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4일 토요일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중

죽은 자들의 몸속으로 가스가 가득히 차오르면 낯선 별빛 아래서 마치 유령처럼 시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 희망도 없이, 모두들 제각각 혼자서, 말없이 다시 한 번 전투에 참가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것들은 다시 쭈그러들기 시작하여 그대로 땅에 착 달라붙을 것 같았다. 너무도 지쳐 땅속으로 기어들려는 것 같았다.

시체들은 햇빛 아래 놓이면 우선 눈 부위부터 녹아내렸다. 눈은 광채를 상실했고, 동공은 아교질처럼 번들번들했다. 눈 속의 얼음이 녹아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마치 울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정말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모든 것을 의심했고, 구역질나는 것도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은 아닐까?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 지난 몇 년 동안 갖가지 견해들이 난무하지 않았던가? 온갖 신념들 말이야. 말이라는 건 의미도 없을뿐더러 위험하기도 하지. 소리도 없이 천천히 다가오는 낯선 것이야말로 훨씬 더 거대하고 막연하고 불길하지. 사람들은 근무와 먹을 거와 추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을 했지. 하지만 낯선 것 그리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어.

시체들은 창백하고 적대적이고 낯설었으며 아직도 생을 체념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 제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머리도 위장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는 층계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야곱의 사다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저건 무엇이었을까?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었을까? 천사들이 그 위로 날아다니지는 않았을까? 천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비행기로 변했을까. 모든 것은 어디에 있는가? 지구는 어디에 있는가? 지구는 오로지 무덤을 위해서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인가? 나는 무덤을 팠어, 많은 무덤을,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나는 폐허들을  수없이 보아 왔어. 하지만 진짜 폐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오늘에서야 진짜 본 거야. 바로 이 폐허를. 이것은 다른 폐허들과는 달라. 왜 나는 저 아래에 누워 있지 않은 걸까? 나는 저 아래 누워 있어야 마땅해.

그것은 그가 전선에서 자주 느꼈던 암흑과도 같은 것이었다. 감히 단 한 번도 대답할 수 없었던 의문이었으며, 낭떠러지 앞에 선 심정이긴 해도 계속해서 회피해왔던 절망이었다. 그것이 마침내 그를 궁지로 내물았고, 그도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더 이상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깊이 숨을 쉬었고, 정의도 불의도 상관없이 세속을 초월하여 위안을 주는 온기를 느꼈다.

"나무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 오늘 오후에는 보리수나무에게서 배웠는데, 지금은 이 나무에게 배우는군. 나무는 자라서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지. 비록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일부는, 땅 속에 조금이나마 뿌리를 뻗고 있는 일부는 계속해서 잎과 꽃을 피우는 거야. 나무는 끊임없이 가르침을 주면서도 결코 비통해하거나 자신을 동정하는 법이 없어."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 그는 경악하며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 것인가? 몇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희미해져 가는 기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략) 그리고 그것조차도 얼마나 오래 남을 것인가? 그는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미 종이 한 장처럼 얇아지고 그림자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훅 불기라도 하면 날려가 버리고, 펌프에 의해 빨아들여진 텅 빈 껍질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 어디에 정주할 수 있을 것인가, 어디에 닻을 던질 것인가,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완전히 내쫓기지 않도록 그를 지탱해 줄 무엇을 어디에다 남겨야 한단 말인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을 때는 판단을 내리고 용감해지는 것이 쉽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세상은 달라 보인다. 더 쉬워질 수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별안간에 이 모든 것을 빚어낸 인간들에 대해 발작과도 같은 증오심이 일었다. 조국의 경계썬에 머무는 그런 증오심이 아니었으며, 신중함이라든지 정의와는 아무 상관없는 증오심이었다.

나는 나를 지탱해 줄 무언가를 가지려 했어. 하지만 그것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나를 두 곱이나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은 몰랐던 거야.

"집단 수용소 대장들 중에 유머를 갖춘 사람도 있고, 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동지애를 갖춘 친위대원도 있어. 그리고 애써 세상의 선한 면만을 보면서 끔찍한 일에는 눈을 감아 버리거나 그것을 일시적이거나 엄혹한 필연으로 여겨 버리는 동시대인도 얼마든지 있어. 그들은 말하자면 탄력적인 양심을 가지 사람들이지."

모든 것은 죽음과 죽음 사이에 있는 거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독일군 병사인 주인공의 고통과 좌절, 양심의 갈등, 사랑과 죽음등이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인간들이 이유도 없이 죽이고 죽어갈 때, 침묵하는 양심은 옳은 것인가?
그래버는 독일군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원인에 대한 반항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소설 초반에 이는 구체화되지 못하고 점차 그래버가 꿈꾸었던 휴가에서의 부모와의 상봉이 물거품되고 생사조차 모르게 될 때, 전방이나 후방 모두에서 모든 사람들이 참혹하게 생활하거나 죽어갈 때, 양심의 유보에 대한 그의 혼돈은 점차 진전된다. 엘리자베스와의 사랑은 전쟁 중에서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던 만큼 그에게 절대적이었으나, 사랑한 사람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를 잃게 됨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다운 삶을 조금이라도 찾는 그 순간이 그에게 영원하다. 결국 그래버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민간인처럼 보이는 러시아인들을 풀어주기 위해 살인광인 동료 독일군을 살해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래버는 자신이 첫 양심에 따라 움직인 그 행동에 의해 죽게 된다. (그 풀려난 러시아인이 도망치면서 두려움에 그를 쏘게 된다.)
  절망과 희망, 삶과 죽음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극한 상황에 도달했을 때 인간의 존엄성은 얼마나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인가? 레마르크는 이 소설에 가치/사상/종교의 무용, 인간의 잔인성과 무모함, 혹은 인간의 양심과 사랑, 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 등을 한꺼번에 담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잔인한 상황과 생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뿌리로 싹을 돋아내는 나무처럼, 순간을 살아내고 사랑하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행동하는 양심의 위대함을 그는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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