 있었고 납빛으로 부풀어오른 채 그의 입 안에 물려 있는 것은 그의 성기였다. (중략)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저자들은 잘못이야. 사람이라면 차마 그렇게는 못 해." 그 사람들로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슨 짓이듯 못 할 게 없다 "무엇이든 다 때려 부술 수 있다"고 르베스크가 대답했다. 그러나 코르므리는 미친 듯이 성을 내면서 고함쳤다. "아냐. 사람이라면 그렇게 못 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나서 그는 이윽고 마음을 진정했다. "난 가난한 사람이야. 나는 고아원 출신이지. 이런 옷을 입고서 전쟁에 끌려 오긴 했어도 나는 못 할 짓은 안 해." "못 할 짓을 하는 프랑스 사람들도 있어." 하고 르베스크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도 사람이 아니지."

"그 사람이 뭐라 그랬어요?" "앙리가 죽었어. 전사한거야." 뤼시는 봉투를 바라보기만 할 뿐 열어 보지 않았다. 그녀도 어머니도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중략) 덧문들을 닫은 다음 침대 위에 누워서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눈물도 없이 자신은 읽을 수도 없는 봉투를 주머니 속에서 꼭 거머쥔 채 어둠 속에서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불행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응 하고 대답했지만 아니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 파묻힌 기억을 뚫고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억은 벌써 부자들의 기억만큼 풍요롭지 못하다.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떠나는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고 그게 그 턱인 단조로운 생활을 하니 시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었다. (중략) 따라서 말없는 체념을 강요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녀로서 인생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한계도 없는 영토 위에서 경계도 없는 시간 동안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빛과 하늘의 광대 무변한 공간 속에서 정신이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자크는 자신이 세상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부자라고 느겼다.

그것은 아름다움 앞에서 약해지는 마음 바로 그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초등 교육 수료반 때 그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베르나르 씨는 어느 한 순간 그 아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 위하여 그의 인간적 무게를 송두리째 실어서 힘을 썼고 또 실제로 그 운명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오직 학교만이 자크와 피에르에게 그런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학교에서 그토록 정열적으로 좋아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집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가난과 무지로 인하여 삶이 안으로 닫혀 버린 것처럼 더욱 견디기 어렵고 더욱 음울했으니까 말이다. 가난이란 출구가 없는 요새와 같은 것이다. (중략)
그렇다, 학교는 그들에게 단순히 가정 생활로부터의 도피 장소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베르나르 선생님의 반에서는 적어도 학교는 어른에게보다는 아이에게 훨씬 더 근원적인 내면의 굶주림, 즉 발견에의 굶주림을 채워 주고 있었다. (중략) 제르맹 선생님의 반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들이 가장 높은 배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들이 나름대로 세상을 발견해 나갈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선생님은 단순히 그가 월급을 받고 가르치도록 되어 있는 것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 속에서 그들을 단순 소박하게 맞이하여 주었으며 그들과 함께 그 삶을 살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그가 사귀었던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자신의 사상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그는 예를 들어서 당시 많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반 교권주의적인 입장이었지만 교실에서 단 한 번도 종교에 대하여, 또 어떤 선택이나 신념의 대상이 되는 것이면 어느 것에 대해서나 절대로 비방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도둑질, 밀고, 무례함, 불결 등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그만큼 더 강하게 배쳑했다.

자크는 15년 전부터 매년 그를 찾아가 보곤 해왔다. 매년 찾아가 오늘처럼 문간에 서서 그의 손을 잡은 채 가슴 뭉클해져서 서 있는 그 늙은 남자에게 떠나기 전에 작별의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더욱 더 큰 발견들을 하라고 그를 정든 땅에서 뿌리뽑아 그 무거운 책임을 혼자 다 짊어지고 바깥 세상으로 나가도록 내몬 사람이 바로 그분이었다.

"이 고장 분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여기선 아무것도 그냥 두는 게 없어요. 때려부수고 새로 짓지요. 미래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 모든 세대의 사람들, 서로 다른 고장에서 지금은 어느새 황혼의 기미가 떠오르는 이 기막힌 하늘 아래로 찾아왔던 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를 안으로 닫은 채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들 위에는 엄청난 망각이 드리워졌다. 사실 이 땅이 베풀어 주는 것은 바로 그것, 다가오는 어둠으로 죄어드는 가슴 속에 고통만 가득 안고 마을 가는 길로 다시 접어든 그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밤과 함께 내려오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중략)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의 집에서는 아무도 어머니가 남을 위해서 일한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우선 그의 아이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크는 그 표현을 써넣기 시작하다가 멈추었고 갑자기 수치심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또 수치스러워졌다.
아이란 그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부모가 그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는 부모에 의해 규정된다. 즉,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규정되는 것이다. (중략) 그 같은 상황 속에서 그나마 의지할 모질고 졸렬한 자존심 뿐이었으므로 흔들림 없는 글씨로 서류에다가 <하녀>라고 써가지고 그런 것에는 별로 주의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복습 교사에게로 시치미를 떼고서 갖다 주었다. 그렇게 하고서도 자크는 결코 자기 집안의 형편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비록 절망적으로밖에 사랑할 수 없다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 한 가난한 아이가 아무것도 부러워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때로는 수치스럽게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숱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묵묵 부답인 가장 초보적인 도덕관만 갖추고서, 태양과 바다 혹은 가난이라는 무심한 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매일같이 현재의 삶이 너무나도 무궁무진해 보이는 바람에 미래의 삶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하느님이 외면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로 자라고 있었다.

