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5일 금요일

블라드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중

나의 이 글이 머리글이 된 그 기묘한 원고의 저자인 험버트 험버트는 1952년 11월 수감된 상태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었다. 그가 재판을 받기 며칠 전 일이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괴물이었지나 너만은 사랑했다. 나는 비열하고, 잔인하고, 야비한 그 모든 것이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 너를 사랑하였다! 네 기분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때도 더러 있었으나 그것을 안다는 것은 곧 지옥이었다.

<롤리타> 나의 책에 대하여
1949년 무렵, 뉴욕 주 중부 이타카에 살고 있을 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 고동 소리가 또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음의 다짐이 새로운 열의를 가지고 영감에 합류했고, 이 주제를 다시 다루어 이번엔 영어로 써볼 생각이었다.
(중략)
진지한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이 발표한 작품이 끊임없이 위로를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표시등은 지하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켜져 있어서, 감추어 둔 자동온도조절 장치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이내 따뜻한 온기를 내뿜는다. (중략) 1955년 봄에 교정을 본 이후 나는 <롤리타>를 다시 읽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기쁨으로 가득 찬 존재이고, 안개 저편에서 틀림없이 밝게 빛날, 여름날의 태양과 같다.
(중략)
하지만 여기서 나는 내 목소리가 꽤 귀에 거슬린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미국인 벗들 중 아무도 내가 러시아어로 쓴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로 쓴 소설을 기준으로 한 평가라는 것은 초점에 벗어날 수밖에 없다.

-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한 번은 영문으로 한 번은 한글번역으로 읽었다. 롤리타는 나보코프의 최초의 영문 소설이다. 내게 옮겨 적을 구절이 거의 없는 까닭은 이 소설은 전체를 읽지 않고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한 두 구절이 마음에 와 닿기 보다는 범죄스러운 이상한 애절함에 사로잡히게 하는 소설 전체를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 더 많이 알려진 롤리타는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라는 중년의 사내가 롤리타라고 명칭되어지는 의붓딸을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성도착자의 어린이에 대한 에로티시즘과 집착을 포함한다면 말이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우리의 주인공 험버트가 무지몽매한 사람도 아니고, 미치광이 범죄자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고, 고상한 취미를 가진 수려한 외모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특히 미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더욱 용서받지 못할) 일을 장기간에 걸쳐 저지르며 그것에 대한 어떤 도덕적 판단을 배제한다는 것은 소설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지기 쉬운 내용은 아니다. 어머니가 죽은 (험버트가 딸을 탐해 결혼했으나 험버트의 진면목을 알고나서 우연한 사고로 죽게 된, 그러나 죽음의 많은 책임에 험버트에게 있는) 12살의 딸을 데리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자신의 성적욕구를 만족시키며 그녀에게 집착하는 험버트. 그녀를 그로부터 도망시킨 사람을 찾아내 살해하는 험버트. 그의 온갖 도덕적 부정함과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매력적인 인물인 험버트.
나보코프의 이 소설은 줄거리만큼이나 그 출판도 드라마틱하다. 코넬 교수였던 나보코프가 출판되었을 때의 파장을 예상하였을 거라 생각된다. (처음에는 익명의 출판을 고려했을 만큼.)  그러나, 미국의 모든 출판사는 출판을 거부하고, 결국 파리의 포르노 소설을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출판된다. 그러나, 미국의 어떤 비평가에 의해 명성을 얻게 되고, 미국에 출판되어 나보코프는 교수를 그만두어도 될 정도의 부를 얻는다. 이 소설이 없었다면 나보코프의 훌륭한 러시아어로 쓰여진 소설도 빛을 보지 못했으리라.
작가 역시 그의 후기에서 영어로 쓰는 일이 러시아어로 쓰는 것만큼의 표현의 유려함과 자유를 주지 못했음을 토로하고 있다. 나 역시 그가 '절망'에서 썼던 현란한 언어의 기교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을 외면하고 자신에게 갇혀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같은 모습이 공통되게 보여지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죄스러운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본인의 이유로는 자신에게 가장 정당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나보코프의 소설에서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개인의 반항 혹은 개인의 관점의 흔치않은 그릇됨이 극한으로 표현되었지만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부분인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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