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5일 토요일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중 2

*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있다.
가능성이 필연성을 뒤로 하고 독주하면,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자기가 돌아가야 하는 필연적(명증적)인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가능성의 절망이다. 이와 같이 자기는 추상적인 가능성이 된다.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몸부림치며 날뛰다가 지쳐 버린다. 그러나, 이 가능성의 장소에서 걸어 나올 수도, 또 어떤 장소로 도달하지도 못하나다. 도달하는 곳이란 필연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중략)
갈망의 가능성은 이와 비슷한 것이다. 가능성을 필연성으로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그는 가능성의 뒤를 쫓아간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이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가능성의 결핍은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다.


* 지상적인 것에 대해서, 또는 지상적인 어떤 개별적인 것에 대한 절망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고 외부로쿠터의 압박에 굴하는 것이지 내부로부터 행동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다.
(중략)
그를 절망으로 떨어뜨릴 만한 어떤 일이 들이닥친다(느닷없이 부닥친다). 이것은 그런 절망 이외의 방법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는 자기 속에 반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절망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 된다.
(중략)
그러나 그가 절망하고 있다고 자칭하며 마치 죽은 사람 같은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있을 때
사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그'라고 하는 인간 속에는 말하자면 아직 생명이 있다. 거기서 갑자기 일체의 것이 모습을 바꾸고 모든 외적인 것이 다시 나타나 원하는 것이 채워지기라도 하면, 생명은 그의 속에서 되살아나고, 직접성도 다시 일어나 그는 새로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중략)
이러는 가운데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 밖에서의 구원이 오면, 이 절망자의 생명도 되살아나게 된다. 그러면 그는 그가 그만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는 자기가 아니었고, 자기였던 적도 없다. 그는 다만 직접적으로 규정된 대로 살아가는 것 뿐이다.


* 영원한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것이 모든 절망의 정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 절망은 앞서 말한 절망보다는 질적으로 더 깊은 것으로서, 세상에서는 드물게 보는 절망에 속하는 것이다...(중략)... 이런 절망상태의 자기야말로 정말 철저하게 안 보이는 장막(최초의 자기를 철저히 가리는 절반의 회귀)이며 그 배후에 자기가 앉아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열심인 것이다. 게다가 그 자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의 자기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밀폐라고 부른다. (중략)
그러나 그 같은 자기는 현실 속에는 생존하고 있지 않고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황야라든지, 수도원 또는 정신병원 같은 데로 가 있는 게 아닐까. 그는 단지 다른 사람과 같은 복장을 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통 외투를 입은 현실의 이방인적 인간일뿐인가. 과연 그런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일에 관해서 그는 누구에게도, 단 한 사람에게도 털어 놓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중략)
이에 반해 그는 드문드문 고독에 대한 욕구를 느낀다. 고독은 때로는 호흡처럼, 또 어떤 때는 수면처럼 그에게는 생명처럼 필수적인 것이다. 그가 이 생명의 필수물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남보다 더욱 깊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고독에 대한 욕구는 인간 속에 정신이 있다는 증거이고, 또 그 정신을 재는 척도이다. '단순히 지껄이기만 하는 비인간적 세상사람'은 고독에 대한 욕구를 느끼기는 커녕, 단 한 순간이나마 고독하게 있어야 되기라도 하게 되면, 마치 군서조처럼 곧장 죽어버린다. 어린애는 자장가를 불러 재워야하듯이 이런 사람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자든지, 기도하든지, 무엇에 열중하든지 하기 위해서 사교상의 소란스러운 자장가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그러나 고대에도, 중세에도 이 고독에 대한 욕구는 알고 있었기에, 그 의미에 존경이 바쳐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교로 날이 새고 해가 지는 현대에 있어서는 범죄자에 대한 형벌로써 외에는 달리 쓸 줄 모르게 되었으니, 그 정도로 지금의 사람은 고독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현대에서는 정신을 가진다는 것이 죄를 범한다는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런 사람들,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범죄자 부류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이 틀어박혀 밀페되어 있는 절망이 절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유지될 경우, 그에게는 자살이 가까이 다가서는 위험이 될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렇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무엇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해 꿈에도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자살은 절대적으로 틀어박혀 있는 사람의 위험이다.


약함의 절망(일반적 의미로는, 절망하여 자기를 체념하고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나, 반항의 절망(일반적 의미는, 절망하여 자기자신이고자 재창조 하는 것) 중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좌절은 단독자에게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즉 인간 각자를 단독자나 단독의 죄인으로 만드는 데서 그리스도교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천지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좌절의 가능성들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단독자 각자를 향해 '너는 믿을지어다, 즉 너는 좌절하든지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 절망에 대한 여러 방향의 다각적이고, 깊이 있는 고찰이 키에르 케고르가 이룬 업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절망이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괴로운 상태임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간적이고 고귀한 가치로 간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개인의 절망의 여러 단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위에서 말하고 있는 저차원적인 절망과 고차원적인 절망. 인간이라면 그 모두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다만 소리높여 말할 수 없고, 입을 잠그고, 방문을 닫고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아닐까? 현대에 와서 내가 보는 또 하나의  절망은 '좌절을 모르는 조직 속에 인간됨을 빼앗긴 개인의 소리없는 절망'이다. 개인의 죄는 묻기가 쉬워도 여러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운 조직의 죄를 묻기는 어렵다. 죽지 않는 조직속에 유한한 개인의 운명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싶다.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존재이유를 자신의 내면에게 끊임없이 묻거나 아니면 그 물음을 아예 차단해 버리는 슬픈 개인의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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