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4일 금요일

릴케의 '말테의 수기' 중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략) 그 여자는 햇볕으로 따뜻해진 높다란 담벼락을 따라 힘들게 걸음을 옮기면서 벽이 아직도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는 듯이 때때로 손을 대어보곤 했다. 그래, 벽은 아직도 거기 있었다.

좁은 거리의 곳곳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요오드포름 냄새, 감자튀김의 기름 냄새, 불안의 냄새였다. (중략)
아이는 입을 벌린 채 자고 있었ㄷ는데, 숨쉬면서 요오드포름과 감자튀김과 불안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사실 그랬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만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외치고 있다. 사람들은 달리며, 서로 앞지른다. 개가 짖는다. 이 얼마나 마음 놓이게 해주는 일인가. 개 한 마리가.

예를 들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얼굴들이 있는가를 한번도 의식한 적이 없었다. 엄청나게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지만, 얼굴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누구나가 여러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물론 그 얼굴은 앍고 더러워지고 주름이 잡혀, 여행 중에 끼고 있던 장갑처럼 늘어나 버린다. (중략) 그들은 그것을 보관해 준다. 자식들이 그 얼굴들을 쓰고 다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르는 개가 그 얼굴을 쓰고 밖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을 거다. 어째서 안 된단 말인가? 얼굴은 얼굴인데.

완전히 자기 몸속으로 폭삭 가라앉은 듯한 그 여자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중략)
거리는 너무나도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가 지루해하며 내 발밑에서 걸음을 빼앗아다가 나막신을 신은 듯이 이리저리 딸가닥거리며 돌아다녔다. 여자가 그 소리에 놀라 너무 갑작스럽게 빨리 몸을 일으켰기 때문에 얼굴이 두 손 안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손 안에 비어 있는 얼굴의 틀을 보았다. 시선이 손에 머물러 있는데 손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얼굴을 안쪽에서 보는 일도 소름 끼쳤지만, 얼굴 없는 적나라한 상처받은 머리통을 보는 일은 훨씬 더 무서웠다.

오늘날 잘 마무리된 죽음을 위해 돈을 치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무도 없다. (중략)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려는 소원은 갈수록 보기 드물어진다. 좀더 지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삶처럼 흔치 않을 것이다. 맙소사, 여기에는 없는게 없다. 그저 와서 생을 발견하면 그만이다. 그저 그것을 기성복처럼 입기만 하면 된다. 자기 뜻으로 가거나 가도록 강요를 받는다. 자, 그러니 노력할 필요가 없다. "선생님, 여기 당신의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닥치는 대로 죽는다. 자기가 앓는 병에 딸린 죽음을 죽는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아, 책 읽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너무도 좋다. 왜 사람들은 늘 책 읽을 때와 같지 않을까? (중략)  많은 사람들은 일에 쫓겨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곧 버림받은 부류로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저들은 거지일 뿐 아니라 버림받은 자들이라는 것도 안다. 아니 그들은 사실상 거지가 아니다.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쓰레기다, 자기의 운명을 탕진해 버린 인간들의 껍질이다. 운명이 뱉어낸 침처럼 축축하게 벽에, 가로등에, 광고탑에 달라붙어 있거나 아니면 뒷골목에서 천천히 흘러내려가는 하수처럼 칙칙하고 더러운 흔적을 남기고 간다.
(중략) 그러고는 나는 책들 사이에 끼여서 마치 내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들을 떠나서 여기 앉아 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많은 농가들 중, 어느 한 곳에서 살 수가 있다면, 나도 한 사람의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방 한 개만으로도 족했을 텐데(햇볕 밝은 지붕 밑 방이면 더욱 좋다). 거기서 나는 오래된 내 물건들, 가족의 초상화들, 무엇보다도 책과 함께 살았을 텐데. 한 개의 안락의자와 꽃과 개들, 그리고 돌이 많은 길을 갈 때 필요한 튼튼한 지팡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테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더 필요 없었을 텐데. 다만 노란 상앗빛 가죽으로 묶인, 오래된 꽃무뉘가 그려진 책 한 권. 거기에다 글을 써넣었을 텐데. 많은 것을 써넣었을 텐데. 왜냐하면 나는 많은 생각과 수많은 사람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땀에 몹시 젖었고, 마치 피 속에 엄청나게 큰 뭔가가 밀치고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혈관을 넓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비시키는 듯한 통증이 내 몸속에서 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공기가 벌써 다 바닥나고 내쉰 공기만을 자꾸 되들이마셔 폐가 정지된 것처럼 느꼈다.

