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6일 토요일

카뮈의 '페스트' 중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곳에서 병을 앓는 사람은 아주 외롭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시간에 전화를 붙잡고서, 혹은 카페에 앉아서 어음이니 선하증권이니 할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데, 더위로 불꽃이 튀기는 듯한 수많은 벽들 뒤에서 덫에 걸린 채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상상해 볼가. 비록 현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메마른 고장에 죽음이 그처럼 들이닥칠 때 불편함이 어떠할 것일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나흘째 되는 날부터 쥐들은 떼를 지어서 거리로 나와 죽었다.

마치 그 광경은 우리의 집들이 자리 잡고 서 있는 땅 자체가 그 속에 있던 응어리와 악혈을 표면으로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건강한 사람의 짙은 피가 돌연 역류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들어오시오, 나는 목매달았소.'

공포가, 공포와 함께 반성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망자의 증가도 충분하지는 못했는지 시민들은 그 불안의 한복판에서도, 그것은 필시 가슴 아픈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결국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버리지 못했다.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겁은 났지만 절망은 하지 않았으며, 페스트가 그들의 생활 형태처럼 보이기까지 하고 또 그때까지 영위할 수 있었던 생활 방식 자체를 잊어버리기까지 하는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일을 두고 시달리다 보니 사람마다 심장이 무뎌져 버렸는지, 마치 신음 소리가 인간의 타고난 언어라는 듯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거나 그 곁에서 살고 있었다.

질병이 확대되면 도덕도 역시 헐렁해질 것이다. 우리는 무덤 근처에서 벌어지던 그 밀라노의 사투르누스 축제를 여기서도 다시 보게 될 판이다.

그때 나는 절대로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이와 같이 매주일 계속해서 그 페스트의 포로들은 저마다 재주껏 발버둥을 쳤다. (중략)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아! 정말이지 인간은 다른 인간들 없이 지낼 수는 없고, 정말이지 그도 이제는 저 불행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속수무책의 신세이고, 정말이지 그들 곁을 떠나고 나면 그 역시 가슴 속에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 동정심의 전율과 똑같은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그런 인간이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라도 전진을 계속해야만 하고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죄 없는 사람이 눈알을 잃었을 때,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앙을 잃거나 눈알이 빠지거나 해야 마땅하죠. 파늘루는 신앙을 잃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는 갈 데까지 갈 거예요.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겁니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인간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필연적으로 그러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행위나 원칙들을 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그러한 죽음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속을 썩이는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자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목구멍이 착 달라붙는 것같이 괴로웠어요. 나는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외로웠어요. 내가 나의 께름칙한 마음을 표시할라치면, 그들은 나에게 지금 때가 어떤 때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흔히 감동적인 이유들을 내세워 아무리 해도 소화되지 않는 것을 내게 삼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일단 한번 양보하면 끝도 없이 양보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략)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을 약간 일으키면서 타루에게,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기링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본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건 공감이죠."

사람은 신없이 성인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늙은 서기의 얼굴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눈물을 라유의 마음을 흔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눈물의 원인을 알고 있었고, 자기도 역시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 슬픔은 리유 자신의 슬픔이었고, 그때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같이 나누고 있는 고통 앞에서 문득 치솟는 견딜 수 없는 분노였다.

끝으로, 낮과 밤의 어떤 시간이 되면 인간이 비겁해지곤 하는데,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시각이라고 그는 대답 대신 적어 놓았다. 타루의 수첩은 여기서 끝나 있었다.

그에게 그렇게도 친근했던 그 인간의 모습이, 지금은 창끝으로 찔리고 초인간적인 악으로 불태워지고 하늘의 증오에 찬 온갖 바람에 주리 틀리면서 바로 그의 눈앞에서 페스트의 검은 물결 속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그로서는 이 난파를 막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빈손과 뒤틀리는 마음뿐, 무기도 처방도 없이 기슭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자신들의 우정을 정말 우정답게 체험할 시간도 미처 갖지 못한 채 그날 저녁에 타루는 죽어 갔던 것이다. 타루는 자기 말마따나 내기에 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 리유가 이긴 것은 무엇이었던가? 단지 페스트를 겪었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우정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애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그가 얻은 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타루도 아마 그런 것을 내기에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단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추억에 남는 것만을 지니고 살아갈 뿐, 희망하는 것은 다 잃어야 되니,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이랴.

삶의 체온과 죽음의 이미지, 그것이 바로 인식이었던 것이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 카뮈가 이야기한 세가지 긍정의 작품 중의 하나인 '페스트'.
죽음과 고립, 저항할 수 없이 밀어닥친 이 재앙에 있어 사람들이 어떠한 행동으로 내몰리는지 카뮈의 문장은 날카롭다. 그러나, 의사인 리유, 타루, 랑베르 등의 인물을 통해, 인간으로서 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최선을 가지고 맞선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 우정, 공감들... 잿빛 하늘 아래에서도 분명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포에 휘말려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일삼게 되더라도, 또다른 리유와 타루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타루의 말대로 '한번 양보하면 끝도 없는 양보를 하게 될까봐'... 그러나, 지금에 와서 비극적인 사건에 침묵하는 나는, 대중은, '양심을 한 보 양보하고, 정의를 한 보 양보하고' 결국 끝도 없이 뒤로 밀리게 될까봐 두렵다.
페스트를 겪은 리유는 그 전의 리유와는 다른 리유이다. 그는 많은 고통과 슬픔을 보았지만, 그에 맞선 용기와 양심도 보았다. 그 추억들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간이 생에 있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전부라고 한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님을 굳게 믿는다. 카뮈의 인간에 대한 긍정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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