훗날 그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은 권리를 존중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오직 힘 앞에서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어머니는 다정하면서도 건성인 키스로 응해 주고 나서는 박명속의 그 부동 자세로 되돌아가 자신이 앉아 있는 언덕의 저 발 아래서 지칠 줄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는 삶의 흐름과 거리 쪽으로 지칠 줄도 모른 채 시선을 던지고만 있었고, 아들은 목이 컥 막혀 오는 것을 느끼면서 지칠 줄도 모른 채 어둠 속의 그녀를 쳐다보면서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행과 대면한 채 불안 가득한 눈으로 구부리고 있는 그 메마른 등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집을 향해 돌아올 때면 언제나 다시 느끼게 된느 미지와 죽음 앞에서의 고통 하루가 저물 무렵에면 어느새 빛과 대지를 파먹어 가는 어둠과 같은 속도로 그의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 고통은

그들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뭐든지 다 알고 싶었다. 그들은 잘 쓴 책이건 험하게 쓴 글이건 상관하지 않았고 오직 글의 내용이 알기 쉽게 분명하게 쓰여 있고 격렬한 삶으로 가득 차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책이야말로, 아니 그런 책들만이 그들에게는 머리 밑에 고이고 무거운 잠을 자도 될 만큼 근거가 있는 꿈을 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책은 한 권 한 권마다 인쇄에 사용된 종이에 따라 섬세한, 혹은 은밀한 그 나름의 냄새가 있었다.

도대체 그 동네라는 것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한편 여자들, 그리고 카트린 코르므리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일만 했다. 그 이유인즉, 그들에게 휴식이란 모든 식구들에게 돌아가는 식사가 더욱 가벼워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엇다. 그 무엇도 보상해 주지 않는 실직은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재앙이었다.

실질적으로 자크에게 있어서 긴긴 여름은 어둡고 광채 없는 날들과 무의미한 일거리로 닳아 없어져 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잖아" 하고 할머니는 말했었다. 바로 그 사무실에서야말로 자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느낌이었다. (중략)
그러나 사무실에서 하는 그 일은 어디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에 이르는 것도 아니었다. 팔고 사는 것은 모두가 그 보잘것없고 미미한 행위들 주변을 맴도는 것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가난 속에서 살아 왔지만 자크는 그 사무실에서 천박함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발견했고 잃어버린 빛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중략)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 그들은 저마다 자기 껍질 속에 웅크리고 들어앉아 있었고 (중략)
그들을 기다리는 집 쪽으로 돌아서서 혼이 깃들이지 않은 노동과 불편한 전차 속에서의 기나긴 왕래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오는 급한 잠 사이에 나누어진 그 삶에 체념한 채 조용히 땀을 흘리면서 말이 없었다. 어떤 저녁 나절에 그들을 바라보노라면 자크는 항상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그는 오직 가난의 풍부함과 즐거움밖에 몰랐었다. 그러나 더위와 권태와 피로는 그에게 가난의 저주를, 끝도 없는 단조로움의 날들을 너무 긴 동시에 너머 짧게 만들어 놓는 저 눈물겹도록 멍청한 노동의 저주를 드러내보이는 것이었다.

으르렁대는 젊은 피, 삶에 대한 탐욕스런 갈망, 사납고 굶주린 지성을 가슴에 품고, 광란하던 즐거움은 낯선 세상이 그에게 가하는 돌연한 펀치에 번번이 끊어져 당황스럽기 그지없지만 곧바로 정신 가다듬고 알 수 없는 그 세상 이해하고 알고 동화하려 애쓰며, 슬그머니 빠져 나가려 애쓰는 법 없이, 결국은 언제나 태연한 확신 버리지 않고, 자신만만, 그렇지, 자신만 가지면 원하는 건 무엇이나 이룰 수 있으니까, 이 세상 것이라면 이 세상만의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불가능할 건 없으니까, 선의를 가지고, 치사하지 않게, 세상에 다가가므로 과연 그 세상을 동화시켜 가며, 그 어떤 자리도 욕심 내지 않고 오직 기쁨과 자유로운 인간들과 힘과 삶이 지닌 좋은 것, 신비스러운 것, 결코 돈으로 살 수 없고 사지 않을 모든 것만을 원하기에 도처에서 제자리에 있으려고 준비를 하는(그리고 또한 어린 시절의 헐벗음에 의하여 준비가 되어 있는) 그의 삶은 그러하였다. (중략)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존재의 알 수 없는 어떤 몫도 있었다. (중략) 그 깊은 물처럼,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더 그 무엇이 또한 있는 것이었다. (중략) 그리하여 그 빽빽하고 알아차릴 수 없는 파동으로부터 아직도 그의 내면에서는 매일매일 마치 그의 사막 같은 고뇌, 가장 비옥한 향수, 헐벗음과 소박함에 대한 돌연한 욕구, 무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처럼 가장 격렬하고 가장 무시무시한 그의 욕망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는 맹목적인 인내의 차원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의 무지한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건설했고 창조했고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나의 날들은 넘치도록 가득 찼었지만 그 무엇도 내 마음을 그처럼 가득 채우지는 못했다.

나를 떠밀어 준 것은 우선 내가 예술에 대하여 품어 온 엄청난 생각, 아주 엄청난 생각이다.
내게 있어서 예술이란 모든 것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은 그 누구와도 분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카뮈의 자서전과도 같은 미완의 소설, '최초의 인간'을 읽은 감회는 남다르다. 오랫동안 읽고 싶었으나 절판된 책이라 중고의 책을 이번 한국 방문에서 구했을 때 매우 기뻤다. 우연히 이 감상이 100번째 포스트가 된 것도...
이 소설은 미완일 뿐더러 거의 초고의 형태도 갖추지 못한 상태의 글들을 그의 딸과 편집자가 정리해서 그의 사후 34년이 지난 뒤 펴낸 것이다.