모든 것이 말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그런데도 불안이 커져갔고, 그에 맞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산만하게 보이려고 무진장 애쓰는 가운데, 그의 몸속에서는 끔찍한 경련이 쌓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남자의 경련이 자라고 또 자라고 있음을 느끼면서 내 마음속에서도 그에 따르는 불안이 자리 잡았다. 심한 경련이 그 남자의 내부에서 몸을 흔들기 시작할 때, 그가 죽어라 지팡이를 움켜잡는 것을 보았다. 양손의 모양이 너무나도 가차없고 엄격해서 크고 굳셀 수밖에 없을 그의 의지에 내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이럴 때 의지가 무엇이겠는가. 힘이 다하여 그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다. 나, 몹시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던 나, 나는 남아 있는 힘을 돈처럼 모아 그의 손을 보며 부탁했다. 필요하다면 나의 작은 의지나마 가져가 주기를.
그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믿는다.
(중략) 그런데 그 남자의 걸음걸이가 약간 불안정해졌다. 그는 두 걸음 앞으로 걷다가 이제 멈추었다. 선 채로 있었다. 왼손이 슬그머니 지팡이를 놓더니 그것을 천천히 쳐들고 공중에서 덜덜 떠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남자는 모자를 약간 뒤로 젖히고 이마를 훔쳤다. 머리를 조금 돌린 후 그의 시선은 흔들리면서 멍하지 하늘과 건물들과 물을 건너가다가 그만 급강하했다. 지팡이는 손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는 하늘을 날려는 듯 두 손을 펼쳤다. 자연의 힘처럼 그에게서 무엇인가 터져 나와, 그의 몸을 앞으로 구부리게 했다가 뒤로 젖히게 했다가, 목을 끄덕이다가 숙이게 했다. 그는 춤을 추려는 듯이 경련을 일으키며 무리 속으로 내동댕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더는 그를 보지 못했다.
마음이 텅 비어 있는데, 어딘가로 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한 장의 빈 종이 같은 기분으로 건물들을 죽 따라 다시 대로를 걸어 올라갔다.

이 끔찍한 것 속에서, 겉보기에 혐오스럽게만 보이는 것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통용되는 존재성을 보는 게 보들레르에게 주어진 과제였어. 선택이나 거부는 없지.

공기의 성분 하나하나 속에 들어 있는 무서운 것의 존재. 너는 투명한 공기와 함께 그것을 들이마시게 되지. 그러면 네 속에서 그것이 비처럼 내려서는 딱딱해지고 몸의 기관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기하학적 도형을 형성한다. (중략) 거기에서 두려움이 높이 솟아올라 너보다 높아지고 네가 마지막 피난처인 듯이 도망쳐 간 너의 호흡보다도 더 높아진다. 아, 그럼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야 하나? 너의 심장은 너를 네 속에서 몰아내고는 네 뒤를 쫓고, 그러면 너는 거의 너의 밖에 나와 있어 너의 속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너는 사람들이 풍뎅이 같은 곤충을 짓밟을 때 내장이 튀어나오듯 그렇게 네 속에서 튀어나오게 되니, 네 표피가 지닌 약간의 단단함과 적응력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나는 울었는데 가면으로 가려져 눈물이 밖으로 흘러나오지를 않았다. 눈물은 안에서 내 얼굴 위로 흘러내리다가 곧 마르고, 다시 흘러내리다가 말랐다.

때때로 나는 하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죽음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그보다도 먼저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밀쳐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쁘게 몰두하고 있는 곳에서는 그 소중한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간은 흘러가버렸고, 그리하여 우리는 하찮은 일들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귀중한 것을 더 알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 엄청나게 커다란 것에 놀라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까요?

그러나 그런 사람이 보이지는 않아도 어떻든 그에 대한 말이 들리기만 하면 그것은 귓속에서 자라난다. 말하자면 부화되어 개의 코로 들어오는 폐렴균처럼 우리의 뇌로 밀고 들어와 그 속에서 파괴해 가면서 커져가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 존재가 이웃 사람이다.

아, 너희들은 죽은 상태로 있었어야 했는데.


- 정말, 기가 막히게,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릴케의 눈으로 본 세상, 너무도 절박하고 안타까운, 가슴 후비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가난한 생들. 그들 사이에서 보는, 그것을 보는 화자. 한걸음의 생도 어려운 절망에 다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말없이 돈처럼 모아서 건네주고 싶은 그 마음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을까? 도시의 번잡스러움 속에 가려진 비참한 인간의 마음들, 병원 담벼락 뒤에 감추어진 고통들, 비명들. 얼굴 속에 감춰진 눈물들. 그리고 그 냄새, 냄새들... 그 모든 것을 너무도 솔직하게 담아내는 릴케의 필치에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같은 문장에 도도리표가 박힌 듯, 몇 번을 되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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