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4일 화요일

카뮈의 "여름" 중

<미노타우로스 또는 오랑에서 잠시> 중

이젠 사막이라곤 없다. 섬들도 없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아쉽다는 느낌은 있다. 세계를 알려면 때로는 딴 데로 고개를 돌리기도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려면 잠시 그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힘을 얻는 데 필요한 고독은, 정신이 집중되고 용기가 가늠되는 긴 호흡은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남은 것은 대도시들뿐이다. 다만 거기에도 또한 조건들이 필요하다.

딴 사막들, 영혼도 의자할 곳도 없는 딴 곳들이 있어야 한다. 오랑은 그런 곳의 하나다.

오랑은 단단한 하늘로 뒤엎인 둥그렇고 누런 큰 담이다. 처음에는 미궁속을 헤매며 아리아드네의 신호인 양 바다를 찾는다. 그러나 억압적인 황갈색 거리에서 뺑뺑 돌게 되며 끝내는 미노타우로스가 오랑 시민들을 먹어치운다. 그것은 권태다. 오래 전부터 오랑 시민들은 헤매지 않게 되고 말았다. 잡아먹히기로 승낙한 것이다. 

공허, 권태, 무관심한 하늘, 이런 곳들의 매력은 무엇들인가? 그것은 아마도 고독이고, 또 어쩌면 계집일지도 모른다.

허무는 절대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세계다.


<명부의 프로메테우스> 중

오늘날의 인류는 오로지 기술만을 필요로 하고 오로지 기술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 인색한 시대에, 헐벗은 나무들에, 이 세계의 겨울에 굴하는 것일까? 그러나 빛을 그리는 이 향수는 내가 옳음을 인정해준다.


<수수께끼> 중

세계의 부조리는 어대 있는가? 이 눈부신 햇빛인가 아니면 햇빛이 없던 때의 추억인가? 기억 속에 이렇게도 많은 햇빛을 담고서 내가 어떻게 무의미에다 걸고 내기를 할 수 있었던가? 내 주변에서는 그래서 놀란다. 나도 때로 놀란다. 바로 그 태양이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그리고 빛이 너무 강렬해지다 보면 우주와 형상들을 캄캄한 눈부심 속에 응고시키고 마는 것이라고 남들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티파사에 돌아오다> 중

나는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낯이 익은 얼굴들에서 내 나이를 읽어내곤 했다. 나는 다만 그 사람들이 나와 함께 젊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젊지 않다는 것을 알 뿐이었다.
티파사로 돌아가게 될 순간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대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자신의 젊음의 고장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스무 살 적에 사랑했거나 강렬하게 즐겼던 것을 마흔 살에 다시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광기, 거의 언제나 벌을 받게 마련인 광기다.

나는 그 시간이면 기진한 동작으로 간신히 조금씩 부풀어오르곤 하는 바다를 바라보았고, 존재가 말라붙어버리지 않고서는 오랫동안 속여서 달랠 길은 없는 두 가지의 갈증, 즉 사랑과 찬미라는 갈증을 충분히 채우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니까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그 불행으로 죽어가고 있다. 피와 증오가 마음 자체를 말려 죽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언덕 위에서 쉬고 잠잘 수도 있고 아니면 범죄 속에 기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의 한쪽 몫을 포기한다면 스스로 존재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이리하여 삶의 그 어는 것 하나도 마다하지 않고 살려는 의지가 있으니 이는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중하는 미덕이다.

그렇다.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 하면 모멸당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해내기가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그 어느 한쪽에도 불충실하고 싶지는 않다.

티파사 동쪽에 있는 생트 살자 언덕 위에서는 저녁 속에 무엇인가 깃들여 살아 있다. 아직은 밝은 것이 사실이지만 빛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느 어떤 쇠잔하 기미가 낮의 끝을 예고해 주고 이씨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때로는 아직 훤한 하늘에 첫 별이 뜨는 시각, 가녀린 비를 맞으며 나는 안다고 여기기도 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마 늘 알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도 그 비밀을 원하지 않으며 아마 나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 그래서 나는 내 가족들과 떨어질 수가 없다. 돌과 안개로 지은 부유하고도 끔찍한 도시들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내 가족들 가운데서 나는 살고 있다. 그 가족은 밤낮으로 목청 높여 지껄이며 그 무엇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그 가족에게 모두가 다 굽힌다. 그들은 모든 비밀에 대하여 귀가 먹었으니까 말이다. 나를 떠받쳐주는데도 그들의 권력이 내게는 따분하기만 하고 그들의 고함 속리에는 진력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도 어느 날엔가 우리가 기진하여 피로와 무지로 하여 죽을 차비를 하게 될 때엔 나는 떠들썩한 우리들의 묘지를 버리고 그 골짜기 속 바로 그 빛 아래로 찾아가 누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바다 -항해일지-> 중

나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비틀거리고 실수를 해서 성공을 놓친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때 나는 혼자인 것을.

나는 아직도 기다린다. 어느 날이 와서 마침내......

부드러움이 길게 연장되는 어던 밤들에는, 그렇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그런 밤들이 땅과 바다 위에 되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죽는 데 도움이 된다.

만일 내가 싸늘한 신에 둘러싸여 세상 모르게,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죽어야 한다면 마지막 순간에 바다가 내 감방을 가득 채우고 밀려와 내 힘 이상으로 나를 떠받쳐서 미움 없이 죽도록 나를 도와줄 것이다.

어느 갑작스러운 사랑, 어느 위대한 작품, 결정적인 행위, 변모를 가져다주는 사상은 어떤 순간 억누를 수 없는 매혹에 겹쳐 바로 그런 견딜 수 없는 불안을 갖다 준다. 존재의 감미로운 고뇌, 그 이름을 알지 못할 위험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절묘한 느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느 것인가? 다시금, 끊임없이 우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자.

나는 언제나 난바다에서, 위협을 받으며, 당당한 행복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 현실의 한복판에서 이상을 놓지 않으며 자연에 귀속하는 낙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카뮈의 산문집 "여름", 자연을 위에도 밑에도 놓지 않으면서 껴안으면서도 관조하고,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도 삶을 더 치열하게 느끼는 그의 모습이 그의 글 속에서 느껴진다. 그의 글은 아름다우면서도 힘이 넘치고, 감미로우면서 씁쓸하다. 소낙비처럼 혹은 진한 땡볕처럼 마음을 두드려대는 그의 글에 한동안 이 책을 놓지 못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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