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4일 금요일

키에르 케고르의 "불안의 개념"

만일 사람이 딱  한 번 참여할 수 있다면, 순간의 왈츠를 단 한 번만 출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삶을 영위한 것이며, 그는 더 불운한 삶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삶 속으로 뛰어드는, 그리고 사납게 앞으로 계속 돌진하면서도 결코 삶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삶을 이미 영위해 버린 것이다.......(중략)......비록 사람들이 절망의 초조감을 가지고 돌진하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하여간 제일 가까운 것을 움켜잡는다.

외면적인 재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넓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고통과 불안을 택하는 사람들, ......(중략)...... 거기에는 이 일을 하기로 결단한 데 대해 후회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순간, 만약 자신이 가진 재능의 직접적 성향을 따랐더라면 자기 앞에는 틀림없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를 좋은 인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을, 아니 때로는 아마 절망에 가까운 생각을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면,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차단되고, 또 미소를 담은 재능의 길은 자기가 단절했기 때문에 상실된 것같이 느껴지는, 그 진퇴양난의 무서운 고비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이렇게 알리는 것을 들을 것이다. "자, 내 아들아! 계속 나아가거라, 모든 것을 잃는 자야말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유가 죄를 두려워할 때 자유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중략)
죄에 대한 자유의 관계는 불안이다. 그것은 자유도 죄도 아직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ㅈ유가 이렇게 모든 정열을 기울인 소망을 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서, 자신 속에서 한 조작의 죄도 볼 수 없을 만큼 죄를 멀리하려 할 때, 자유는 죄를 응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응시는, 마치 가능성의 내부에서 채념한다는 것도 하나의 소망이듯이 불안의 양의적인 응시인 것이다.

악마적인 것은 어떤 무엇인가를 가지고서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불안에 떤다는 게 대체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하나의 모험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이제껏 불안해진 적이 없기 때문에, 혹은 불안 속에 빠져 버리기 때문에 멸망하고 만다. 그래서 불안을 바르게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동물이나 천사였다면 불안해지는 일은 없었을 거이다. 인간은 하나의 종합(정신에 의한 마음과 육체의 종합)이기 때문에 불안해 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불안이 깊으면 깊을수록 인간은 위대하다.

-키에르 케고르가 평생 남다른 '죄의식과 불안'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인이었다면 그렇게 고통받지 않아도 되었을 이 불안이 오히려 그의 맑은 영혼을 비춰주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인 환경이 이 남다른 성찰을 더 깊게,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안에 지지 않고 그것을 보듬어 않고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대한 의지를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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