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8일 화요일

파스칼의 '팡세' 중

배를 탄 손님 중에서 집안이 제일 좋은 사람에게 배의 키를 잡게 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헛됨을 못 보는 자는 그 자신이 참으로 헛된 것이다.

영광의 단맛은 하도 큰 것이어서 그것을 어떤 것에 붙여 놓든지, 비록 죽음에다 붙여 놓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한다.

병은 우리의 판단력과 감각을 망친다. (중략)
우리 자신의 이익도 역시 우리의 눈을 기분 좋게 현혹시키는 기묘한 연장이다.

"그대는 어째서 그대의 이익을 위해서 나를 죽이려는 거요? 나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아니, 뭐라고! 그대가 강 건너편에 살고 있지 않느냐 말이오. 벗이여, 그대가 이쪽에 살고 있다면 나는 살인자일 것이고, 그대를 이렇게 죽이는 것이 옳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가 저쪽에 살고 있으니 나는 용감한 사람이고, 또 내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이요."
(- 국수주의, 집단 이기주의의 옳지 못함 -)


내가 채우고 있고 내가 보기까지 하는 조그만 공간, 내가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도 못하는 그 무한하고 무량한 공간 속에 깊이 잠긴 조그만 공간을 앞서갔고 또 뒤따르는 영원안에 흡수된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을 생각하면 "memoria hospitis unius diei praetereunitis (지나가는 하루해 길손의 추억)" - 내가 저기 있지 않고 왜 하필이면 여기 있는가, 하고 놀랍고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저기가 아니고 여기에 있으며, 저때가 아니고 하필이면 지금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지금 여기에 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인도로 나에게 차례가 왔는가?


다수성은 그것이 공개적이고, 또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무능한 사람들의 의견이다.


절름발이는 우리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는데, 둔한 정신은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냐하면 절름발이는 우리가 똑바로 걷는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둔한 정신은 우리야말로 다리를 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다면야, 우리는 그를 동정하지 분노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존엄성을 공간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내 사고를 조절하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땅을 차지한다 해서 가진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으로 따지면 우주가 나를 포함하고 나를 한 개의 점처럼 집어 삼킨다. 그러나 사고로는 내가 우주를 포함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비참함을 깨닫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폐위된 왕이 아니고서는 누가 자신이 왕이 아님을 불행으로 여기는가?


또 우리는 하도 허영심이 많아서, 우리 주위에 있는 대여섯 사람의 존경으로 재미를 보고 만족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의 모든 불행이 꼭 한 가지, 즉 방안에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토끼는 우리에게 죽음과 비참을 보지 않게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사냥은 거기서 우리의 정신을 돌리게 하여 우리에게 그것을 막아주는 것이다. (중략)
그들은 자기들이 짐승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만일 이 직책을 얻으면 그 다음에는 평안히 쉴 줄로 생각한다. 그들의 탐욕이 채워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휴식을 찾는 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소란 밖에 찾지 않는 것이다. (중략)
이렇게 해서 한평생이 지나가는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이 사람은 불안해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자기 기질적으로 타고난 고유한 상태로 말미암아 불안을 느낄 만큼 몹시 불행하다. (중략)
내일 친구들 앞에서 남보다 잘 쳤다고 자랑하려는 목표가 있는 것이다. (중략)
내 생각에는 모두 다 어리석은 짓이다. (중략)
그는 지금 개들이 여섯시간째나 죽어라고 쫓아다니는 저 멧돼지가 어디로 지나갈지 살피ㅣ느라고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가 없다. 사람은 아무리 슬픔을 한아름 지니고 있어도, 누가 그로 하여금 어떤 심심풀이를 시작하게만 만들면 그동안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조심하여 살펴보라. 대장경이나 대법관이나 재판장이 된다는 것은 아침부터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도 남길 수 없는 그런 지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허영, 남에게 그것을 보여주려는 즐거움.
춤, 발을 어디다 놓을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즉,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생각하면 불행하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왕이 손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기묘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왕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할 것이니,

신의 행동은, 종교를 정신에는 이치로 넣고, 마음에는 은총으로 넣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정신과 마음에 강제와 협박으로 넣으려 하는 것은 종교를 넣는 것이 아니고 공포를 넣는 것이니, "Terrorem potius quam religionem (종교보다는 오히려 공포를 넣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계에서 가장 약한 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부수는 데는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로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부수어 버린다 해도 사람은 그를 죽이는 그것보다 훨씬 고귀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힘이 세대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런 것을 도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엄성은 완전히 생각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으로서가 아니라, 이것, 즉 생각으로 우리의 가치를 올려야 한다.

불가해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신앙과 착함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경험으로 안다.

-우리의 비참을-위로해 주는 유일한 것이 오락이다. 그러나 이 오락이 우리의 비참 중의 가장 큰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주로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게 막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멸망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근심 속에 빠지게 될 것이고, 이 근심이 우리를 격려하여 거기에서 놓여나올 수 있는 더 건실한 방법을 찾게 할 것이다. 그러나 오락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일에 대한 시장기가 없으면 그것에 물리고 만다. - 의덕에 대한 주림은 여덟째 참된 행복이다-.

자연스러운 문체를 보면 놀랍고 기쁘다. 왜냐하면 한 작가를 만날 줄 알았었는데, 하나의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당하지 말고 위험이 없을 때 죽음을 무서워하라 - 사람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


신이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신이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영혼이 육신과 함께 있다는 것도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나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거나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 등도 이해할 수 없고 - 원죄가 있다는 것도, 그것이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


-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서는 처음에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일생이 그보다 더 흥미로웠다. 그의 일생은 그가 비유한 너무나도 유명한 문구, '생각하는 갈대'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인정했지만, 그것의 허무함 또한 같이 보고 있었던 듯 하다. 그는 기독교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으나, 그것은 단순한 종교에의 귀의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했던 귀의이다. 그가 생각하는 갈대이기에 그렇게 많은 성경 구절들이 그의 글에 필요했으리라.
초반부의 '팡세'에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느껴진다. 또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경도 보인다. 이는 중후반부에 걸쳐 많은 성경 구절들 속에 묻혀진다. 아마도 약해진 건강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파스칼이 존경스러운 것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신념을 자신의 삶에서 진실되게 지켜갈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의 수학/과학적인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인간적인 부분을 고민했으며, 영혼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적 정신과 실존적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두가지 정신을 한꺼번에 가질 수 있는 것은 저주스러운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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