그의 첫 생각이 글로 고스란히 드러난 것을 읽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 그토록 풍요롭고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에 대한 묘사는 너무도 생생해 마치 살아있는 카뮈가  이야기라도 해주는 듯 했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 대한 그 본질적 숭고함과 따라다니는 무의미함에 대해 그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난과 불운 앞에서 어찌 해 볼 수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의 어린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린 시절 숨막히는 노동의 반복에 질식할 듯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 밖으로 뛰쳐나갔음에도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그 모든 정의와 열정을 자신의 삶과 글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의 위대함은 현실을 직시하고도 타협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연대를 가지고, 글에 대한 열망과 정의를 순수하게 지키며 살아갔다는 점이다. 그가 말했듯이 그의 예술이 그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글을 자신의 삶 속에서 꺼내어 아직도 뜨거운 피를 흘리는 따뜻한 진실을 들이댔다.

아버지의 기억이 없는, 무명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자식들인 자신은 (혹은 우리 자신은), 아마도 이 땅의 '최초의 인간'이 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으로도 남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망각된 생에 대한 그의 연민은 그러한 모든 사람을 그 뿌리를 가지지 못한 '최초의 인간'으로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으로부터 얻은 아버지에 대한 편린의 기억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일지언정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던 전쟁에 징집되어 죽어간 20대의 아버지), 어느 귀통이 이름이 적힌 작은 묘석, 어머니의 슬픈 등 돌린 모습에서 주워 들은 아버지의 부재에의 존재 등은, 카뮈가 자신을 '최초의 인간'으로 규정하기 이전에 그의 아버지가 '최초의 인간'이었으며 그 이전에 죽어간 평범하지만 존엄한 인간들의 삶을 '최초'로 규정하여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음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미완이고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리라. 그러나 이 책이 없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카뮈의 진정한 어린 시절의 모습들에 가슴이 저미고 공감하면서, 시대적 불행과 가족적 불운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빛나는 추억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그를,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그를 (숫자가 의미를 가진다면) 그리고 미래의 카뮈를, 치열하게 기억하고 싶다.





2014년 1월 16일 목요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 를 읽고

하루키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김영하' 작가의 책처럼 그가 쓴 책이 나오면 바로 사보게는 되지만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아놓고 다시 펴본다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물론 젊었을 때 '상실의 시대'를 읽고서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는 책을 보면서,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에서 나타난 그와는 달리 타지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특히 동양계 외국인, 이 느끼는 점에 대해 많이 동감했다. 특히 내가 알았던 미국에의 일본 사람을 떠올리게 해서 가끔은 미소짓게 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하루키가 전통적이지 않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나가는 작가의 모습을 담은 이 에세이는 어딘가 좀 서글픈 구석이 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어떤 문제, 타지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의 어떤 정해진 숙명적인 슬픔같은 것이다. 언어가 익숙해져도 친한 친구가 생겨도, 자신만 느끼는 어떤 괴리감은 열등감도 아니고 우월감도 아닌 혼자만의 이질감이다. 아마도 하루키는 그 것을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는 제목으로 표현해내었던 것 같다.

특별히 기억나는 부분은 없지만 읽는 내내 비슷한 지역에서 타향살이를 해 본 동양계 외국인으로서 많이 고개를 끄덕거리면 조금은 재밌게 조금은 쓸쓸하게 읽었던 책.

2014년 1월 14일 화요일

에밀 졸라의 '목로 주점' 중

젊은 여인과 함석공은 한 달 내내 사이가 좋았다. 쿠포는 제르베즈가 용기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밤이면 닥치는  대로 바느질감을 찾아 일을 하는 여자였다. 세상에는 정직하지 않은 여자들, 먹고 마셔대며 흥청망청 사는 여자들도 있다. 진정 제르베즈는 그런 여자들과 달랐다! 너무도 진지하게 살아가지 않는가! 이말을 듣자 제르베즈는 웃음 띤 얼굴로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그렇제 얌전하게 살지만은 않았다며, 이미 열네 살에 첫 출산을 했다는 걸 넌지시 언급했다. 어머니와 함께 아니스 술을 몇 병이나 비운 적도 있다는 얘기도 다시 꺼냈다. 산전수전 겪다 보니 조금 좋아진 것뿐이에요. 특별히 의지가 굳은 거라고 생각하진 마요. 오히려 굉장히 약한 걸요. 누군가 밀어대면 그냥 밀려가죠. 그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요. 그녀는 올바른 사회에서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나쁜 사회는 도축장의 도끼처럼 사람들 머리를 부서뜨리고, 순식간에 여자를 짓뭉개버리죠. 앞날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나요. 난 공중에 던진 동전과 같은 처지죠. 땅에 떨어질 때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아무도 몰라요. 그냥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 어릴 때 나쁜 예들을 너무 많이 봐서 잊지 못할 교훈을 얻은 것뿐이에요.

