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일 금요일

카뮈의 '작가수첩 1' 중 (1935 ~1942)

내가 말할 것은 한 가지뿐이니 똑똑히 보겠다는 것이다.

8월의 소나기 머금은 하늘. 뜨거운 바람결. 시커먼 구름. 그러나 동쪽에는 섬세하고 투명한 띠. (중략)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다라 끝없이 늘이고만 싶은 한 순간의 영원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뭇잎들과 햇빛의 유희 속으로 빠져드는 것밖에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중략) 잠시 후면 또다른 사물들, 또다른 사람들이 나를 휘어잡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책갈피에 꽃잎을 끼워두듯이 나로 하여금 시간의 천에서 이 순간을 오려낼 수 있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던 어느 날의 산책길을 그 꽃잎 속에 간직해둔다. 그리하여 나 또한 산책을 한다. (중략) 진종일 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나더러 매우 활동적이란다. 오늘은 잠시 발길을 멈춘 정지다. 그리하여 내 가슴은 저 자신을 만나러 간다.
아직도 어떤 불안이 나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잡을 길 없는 무형의 순간이 수은 방울들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하는 이들을 가만 놓아두라. 나는 나 자신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있기에 이젠 더 이상 불평이 없다. 나는 이 세계 속에서 행복하다. 나의 왕국은 이 세계의 것이기 떄문이다. 지나가는 구름, 사라져가는 순간. 나 자신으로부터의 나의 죽음. 책을 펼치면 좋아하는 한 페이지가 나타난다.

철학자가 되려거든 소설을 쓰라.

나는 수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왜냐 하면 내 몸이 그걸 요구하니까.

죽음과 태양의 맛. 삶에 대한 사랑.

나는 사람들이 내게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속으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모두들 겉모습을 향해 미소를 짓고 거기에 고분고분 따르는 척한다.

자기 스스로를 죽이지 않는 한 삶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내가 물 밖으로 조금씩 조금씩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그처럼 분주하고 절망적인 생활의 오랜 기간을 보냈으니 이젠 다시 건설적이 되어야 한다. 마친내 햇빛, 그리고 내 헐떡거리는 몸뚱이. 침묵할 것 - 믿을 것.

자신의 삶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확장할 것.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허송하지 말 것. 고독 속에서 극단적인 경험을 구할 것. 자기 극복으로 유희를 정화할 것 - 자기 극복이 부조리한 것임을 알면서.

병의 재발과 허약함에 대항하여: 노력 - 주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한 권의 책을 언젠가는 쓸 것이다.

단순하고 진실해야 한다. 말로 때워서는 안 된다 - 받아들이고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중략)
고통받는다고 해서 무슨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싶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것은 똑같은 태양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똑같은 태양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철학은 철학자의 됨됨이에 달렸다. 인간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철학은 더욱 진실한 법이다.

불멸성이라는 문제의 부질없음. 우리의 관심사가 우리의 운명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뒤'의 운명이 아니라 '앞'의 운명이다.

멀리 물러나 있을 것. 내 가슴에 가득히 차오르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것도 빨리.

자기 앞으로의 도망.

광란하는 듯한 노력 속에 모든 것을 해방하기 전에 크게 숨을 내쉬는 시간.

사물들과 존재들이 나를 기다린다. 아마도 나 또한 내 모든 힘과 내 모든 슬픔을 다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욕망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여기서 너무나 많은 침묵과 비밀로써 삶을 획득한다.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기적.

나는 체념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무용함으로 인해서 도대체 내 반항의 그 무엇이 의미 없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삶이 무용하기 때문에 반항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략)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 보면 나는 결국 행복하게 죽게 될 것 같다. 내가 내 희망을 남김없이 다 먹고 난 뒤의 일일 터이다.

나는 다만 내 삶을 내 두 손 안에 거머쥐고 싶을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 자신의 현존, 내 노력은 그것을 궁극에까지 밀고 나가고 그것을 삶의 모든 모습들 앞에서 지탱하는 것이다 - 견디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아는 터인 고독을 그 대가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무릎 꿇어버리지 말 것 - 문제는 여기 있다. 동의하지 말 것, 배반하지 말 것. (중략)
사람이(내가) 자신의 허영에 양보할 때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생각하고 살게 될 때마다, 그것은 배반이 된다. 그때마다 남의 눈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며, 그로 인하여 나의 존재는 진실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자신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중략) 한 인간에게는 훨씬 더 큰 힘이 내재해 있다. (중략) 궁극에까지 간다는 것은 자신의 비밀을 간직할 줄 안다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지금 나는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홀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 나의 심오한 기쁨!

산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붉은 꽃들을 바라보며 사는 바로 그 사람들은 그들의 손바닥만한 방안에서 명상을 도와주는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손바닥만한 방안에서 명상을 도와주는 죽은 사람의 해골을 앞에 놓아두고 지낸다. 창 밖으로는 피렌체 시가가 내려다보이고 탁자 위에는 죽음이 놓여 있는 것이다.

