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노자의 '노자 (도덕경)' 중, 김원중 역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dn은 서로를 이루어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내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며, 곡조와 소리는 서로 조화롭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 이 때문에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무르면서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이 일어나도  말하지 않으며, 생겨나게 하고서도 소유하지 않으며, 해놓고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머물지 않는다.
머물러 있지 않기에 떠나지 않는다.

인간이 멋대로 정한 표준이라는 틀을 노자는 갑갑해한다. (중략)
인간의 지식은 주관적이고 구별은 무가치하다고 보는 노자는, 자기와 다른 것을 구분하고 사소한 것을 따지는 사회의 가치 체계와 규범이 대립과 경쟁을 유발시켜 인류의 불행을 초래했다고 본다.

하늘은 오래가고 땅은 장구하다.
하늘과 땅이 오래가고도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자신만 살려고 하지 않으므로,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섯 가지 색깔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가 사람의 귀를 먹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이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한다.
말달리기와 사냥하는 일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의 행동을 방해하게 한다.

"도룡기"란 말이 있다. '도룡', 즉 용을 잡는 기술은 제아무리 높은 수준이라도 쓸데없다는 말로서 '도룡지술'이라고도 한다.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천지이다.
천지도 오히려 지속될 수 없거늘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발돋움하여 서 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다리를 벌려 걷는 사람은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현명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드러나지 못하며,
스스로를 자랑하는 사람은 공이 없어지고,
스스로를 뽐내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을 도에서 본다면 남은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고 한다.
만물은 그것을 싫어하기에 도를 터득한 자는 머물지 않는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근본이 되고, 고요한 것은 조급함의 임금이 된다.

천하라는 신령한 기물은, (억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하려고 하는 자는 실패하고, 잡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 (중략)
이 때문에 성인은 극단적인 것을 없애고 사치스러운 것을 없애며 지나친 것을 없애는 것이다.

승리해도 불미스럽게 여겨야 하니, 그것을 찬미하는 사람은 바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천하에서 뜻을 얻지 못할 것이다. (중략)
죽인 사람이 많으면 비통한 마음으로 임하고, 전쟁에 이기더라도 상례에 따라 처리한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지만,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하지만,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을 얻는다.
그 자신이 있는 곳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가지만, 죽더라도 (도가) 없어지지 않는 사람은 천수를 누린다.

가장 높은 선비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그것을 실행하고, 중간 선비는 도를 들으면 가지고 있는 듯 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듯 하기도 하며, 가장 낮은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으니, (그런 선비가)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될 만한 것이 못 된다.

물이 강한 이유는 "형체가 없는 (무유)"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낮은 데를 지향하고 부드럽게 만물을 감싸면서 생육하고 때러는 "수적천석"이란 말처럼 돌도 뚫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하에서 물보다 강한 것은 없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없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알고,
들창을 엿보지 않아도 하늘의 이치를 볼 수 있다.
그 나가는 것이 멀어질수록 그 지혜는 더욱 적어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밝아지고, 하지 않고도 이룬다.

우리가 흔히 지식을 얘기하지만, 아는 것이 먼 곳까지 미치게 되면 가까이에 있는 일을 모른다. (중략) "고기 한 점 먹고 솥 안의 고기 맛을 다 알고, 깃털과 숯을 매달아놓고서 방 공기가 건조하지 습한지 알 수 있다. 이는 사소한 것으로 큰 것을 아는 것이다. 낙엽 하나를 보고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알고, 항아리 속의 얼음을 보고 천하가 추워졌음을 안다. 이것은 가까운 것으로 먼 것을 논하는 것이다."

산속 스님은 날짜 헤아리지 않고
낙엽 하나로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아네.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하고도 의지하지 않으며, 자라게 해주고도 주재하지 않으니, 이를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명"은 천하 만물의 전체적인 이치를 헤아리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넓은 시야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에게 확실하게 잘 아는 사람이 있어 대도를 가게 한다 하더라고, 오직 샛길로 가게 될까 두렵다.
대도는 아주 평탄하나, 백성은 지름길을 좋아한다.
조정은 아주 치워져 있으며, 밭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창고는 텅텅 비어 있는데, 화려한 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찼으며, 음식을 물리도록 먹고, 재물은 남아돈다. 이것을 도과(도정의 우두머리)라고 하니, 도가 아니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반듯하지만 가르지 않고, 예리하지만 상처 주지 않으며, 올곧지만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지만 번쩍거리지는 않는다.

특히 "미迷"의 의미에 대해 한비는 이런 주석을 달았다. "무릇 가고자 하는 길을 잃고 헛되이 행동하는 것, 이를 가리켜 갈피를 못 잡는다고 한다. 사람이 갈피를 못 잡으면 이르고자 하는 곳에 이를 수 없다. 지금 사람들은 이르고자 하는 곳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신을 사용하는 마음가짐은 조급하다. 조급하면 소모가 많아지는데, 소모가 많아지는 것을 '사치'라고 한다. 성인이 정신을 사용하는 것은 고요하다. 고요하면 소모가 적은데, 소모가 적은 것을 '아낀다'고 한다. 아끼는 방법은 도리로부터 나온다. 무릇 아낄 수 있으면 도를 따르는 것이며 이에 복종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걱정학 환난에 빠지더라도 물러설 줄 모르고 도리에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성인은 비록 재앙과 환난의 형상을 보지는 못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도리에 복종하기 때문에 이것을 '조복'이라고 하낟."

노자에 따르면 세상의 어려운 일들은 많은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하지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작은 생선을 찌는 데 자주 뒤집으면 그 윤기를 잃게 될 것이며, 큰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주 법을 바꾸면 백성이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이 때문에 도를 터득한 군주는 고요함을 귀중하게 여기고 법을 자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말하기를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찌듯이 한다"고 했다. 

생기지 않았을 때 작위하고, 어지러워지지 않았을 때 다스려야 한다. (중략) 천 리 가는 길도 발아래에서 시작한다. (중략)
집착하는 일이 없으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는 것은 내가 귀한 것이니,
이 때문에 성인은 베옷을 걸치고도 옥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스스로를 알지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아끼지만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 (자현自現과  자귀貴)을 버리고 이것(자지知와  자애自愛)을 취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도 잘 이기고,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잘 대답하며,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오게 되고, 느긋하면서도 잘 도모한다.

때가 되면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니 여유롭게 떄를 기다려야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만물을 적시듯, 한 방울의 빗방울이 결국 강으로 바다로 닿듯이 말이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것을 보태주나,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으니, 부족한 것을 덜어내어 남음이 있는 편을 봉양해준다.



- 노자의 사상은 단순한듯 하면서도 난해하고, 직관적인 듯하면서도 여러 해석이 가능하게 느껴진다.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은 예리하기가 그지 없으며, 그가 설파한 '도', 또한 가슴 속에서 깊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위'를 강조한 그의 사상을 현실적으로 얼마나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그의 사상의 고귀함이 하늘과 같고, 유려함이 물과 같게 느껴지며, 순수함이 대지와 같아서, 그의 사상을 따라 산다면 세속에서 신선과도 같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이고, 오묘한 만큼 그의 사상을 따르기가 쉽지는 않은 듯 보인다. 공자는 '예'를 통해 '인'에 다다르는 행동지침을 제시했다면, 노자는 오직 높은 정신을 지닌 몇 명만이 다다를 수 있는 직관에 의한 깨달음과 그 실행의 경지를 제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단 5000자의 내용으로 현세까지 그 사상을 전달하는 힘이, 그가 말한 무위의 사상으로 죽더라도 천수 이상를 누리고 있음을 그의 행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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