집을 얻는 날 쿠포 부부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러 갔다. 그런데 제르베즈는 큼지막한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이제 계단과 복도가 이리저리 만나고 갈라지면서 끝없이 이어진, 거의 작은 도시 하나만 한 이 건물에서 살아가게 된다. 잿빛의 건물 정면은 창문마다 햇볕에 말리느라 누더기 같은 옷들을 널어놓았고, 음산한 안마당은 광장처럼 포석이 깨져 있었다. 작업작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들으며 제르베즈는 심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꿈에 다가갔다는 기쁨이 있었지만, 동시에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두려움도 있었다. 굶주림이라는 괴물, 지금 자기 귀에 숨결을 뿜어내고 있는 괴물에 맞서 치러내야 할 엄청난 싸움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결국 빚은 다시 450프랑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한 푼도 더 갚아나가지 못하고 받을 세탁비로 제해 나가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제르베즈가 일을 덜 한다거나 가게가 잘 안 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그런데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고, 돈이 저절로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제르베즈는 대충 당장 쓸 돈만 있으면 만족했다. 어쩌겠어! 먹고 살 수 있으면 된 거지. 너무 불평할 필요는 없잖아? 이즈음 제르베즈는 살이 쪘다. 그리고 살이 찌면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쉽게 포기해 버렸다. 더 이상 미래를 생각하면서 두려워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계절이 바뀔수록 이 부부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진 것은 자기들 잘못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특히 비참한 가난 속에 허우적대는 인간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늘 운이 없다고, 신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집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둘은 하루종일 으르렁거렸다. 아직 치고받지는 않고 말다툼이 격해지면 몇 번 따귀를 날리기도 했다. 가장 슬픈 일은 이미 애정의 새장에 문이 열렸기 때문에 그 안에 있어야 할 감정들이 새장 밖으로 갈아가는 카나리아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좁은 집 안에 포개져서 서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 사이의 따뜻한 마음은 사라져버렸다. 각자 자기 구석에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쿠포와 제르베즈, 그리고 나나 셋 모두 건드리기만 해도 화를 냈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잡아먹을 듯이 덤볐다. 무언가가 끊어져 버린 것 같았다. 가족을 지탱하는 태엽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족의 심장을 함께 뛰게 해주는 장치가 고장 나버린 것이다. (중략) 저 인간은 도대체 언제 죽어버릴까?

사나흘 계속 영감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이웃 사람들이 문을 열어보며 죽은 게 아닌지 살폈다. 아니다. 영감은 살아 있었다. 제대로 살아 있는 건 아니고, 죽지 않아 살아 있었다.

방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알코올 냄새 때문에 머리도 지끈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며 불안이 엄습했다. 돌아보니 증류기가 있었다. 사람들을 술 취하게 만드는 기계는 안마당 안 유리로 덮인 곳에서 지옥 성찬의 전율을 퍼뜨리고 있었다. 밤이라 둥근 옆부분에 커다란 별 모양 등불 하나가 달려 있고, 증류기의 구리는 더 음침해 보였다. 안쪽 벽에 흡사 꼬리 달리 괴물이 이 세상을 집어삼키려고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의 그림자가 보였다.
(중략)
제르베즈는 뒤쪽에 있는 증류기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가마솥처럼 생긴 게 땜장이 마누라의 뚱뚱한 배 같았고, 거기에 구불구불 기다란 코가 부은 것 같았다 보고 있노라니 어깨에 전율이 일었다. 욕망이 뒤섞인 공포 같은 것이었다. 그랬다. 그것은 꼭 덩치 큰 매춘부, 마녀의 배 속에 들어앉은 금속 장기 같았아. 창자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불길을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진정 독물이 흘러나오는 샘이 아닌가. 저런 건 지하실에 묻어버려야 한다. 너무도 뻔뻔하고 가증스러우니까! 그런데도 제르베즈는 자꾸만 저 안에 코를 담그고 냄새를 맡고 싶었고 저 더러운 것을 맛보고 싶었다. 설사 혀를 데고 오렌지 껍질처럼 벗겨지더라도 말이다.
(중략)
두 번째 술잔을 삼키자 더 이상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쿠포와 화해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중략)
그녀는 이제 정신없이 들이켰고, 메보트를 '내 아들' 이라고 불렀다. 등 뒤에서는 술 취하게 만드는 기계가 여전히 웅웅거리며 땅 밑으로 개천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저 기계를 멈출 수는 없으리라. 저 안에 든 걸 다 마셔 없애버릴 수는 없으리라. 
(중략)
하지만 얼이 빠져버린 듯한 제르베즈의 얼굴을 본 순간 랄리는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독주 냄새를 풍기는 숨결, 흐리멍텅한 눈, 일그러진 입, 모두 아이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제르베즈는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지나갔고, 문간에 선 랄리는 어두운 눈길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간이 무슨 일에도 익숙해진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먹지 않고 지내는 것만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것만은 제르베즈를 힘들게 했다. 인간 말종이 되어 시궁창에 떨어진 것도, 자기가 지나갈 때 옆 사람들이 더럽다고 옷을 터는 것도, 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리 험한 대접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속이 주리면 늘 창자가 뒤틀렸다. 