눈물과 태양의 얼굴을 가진 삶, 소금과 뜨거운 돌 속에서의 삶, 내가 사랑하고 내가 뜻하는 그대로의 삶, 그 삶을 애무하다 보면 나의 모든 절망과 사랑의 힘들이 서로 접합하는 것 같다. (중략) 그것은 긍정이고 부정이다. 눈물과 태양이 아닌 모든 것 앞에서의 부정이요 반항. 처음으로 그 장래의 약속을 느낄 수 있는 내 삶 앞에서의 긍정. (중략) 미래의 불확실함, 그러나 내 과거와 나 자신에 대한 절대적 자유.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행동을 해야 해요.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사람이 살자면 뭔가 하면서 지내야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가난하면 자기 밥벌이를 해야 하고, 일거리를 얻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믿으며 지내왔다. (중략)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에 비긴다면 어쩌면 생활의 안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져서 나는 그걸 거부하고 말았다. 그런 생활의 따분하고 무기력한 면이 생각되어 뒤로 물러선 것이다. 처음 며칠만 잘 견뎠다면 나는 분명 그 직작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중략) 그런 생활을 물리치고, 남들이 '미래'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여전히 불확실과 가난 속에 남아 있는다는 것이 과연 용기였는지 아니면 비겁함이었는지 지금도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만약에 마음속에 갈등이 있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인가를 위한 것임을 나는 안다.

포기하지 말 것, 절대로 포기하지 말 것 -  (중략) 남의 눈에 보이는 모습에 연연해하지 말고 존재할 것.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버티는 것,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우선 침묵하는 것 - 관중을 제거해버리는 것, 그리고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주의 깊은 육체적 훈련을 주의 깊은 삶의 의식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 일체의 우쭐해하는 태도를 버리고 돈에 대한, 자신의 허영과 비겁함에 대한 이중의 해방 작업에 노력할 것. 질서 있게 살 것. 한 사람의 일생에서 단 한 가지 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데 2년은 너무 긴 시간이 아니다.

이 공책을 매일매일 기록할 것: 2년 뒤에는 한 편의 작품을 쓸 것.

창조자의 메마른 가슴.

칼리굴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입을 다물어야 해. 내겐 존재들의 침묵이 필요해. 그리하여 가슴속의 이 끔찍한 소용돌이가 잠잠해져야 해."

커다란 하늘 한 조각만 나타나면 지나치게 팽팽했던 가슴속에 금방 고요가 찾아든다.

우리는 완전한 모순 속에 놓여 있다. 시대가 송두리째 해방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채 모순 속에 목까지 푹 빠져 숨막혀 하며 살고 있다.
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제도 없다.

마치 그 검은 심장에서 흘러나온 황금빛 즙이 그 짧은 가지들 끝에까지 끓어 올라와가지고 녹색의 잎새들 위로 긴 자국을 남기면서 줄줄 흘러내리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묘사하는 작품과 설명하는 작품을 서로 조화시킨다. 묘사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묘사는 그 자체만으로는 멋진 것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없다. (중략) 작품은 '울림'을 갖게 된다.

전쟁은 전사와 비전사의 저 끔찍한 고독 속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저 수치스런 절망 속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비쳐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저 점증하는 비열함 속에 있다. 짐승들의 세상이 시작되었다.

밖에 서서 어떤 사태를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도덕하다. 이 부조리한 불행을 멸시할 권리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불행의 한가운데 서 있어야 한다.

받아들일 것. 그리하여 가령 나쁜 것 속에서 좋은 것을 볼 것.

다른 사람들의 피와 자유를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베다경.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된다.

그 심장은 썩어 있다. 감상적인 것, 눈에만 즐거운 것, 자기 만족, 인간에게는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대도시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이 모든 끈적거리는 피난처들.

나를 텅 비워놓는 것을 나는 삶과 사랑이라고 부른다. 출발, 구속, 단절, 나의 내면에 흩어져 있는 빛 없는 이 마음, 눈물과 사랑의 짠맛.

뭐가 뭔지 모르는 혼란에 빠진 채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무엇과도 닮지 않고, 우리를 규정하는 것을 영원히 분쇄해버리고, 고독과 허무를 바치며, 돌연 운명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단을 다시 찾고 싶은 그 현기증. 그 유혹이 끊이지 않는다. 그 유혹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물리칠 것인가? 나른한 생활의 품에 안겨 지내면서도 어떤 작품의 고정관념을 지탱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에 걸맞는 자신의 삶을 살고 그 섬광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인가? 자유와 더불어 나의 최악의 걱정거리는 아름다움이다.

T. E. Lawrence (중략) 그는 국왕이 하사하는 훈장도 거절하고 무공 훈장은 기르는 개한테 준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출판사를 익명으로 보냈다가 거절당한다. 오토바이 사고.
(중략) 초인은, 역사 족에 요지부동으로 갇혀 있으면서도 그가 역사에 대하여 누리는 내적 자유에 의하여 알아볼 수 있다.

여러 가지 감정, 이미지는 철학을 열 배로 확대한다.

- 작가의 수첩을 들여다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그의 메모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힘을 얻고, 노트를 옮겨 적으면서.
카뮈는 내게는 이상적인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적이면서도 독창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의미가 깊다. 한쪽으로 치우친 유미주의자도 아니고, 삶의 비극적인 면만을 고통스럽게 묘사하는 작가도 아니다. 그는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의 모습을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그런 작가다. 그의 글은 완벽하면서도 글을 위한 글이 아닌, 진실이다. 때론 공공연히 말하여지지 않는 그런 진실이다.
그의 메모들에서 보여지는 작가로서의 다짐, 열망들을 다시 만나면서, 이 순간의 무한한 기쁨.
단지 삶을 위한 삶을 아닌,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의미를 찾는 인간의 용기. 반가울 뿐이다.
인생의 의미를 남기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을 마다한 카뮈와 니체. 그들이 남긴 발자국. 세월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적어도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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