- 고된 현실과 잘못된 사회가 세월의 인간을 승리할 때 느껴지는 비릿한 씁쓸함. 
주인공인 제르베즈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썼다. 더러운 환경속에서 세탁부로서 더러운 것들을 깨끗히 빨아 돈을 버는 제르베즈는 유혹도 거부하려 했고, 아이들을 잘 키우려고 했고, 돈을 모으려고 했고,  그저 열심히 살아보려 했다. 그녀는 착한 성품이었고, 가난한 이웃에게 친절했으며, 무엇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그녀의 꿈은 굶지않고 깨끗한 집에서 사는 것, 그것 뿐이었다.
남보다 열심히 일하는 제르베즈는 그 꿈에 다가가는 듯 했으나 결국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굴복하게 된다. 허영과 과시욕에 굴복하고, 식탐에 굴복하고, 게으름에 굴복하고, 타락에 굴복하고, 이웃의 질시와 험담에 굴복하고, 그녀가 혐오해 마지않던 음주에 굴복한다. 그럼으로서 서서히 몰락해가는 인간, 열심히 살아보려고 그렇게 발버둥쳤으나 서서히 죄어드는 환경의 덫에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을 에밀 졸라는 그려내고 있다. 바르고 굳건한 인물이면서 제르베즈를 흠모하는 대장장이 구제라는 인물조차 산업화의 기계들에 의해 설 곳을 잃어가는 모습에서 졸라는 산업화의 수레바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되는 소시민의 비극을 너무도 생생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구성 속에서 처음부터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목로주점, 독주를 만들어내는 그 곳, 만이 당당한 위치를 점하고 개인의 비극의 즙을 짜 다시 그 원료로 삼아 소시민의 고통의 수레바퀴를 시대를 거듭해 계속 돌릴 듯하다. 물론 주인공인 제르베즈의 불행이 그녀의 잘못으로부터 비롯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으나 졸라는 처음부터 제르베즈 스스로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인정하고 사회에 던져진 동전 하나처럼 미미한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개인들의 비극적 삶이 사회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했음을 한 개인의 안타까운 삶을 통해 역설하고자 했던 듯하다.

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카뮈의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

사람은 어느 한 극단으로 쏠림으로써가 아니라 양 극단에 동시에 닿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파스칼-


'첫 번째 편지' 중 (1943년 7월)

나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수단들이 있습니다.

전쟁을 경멸하면서도 투쟁을 한다는 것은, 행복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한다는 것은, (중략) 우리는 우리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에게는 마음에도, 지성에도 극복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 가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억제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당신들과는 달리 우리는 무기를 가지고 승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억제할 것이 많았습니다. 우선 당신들과 닮은 짓을 하고 싶은 유혹부터 뿌리쳐야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지성이 시키는 것을 모른 체하고 오직 효율성만을 중시하여 본능에 휩쓸려버리고 싶은 무엇인각가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에게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는 것인지, 이미 충분할 만큼 가혹한 이 세상의 비참함에 또 다른 비참함을 덧보태도 되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전에 가끔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정신이 검을 당할 수 없지만 검과 힘을 합친 정신은 한갖 검일 뿐인 검에 대해서 영원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기서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우리 편임을 확신하고 난 우리가 이제 검을 뽑아 들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아야 했고 스스로 죽음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중략) 사람은 스스로 대가를 지불한 것만을 제대로 소유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비싼 대가를 지불했고 앞으로 더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확신과 이유들과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패배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나라는 수많은 오류와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함의 근본인 생각을, (중략)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중략) 나는 그런 나라의 국민입니다. 내 나라는 나의 어렵고 까다로운 사랑으로 사랑할 가치가 있습니다. (중략) 반대로 당신의 나라는 그 국민으로부터 그 나라에 대한 합당한 사랑, 즉 맹목의 사랑밖에는 받을 자격이 없다고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 사랑이든 사랑만 받으면 다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이 점에서 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혁혁한 승리를 거둘 때 이미 패배한 당신이없으니, 이제 다가오는 패배 속에서 당신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번째 편지' 중 (1943년 12월)

마음속에 확신이 생긴다고 해서 반드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오히려 나 자신입니다. (중략) 폭군과 신을 결국은 버리고 마는 힘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것은 자명함의 힘입니다. 우리가 보존해야 할 것은 인간적인 자명함입니다. (중략) 만약 의미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당신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의미 있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당신들의 희생에는 아무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치의 우선 순위가 잘못되어서 당신들이 중시하는 가치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나라에서는 신들조차 전쟁에 동원된 것입니다.


'세 번째 편지' 중 (1944년 4월)

그 모든 풍경들, 꽃들, 경직지들은, 세상의 땅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그 땅은 봄이 올 때마다 세상에는 당신들이 피 속에서 질식시키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편지' 중 (1944년 7월)

그러나 당신들은 기어이 일을 저질렀고 우리는 역사 속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5년 동안, 서늘한 저녁의 새소리를 즐기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절망해야 했습니다. (중략) 5년 동안 이 땅 위에서는 아침마다 죽음의 고통이 있었고 저녁마다 투옥이 있었으며 점심때면 살육이 행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렵지만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들을 따라 전쟁에 뛰어들었으면서도 결코 행복을 잊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고함과 폭력 속에서도 우리는 행복했던 바다와 결코 잊어본 적이 없는 언덕의 추억을, 소중한 미소를 한사코 가슴속에 간직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가지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우리는 그 무기를 결코 내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절망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토록 엄청난 불의를 당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증명해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책무입니다. (중략) 곧 동이 틀 것이고 당신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저지르는 잔혹한 승리를 못 본 체하며 무관심했던 하늘이 당신들의 당연한 패배에도 무관심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 '정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을 수 있다면, 이 순진한 인간의 옹호자, 카뮈가 아닐까? 나치의 불의에 대하여 그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써내려간 산문을 보면, 모든 것이 혼돈과 파괴 속에 몰아붙여진 세계대전의 상황 속에서 분명하고 명료하게 무엇이 잘못인지를 칼로 끊는 듯한 문장 속에서 짚어가고 있다. 이 잔인한 살육과 폭력속에 그는 분명히 절망하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게 절망이 끝이 아님을 피로 적셔진 대지가 틔워내는 봄꽃처럼 인간에게 옳은 것, 정의로운 것, 인간다운 것이 옳은 승리를 결국에 이뤄낼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부럽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조국을 가진 카뮈. 나치 지지자에게는 아무리 싸워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조국은 사랑할 가치를 가지지 않았기에 그들의 승리는 의미가 없고 그들의 희생은 허무하다는 것을 꼬집어 내는 카뮈. 후에 불란서가 마다카스카르의 폭동에 대해 나치와 같은 불의로 대하는 것을 보고 개탄에 마지 않는 카뮈지만 이 글을 쓸 당시의 조국은 그에게는 피를 흘려 지킬 정신을 지닌 가치있는 조국이었다.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조국을 가진 것이 나는 매우 부럽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의 독일에 대한 맹목의 사랑이 아닌 진정한 의식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나라가 나에게는 있는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그러나 이 회보라의 안개로 둘러싸인 세계 속, 그래도 찾아야 할 의미와 가치!

2014년 1월 10일 금요일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 중

과연 공개적으로 처형을 하든지 아니면 처형하는 것이 꺼림칙하다는 것을 고백하든지 양자택일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본보기의 필요성 때문에 사형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스스로 그 광고를 필요불가결하게 만들어 스스로의 입장을 정당화해야 한다. 그 사회는 매번 사형 집행인의 손을 보여주어야 하며 직접, 간접으로 이 집행인이 존재하도록 만든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과도하게 신경이 예민한 시민들도 그 손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스스로 무슨 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살인을 범하고 있음을 시인하는 격이 된다.

결국 사형 집행에 30회 가까이 입회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벨라 쥐스트 Bela Just 신부처럼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사형 집행인들이 쓰는 은어는 그 추잡성과 저속성에 있어서 결코 범죄인이 쓰는 은어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대로의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중략)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 동안, 육체적으로는 생명이 다하지 않은 채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인정하자.

인간은 그가 굳게 믿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불가피한 죽음에 직면하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황무지가 되고 만다.

알코올이라는 씨앗을 파종하는 국가로 말하자면 범죄를 수확하게 되더라도 놀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기야 국가는 그런 사실에 놀라지 않고 다만 국가가 그렇게 많은 알코올을 쏟아 부은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국가는 태연하게 사법권을 휘두르며 마치 채권자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양심에 꺼리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죄와 무죄를 다 밝혀낸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과학이지만 그 과학도 자신이 죽인 사람을 되살려내는 일에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두 배심원단이 정확하게 똑같은 경우는 세상에 없으므로 사형당한 사람이 어쩌면 사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그는 그 행위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시대 분위기 때문에도 사형을 당한 것이다. (중략) 이들은 시대와 풍습은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무 빨리 처형당한 유죄인이 더 이상 그토록 흉악하게 보이지 않는 날이 오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사무치게 후회하거나 망각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다. 물론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쪽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만큼 병이 든다. 그리스인들은 범죄가 처벌받지 않으면 도시가 타락한다고 했다. 그러나 무죄가 처벌받거나 처벌이 너무 과해도 여전히 도시는 더럽혀진다.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안다면 사법권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판결을 둘러싸고 생길지도 모르는 오류를 수정할 충분한 여지를 어느 정도 남겨놓아야 옳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선하지 않다. 인간은 그보다 더 악하거나 그보다 더 선하다. (중략)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심판자로 자처할 수 없으며 최악의 죄인이라 해도 결정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고 선고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절대적 결백을 자신할 수 없으니 말이다.

가장 피를 많이 흐르게 하는 자들은 법과 논리와 역사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개인으로부터 방어하는 것 이상으로 국가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한다.

이념이 지배하며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처형대가 우리에게 주는 모범이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유용하다고 믿게 될 때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유럽의 병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순전히 감상적인 이런 혼동은 관대함보다는 비겁한에서 나오는 것이며, 결국은 이 세상 최악의 것을 정당화하고 만다.


-어느 사회에서나 '공공선'을 위한 이라는 국가의 법 제정 및 실행에 있어서, 그것이 과연 개개의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선'인가 하는 문제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듯하다. 카뮈는 사형제도에 있어서의 야만성과 비형평성을 논의하며, 사형제도의 폐지를 그의 일생동안 (그의 문학작품 안에서도) 주장했다.
완전히 똑같은 재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없는 한, 돌이킬 수 없는 극형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 은 저지르지 말자는 것이다. '사형'은 '공식화된 살인'이며 그것이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라는 명목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글이 나에게 와 닿은 부분은 마치 당연시되어 온 국가의 법이나 정책이 개인의 권리, 자유, 존엄성을 침해할 때, 그 침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행해질 때, 그 침해가 어떤 공공의 목적이라는 명목을 달고 있으나 그 형평성이 맞지 않을 때, 그러한 때에는 구성원 개개인 그러한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바꿀 수 있도록 용기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 에세이를 쓸 때, 비난받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 제도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준 것이다. 침묵과 외면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유럽을 병들게 하듯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이 장소를 똑같이 병들게 할 것이다. 페스트의 타루가 말했듯이, 전락의 클라망스가 괴로워했듯이,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침묵하는 일을 그만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듯 (특히 그것이 개인의 생명에 관계되어 있을 때는...).

2014년 1월 6일 월요일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슬픔의 위안' 중

그러니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 "플러피(애완동물)를 잃어버렸을 때 내 심정이 꼭 이랬어요."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 큰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훨씬 가벼운 경험으로 자신들과 공감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슬픔이 깊어지거나 소외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두 가지를 다 겪게 된다.

두 아이를 익사사고로 잃은 이사도라 던컨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슬픔은 사람을 죽게도 하지요."

삶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런데 슬픔은 그 사소한 것들을 비틀어 떼어내 버린다. 죽음은 사소한 것들을 베어내 버리고 난 뒤 그 자리를 공허감 대신 인식 가능한 고통의 무게로 채운다. 고통은 엄연한 실재다. 그래서 고통은 공간을 채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에서 콘스탄스라는 여인은 어린 아들을 잃은 뒤 그 지극한 슬픔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것은 부재라는 무거운 실재에 대한 생생한 묘사다.
슬픔은 떠나간 아이의 빈 방을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서성거리고,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아이가 하던 말을 흉내 내어 말하고,
아이의 사랑스럽던 몸 구석구석을 떠올리고,
아의 형상이 되어 주인 잃은 아이의 옷을 걸치네.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 자신이 어린 외아들 햄릿을 잃은 직후에 쓴 것이다. 햄릿은 1596년에 죽었다. 그때 나이, 열한 살이었다.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 이 모양이다.

그런데 때때로 사람들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거북함이라는 다리를 건너 슬픔에 빠진 타인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내고야 만다.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만나는 아름다움은 심장을 꿰뚫는 검과 같다.

비탄에 잠긴 사람은 비탄에 잠긴 다른 이들을 아주 예민하게 알아본다. (중략)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여되어 있을지 모르는 공감 능력을 얻는다. 공감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시대가 약화시키고 있는 한 가지 본능을 회복시킨다.
우리는 자극은 과도하고 윤리는 약화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중략) 순전히 개인주의적으로 보내는 시간을 늘려가는 기세를 함께 생각해보라. 개인용 컴퓨터와 아이팟, TV와 취향에 맞게 직접 만든 웹사이트, 조지 해리슨이 노래한 것처럼 "하루 종일, 나는 나"다. 슬픔은, 좋든 싫든,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슬픔은 시작이다.

생명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슬픔을 이겨내는 사람들은 가장 정직하게 살아온 이들이다. (중략) 정직은 진실의 모든 측면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타인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다면 당신에게만이라도 슬픔을 털어놓으라.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위로의 말이 전혀 없음을, 어떤 말도 진정으로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얼른 깨달았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있어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비탄에 젖은 이들은 이 상처와 소금기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중략) 어떤 죽음을 둘러싸고든 항상 그 상황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 여럿이 함께 경험하는 신성한 슬픔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알베르 카뮈는 일기장에 다음 세 문장을 휘갈겨썼다.
치유의 단계들.
자유의지를 잠들게 하라. 
"해야 한다"는 이제 그만.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비탄에 젖은 이에게는 늘 친절을 베풀고, 아름답고 의미 있고 소중한 감정들을 표현한다. 이 모두가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억제는 대가가 크다.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표현대로 "너무 오래 희생하면 심장이 돌처럼 굳는다."

사람은 슬프면 추위를 느낀다.

기대고 울 어깨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기대고서 언짢은 말을 할 어깨도 필요하다. 그래야 속이 후련해지니까.

골웨이 키넬의 시 "성 프란체스코와 암퇘지" (중략)
때로는 필요하리.
인간 아닌 것에게 제 사랑스러움을 일깨워주는 것도,
꽃의 이마에 손을 얻고 
말로, 또 손길로
너 사랑스럽다
다시 들려주는 것도.
스스로 축복하면 안으로 피어날 때까지.
(중략)
더러운 것들을 만지고 감상에 젖은 감정들을 정리해도 슬픔이 누그러지지 않을 때조차, 언제든 매달릴 수 있는 감동 깊은 무엇이 바로 시다. 시는 무기는 될 수 없을지 모르나, 꽤 훌륭한 방패는 될 수 있다.

슬픔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자신이 사랑한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며,
자신이 사랑한 누군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선의에서 마음을 써주지만, 결국 뒤처리를 하는 사람은 여자다.

죽음은 삶을 끝내지만
관계를 끝내지는 않는다. (로버트 앤더슨)

나는 옛날 함께 등을 꼭 붙이고 있던 누군가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살아 있는 당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슬픔의 궤적이다. (중략) 오든은 "더 많이 사랑하는 이"라는 시에서, (중략)
모든 별이 사라지거나 진다면,
나는 배워야하리,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 법을,
그 암흑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법을.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 슬픔, 상실에서 오는 슬픔, 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위로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지구의 무게보다 몇 만배 크게 느껴지는 슬픔을 떠안은 개인이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있으라 아니면 괜찮은 것처럼 묵묵히 살라 하지는 말자. 이 책은 슬픔을 똑바로 바라보는 법부터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슬픔과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언젠가부터 부정적인 것, 금기시되어있는 것, 심리상담가를 만나야 하는 그런 것으로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상실의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혼자 집에서 그 무게를 떠안고 혼자 부정적인 생각으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감추어진 상처는 곪기 시작해 치유가 어려울 때쯤에 가서야 주변 사람들을 그 비애의 냄새를 맡으리라.

이 책은 상실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한 번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죽음은 인간사의 당연한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는 은폐되고 미화되어 실제로 들이닦치기 전에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어떤 일로 느껴진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사람은 당황하고 어쩔 바를 몰라 그 상실에 대한 슬픔조차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장례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더 이상 주변에 아무도 없을때 결국 실감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놈은 더 모질게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되는지도... 어려운 주제이지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과 주변인의 상실의 슬픔을 더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직도 내 휴대전화의 목록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이름과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이제 관계가 소원해진 그 번호를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지 않기에 나는 그 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다른 전화번호를 찾다가 마주치게 되는 그 이름을 보면 잠시 그 사람을 생각한다. 오든의 시에서 말하는 '텅 빈 하늘을 보는 법'은 아마도 그런 것지도 모르겠다. 

괴테의 '파우스트' 중

반짝이는 것은 순간만 존재할 뿐이지만,
참된 것은 후세에도 잊히지 않는 법입니다. (작가)

후세라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나까지 나서서 후세 어쩌고저쩌고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누가 웃겨주나요? (어릿광대)

아무리 자네가 완벽한 작품을 내놓아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걸 찢어가지고 갈 거야. (단장)

자넨 시인의 그 높은 곳에서 뭘 꿈꾸는가? 
그러면서도 극장이 만원이 되면 좋아하는 건 뭔가? (단장)

사랑에 눈이 먼 저런 바보는
잠시라도 애인을 기쁘게 해주려고
해와 달과 별까지 허공에 쏘아 올리려 한다니까. (메피스토펠레스)

이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 나느 게 뭔지 아쇼.
그건 바로 절망에 빠진 악마요. (메피스토펠레스)

여기서 피 맛을 보지 않은 단도는 없어요,
건강한 신체를 먹어치우는 뜨거운 독을
뿌리지 않은 잔도 없지요.
아름다운 여인을 꾀어내지 않은 보석도
없고, 맹약을 깨고서 등 뒤에서
상대를 찌르지 않은 칼도 없지요. (만물상 마녀)

세상의 절반은 흥청망청 먹는 것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새 옷을 차려입고 자랑하려 합니다. (집사장)

이게 젊은이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소명이오.
세계도 내가 창조하기 전에 있지도 않았어요.
태양을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도 나이고,
나로 인해 달도 차고 이울기 시작한 거요.
낮은 내가 가는 길을 위해 꽃단장을 했고,
푸른 대지는 나를 반겨 꽃을 피웠지요.
그 첫날밤에 나의 눈짓에 따라
하늘엔 별들이 총총했던 거요.
속물근성에 사로잡혀 있는 당신들을 
해방시킨 게 누구죠? 나 말고?
반면에 나는 정신이 일러주는 대로 자유롭게 
그리고 즐겁게 내 내면의 빛을 따를 뿐이죠.
그리고 마음속 희열을 느끼며 잽싸게
눈앞의 영광을 쫓지요. 어둠을 뒤로하고서. (학사)
(퇴장)
이 괴짜 자식아, 네 영광의 길을 가거라!
이런 사실을 넌 뼈저리게 느낄 거야,
이 세상에 멍청한 것이든, 현명한 것이든
옛 사람들이 이미 생각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그래도 이런 놈은 위험할 것이 없어,
몇 년 안 돼 생각이 바뀔 거거든.
포도즙이 별별 괴상한 모습을 보여봤자
결국 남는 것은 포도주지.
(중략)
그래도 알아둬라, 악마는 나이가 무척 많아,
그러니 악마를 이해하려면 너희도 늙어야 해! (메피스토펠레스)

아무리 이런 풍요로움을 느낀다 해도
갖지 못한 한 가지가 큰 고통을 준다. (파우스트)

그는 어떤 향락, 어떤 행복에도 만족지 못했고,
늘 새로운 뭔가를 찾아 나섰다.
이 보잘것없고 공허한 마지막 순간을
잡아두려 하다니, 불쌍한 사람.
나한테는 그렇게 끈덕지게 저항하더니,
세월은 어쩔 수 없어, 이 노인 모래바닥에 누워 있다.
시계는 멈추었다. (메피스토펠레스)


- 어려서 읽어서 간략한 스토리라인 외에는 기억나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많은 문학작품에서 회자되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시 읽었다. 화려한 문장과 다채로운 배경, 순간 순간 바뀌는 장면들이 하나의 서사극을 보는 듯한 느낌. 그러나 나의 문학적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존경받는 지식인인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의 도움을 받이 순진한 여자를 농락하고, 그녀의 모친과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결국 그 여인과 그의 아기마저 죽음에 몰아넣고는 연민이나 탄식없이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헬레네를 쫓아다니는 욕망과 색정에 물든 인간, 권력과 부를 탐하고, 그 얻은 것이 모자라 옆의 노부부의 작은 언덕을 빼앗고자 하는 탐욕,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잠시 등장하는 '학사'라는 인물은 마치 파우스트의 젊은 시절을 엿보게 하는 듯하다.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느껴지고 숭고한 목표에 자신을 바치는 듯한... 그러나, 메피스토펠레스가 암시하듯 인간은 세월이 지나면 결국엔 욕망과 욕심에 굴복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파우스트의 죽음 앞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어떤 행복에도 만족지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탐닉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 본질적으로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이 없다면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로서의 욕망을 충실히 따라간 파우스트의 삶을 추앙고자 한 것일까? 이 책에는 도덕적이며 올바른 방법은 모두 악마적인 술수에 진다. 파우스트가 여인을 얻은 것도 술수와 계략이고, 부와 권력을 차지한 것도 술수와 계략이다. 심지어 마지막에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사에게 뺏기는 것도 천사들의 술수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집필을 시작한지 70여년만에 완성하고 얼마 후 고인이 되었던 괴테 자신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는 이 대작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아마도 그가 썼던 편지에 언급되었듯이 "궁극의 성자가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 나타나는 그런 진정한 종교를 향해 내가 날아갈 수 있다면......" 이라는 말처럼 그는 인간의 사랑과 욕망을 신과 악마와 견주어도 좋을 신성한 목록들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고자 하는 나에게는 카뮈나 말로의 책들이 더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